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원문: Three Levels of Practice 섹션의 ‘Fooled by Distorted Saññā (Sañjānāti) – Origin of Attachment (Taṇhā)’ 포스트
감각 입력과 함께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는 세상을 ‘감각적 즐거움’이 가득한 것으로 거짓으로 보여주는데, 붓다께서는 이것을 ‘신기루’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들러붙음(땅하-, tanhā)의 기원입니다.
2023년 12월 12일 작성
물-라빠리야-야 숫따의 요점
1. (우리가 ‘물-라빠리야-야 숫따 ㅡ 모든 것의 뿌리’에서 논의했던) ‘물-라빠리야-야 숫따’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평이한 영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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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즐거움의 인식/느낌’은 절대적이지 않고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산냐-, 웨다나-, 가띠, 및 바왕가가 같은 다른 개념에 대한 많은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약간 복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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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상황은 마술쇼를 즐기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술쇼가 환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서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좋은’ 마술쇼를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합니다. 여기서는, 수반된 속임수를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없다면, 마술쇼는 ‘좋은’ 것입니다. 마술사가 우리를 어떻게 속이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으면, 그 스릴(짜릿함/전율/흥분)은 사라질 것입니다.
2. 붓다께서는 우리의 삶이 그런 거대한 규모의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마술쇼가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결코 ‘삶의 즐거움’이 ‘마술 행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환상이 그렇게 좋습니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삶을 통한 보디삿따(보살)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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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거대한 마술사는 특질(또는 세상이 어떻게 우리의 오염된 마음에 기반하여 작동하는지)이며, 오직 부처님만이 그 속임수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여러 방식으로 그 속임수를 설명하셨고, 필자의 의견으로는 속임수를 아는 최상의 방법은 물-라빠리야-야 숫따를 이해하는 것, 즉 우리에게 ‘내재된’ 왜곡된 인식이 어떻게 우리 마음을 속이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자동적으로 그 왜곡된 인식에 들러붙고(땅하-, taṇhā), 그것은 오염된 인식으로 바뀝니다. 이 통합된 과정이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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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속임수, 즉 마음이 어떻게 처음에 그 왜곡된 산냐-를 얻는지를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노력이 필요할 수 있지만, 노력할 가치가 있습니다. 필요한 배경 자료는 ‘세 단계 실천’ 섹션의 ‘인식(산냐-) 이해를 통한 소따빤나 단계(Sotapanna Stage via Understanding Perception (Saññā))’ 서브섹션의 첫 포스트에 있습니다. 이 포스트의 끝에 이것을 포함시키겠습니다.
거대한 마술사
3. 속임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외부 대상을 볼 때, 마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특정한 영역과 연관된 마음성향에 기반하여 그 루빠에 대한 그것의 버전을 생성합니다. 그 마음성향은 웁빳띠 바왕가(uppatti bhavaṇga)라고 불리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함에 대해 염려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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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다른 영역의 유정체는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보고 인식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배설물 더미(대변, 똥)를 보면, 혐오스런 광경이지만, 돼지에게는 그것이 음식이기 때문에 끌리는 광경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똥 냄새를 혐오스런 것으로 인식하지만, 그것은 돼지에게는 유혹적이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냄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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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똥 더미는 내재된 혐오성 또는 매력성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인식(산냐-)은 인간과 돼지의 마음에서 유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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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마음이 만든’ 인식을 실제적이라고 믿는다면, 마음은 자동적으로 그런 감각 입력을 반복하여 즐기려는 기대, 즉 붓다께서 ‘마술사’라고 칭하셨던 ‘오염된 윈냐-나(defiled viññāṇa)’를 생성합니다.
