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산딧티꼬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
원문: Dhamma and Science 섹션의 ‘ Sandiṭṭhiko – What Does It Mean? ’ 포스트
산딧티꼬(Sandiṭṭhiko)는 산(san)(라-가, 도사, 모하)이 어떻게 산냐-(saññā)에 들러붙음을 통해 순수한 마음(빠밧사라 마음)에 더해지는지를 아는 소따빤나(Sotapanna)입니다. (아산냐 영역을 제외한) 각 영역에는 ‘내장’ (왜곡된) 산냐-가 있습니다. 붓다의 세계관을 이해해야만 마음이 그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는 경향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025년 1월 11일 작성; 2025년 5월 17 재작성
고대 요기들도 라-가와 도사가 괴로움의 근본원인임을 깨달았다
1.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와 같이) 부처님 이전에 있었던 고대 요기(수행자)들은 감각적 즐거움이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억지로 삼갔는데, 유혹적인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정글에 들어갔으며, 최고의 자-나(jhāna)와 사마-빳띠(samāpatti)도 육성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일시적으로) 악처(아빠-야-)에 재탄생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지만, 재탄생 과정에서 벗어나는 닙바-나에 이를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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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근본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고,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꿀의 달콤한 맛처럼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는 것은 꿀을 맛보면 ‘즐거운 감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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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심으로써, 그런 ‘즐거운 감각’이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발견하셨습니다. 좋은 마술 쇼를 볼 때도 우리는 그런 ‘즐거움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마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게 되면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됩니다. 붓다께서는 ‘Pheṇapiṇḍūpama Sutta (SN 22.95)’에서 동일한 비유를 하셨습니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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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즐거운 감각’이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어떻게 우리 몸에 내재되는지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에 들러붙는 것의 헛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시점에 이르면, (알-라라 깔-라-마나 웃다까 라-마뿟따처럼) 감각적 즐거움을 억지로 삼갈 필요가 없습니다.
‘뿌라-나 깜마’ 단계를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
2.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와 같은 고대 요기(수행자)들은 감각 입력에 들러붙으면 마음이 어떻게 점점 더 오염되고, 그것이 어떻게 부도덕한 행위로 이어지며, 그것이 결국 미래의 고통(아빠-야-에 재탄생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현재 삶 자체의 불안/초조)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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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위의 부분이 우리의 의식적 인식 없이 일어나는 자동적인 과정으로 선행된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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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도표에서, 고대 요기들은 두 단계 과정 중에서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 단계에 앞서 붓다께서 발견하신 ‘뿌라-나 깜마(purāna kamma) 단계가 있습니다.
영문 도표 다운로드/인쇄: ‘Purāna and Nava Kamma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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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san) (라-가, 도사, 모하; ‘산(San)이란 무엇인가? 상사-라(삼사-라)의 의미’ 참조)의 축적이 ‘나와 깜마’ 단계에서 더 강하지만, 이 두 단계 과정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마음은 그 ‘나와 깜마’ 단계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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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말해, 첫번째 ‘뿌라-나 깜마’ 단계를 멈추지 않고서는 ‘나와 깜마’ 단계를 완전히 멈출 수 없습니다. 그 요기들의 마음조차도 정글에서 ‘즐거움으로 가득한 사회)로 돌아온다면 유혹적인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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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아래에서 논의하는 바와 같이, ‘뿌라-나 깜마’ 단계를 이해하지 않고는 (지혜로 ‘산/san’의 기원을 본) 산딧티꼬(sandiṭṭhiko)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산딧티꼬’가 되기 위해서는 ‘뿌라-나 깜마’ 단계를 이해해야 한다
3. 첫번째 ‘뿌라-나 깜마’ 단계는 ‘산(san)’(라-가, 도사, 모하)이 ‘괴로움 없는 빠밧사라 마음’에 자동적으로 통합되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이를 직접 통제할 수 없습니다. 즉, 그 순간에 그 마음이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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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에, 우리는 마음이 어떻게 ‘잘못된/왜곡된 산냐-’에 의해 유혹되는(끌리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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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왜곡된 산냐-’로 인한 그 ‘즐거운 감각’은 감각 입력에 들러붙는 세가지 방식, 즉 잘못된 견해(딧티), 갈망(땅하-), 및 ‘나라는 감각(마-나)’으로 이어집니다. 붓다께서는 그것을 많은 다른 숫따 중에 ‘Etaṁmama Sutta (SN 22.151)’에서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을 간략히 검토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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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밧사라 마음은 ‘빠밧사라 찟따와 산냐- 위빨라-사’ 및 ‘아누세띠 ㅡ 아누사야가 상카-라와 함께 자라는 방식’ 포스트에 논의되어 있습니다.
