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앗따또 사마누빳사띠'와 소따빤나 단계
원문: ‘Is There A Self?’ 섹션의 ‘Attato Samanupassati and Sotapanna Stage’ 포스트
'앗따또 사마누빳사띠(attato samanupassati)'는 ‘어떤 것을 가치있게 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맥락에서) ‘앗따(atta)’는 어떤 것이 가치있음을 나타내고, ‘아낫따(anatta)’는 그 반대를 의미합니다. 아낫따(antta)는 아닛짜(anicca)와 둑카(dukkha)의 자연스런 연장(확장)입니다.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음(즉, 빤짜 우빠-다-낙칸다)이 결실없고 더 많은 고통으로 이끌기만 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합니다.
2023년 10월 20일 작성; 2025년 5월 30일 재작성
소개
1. 우리는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ㅡ 땅하-, 마-나, 딧티와 관계’ 포스트에 있는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구절을 논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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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구절은 부처님의 세계관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내재된 개념들은 오직 아라한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이해함으로써 소따빤나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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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인 “eso me attā’ti”(‘딧티’, 즉 ‘잘못된 견해’에 관련됨)는 관련 구절인 '앗따또 사마누빳사띠(attato samanupassati)'와 함께 이 포스트에서 논의됩니다. 이 포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구절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여정의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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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딧티(diṭṭhi)의 문제가 소따빤나 단계에서 명확해지면, 구절의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etaṁ mama’와 ‘esohamasmi’)은 각각 아나-가-미 단계와 아라한뜨 단계에서 완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부분들은 땅하-(감각 입력에 들러붙음)와 마-나(‘나’라는 감각)와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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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이 ‘단계별’ 과정에서, 먼저 부처님의 세계관(‘붑베 아나눗수떼시 담마’, 즉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가르침’)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과학자나 철학자들의 전통적인 세계관과는 매우 다릅니다. 붓다께서는 정신현상에만 완전히 집중하신 반면에, 다른 이들은 물질적 현상에 집중합니다.
숫따-들에서, 루빠는 ‘외부 세계에 있는 것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2. 우리 모두에게는 ‘루빠(rupa)를 물질적 사물로 해석하는 타고난 성향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영어 번역에서 ‘루빠’는 ‘형태(form)’로 번역되는데, 이는 ‘물질적인 형태’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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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붓다께서 말씀하신 ‘루빠(rupa)’는 ‘외부 감각 입력(광경, 소리, 맛, 냄새, 및 접촉)에 대한 정신적 인상’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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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동일한 ‘외부 루빠’가 매우 다른 루빠(즉, ‘루빠 우빠-다-낙칸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ㅡ 땅하-, 마-나, 딧티와 관계’ 포스트의 #6 ~ #8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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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예는 그 포스트에서 논의됩니다. 같은 사람 X를 볼 때, 두 사람(A와 B)은 X를 각각 친구와 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에서 (X를 볼 때) A와 B에게 서로 다른 유형의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그리고 윈냐-나(viññāṇa)(즉, 웨다나- 우빠-다-낙칸다, 산냐- 우빠-다-낙칸다, 상카-라 우빠-다-낙칸다, 그리고 윈냐-나 우빠-다-낙칸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A와 B가 X를 (친구와 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전 경험에 따라 자동적으로 생기는 ‘산냐-(saññā)’에 기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칸다, 즉 무더기(집합)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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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아라한 단계 아래의 사람에게는 빤짝칸다(pañcakkhandha)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도 논의되었습니다. 빤짜 우빠-다-낙칸다(pañca upādānakkhandha)는 항상 감각 입력에 반응하여 일어납니다.
3.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그리고 윈냐-나가 숫따에서 논의될 때마다 그것들은 항상 각각의 우빠-다-낙칸다(upādānakkhandha)를 지칭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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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아비담마에서, 숫닷-타까를 통한 ‘물질적 루빠’의 기원도 또한 논의됩니다. ‘물질의 기원 ㅡ 숫닷-타까’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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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숫따에서, ‘루빠(rupa)’는 거의 모든 경우에 루빠 우빠-다-낙칸다(rupa upādānakkhandha)를 지칭합니다. 육체가 숫따에서 논의될 때마다 그것은 ‘짜-뚜마하-부-띠까 까-야(cātumahābhūtika kāya)’라고 합니다. 이는 육체가 ‘네 가지 대 요소’, 즉 빠따위, 아-뽀, 떼조, 와-요로 구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Assutavā Sutta (SN 12.61)’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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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다음 사항도 유의해야 합니다.