4. 그것이 물-라빠리야-야 숫따에 뿌리 박힌 결정적인 점입니다. 그것을 숙고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삶의 경험에서 다양한 예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풀을 먹지 않는 반면에, 소는 풀을 먹으며 하루 종일을 행복하게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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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중에서도, 덜한 정도로 그런 다양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은 클래식(classical) 음악을 좋아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지루하고 헤비-메탈(heavy-metal) 음악을 더 선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선호는 음악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마음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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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타고난 가띠에 기반하여) 우리 마음이 만든 그런 ‘신기루’에 기반하여, 우리는 자동적으로 외부 광경, 소리, 냄새 등을 갈망하거나 혐오하여 들러붙습니다. 따라서, 그런 외부 자극을 매력적, 혐오스런, 또는 중립적이라는 범주로 만드는 윈냐-나로 이어지게 하는 것은 (붓다께서 ‘신기루’라고 칭하신) 이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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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어떤 외부 감각 입력도 고유한(내재된) 매력적 또는 혐오적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단순한 사실이 마음 속에 완전히 스며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술쇼를 보는 것’과 ‘왜곡된 산냐에 기반하여 사는 것’ 사이의 차이
5. 특정 마술쇼의 속임수가 드러나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보는 즐거움(앗사-다, assāda)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이 결실없고/의미없는 시간 낭비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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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기분좋은 광경, 소리, 맛, 냄새를 떠올리는데 관련된 ‘속임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 실제적인’ 것들은 (결국 둑카 웨다나-가 지배적인 우리 육체와 연관된 수카(sukha)와 둑카(dukha) 웨다나-(vedanā)뿐입니다. 우리는 또한 ‘조밀한 육체’를 가진 영역에 재탄생하는 것을 피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 영역 위의 영역에는 그 수카(sukha)와 둑카(dukha) 웨다나-(vedanā)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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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매우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 단지 ‘만들어진 즐거움을 아무 생각없이 즐기는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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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유일한 결과라면, ‘만들어진 감각적 즐거움’에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마술쇼와 영화를 봅니다.)
왜곡된 산냐-는 우리가 부도덕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
6. 문제는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가 헤아릴 수 없는 고통/괴로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괴로움은 인간 영역에서도 우리에게 보이고, 우리는 또한 더 높은 수준의 동물 고통/괴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고통/괴로움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다른 세 가지 아빠-야-(apāyā)에서 훨씬 더 높습니다. 그 고통/괴로움이 ‘왜곡된 산냐-’와 어떻게 관련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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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산냐-’에 기반하여, 우리는 ‘기분좋은 감각 경험’을 더 얻거나 ‘암울한 감각 경험’을 제거하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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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면, 감각적 경험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훔치고, 거짓말하고, 성적 비행을 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문제는 그 모든 행위들(깜마)은 그 결과(과보)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쏘아 죽이는 것은 단 1초밖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동물로 재탄생하거나 심지어 지옥(니라야)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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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문제는 ‘왜곡된 산냐-’가 자동적으로 ‘오염된 산냐-’로 이어지고 우리가 부도덕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생과 (아빠-야에 재탄생함으로써) 미래 생에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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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왜곡된 산냐-’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아닛짜 특성’, 즉 그런 행위가 더 많은 괴로움으로 이어지게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더 쉽게 합니다.
7. 대부분의 유정체는 니라야(niraya)라는 가장 낮은 영역에 갇혀 있고, 그곳에서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육체가 느끼는 둑카 웨다나-(dukha vedanā)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고통을 당하면 우리는 단 1분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수백만 년, 심지어 수십억 년 동안 그것을 견딜 수 있습니다. 필자는 누군가에게 겁을 주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붓다께서 [유정체가 니라야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직접 보셨고 숫따에 기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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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또한 ‘선처’에 다시 태어나게 하는 ‘도덕적 행위’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열가지 윤회 족쇄, 즉 상요자나(saṁyojana)를 끊는’ 데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세가지 상요자나가 끊어질 때까지 아빠-야에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유혹은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래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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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우리가 니라야(niraya), 데와(Deva), 브라흐마(Brahma)와 같은 그런 영역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단 우리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가 그 모든 영역에서 재탄생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부처님의 더 넓은 세계관 내에서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냐-(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는 신기루다