딧티, 땅하-, 마-나 ㅡ 들러붙음의 세 가지 방식
4. 다음은 기본적인 개념을 제공하기 위해 ‘Etaṁmama Sutta (SN 22.151)’에 있는 필요한 구절을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보통) 사람들이 무언가(루빠)를 ‘이것은 내 것이다(etaṁ mama), 이것은 '나'이다(esohamasmi 또는 eso aham asmi), 이것은 나에게 이롭다(eso me attā)’라고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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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감각’(‘잘못된/왜곡된 산냐-’)은 그것이 유익하다는 잘못된 견해(딧티)로 이어집니다. 즉, ‘그것은 나에게 이롭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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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가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려는 욕망(땅하-)이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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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을 계속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나에 대한 감각(마-나)’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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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시작없는 재탄생 과정 속에서 이 세 가지를 모두 해왔습니다.
열 가지 상요자나는 우리를 재탄생 과정에 묶는다
5. 부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열 가지 상요자나(saṁyojana, 윤회 족쇄) 하위 범주로 나누셨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족쇄는 무수한 생을 거치며 굳건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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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딧티 카테고리(범주)는 세 가지 상요자나로 나누어지는데, 삭까-야 딧티, 위찌낏차-, 실랍바따 빠라-마-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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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하- 카테고리는 네 가지 상요자나로 나누어지는데, 까-마 라-가, 루빠 라-가, 아루빠 라-가이며, 여기서, 까-마 라-가는 또한 빠띠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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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나라는 감각’(마-나)은 세 가지 상요자나로 이어지는데, 마-나, 웃닷짜, 아윗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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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요자나는 ‘다사 상요-자나 - 재탄생 과정의 족쇄’ 포스트에 논의되어 있습니다.
6. 먼저, 우리는 지혜(빤냐-)를 육성하고 잘못된 견해와 관련된 세 가지 상요자나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전체 과정에 대한 예비적인 이해로 이어지며, 이로서 소따빤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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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이해는 들러붙는 경향, 즉 땅하-와 연관된 네 가지 상요자나를 끊는데는 불충분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를 육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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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까다-가-미 단계에서, 까-마 라-가와 빠띠가가 약화되고, 이것은 아나-가-미 단계에서 끊어짐/제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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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다섯 가지 상요자나는 아라한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우빠와-나산딧티까 숫따 ㅡ 산딧티꼬가 되는 방법
7. ‘Upavāṇasandiṭṭhika Sutta (SN 35.70)’에서, 빅쿠 우빠와-나는 “사람들은 산딧티꼬가 되는 담마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라고 붓다께 물었습니다. 붓다께서는 다음와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구절 하나하나를 번역하는 대신에, 기본 개념을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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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딧티꼬(산 축적 과정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이해하거나 본 사람)가 되려면, 그것이 ‘뿌라-나 깜마’ 단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중요한 루-빠 라-가 빠디상웨디-(rūpa rāga paṭisaṁvedī) 단계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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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마음이 시각 대상에 집착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두 단계로 설명하셨습니다. “Idha pana, upavāṇa, bhikkhu cakkhunā rūpaṁ disvā rūpappaṭisaṁvedī ca hoti rūparāgappaṭisaṁvedī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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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빠와-나여, (‘왜곡된 산냐-’와 함께 발생하는) 눈으로 시각 대상을 보는 빅쿠를 예로 들어보자.” 이 단계는 아라한에게도 일어나며, 위 구절의 rūpappaṭisaṁvedī(rūpa paṭisaṁvedī)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루빠’는 태어날 때 우리 몸에 내재된 ‘왜곡된 산냐-’에 기반합니다.