‘외부 세계에 있는 것들’은 환상이 아니다
4. 붓다께서는 “외부 세계는 환상이다”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다는 점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주변의 세계는 실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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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 (찟따가 일어나지 않는 아산냐 영역을 제외한 31개 영역 모두에) 우리의 몸이 ‘거짓된 인식’, 즉 ‘왜곡된 산냐-’를 제공하기 위해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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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문에, 뿌툿자나(puthujjana)의 마음은 자동적으로 (라-가, 도사, 또는 모하를 통해) 모든 감각 입력에 들러붙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소따빤나(Sotapanna) 또는 산딧티꼬(sandiṭṭhiko)가 되는 한 측면입니다. ‘산딧티꼬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것이 모든 생각들(cittā)이 결코 ‘순수한/오염안된 빤짝칸다(pañcakkhandha)’에 기반하여 일어나지 않고, 오염된 빤짜 우빠-다-낙칸다(pañca upādānakkhandha)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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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 사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i) 마음이 ‘외부 루빠’의 이미지를 수신합니다. (ii) 감각 입력을 인식하기 위해, (비슷한 루빠가 과거에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는지) 마음은 과거 경험을 훑어봅니다. 그 때문에 루빠 우빠-다-낙칸다(rupa upādānakkhandha)가 작용합니다. 더욱이, 이와 관련된 감정(즉, 다른 네 가지 우빠-다-낙칸다)도 마음이 경험합니다. (iii) 마음은 자동으로 그것들에 들러붙고, 따라서 새로운 사건도 계속 커지는 빤짜 우빠-다-낙칸다(pañca upādānakkhandha)에 추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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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바로 빤짜 우빠-다-낙칸다(pañca upādānakkhandha)가 무한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모든 (전생의) 과거 경험은 나-마곳따(nāmagotta)에 온전히 남아 있지만, 우리는 현생의 경험도 극히 일부만 상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소수 사람들은 (이 생의) 과거 경험을 매우 자세하게 상기할 수 있습니다. ‘끊기지 않은 기억 기록(HSAM)에 대한 최근 증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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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묘한 (그리고 더 깊은) 점은 그런 모든 감정이 (왜곡된) 산냐-로 인해 생겨나지만, 그 산냐-는 우리 몸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감정들은 환상이 아닙니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을 참조하세요. 그 (왜곡된) 산냐-가 어떻게 생기는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마음이 그런 감정에 들러붙지 않도록 훈련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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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앗따또 사마누빳사띠(attato samanupassati)’라는 구절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앗따또 사마누빳사띠 ㅡ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 (anicca와 anatta와 같이) ‘앗따(atta)’는 여러 의미를 가진 빠알리 낱말입니다. 현재 맥락에서는 ‘유익한’ 또는 ‘의미 있는’과 같은 의미를 같습니다. 주: 아낫따(anatta)는 앗따(atta)의 반대말입니다. ‘앗따- 히 앗따노- 나-토-’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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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알리어에서는 동일한 낱말이 시제를 바꾸거나, 명사나 동사로 만들거나,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도록 변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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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앗따또(attato)’는 ‘유익하거나 의미 있는(무언가)’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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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빳사띠(passati)’는 ‘(지혜로) 보는 것’을 의미하고 ‘사마누빳사띠(samanupassati)’는 ‘그렇게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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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앗따또 사마누빳사띠(attato samanupassati)’는 ‘무언가를 유익하거나 의미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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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마음이 ‘사물의 가치’를 네 가지 수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셨는데, ‘앗따또 사마누빳사띠(attato samanupassati)’는 가장 강한 들러붙음의 수준입니다.