8. 그것들은 물-라빠리야-야 숫따에 표현된 핵심 개념입니다. 붓다께서는 ‘Pheṇapiṇḍūpama Sutta (SN 22.95)’에서 직접 산냐-를 신기루라고 부르셨고 우리는 ‘소따빤나 단계와 왜곡된/오염된 산냐-’ 포스트에서 그것을 논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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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물-라빠리야-야 숫따와 같은 핵심 숫따를 잘못 번역한 것이 수세기 동안 그 핵심 요점을 감추어 왔습니다. 일단 여러분이 그 감춰진 보석을 보기 시작하면(즉, 그 산냐-는 신기루라는 것), 여러분은 다른 숫따에서도 그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도로 응축된 숫따들은 적어도 처음에는 자세히 설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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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히 도덕적 행위(puñña abhisaṅkhāra)를 하는 것도 반드시 해야 하지만, 이제 우리는 왜 단순히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는 ‘괴로움 없는 마음’으로 이어질 수 없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뿐냐 아비상카-라를 육성하는 것(세간적 팔정도의 육성)은 아빠-야-(apāyā)에 재탄생하는 것을 피하고, 또한 마음이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와 같은 더 깊은 개념을 이해하고 성스런 팔정도를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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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가지 근본원인 - 로까 사무다야(괴로움의 발생)와 로까 니로다야(열반)’와 ‘재탄생은 아비상카-라에 따라 일어난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감춰진 순수한 마음’과 관계
9. 또한, 관련된 다른 결정적인 개념을 복습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오염된 마음 아래에 감춰진 ‘괴로움 없는 순수한 마음’(그것을 ‘빠밧사라 마음’이라고 하겠으며, ‘홈’ 섹션의 ‘괴로움 없는 순수한 마음을 회복_Recovering the Suffering-Free Pure Mind’ 서브섹션의 포스트들을 참조)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빠밧사라 찟따’, 즉 ‘괴로움 없는, 오염되지 않는 찟따’는 오염이 없는 ‘빠밧사라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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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툿자나(평범한 사람)의 마음은 열가지 오염층, 즉 열가지 상요자나(aṁyojana)로 덮여 있습니다. 또한, 그것들은 뿌툿자나의 마음을 괴로움/고통과 재탄생 과정에 묶는 ‘정신적 족쇄(결박)’입니다. ‘다사 상요-자나 - 재탄생 과정의 족쇄’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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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모든 유정체의 마음이 처음에 어떻게 그 열가지 오염층으로 오염되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셨을 때 전생을 계속 추적해 보셨으나 그 모든 마음들이 처음에 오염된 때[윤회의 시작]을 알 수 없었습니다. (‘추적할 수 없는 시작’에 대한 이 문제는 ‘인과 원리(the Principle of Causality)’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재탄생 ㅡ 제1성제의 괴로움과 관련’와 ‘불교에서 무한대 문제’ 포스트의 마지막 부분의 요약을 참조하세요.) 그러나, 누군가 그 ‘빠밧사라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다면, ‘빠밧사라 마음’ 자체가 오염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다시는 오염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재탄생 과정에 ‘시작이 없다’는 가정과 서로 잘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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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그 문제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괴로움 없는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 생에서 남아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닙바-나(열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삶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산딧티까 담마(sandiṭṭhika Dhamma)’인 이유입니다. ‘산딧티까(Sandiṭṭhika)’는 ‘산(san)’을 축적하는 것이 어떻게 한 방향, 즉 마음을 더 오염시키는 방향으로 이어지는지를 볼 수 있음(또는 알아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간단히 논의해 보겠습니다.
루빵, 빅카웨, 아닛짱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
10. ‘Khandha Sutta (SN 25.10)’에서, 붓다께서는 “Rūpaṁ, bhikkhave, aniccaṁ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라고 말씀하셨는데, 위 링크에 있는 영어 번역에서는 “수행자들이여, 형상은 무상하고, 쇠퇴하고, 소멸된다”로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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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번역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 수세기동안 감춰져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평범한(세간적인), 낱말별로 직역한’ 주요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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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루빠(rupa)’는 (‘왜곡된 산냐-’와 함께) ‘외부 루빠에 대한 정신적 재형성’을 지칭하며, ‘아닛짜(anicca)’는 무상(impermanence)을 의미하지 않으며, ‘위빠리나-미(vipariṇāmi)’는 ‘쇠퇴(decay)’를 의미하지 않으며, ‘안냐타-바-위(aññathābhāvi)’는 소멸(perishing)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번역자는 그 매우 중요한 구절의 의미를 설명하는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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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저에 있는 결정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루빠(rupa)’ 또는 ‘루빵(rūpaṁ)’이라는 낱말은 붓다께서 거의 항상 ‘외부 루빠에 대한 정신적 재형성’을 지칭하셨으며 ‘외부 루빠’을 지칭하지 않으셨습니다. 번역자는 그 잘못된 이해와 함께 외부 루빠의 무상, 쇠퇴 및 소멸에 초점을 맞춥니다. 외부 루빠는 과연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통 인간이라면 누구나 외부 루빠에 대한 그러한 특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 그것을 가르칠 필요는 없습니다.