‘뿌라-나 깜마’ 단계의 자동적인 들러붙음 과정
8. ‘뿌라-나 깜마’ 단계 전에도, 마음은 ‘까-마 다뚜’ 단계에서 매혹적인 특성을 지닌 루빠를 알게 됩니다. 위 도표를 참조하세요. 이것은 2.1절에 있는 ‘rūpappaṭisaṁvedī’(rupa paṭisaṁvedī)입니다. 여기서, 빠띠상웨디-(paṭisaṁvedī)(paṭi saṁvedī)는 ‘왜곡된’ 산냐-로 광경(시각대상)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논의했듯이, 이것은 아라한을 포함하여 인간 몸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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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러붙음은 까-마 라가 상요자나(kāma raga saṁyojana)를 가진 사람에서 라-가(rāga)가 마음 속에 자동으로 일어날 때에만 둘째 단계(rūparāgappaṭisaṁvedī)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이 이어지는 ‘루-빠 라-가 빠디상웨디-(rūpa rāga paṭisaṁved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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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동적인 들러붙음은 열 가지 상요자나가 모두 있을 때, 즉 뿌툿자나(putujjana)에서 가장 강합니다. 소따빤나(Sotapanna)에서는 세 가지 상요자나(diṭṭhi saṁyojana)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들러붙음의 힘’이 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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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따빤나는 적은 상요자나로 들러붙으므로, 들러붙음이 더 약합니다. 따라서, 들러붙음의 나중 단계(‘나와 깜마’ 단계,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 참조)에서도 소따빤나는 아빠-야-에 재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강한 까-야 및 와찌 깜마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뿌라-나 깜마’ 단계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므로 의지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또한, ‘불교에서 자유 의지 ㅡ 상카-라와 관계’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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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가-미는 (까-마 라-가와 빠띠가를 포함하여) 까-마 로까(욕계)와 연관된 다섯가지 상요자나를 모두 제거했습니다. 물론, 아라한의 마음도 들러붙지 않을 것이므로, 아라한과 아나-가미의 마음은 위 도표의 까-마 로까(까-마 바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위 도표에서는 아라한에 대한 것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둘째 단계가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은 까-마 바와에 들어가지 않는다
9. 마음이 까-마 로까(kāma loka)에 적용되는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을 때에만 마음은 까-마 바와(kāma bhava)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붓다께서는 ‘Paṭhamabhava Sutta (AN 3.76)’에서 그것을 아난다 존자에게 설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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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난다 존자는 붓다께 “바와(bhava)는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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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Kāmadhātuvepakkañca, ānanda, kammaṁ nābhavissa, api nu kho kāmabhavo paññāyethā”ti?”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링크에 있는 번역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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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 ‘까-마 다-뚜를 익히고 늘리기 위한’ 깜마가 행해지지 않았다면(kammaṁ nābhavissa), 까-마 바와에 들어갔다고(kāmabhavo paññāyethā’ ti) 말할(또는 선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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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깜마는 뿌툿자나와 소따빤나에 대해 마노 (아비)상카-라를 통해 행해지고 의식적 사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 이상의 관련된 상요자나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마음은 자동으로 그 감각 입력에 들러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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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가-미 또는 아라한은 까-마 로까와 연관된 다섯가지 상요자나를 모두 제거했기 때문에 그 마음은 까-마 바와(kāma bhava)에 빠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왜곡된) 산냐-를 경험하지만 (들러붙음이 있는) 아비상카-라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아나-가-미 또는 아라한은 까-마 다뚜를 경험한다
10. 그러므로, 아나-가-미 또는 아라한의 마음은 ‘까-마 바와(kāma bhava)’ 또는 까-마 로까(kāma loka)’에 들어가지 않고 ‘까-마 다-뚜(kāma dhātu)’ 단계에 머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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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감각 입력을 경험하는데, 꿀의 달콤함을 맛보고, 꽃의 기분좋은 향기를 냄새맡고, 기분좋은 음악소리를 듣습니다. 동일한 식으로, 그들은 부패한 음식의 불쾌한 맛, 대변의 불쾌한 냄새, 또는 막대로 맞았을 때 고통도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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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한 차이점은 그들의 마음이 그런 감각 사건에 (위의 첫번째 종류의 감각 입력에 대한) 좋아함이나 (위의 두번째 종류의 감각 입력에 대한) 싫어함으로 들러붙음을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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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아나-가-미 또는 아라한의 마음은 결코 까-마 바와(kāma bhava)에 빠지지 않지만,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감각 입력을 경험합니다.