들러붙음의 네 가지 레벨(삭까-야 딧티에 기반)
6. ‘Samanupassanā Sutta (SN 22.47)’에서, 붓다께서는 세상 것에 관한 뿌툿자나의 잘못된 숙고 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셨습니다. “Idha,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ṁ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ṁ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rūpaṁ, rūpasmiṁ vā attān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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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절의 첫번째 부분은 “성자로부터 성스런 가르침을 듣지/이해하지 못한 보통 사람은 네 가지 방식으로 루빠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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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네 가지 방식은 가장 강한 것(rūpaṁ attato samanupassati)으로 시작하는 네 가지 레벨에 있습니다. 네 번째(rūpasmiṁ vā attānaṁ)는 가장 약한 들러붙음을 가리킵니다. 그 네 가지 레벨은 또한 사람(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강한 사견을 가짐)과 감각 입력(아-람마나)의 유형에 따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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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그 구절은 네 가지 정신적 무더기, 즉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및 윈냐-나(viññāṇa)에 대해서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viññāṇaṁ attato samanupassati, viññāṇa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viññāṇaṁ, viññāṇasmiṁ vā attāna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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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우리는 “pañcupādānakkhandhā attato samanupassati, etc.”라고 말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빤짝칸다-(pañcakkhandhā) 대신에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를 사용하는 이유가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ㅡ 땅하-, 마-나, 딧티와 관계’ 포스트에서 논의되었으며, 또한 아래에서 논의됩니다.
7. 들러붙음의 네 가지 레벨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i) 특정 루빠의 가치/유익함은 또 다른 것으로부터 기대될 수 없는데, 인식된 가치는 그 루빠 또는 그 루빠에 기반한 정신적 실체와 본질적으로 관련이 있고(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ii) 어떤 (외부) 루빠는 어떤 경우에 (i)의 그것에 대체될 수 있으며(rūpavantaṁ vā attānaṁ, ..),
(iii) 특정 범주에 있는 어떤 루빠(attani vā rūpaṁ, ..)는 충분히 좋으며,
(iv) 이전에 숙고하지 못했던 방식으로도, 행복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루빠(rūpasmiṁ vā attāna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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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특정 루빠에 대한 강조는 (i)에서 (iv)로 갈수록 감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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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에 있는 영어 번역(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번역)에서는 매우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 번역자는 ‘앗따-를 자아로 ㅡ 많은 숫따에서 잘못된 번역’에서 설명된 ‘앗따-(attā)’의 다른 의미를 기계적/맹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간단한 비유
8. 아래는 네 범주에 대한 개념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간단한 예입니다.
(i) 사람 A가 B와 사랑에 빠졌다고 가정해 보세요. 들러붙음이 너무 강해서 A는 “나는 B와 결혼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A의 마음에는, B의 루빠가 미래의 행복과 동일합니다. B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모든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및 윈냐-나(viññāṇa)는 미래의 행복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내지 ‘viññāṇaṁ attato samanupassati’의 예입니다.
(ii) 또 다른 사람 C는 D와 사랑에 빠졌지만 D가 결혼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C는 D와 닮은 어떤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습니다. 이것은 ‘rūpavantaṁ vā attānaṁ’의 예인데, 즉 C는 D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이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iii) 또 다른 경우에, 사람 E는 적당한 파트너를 찾아서 그런 사람과 결혼한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E는 누군가를 찾고 있지만 특정 유형의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attani vā rūpaṁ’, 즉 가치있는 루빠가 있을 수 있습니다.
(iv) 마지막으로, 사람 F는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G와 만나며 ‘G와 결혼하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rūpasmiṁ vā attānaṁ’, 즉 이 특정한 루빠에서 가능한 가치를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F는 G에 대한 끌림이 강해지면 위 (i)의 경우와 같은 A의 마음성향을 채택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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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적으로, ‘Pālileyya Sutta (SN 22.81)’는 그 네가지 범주를 더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범주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9. 빤짜 우빠-다-낙칸다의 다섯 가지 실체 각각(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은 그런 4가지 범부/수준을 가질 수 있으므로, 위의 내용을 ‘삭까-야 딧티와 관련된 20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라고 합니다. 20가지 유형에 대한 상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삭까-야 딧티 - 더 깊은 사견의 제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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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논의된 것과 같은 분석은 삭까-야 딧티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런 묘사 또는 범주를 기억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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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따빤나는 그런 범주를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소따빤나들은 삭까야 딧티에 대한 각자의 이해를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한번은 한 빅쿠가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했다고 선언한 다른 빅쿠들에게 소따빤나 단계를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를 물으며 다녔습니다. 