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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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 ㅡ 대부분 오해됨


    원문: Key Dhamma Concepts 섹션의 ‘Rupa, Vedanā, Saññā, Saṅkhāra, Viññāṇa – Mostly Misunderstood’ 포스트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는 흔히 다섯가지 무더기(오온), 즉 빡짝칸다로 불립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숫따는 이를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 즉 ‘다섯가지 집착(움켜잡음)의 무더기’로 논합니다. 더욱이, 빤쭈빠-다-낙칸다의 모든 다섯가지 실체는 각각의 모든 감각 경험에서 마음 속에 일어납니다.  


    2025년 6월 6일 교체작성


    소개


    1.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가 빤짝칸다(pañcakkhandha), 즉 ‘다섯가지 무더기’고, 이에 대한 들러붙음이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 즉 ‘다섯가지 집착(움켜잡음)의 무더기’를 일으킨다고 가정하기 쉽습니다. 


    • * 필자는 이전 포스트들에서도 그렇게 언급했을 수 있는데, 개정할 예정이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최근 포스트(지난 2~3년 사이)에서 논의했듯이, 필자는 아라한 단계 아래에 모든 이들에게는 오염 안된 빤짝칸다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 * 정의에 따르면, 순수하고 오염 안된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를 갖춘 마음은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들러붙지 않는 빠밧사라(pabhassara) 마음입니다. 반면에, 오염된 마음은 항상 들러붙기 쉬운 빠바사라(pabhasara)(‘s’가 하나) 마음입니다. ‘괴로움 없는(빠밧사라) 마음을 드러내는 것’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오염된 마음이 깜마 에너지를 생성한다


    2. 감각 경험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감각 입력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 * 우리가 감각 경험에 들러붙어 (라-가, 도사, 및/또는 모하로) 아꾸살라 깜마를 짓는다면,  그 ‘오염된 마음성향(마음가짐)’은 깜마 에너지를 생성합니다. 그 깜마 에너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사라지며, 수십억 년 동안 지속됩니다. 우리가 업 에너지를 축적함에 따라, 그 에너지는 현재 삶에서 뿐만 아니라 미래 재탄생을 일으킬 수 있는 결과(위빠-까)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위 내용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기본 토대를 이루므로, 이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 * 감각 과정은 마음이 시각 대상, 소리, 맛, 냄새, 또는 접촉과 같은 외부 자극을 경험할 때 시작됩니다. 또한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도 떠오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마음에 의해 보이는 루빠로 시작되며,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는 이 루빠들에 대한 반응입니다.

    • * 모든 다섯가지 실체(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는 정신적 실체를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모두(루빠를 포함) 마음에 일어납니다. 먼저 그것을 논의해 보겠습니다.    


    루빠 ㅡ ‘외부 루빠’에 대한 마음의 버전


    3. 마음은 자동적으로 외부 자극에 대한 버전(해석)을 준비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외부 자극에 대한 이 정신적 이미지는 각 영역과 관련된 (왜곡된) 산냐-에 기반합니다. 그 산냐-는 자동적으로 일어나며, 감각 경험의 시작 단계(‘다-뚜’ 단계라고 함)에서 ‘뿌라-나 깜마(purāna kamma)’ 단계 이전에도 일어나는데, 그것은 (부서지지 않은 상요자나와 특정 영역에 기반하여) 자동적으로 왜곡되며, 보통 사람(뿌툿자나)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산딧티꼬(sandiṭṭhiko)’가 됩니다. ‘산딧티꼬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따라서, 숫따에서, ‘루빠(rupa)’는 ‘외부 루빠’가 아니라 이 ‘마음이 만든 버전’을 의미합니다.

    • * 논의한 바와 같이, 이 ‘루빠(rupa)’는 실제로 (사진을 찍는 것과 같은) ‘단일 이미지’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추출된 것이며 ‘루빠 무더기’, 즉 ‘루빡칸다(rupakkhandha)’의 일부입니다. 뿌툿자나의 마음은 항상 그것에 들러붙으므로, 그것을 ‘루뿌빠다-낙칸다(rupupadānakkhandha)’라고 합니다. 