까마 라-가(및 빠띠가)를 제거하려면 사띠빳타-나를 육성해야 한다
11. 소따빤나(산딧티꼬)가 여전히 그런 감각 입력에 들러붙더라도, 그들은 둘째 단계는 까-마 라-가 상요자나(kāma rāga saṁyojana)가 남아 있기 때문에만 일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7의 논의를 계속하면, 이것은 ‘Upavāṇasandiṭṭhika Sutta (SN 35.70)’의 2.2절에 표현되어 있는데, “Santañca ajjhattaṁ rūpesu rāgaṁ ‘atthi me ajjhattaṁ rūpesu rāgo’ti pajānāt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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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절(“Evampi kho, upavāṇa, sandiṭṭhiko dhammo hoti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i“)에 표현된 바와 같이, “이 때문에 (붓다) 담마는 시간을 초월하고(akāliko), 일어날 때 각 감각 입력으로 식별될 수 있고(ehipassiko), 세상것이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라는 보편 원리로 인해 일어나기(opaneyyiko) 때문에, 산딧티꼬(sandiṭṭhiko)는 스스로 그것을 안다(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i)”입니다.
12. 그 다음, 붓다께서는 다섯 가지 유형의 감각 입력에 대해 그것을 반복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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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표식 3.1에서 맛있는 음식에 대한 과정이 “Puna caparaṁ, upavāṇa, bhikkhu jivhāya rasaṁ sāyitvā rasappaṭisaṁvedī ca hoti rasarāgappaṭisaṁvedī ca. Santañca ajjhattaṁ rasesu rāgaṁ ‘atthi me ajjhattaṁ rasesu rāgo’ti pajānāti.”로 설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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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혀가 맛있는 음식을 경험할 때(jivhāya rasaṁ sāyitvā rasappaṭisaṁvedī), 그 맛을 갈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rasa rāga ppaṭisaṁvedī). 둘째 단계가 일어나면, ‘나에게 라사 라-가가 일어났다는 것(‘atthi me ajjhattaṁ rasesu rāgo’ti)’을 즉시 알 것이다(pajān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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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소따빤나가 아직 까-마 라-가(kāma rāga)와 빠띠가(paṭigha) 상요자나를 제거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일어날 때 알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이것은 곧 있을 포스트에서 논의할 사띠빳타-나의 출세간 버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13. 그 다음 표식 5.1에서, 붓다께서는 다섯 가지 상요자나를 모두 제거한 이들(아나-가-미와 아라한)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시각대상’을 경험(rūpappaṭisaṁvedī)하지만, 그것에 들러붙지 않는다(no ca rūparāgappaṭisaṁvedī)고 설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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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5: “그들에게는 그런 시각대상에 대한 갈망이 없고, 그들은 그것을 이해한다”(Asantañca ajjhattaṁ rūpesu rāgaṁ ‘natthi me ajjhattaṁ rūpesu rāgo’ti pajān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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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 포스트의 #6에서, 루빠 빠띠상웨디(rupa paṭisaṁvedī)(또는 맛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라사 빠띠상웨디)는 (까-마 산냐-를 가진) 까-마 다-뚜에 해당하고, 바힛다 윈냐-나(bahidda viññāṇa)는 루빠 라-가 빠띠상웨디(rupa rāga paṭisaṁvedī)(또는 맛있는 사건에 대해서는 라사 라-가 빠띠상웨디)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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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묘사는 여섯 가지 유형의 감각 입력 모두에 적용되는데, 표식 7.1에서 다섯 가지 육체 감각을 통해 오지 않고 마음(마노)에 일어나는 사건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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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다른 두 가지 로까-(루빠 로까 및 아루빠 로까)를 간략히 논의해 보겠습니다.