각 빅쿠들은 소따빤나 단계에 대해 서로 다른 묘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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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비구는 혼란스러워서 부처님께 하소연하였습니다. 붓다께서는 독특한 줄기(검은색), 독특한 꽃(붉은 고기 한덩이처럼 보이는 밝은 빨간색), 그리고 독특한 잎(특정하고 독특한 모양)이 있는 나무를 묘사해 달라고 누군가에게 요청하는 경우의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에 독특한 줄기가 있다고 식별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나무를 꽃이나 잎으로 묘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Kiṁsukopama Sutta (SN 35. 245)’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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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점은 이 세상의 ‘아닛짜(anicca) 특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세간의 즐거움을 쫓는 것으로는 고통/괴로움을 멈출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닛짱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 ㅡ 결정적 구절’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아닛짜(anicca)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둑카와 아낫따 특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앗따-를 자아로 ㅡ 많은 숫따에서 잘못된 번역’ 포스트의 #10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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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어떤 즐거움도 고통으로부터 영구적으로는 벗어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삭까-야 딧티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앗따또 사마누빳사띠와 웃체-다 딧티
10.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강한 들러붙음은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로서 그 사람의 육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또한 그 육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 현상도 ‘나(me)’와 연관되어 있다는 견해를 가질 것입니다(vedanāṁ, saññaṁ, saṅkhāre, viññāṇaṁ attato samanupas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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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이 견해는 웃쩨-다 딧티(ucchēda diṭṭhi)라는 극단적 견해를 나타내는데, 그 견해에서는 육체를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육체가 죽으면, 그것은 ‘나’의 종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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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견해에는 육체가 죽으면 ‘삶(생)’이 끝난다는 또 다른 관점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를 종종 ‘유물론(물질주의) 견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정신 현상이 뇌에서 일어나므로 다섯 무더기(오온)가 모두 육체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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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섯가지 잘못된 견해(즉,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는 모두 ‘attato samanupassati’ 본성임)는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와 연관된 20가지 잘못된 견해 중의 5가지를 나타냅니다.
다른 세 가지 경우는 삿사따 딧티와 연관된다
11. ‘영구적 영혼’ 또는 (힌두교의) ‘아트만(ãtaman)’을 믿는 사람들은 삶(생)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에서 생으로 이동하는 영혼 형태의 영구적 실체를 믿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종점은 천국이나 지옥 중의 하나, 즉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거나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속에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힌두교에서, 영구적 상태(아-트만)는 마하 브라흐마(Mahā Brahma) 영역에 태어날 때 실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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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그들은 현재 육체를 웃쩨-다 딧티(ucchēda diṭṭhi)를 가진 사람들과 같은 ‘궁극적 행복’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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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육체와 연관된 ‘영혼 형태의 실체’가 있지만, 그 실체는 육체가 죽은 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육체의 가치를 특정 레벨까지만 보는데, “rūpa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rūpaṁ, rūpasmiṁ vā attānaṁ.”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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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정신적 실체(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봅니다. 그것들은 천국이나 마하- 브라흐마 영역에 가는 길을 닦는 정도에만 유익합니다. 그것은 삭까-야 딧티와 연관된 15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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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말하면, 그들은 다섯 무더기는 궁극적 피난처가 아니지만, 그것들이 없이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삭까-야 딧티와 아스미 마-나 사이의 차이
12.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이 세상의 어떤 즐거움 또는 존재가 괴로움/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 즉 사람은 이 세상 어떤 곳에서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와 아스미 마-나(asmi māna)(‘나’라는 인식) 사이의 차이를 아는 것이 또한 필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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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보통 사람(뿌툿자나, puthujjana)은 삭까-야 딧티(딧티 위빨라-사; 왜곡된 견해)라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 세상의 어떤 것들을 ‘내 것’으로 인식하는 것(‘산냐-’로)이 유익하다는 잘못된 인식(산냐- 위빨라-사,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땅하-(taṇhā)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세 번째 범주인 ‘아스미 마-나(asmi māna)’, 즉 ‘나라는 감각’을 확고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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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는 소따빤나 단계에서 사라집니다. 소따빤나는 감각적/세간의 즐거움이 위험하다는 것을 (지혜로) 보았지만, 세간의 즐거움(그리고, 그래서 땅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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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산냐 위빨라사에 기반한) 땅하-는 제거하기가 훨씬 더 힘들고 아라한 단계에서만 완전히 사라집니다. 