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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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앗따또 사마누빳사띠' ㅡ 어떤 것을 가치있게 봄

     

    원문: ‘Is There A Self?’ 섹션의 ‘Attato Samanupassati – To View Something to be of Value’ 포스트

     

    '앗따또 사마누빳사띠(attato samanupassati)'는 ‘어떤 것을 가치있게 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앗따(atta)’는 어떤 것이 가치있음을 나타내고, ‘아낫따(anatta)’는 그 반대를 의미합니다. 아낫따(antta)는 세상 것에 관한 아닛짜(anicca)와 둑카(dukkha)의 자연스런 연장(확장)입니다. 세상 것에 피난처를 구하는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고,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유익하지 않고 쓸모없습니다.

     

    2023년 10월 20일 작성; 2024년 2월 28일 개정

     

    삭까-야 딧티 ㅡ 세간 즐거움이 지속적 행복을 준다는 잘못된 견해

     

    1. 붓다께서는 뿌툿자나(평범한 사람)가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라는 5가지 실체를 사용하여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는 것을 요약하셨습니다. 이것들은 다섯 무더기(빤짝칸다-)입니다. 그러나, 경험하는 모든 루빠에 우리가 들러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 오취온)에 집중할 것입니다. 아래를 보세요.

     

    • * 내부 루빠와 외부 루빠는 감각 사건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 감각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정신 현상은 4가지 실체로 요약할 수 있는데,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및 윈냐-나(viññāṇa)가 그것입니다.

    • * 감각적 즐거움이 추구할 가치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삭까-야 딧티)로, 뿌툿자나(puthujjana)는 그런 경험을 가져올 수 있는 외부 루빠를 갈망하고, 또한 일어나는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를 갈망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배우자, 집, 자동차, 등)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생각할 때 일어나는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를 매우 가치있게 여깁니다.

    • *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라는 그 잘못된 견해는 그 모든 5가지 실체들이 ‘결실있음’, 즉 ‘앗따(atta) 본질’로 간주될 가치가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 반대를 보기(알기) 시작할 때, 그 사람은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가 됩니다.

     

    들러붙음의 네 가지 레벨(삭까-야 딧티에 기반)

     

    2. ‘Samanupassanā Sutta (SN 22.47)’에서, 붓다께서는 세상 것에 관한 뿌툿자나의 잘못된 숙고 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셨습니다. “Idha,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ṁ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ṁ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rūpaṁ, rūpasmiṁ vā attānaṁ.”

      

    • * 구절의 첫번째 부분은 “성자로부터 성스런 가르침을 듣지/이해하지 못한 보통 사람은 네 가지 방식으로 루빠(내부 및 외부 모두)에 대해 생각한다.”

    • * 그 네 가지 방식은 가장 강한 것(rūpaṁ attato samanupassati)으로 시작하는 네 가지 레벨에 있습니다. 네번째(rūpasmiṁ vā attānaṁ)는 가장 약한 들러붙음을 가리킵니다.  그 네 가지 레벨은 또한 사람(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강한 사견을 가짐)과 감각 입력(아-람마나)의 유형에 따라 다릅니다.

    • * 그다음, 그 구절은 네 가지 정신적 무더기, 즉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및 윈냐-나(viññāṇa)에 대해서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viññāṇaṁ attato samanupassati, viññāṇa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viññāṇaṁ, viññāṇasmiṁ vā attānaṁ.”입니다.

    • * 따라서, 우리는 “pañcupādānakkhandhā attato samanupassati, etc..”라고 말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빤짝칸다-(pañcakkhandhā) 대신에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를 사용하는 이유를 아래에서 논의합니다.

     

    3. ‘사마누빳사나-(samanupassanā)’ 와 ‘사마누빳사띠(samanupassati)’라는 낱말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마(sama)’와 ‘보다’를 의미하는 ‘빳사(passa)’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사마누빳사나-(samanupassanā)’는 어떤 특정한 기준(여기서는 자신의 잘못된 견해)에 따라 ‘보는’ 것입니다.