    • * 그러므로, ‘외부 루빠’를 경험할 때 마음에 일어나는 것은 루뿌빠다-낙칸다(rupupadānakkhandha)며, 이는 마음이 이전의 비슷한 루빠와 상호작용한 것을 통합한 것입니다.

    • * ‘앗따또 사마누빳사띠'와 소따빤나 단계’의 #2를 참조하시고 더 자세한 것은 그 포스트에서 링크된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루빠 니로다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


    4. 따라서, 뿌툿자나 또는 아라한의 경우에도 마음은 결코 ‘외부 루빠’의 실제 표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아라한조차도 ‘외부 루빠’의 ‘왜곡된 버전’만을 봅니다. 그것은 (아라한이 태어난) 육체가 빠띳짜 사뭅빠-다에 의해 ‘외부 루빠’의 왜곡된 버전’을 생성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메카니즘을 탐구하고 싶은 사람은 ‘불교의 세계관 - 소개’와  ‘세상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들'은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일어난다’ 포스트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 * 유일하고 결정적인 차이점은 아라한의 마음은 ‘외부 루빠의 거짓된 표상’인 ‘왜곡된 루빠’에 들러붙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스런 팔정도의 목표는 ‘루빠 니로다(rupa nirodha)’인데, 이는 종종 ‘외부 루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형태의 소멸’로 잘못 번역됩니다.

    • * 그러나, 아라한과에 도달할 때, ‘외부 루빠’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그것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루빠 니로다(Rupa nirodha)’는 마음에 일어납니다! 

    • * 오직 아라한의 마음은 ‘마음이 만든 루빠’에 속지 않는다는 사실만 일어납니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아라한에게 있어서, 그 ‘마음이 만든 루빠’는 더 이상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루빠 니로다(rupa nirodha)’의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겠습니다.


    ‘왜곡된 루빠’는 인간 육체로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다


    5. 인간 육체로 태어난 모든 사람의 마음은 ‘왜곡된 루빠’ 또는 ‘왜곡된 산냐-’가 내재된 루빠를 받습니다. 같은 감각 입력에 대해서도 그 ‘왜곡된 산냐-’는 다르며, 특히 영역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영역에서도 미세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 * 부처님 가르침의 더 깊은 측면에서 그것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위 #3과 #4에 링크된 포스트들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 * 하지만,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그것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 * 예를 들어, 인간은 동일한 외부 대상에 대해 동물과는 매우 다른 산냐-(saññā)를 생성하며, 동물 중에서도 그 산냐-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돼지는 똥(대변) 더미를 매혹적으로 느끼지만, 우리는 역겹게 느낍니다. 소는 풀을 맛있게 느끼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이 소는 풀을 소화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가 또한 육체의 생성을 결정짓기 때문에, 육체 또한 이 ‘대 마법 쇼’에 잘 맞습니다. 

    • *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여성을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지만,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 상대적인 개념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어떤 여성이 미인 대회에서 우승할 지에 대한 절대적인 합의는 없습니다. 그런 차이는 특히 취향에 따라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운 음식을 갈망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먹을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루빠의 일어남 = 괴로움의 일어남


    6. ‘Khandha Sutta (SN 26.10)’에서는 “Yo kho, bhikkhave, rūpassa uppādo ṭhiti abhinibbatti pātubhāvo, dukkhasseso uppādo, rogānaṁ ṭhiti, jarāmaraṇassa pātubhāvo”라고 합니다. 즉, “빅쿠들이여, 루빠의 일어남, 지속, 및 성장괴로움과 죽음의 일어남이다.” (주: (대부분의 다른 영어 번역과 마찬가지로) 링크 주소의 영어 번역은 많은 면에서 잘못되었거나 부적절합니다. 마찬가지로,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는 그 번역자가 기계적으로 느낌, 인식, 선택, 및 의식으로 번역한 것과는 다릅니다.)


    • * 만약 ‘외부 물질 대상의 일어남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면, 우리는 외부 대상을 제거하거나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괴로움을 없앨 수 없습니다.