세가지 로까에 있는 서로 다른 유형의 산냐-
14 붓다께서는 세상을 까-마 로까(kāma loka, 욕계), 루빠 로까(rupa loka, 색계), 및 아루빠 로까(arupa loka, 무색계)라는 세 가지 로까로 나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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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루빠 로까(arupa loka)에는 다섯 가지 육체 감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외부 세계가 없으며, 마음만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외부 루빠(external rupa)를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아루빠 로까(arupa loka)’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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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빠 로까(rupa loka)에서는 광경(시각대상)과 소리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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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 로까(kāma loka)에는 (맛, 냄새, 및 감촉을 포함하는) 다섯 가지 육체 감각이 모두 존재합니다. 맛, 냄새, 및 감촉을 제공하는 ‘조밀한 물질 실체’가 루빠 로까에는 없다는 점에 주목하세요. 따라서 루빠 로까의 물질 환경은 크게 다르며, 즉 보고 들을 것이 더 적습니다.
15. (물질 환경과 마찬가지로) 까-마 로까에 있는 유정체의 몸은 특정한 맛, 냄새, 감촉을 경험했을 때 환상적 ‘기쁨’ 감각을 주도록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통해 준비되었습니다. 더욱이, 그것과 관련된 시각과 청각도 환상적 기쁨, 즉 왜곡된 산냐-를 줍니다. 그것은 까-마 로까에서 빤짜 까-마(pañca kāma, 다섯가지 유형의 감각적 탐닉)를 즐기는 것에서 행복을 인식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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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아나리야 요기(anariya yogi, 세간 수행자)는 부처님의 시대 이전에도 (마음에 일어나는 까-마 구나로) 빤짜 까-마(pañca kāma)에 들러붙는 것의 해로운 결과를 알 수 있었습니다. 빤짜 까-마에 들러붙는 것의 해로운 결과를 숙고함으로써, 그들은 아나리야 자-나(anariya jhāna)를 육성하였는데, 그것들은 더 나은 마음 상태를 주고 또한 루빠 로까에 재생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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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 중에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와 같은) 일부는 또한 루빠 로까의 제한된 광경(시각대상)과 소리의 단점을 보고 아루빠 사마-빳띠(arupa samāpatti)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아루빠 사마-빳띠의 ‘더 오래 지속되는 즐거움’을 경험했으며, 이는 아루빠 로까에 재생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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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그 모든 즐거움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발견하셨는데, 그것들은 마음이 만든 환상입니다. 그러나, 이 환상은 최고의 마술사가 나타내는 환상보다도 다른 [정교한] 것입니다. 까-마 로까의 감각적 즐거움, 루빠 로까의 자-나 즐거움, 아루빠 로까의 사마-빳띠 즐거움에 대한 그 (왜곡된) 산냐-는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나타납니다. ‘담마와 과학’ 섹션의 ‘붓다의 세계관(Worldview of the Buddha)’ 서브섹션의 처음 3개의 포스트와,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루빠-와짜라 자-나와 아루빠-와짜라 사마-빳띠
16. 일부 아나-가-미와 아라한들은 (루빠 로까에 해당하는) 루빠-와짜라 자-나(rupāvacara jhāna) 또는 (아루빠 로까에 해당하는) 아루빠-와짜라 사마-빳띠(arupāvacara samāpatti)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아나-가-미와 아라한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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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가-미는 루빠 라-가를 제거하지 않았으므로(즉, 루빠 라-가 상요자나가 그대로 있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자동으로 자-나 즐거움이라는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동으로 루빠 바와(rupa bhava)에 들어갑니다. 반면에, 아라한의 마음은 루빠 다-뚜(rupa dhātu)에 머무르고 루빠 바와(rupa bhava)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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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이 아루빠 사마-빳띠를 개발하면, 그들은 그것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열 가지 모든 상요자나를 제거했으므로, 아루빠 바와에 들어가지 않고 아루빠 다-뚜에 머무릅니다. 또한, 그런 우바또위뭇띠 아라한(ubhatovimutti Arahant)은 한 번에 세 가지(까-마 다-뚜, 루빠 다-뚜, 또는 아루빠 다-뚜) 중의 하나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아라한의 유형에 대한 논의는 ‘깔라하위와-다 숫따 ㅡ 싸움과 분쟁의 기원’ 포스트의 끝 부분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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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뿌툿자나는 아나리야 자-나와 사마-빳띠를 기를 수 있습니다. 자-나에 있는 동안에 그들은 ‘루빠 바와’에 있고, 아루빠 사마-빳띠에 있는 동안에 그들은 ‘아루빠 바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