     

    • * 그러므로, ‘사마누빳사띠(samanupassati)’는 ‘누군가 자신의 견해에 따라 세상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들러붙음의 네 가지 방식은 삭까-야 딧티(세상 것들이 자신에게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견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 이전 포스트인 ‘앗따-를 자아로 ㅡ 많은 숫따에서 잘못된 번역’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이 문맥에서 ‘atta/attā’라는 낱말의 의미는 세상 것들이 쓸모있고/유익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4. 들러붙음의 네 가지 레벨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i) 특정 루빠(그리고 그 루빠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마음이 만든 루빠')의 가치/유익함은 또 다른 것으로부터 기대될 수 없는데, 인식된 가치는 본질적으로 그 루빠 또는 그 루빠에 기반한 정신적 실체에 관련이 있고(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ii) 어떤 (외부) 루빠는 어떤 경우에 (i)의 그것에 대체될 수 있으며(rūpavantaṁ vā attānaṁ, ..),

    (iii) 특정 범주에 있는 어떤 루빠(attani vā rūpaṁ, ..), 그리고 

    (iv) 이전에 숙고하지 못했던 방식으로도, 행복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루빠(rūpasmiṁ vā attānaṁ, ..).

     

    • *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특정 루빠에 대한 강조는 (i)에서 (iv)로 갈수록 감소합니다.

    • * 링크에 있는 영어 번역(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번역)에서는 매우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 번역자는앗따-를 자아로 ㅡ 많은 숫따에서 잘못된 번역에서 설명된 ‘앗따-(attā)’의 평범한 의미를 맹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간단한 비유

     

    5.  아래는 네 범주에 대한 개념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간단한 예입니다.

    (i) 사람 A가 B와 사랑에 빠졌다고 가정해 보세요. 들러붙음이 너무 강해서 A는 “나는 B와 결혼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A의 마음에는, B의 루빠가 미래의 행복과 동일합니다. B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모든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및 윈냐-나(viññāṇa)는 미래의 행복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내지 ‘viññāṇaṁ attato samanupassati’의 예입니다.

    (ii) 또 다른 사람 C는 D와 사랑에 빠졌지만 D가 결혼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C는 D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습니다. 이것은 ‘rūpavantaṁ vā attānaṁ’의 예인데, 즉 C는 D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이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iii) 또 다른 경우에, 사람 E는 적당한 파트너를 찾아서 그런 사람과 결혼한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E는 누군가를 찾고 있지만 특정 유형의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attani vā rūpaṁ’, 즉 가치있는 루빠가 있을 수 있습니다.

    (iv) 마지막으로, 사람 F는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G와 만나며 ‘G와 결혼하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rūpasmiṁ vā attānaṁ’, 즉 이 특정한 루빠에서 가능한 가치를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F는 G에 대한 끌림이 강해지면 위 (i)의 경우와 같은 A의 마음성향이 될 수 있습니다.

     

    앗따또 사마누빳사띠와 웃쩨-다 딧티

     

    6.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강한 들러붙음은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로서  자기 자신의 육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또한 그 육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 현상도 ‘나(me)’와 연관되어 있다는 견해를 가질 것입니다(vedanāṁ, saññaṁ, saṅkhāre, viññāṇaṁ attato samanupassati).

     

    • * 일반적으로 이 견해는 웃쩨-다 딧티(ucchēda diṭṭhi)라는 극단적 견해인데, 그 견해에서는 육체를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육체가 죽으면, 그것은 ‘나’의 종말이라고 생각합니다.

    • * 이 견해에는 육체가 죽으면 ‘삶(생)’이 끝난다는 또 다른 견해, 즉 ‘유물론(물질주의) 견해’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정신 현상이 뇌에서 일어나고, 따라서 다섯 무더기(오온)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고 믿습니다.

    • * 그 다섯가지 잘못된 견해(즉,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는 모두 ‘attato samanupassati’ 본성임)는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와 연관된 20가지 잘못된 견해 중의 5가지를 나타냅니다.