    • * 붓다께서 거기(그리고 거의 모든 숫따)에서 언급하신 ‘루빠(rupa)’는 마음 속에 일어나는 ‘외부 루빠에 대한 왜곡된 정신적 인상’입니다

    • * ‘왜곡된 루빠’가 생성되는 주된 이유는 우리의 육체와 마음이 외부 루빠에 대해 ‘왜곡된 산냐-’를 생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왜곡된 산냐-’는 유정체와 관련된 가띠(gati)에 따라 다릅니다. ‘Gati Sutta (AN 9.68)’에 따르면 다섯가지 주요 가띠가 있지만, 각 범주에는 (위 #5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다양한 변형이 존재합니다.

    • * 또한 숫따에서 말하는 ‘루빠의 성장’은 짧은 시간 내에 여러 단계를 거치며 마음이 점점 더 들러붙게 되는 ‘루뿌빠-다-낙칸다(rupupādānakkhandha)의 성장’을 뜻한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루빠 니로다 = 더 이상의 괴로움을 멈춤


    7. 위에서 논의한 것은 표식 1.7 구절인 “Yo ca kho, bhikkhave, rūpassa nirodho vūpasamo atthaṅgamo, dukkhasseso nirodho, rogānaṁ vūpasamo, jarāmaraṇassa atthaṅgamo”에서  명확해집니다. 이는 “루빠의 일어나지 않음, 그침, 끝괴로움과 죽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입니다.


    • * 니로다(nirodha), 유-빠사마(vūpasama), 및 앗탄가마(atthaṅgama)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낱말임에 주목하세요. 대부분의 숫따-에서, ‘니로다’는 ‘실체의 일어남이 멈춤’을 의미하는 것으로 흔히 사용됩니다. 여기서, 니로다(nirodha)는 ‘니르(nir)’ + ‘우다-(udā)’에서 유래되었으며, ‘우다-(udā)’는 ‘일어나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니로다는 ‘그 일어남을 멈춤’을 의미합니다.

    • * 이 ‘왜곡된 산냐-’가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 우리 마음은 그런 ‘외부 루빠에 대한 왜곡된 정신적 인상’에 들러붙는 것을 멈출 것입니다. 멈추는 것은 ‘외부 루빠에 대한 왜곡된 정신적 인상’에 들러붙음이지, ‘외부 루빠’의 파괴가 아닙니다.


    8. 따라서, 들러붙음과 갈망을 없애는 열쇠는 이 ‘가장 위대한 마술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지혜(빤냐-)로 보는 것’입니다.



    ‘웨다나- 니로다’는 ‘삼팟사ㅡ자-ㅡ웨다나-’에 대한 것만을 의미한다


    9. ‘Khandha Sutta (SN 26.10)’의 이어지는 구절들은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가 모두 일어나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낱말들에 대한 몇 가지 핵심 사항을 이해해야 합니다. ‘루빠(rupa)’는 거의 항상 ‘마음으로 만들어지고 왜곡된 루빠(rupa)’를 의미하지만,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윈냐-나(viññāṇa)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 * ‘웨다나- 니로다’는 ‘마음이 만든 웨다나-’, 즉 ‘삼팟사ㅡ자-ㅡ웨다나-’만을 멈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육체가 경험하고 있는 어떤 둑카 웨다나-도 멈추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이전 깜마의 결과입니다. 위에서 논의했듯이, ‘왜곡된 산냐-’는 또한 이전 깜마의 결과로 생겨난 육체의 표현입니다.