아나-가-미(Anāgāmi)조차도 오직 ‘까-마 라-가’만 제거했고 루빠 라-가와 아루빠 라-가는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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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아스미 마-나(asmi māna)’, 즉 ‘나라는 감각’ 또한 아라한과에서 사라집니다. 이는 소따빤나에게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13. 다음은 띠삐따까에 있는 이야기로서, 아디뭇따 존자(Ven. Adhimutta)(아라한)께서 아스미 마-나(asmi māna)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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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산적 무리에게 잡혔습니다. 그 당시 일부 사람들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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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그를 제물로 바치려 했지만, 테로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보통, 희생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목숨을 구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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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이야기는 ‘Adhimuttattheragāthā’에서, 산적들이 그에게 왜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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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로의 답변은 표식 3.1부터 표식 15.4까지 입니다. 그는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설명합니다(그는 아스미 마-나, 즉 ‘나라는 감각’을 포함한 열 가지 상요자나를 모두 끊었습니다). 사실, 그는 고통의 흔적조차 없는 빠리닙바-나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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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에 언급된 바와 같이, 결국 일부 산적들은 빅쿠가 되었고 결국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진전하는 자아’는 아라한 단계에 이를 때까지 존재한다
14. 붓다께서는 ‘자아(self)’가 의미하는 바가 ‘사람’이라면 그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나’, ‘내 차’, ‘내 몸’ 등으로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괜찮습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인간의 형태조차도) 이런 형태가 아닐 것이라는 ‘더 깊은 진리’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 사이클(life cycle)은 과거에 데와(Deva)와 브라흐마-(Brahmā)뿐만 아니라 동물과 지옥 중생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환생이란 무엇인가? - 생명 흐름의 개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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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영구적 자아’(천신 영역이나 브라흐마 영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자)의 개념은 잘못되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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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생명흐름(lifestream)은 “avijjā paccayā saṅkhāra” 내지 “jāti paccayā jarā, marana, soka-paridēva-dukkha-dōmanassupāyasā sambhavan’ti.”라는 빠띳짜 사뭅빠-다로 결정되는 동일한 원리에 따라 진전합니다. 그것들은 모든 유형의 유정체에 적용되는 포괄(일반) 용어들입니다. 여러분의 생명흐름은 또 다른 사람, 동물, 또는 데와의 그것과 같은 단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제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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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삭까-야 딧티를 제거하는 것은 첫 단계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나(me)라는 인식’은 아라한 단계까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삭까-야 딧티를 제거하는 것은 미래에 아빠-야-(사악처)에 태어나지 않게 합니다.
15. 그러나, (‘me’, ‘I’ 등의 인식을 제거한) 아라한조차 여전히 ‘나는 먹고 있다’, 또는 ‘나는 내 팔을 긁었다’와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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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ahanta Sutta (SN 1.25)’를 참조하세요. 아라한은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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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아라한은 육체가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며(빠리닙바-나), 아라한과 연관된 영혼/아-트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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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말에 매달리는 대신에, 문맥에 따라 빠알리 낱말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들러붙음은 빤짜 우빠-다-낙칸다-에 있고 빤짝칸다-에는 없다
16. 또한, 위의 #2에서 필자는 'pañcakkhandhā attato samanupassati 등'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위의 'pañcupādānakkhandhā attato samanupassati 등'이라고 말했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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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관심없는 어떤 것에는 결코 들러붙지 않으므로, 빤짝칸다(pañcakkhandhā)는 빠띳짜 사뭅빠-다에서 작용하지 않습니다. 감각 접촉을 하는 첫 단계 조차, 그것에는 빤쭈빠-다-낙칸다 (pañcupādānakkhandhā)가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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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러붙음을 유발하지 않는 감각 입력에 대해서도, 우리 마음은 그것을 모하(moha) 또는 아윗자-(avijjā)로 인식합니다((sanjānāti). ‘인지 모드 ㅡ 산자-나-띠, 위자-나-띠, 빠자-나-띠, 아비자-나-띠’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따라서, 보통 사람의 마음은 항상 최소한 ‘뿌라나 깜마’ 단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서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들러붙습니다.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의식적으로 그것에 들러붙을 때에만 ‘나와 깜마’(nava kamma, 새로운 깜마) 단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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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 입력(아-람마나)에 기반하여, 찟따는 이미 오염되어 일어나고(즉, pancupadanakkhandha), 더 강한 들러붙음인 두 번째 단계는 (위 포스트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아-람마나가 강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 이 포스트는 구 포스트인 ‘앗따또 사마누빳사띠 ㅡ 어떤 것을 가치있게 봄’을 대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