11. 붓다께서는 잘못 인도된 마음이 타고난 마음 성향(웁빳띠 바왕가, uppatti bhavaṇga)에 기반하여 ‘외부 루빠에 대한 잘못된 버전’을 만든다고 설명하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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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산냐-’에 기반하여 생성된) 그 ‘외부 루빠에 대한 잘못된 버전’에 기반하여, 마음은 그후 그것에 들러붙고 빠밧사라(pabhassara) 마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부도덕한(또는 적어도 결실없는) 행위를 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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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그런 결실없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닛짜 특성입니다. 즉, 자신의 잇짜(icca, ichcha로 발음) 또는 기대가 더 즐거움이지만, 최종 결과는 그 반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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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리나-미(pariṇāmi)’는 더 나은 결과로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와 함께, 사람들은 불쾌하고 위험한 결과에 이르는 잘못된 방향으로 이동하는데, 그것이 ‘위빠리나-미(vipariṇām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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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안냐타(aññatha)는 ‘나쁜 방향으로 벗어남’(‘빠밧사라 마음’에서 멀어짐)을 의미하고 ‘잇타(ittha)’ 또는 ‘닙바-나의 안정 상태’의 반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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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한 설명은 ‘아닛짱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 ㅡ 결정적 구절’에 있습니다. 포럼에서 자유롭게 질문해주세요. 이것들은 이해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가르침
12. 위의 설명을 통해 붓다께서 자신의 가르침을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adi, paññā udapa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라고 하셨던 이유가 분명해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비전, 앎, 지혜, 진리, 그리고 이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āloko)이 내 안에서 일어났고, 이것은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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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구절은 띠삐따까(Tipiṭaka)의 15곳에 나타납니다. 검색 결과인 ‘pubbe ananussutesu dhammesu’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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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 그것을 발견하실 때까지, 어떤 인간, 데와, 브라흐마도 위에서 논의된 다음 진리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즉, 모든 ‘모든 영역에서 접할 수 있는 기분 좋은 경험’은 감각 입력과 함께 일어나는 산냐-(saññā)가 신기루처럼 작용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들이 본질적으로 ‘매력적이거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달아오른 사막에서 물이 가득찬 호수와 같이 보이는 신기루와 같지만,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결코 물을 얻지 못하고 목말라 죽게 될 것입니다!
필수 배경
13. 이 포스트는 아래에 링크된 새로운 서브섹션인 ‘인식(산냐-) 이해를 통한 소따빤나 단계(Sotapanna Stage via Understanding Perception (Saññā))’의 포스트 시리즈에서 네 번째 것입니다. 그 서브섹션은 뿌툿자나가 소따빤나 단계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이 자료는 소따빤나가 더 높은 단계의 닙바-나를 달성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필요한 배경을 배우거나 그 필요한 개념을 ‘세련’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음 단계를 보세요.
i. 산냐-에 대한 소개는 ‘산냐-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를 보세요.
ii. ‘감춰진 순수한 마음’(빠밧사라 찟따)에 대한 개념은 ‘홈’ 섹션의 ‘괴로움 없는 순수한 마음을 회복_Recovering the Suffering-Free Pure Mind’ 서브섹션의 포스트들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iii. 그다음, 필자는 아닛짜, 둑카, 및 아낫따 특성은 그 접근에 기반하여 다르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아가 있는가?’ 섹션의 ‘아낫따는 자아를 지칭하는가?(Does 'Anatta' Refer To A 'Self'?)’ 서브섹션을 보세요.
iv. 현재 포스트는 ‘자아가 있는가?’ 섹션의 ‘감각 경험 - 더 깊은 분석(Sensory Experience – A Deeper Analysis)’ 서브섹션에 있는 두 개의 포스트의 후속입니다.
v. 현재 서브섹션에는 3개의 이전 포스트가 있으며, 이 서브섹션은 ‘세 단계 실천’ 섹션의 ‘인식(산냐-) 이해를 통한 소따빤나 단계(Sotapanna Stage via Understanding Perception (Saññ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