    • * 물론, 모든 웨다나-는 ‘완전한 닙바-나’, 즉 ‘아라한으로서 빠리닙바-나’와 함께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 그러나, 모든 ‘정신적 괴로움’(‘삼팟사ㅡ자-ㅡ웨다나-’)는 아라한이 되는 순간 즉시 멈출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와 관련된 육체적 괴로움(고통)은 [육체적] 죽음에 이르러서야 끝납니다. 부처님도 육체적 괴로움(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10. 위의 #5에서 우리는 돼지가 똥(대변) 더미를 ‘매혹적인 루빠’로 보는 반면, 사람은 그것을 ‘역겨운 루빠’로 보는 이유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 * 그래서 또한 돼지는 그것을 보고 소마낫사 웨다나-(정신적 즐거운 느낌)을 느끼는 반면에, 사람은 도마낫나 웨다나-(정신적 괴로운 느낌)을 느끼는 것입니다. 앞서 논의했듯이, 이 웨다나-는 마음이 그 ‘마음이 만든 웨다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 발생하는 ‘삼팟사ㅡ자-ㅡ웨다나-’입니다. ‘둑카 사무다야는 삼팟사ㅡ자-ㅡ웨다나-로 시작된다’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나는 웨-다나-(느낌)’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고통(신체 손상이나 암과 같은 신체적 질병)을 제외한 다른 모든 웨다나-(시각 대상, 소리, 맛, 냄새와 관련)는 ‘왜곡된 산냐-’와 연관됩니다. 이는 아비담마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 * 아비담마 이론은 붓다 시대에는 완전히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아비담마 ㅡ 소개’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특히 보통 사람들은 구전(말로 설법)으로만 접할 수 있었고, 아비담마를 가르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아비담마는 일련의 개념을 모두 배우는 것을 의미하며, 문헌 없이는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상카-라 니로다’는 ‘아비상카-라’에 대한 것만을 의미한다


    11. 살아 있는 아라한은 ‘웨다나-(vedanā)와 산냐-(saññā)’로 정의되는 찟따 상카-라(citta saṅkhāra)를 생성합니다. 이 웨다나-는 ‘삼팟사ㅡ자-ㅡ웨다나’가 아닙니다. 즉, 오염이 없습니다. 아라한에게는 ‘왜곡된 산냐-’가 일어나더라도, 오염되지 않습니다. ‘왜곡되었다’는 것은 ‘오염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 * 다시 말해, 아비담마에서는 상황이 훨씬 더 명확합니다. 7가지 보편/공통 쩨따시까(팟사, 웨-다나-, 산냐-, 쩨-따나-, 에깍가따, 지위띤드리야, 마나시까-라) 없이는 찟따(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쩨따시까(정신 요소)’ 포스트의 #2을 참조하세요.

    • * 이 7가지 실체는 아라한의 마음에 (오염이나 왜곡이 없는) 순수한 형태로 아라한뜨 팔라 사마-빳띠(Arahant-phala samāpatti)에서 일어납니다. 알다시피, 일상생활 중의 아라한은 찟따-는 여전히 ‘왜곡된 산냐-’를 가집니다. 이런 상카-라를 ‘숫다 상카-라(suddha saṅkhāra)’, 즉 ‘오염없는 상카-라’라고 합니다. ‘Adhimuttattheragāthā’을 참조하세요. 여기서, “Suddhaṁ saṅkhārasantatiṁ”는 “마음에 숫다 상카-라로”를 의미하는데(‘santatiṁ’는 ‘마음에’를 의미함), 링크의 영어 번역은 크게 어긋납니다.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앗따또 사마누빳사띠'와 소따빤나 단계’의 #12 및 #13을 참조하세요.

    • *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오염원(라-가, 도사, 모하)을 수반하는데, 이것들은 살아 있는 아라한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 * 따라서, ‘상카-라 니로다(saṅkhāra nirodha)’는 실제로 ‘아비상카-라 니로다(abhisaṅkhāra nirodha)’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Dutiyabodhi Sutta (Ud 1.2)’에서, “avijjā nirodhā saṅkhāra nirodho”는 “avijjā nirodhā abhisaṅkhāra nirodho”를 의미합니다. 링크의 영어 번역은 잘못되었다는 것에 유의하세요. “무지가 그치면, 오염된 선택이 그친다.(When ignorance ceases, defiled choices cease.)”가 되어야 합니다.  


    ‘윈냐-나 니로다’는 ‘모든 윈냐-나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2. 유일하게 명확하게 구분되는 실체는 윈냐-나(viññāṇa)입니다. 여기서, ‘윈냐-나 니로다(viññāṇa nirodha)’는 아라한과를 얻은 후에는 어떤 윈냐-나의 범주도 생겨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 * ‘윈냐-나(viññāṇa)’라는 낱말은 ‘냐-나(ñāṇa)가 없음’, 즉 ‘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한 지혜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라한은 어떤 형태의 윈냐-나도 생성하지 않습니다.

    • * 아라한이 윈냐-나를 생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감각 입력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아라한이 보는 것(또는 눈 의식)은 ‘딧테 딧타맛땅 바윗사띠(diṭṭhe diṭṭhamattaṁ bhavissati)’, 즉 ‘어떤 오염도 생기지 않고 보는 것(비록 그 시각 대상에 왜곡된 산냐-가 내재되어 있더라도)’으로 표현됩니다.

    • * ‘윈냐-나와 그 진정한 의미’의 #4를 참조하세요.

    • * 또한,  더 자세한 내용은 ‘짝쿠 윈냐-나에는 오염이 없는가?’를 참조하세요.


    ‘일어남이 멈춤’은 다섯가지 실체 각각에 대해 이해되어야 한다


    13.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라는 다섯 가지 항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i. 숫따에서, 이것들은 거의 항상 각각의 우빠-다-낙칸다(upādānakkhandha), 즉 루빠 우빠-다-낙칸다부터 윈냐-나 우빠-다-낙칸다까지를 지칭합니다. 이들 우빠-다-낙칸다 중 어떤 것도 아라한이 된 후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살아있는 아라한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우빠-다-낙칸다’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ii. 물론, 살아있는 아라한은 외부 루빠(시각 대상, 소리 등)을 경험하지만, 이를 ‘루빠’ 또는 ‘루빠 우빠-다-낙칸다’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아라한과에 대한 ‘루빠 니로다(rupa nirodha)’는 아라한의 마음이 그런 시각 대상, 소리 등에 들러붙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아라한이 ‘본다’는 것은 ‘짝쿠 윈냐-나’라고 하지 않고 ‘딧테 딧타맛땅 바윗사띠’, 즉  ‘보는 것 너머(라-가, 도사, 모하에 들러붙어 봄)로 나아가지 않음’이라고 합니다. 아래 (vi)도 참조하세요.

    iii. 아라한은 부상과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웨다나-(느낌)’을 여전히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웨다나- 우빠-다-낙칸다(vedanā upādānakkhandha)’와 관련된 ‘삼팟사ㅡ자-ㅡ웨다나-’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웨다나- 니로다(vedanā nirodha)’는 단지 ‘삼팟사ㅡ자-웨다나-의 멈춤’을 의미합니다.

    iv. 일상 생활 중에, 아라한은 그런 시각대상, 소리, 등과 관련된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를 경험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것들에 들러붙지 않습니다. 따라서, ‘산냐- 니로다(saññā nirodha)’는 ‘산냐- 우빠-다-낙칸다(saññā upādānakkhandha)’를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일상 생활 중에 오염 안된(그러나 왜곡된) 산냐-를 경험하고, 아라한 팔라 사마-빳띠(Arahant-phala samāpatti)에 있는 동안에는 왜곡되지 않은 산냐-를 경험합니다.

    v. ‘상카-라 니로다(saṅkhāra nirodha)’는 ‘산(san)’이나 ‘라-가, 도사, 모하’를 수반하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의 소멸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산쩨따나(sancetana)’(‘산’을 가진 ‘쩨따나’)는 아라한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vi. 아라한은 어떤 윈냐-나도 경험하지 않습니다. 아라한의 감각 경험은 “diṭṭhe diṭṭhamattaṁ bhavissati, sute sutamattaṁ bhavissati, mute mutamattaṁ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ṁ bhavissatī.”로 묘사됩니다.


    빤쭈빠-다-낙칸다 및 빠띳짜 사뭅빠-다의 용어 ㅡ 모두 정신적임


    14. 가장 기억하기 쉬운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거의 모든 설명은 오로지 정신적 과정만을 포함합니다.  


    • * 따라서, 짝쿠(cakkhu)는 육체적 눈이나 간답바(gandhabba)의 짝쿠 빠사-다 루빠(cakkhu pasāda rupa)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신, 짝쿠(cakkhu)는 일어나는 것이 멈출 수 있는 정신적 실체인 짝쿠 아-야따나(cakkhu āyatana, cakkhāyatana)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 마음에 있는 로바/라-가, 도사, 및 모하와 함께 육체적 눈과 ‘짝쿠 빠사-다 루빠’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라한은 눈과 짝쿠 빠사-다 루빠를 사용하여 보지만, 로바/라-가, 도사, 모하를 생성하지 않고 그렇게 합니다.

    • * 마찬가지로, 빠띳짜 사뭅빠-다에 나오는 모든 항목도 물질적 루빠가 아니라, 마음에 의해 창조된 정신적 실체 또는 업 에너지입니다. 예를 들어, 빠띳짜 사뭅빠-다의 나마루빠(nāmarupa)는 ‘정신적 구성물’이고, 바와(bhava)는 마음에 의해 창조된 업 에너지입니다.

    • * 그러므로, 루빠, 짝쿠 등을 생각할 때마다, 빤쭈빠-다-낙칸다 또는 빠띳자 사뭅빠-다의 항목 중의 어느 것도 물질적 대상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세요.

       

    15. ‘Avijjā Sutta (SN 22.113)’:  “Idha, bhikkhu, assutavā puthujjano rūpaṁ nappajānāti, rūpasamudayaṁ nappajānāti, rūpanirodhaṁ nappajānāti, rūpanirodhagāminiṁ paṭipadaṁ nappajānāti; vedanāṁ nappajānāti …saññaṁ nappajānāti…saṅkhāre nappajānāti…viññāṇaṁ nappajānāti”, 즉 “무명은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것들의 기원, 그침, 및 그것들의 그침에 이르는 실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 * 아라한 단계에 도달하면,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라는 다섯가지 실체가 모두 존재하기를 그쳐야 합니다. 알다시피, 바히야 존자는 부처님을 만난지 몇 분 만에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다섯가지 실체가 모두 ‘존재하기를 그쳤습니다’.

    • * 위의 내용이 암시하는 바를 생각해 보세요. 그 몇 분 동안에 바히야 존자의 주변 환경이나 외모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의 마음 속에서만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 * 아라한과를 성취한 후, 바히야 존자는 주변의 모든 것을 보았고(즉, ‘루빠’는 외부 사물이나 시각 대상을 의미하지 않음), 소에게 받혀 죽었을 때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고(즉, ‘웨다나-’는 육체적 고통이나 쾌락을 의미하지 않음), 모든 것을 인식했습니다(즉, ‘산냐-’는 단순한 인식을 의미하지 않음). 그리고, 윈냐-나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윈냐-나를 몰아내는 완벽한 지혜, 즉 빤냐-(paññā)가 완전히 확립되었습니다.

    • * 그것들은 이 빠알리 낱말들의 의미는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쓰여진 형태(uddesa)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실제 용어(niddesa)와 연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paṭiniddesa)의 작용을 알아야 합니다. ‘숫따 해석 - 웃데-사, 닛데-사, 빠띠닛데-사’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16.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은 빠띳짜 사뭅빠-다가 아라한과에 도달한 순간부터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 * 따라서, 아윗자-, 상카-라, 윈냐-나, 나-마루빠, 살라-야따나, 팟사, 웨다나-, 땅하-, 우빠-다-나, 바와, 자-띠는 모두 아라한과를 얻은 후 한 순간에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 * 닛데사(niddesa) 버전에서, 해당 개체(실체)는 아윗자-, 아비상카-라, 윈냐-나, 나-마루빠, 살라-야따나, 삼팟사, 삼팟사ㅡ자-ㅡ웨다나-, 땅하-, 우빠-다-나, 바와, 자-띠입니다.

    • * 숫따는 사람들이 그런 미묘한 차이를 인지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반면, 아비담마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아비담마에서, ‘팟사’는 ‘순수한 감각 접촉’을 의미하고, ‘삼팟사’는 ‘오염된 감각 접촉’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숫따 영어 번역에서 흔히 그렇듯이, 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숫따-를 번역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 * 또한, ‘감각 경험, 빠띳짜 사뭅빠-다, 및 빤쭈빠-다-낙칸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주: 이 포스트는 ‘주요 담마 개념’ 섹션의 ‘다섯 무더기(오온)(The Five Aggregates (Pañcakkhandha))’ 서브 섹션에 있는 구 포스트인 ‘물질적 루-빠와 루-빡칸다 사이의 차이’를 대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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