     

    다른 세 가지 경우는 삿사따 딧티와 연관된다

     

    7. ‘영구적 영혼’ 또는 (힌두교의) ‘아트만(ãtaman)’을 믿는 사람들은 삶(생)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에서 생으로 이동하는 영혼 형태의 영구적 실체를 믿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종점은 천국이나 지옥 중의 하나, 즉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거나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속에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힌두교에서, 영구적 상태(아-트만)는 마하 브라흐마(Mahā Brahma) 영역에 태어날 때 실현됩니다.

     

    • * 그러므로, 그들은 현재 육체를 웃쩨-다 딧티(ucchēda diṭṭhi)를 가진 사람들과 같은 ‘궁극적 행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 * 그들은 육체와 연관된 ‘영혼 형태의 실체’가 있지만, 그 실체는 육체가 죽은 후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육체의 가치를 특정 레벨까지만 보는데, “rūpa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rūpaṁ, rūpasmiṁ vā attānaṁ.”로 봅니다.

    • * 그들은 정신적 실체(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봅니다. 그것들은 천국이나 마하- 브라흐마 영역에 가는 길을 닦는 정도에만 유익합니다. 그것은 삭까-야 딧티와 연관된 15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로 이어집니다.

    • * 달리 말하면, 그들은 다섯 무더기는 궁극적 피난처가 아니지만, 그것들이 없이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20가지 유형의 삭까-야 딧티 대비 #5에서 논의된 비유

     

    8. 위 #6과 #7에서 논의된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와 연관된 20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는 웃쩨-다 딧티(ucchēda diṭṭhi)와 삿사따 딧티(sassata diṭṭhi)에 기반한 극단적 경우입니다. 20가지 유형에 관한 상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삭까-야 딧티 - 더 깊은 사견의 제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러나, 위 #5에 논의된 더 간단한 유형의 잘못된 견해(외부 루빠와 외부 루빠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정신 현상에 적용됨)도 또한 삭까-야 딧티에 속합니다.

    • * 위 #5(i)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어떤 상황 하에서는, 사람은 외부 루빠를 자기 자신의 것보다 훨씬 더 가치있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 * 삭까-야 딧티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더 깊이 파고 들면, 그것은 (i)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으로 인해 일어나고, (ii)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어나는 것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는 빠띳짜 사뭅빠-다를 이해함으로써 이해됩니다. 두 번째는  영혼/아트만의 의미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시적으로 존재합니다.

     

    모든 범주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9. 위에서 논의된 것과 같은 분석은 삭까-야 딧티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런 묘사, 범주 등을 기억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 * 소따빤나는 그런 범주에 대해 알지도 못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소따빤나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삭까야 딧티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한번은 한 빅쿠가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했다고 선언한 다른 빅쿠들에게 소따빤나 단계를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를 물으며 다녔습니다. 각 빅쿠들은 소따빤나 단계에 대해 서로 다른 묘사를 했습니다.

    • * 그 비구는 혼란스러워서 부처님께 하소연하였습니다. 붓다께서는 독특한 줄기(검은색), 독특한 꽃(붉은 고기 한덩이처럼 보이는 밝은 빨간색), 그리고 독특한 잎(특정하고 독특한 모양)이 있는 나무를 묘사해 달라고 누군가에게 요청하는 경우의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에 독특한 줄기가 있다고 식별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나무를 꽃이나 잎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Kiṁsukopama Sutta (SN 35. 245)’을 참조하세요.

    • * 중요한 점은 이 세상의 ‘아닛짜(anicca) 특성’, 즉 세간의 즐거움을 쫓는 것으로는 고통/괴로움을 멈출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닛짱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 ㅡ 결정적 구절’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아닛짜(anicca)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둑카와 아낫따 특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앗따-를 자아로 ㅡ 많은 숫따에서 잘못된 번역’ 포스트의 #10을 참조하세요.

     

    삭까-야 딧티와 아스미 마-나 사이의 차이

     

    10.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이 세상 것들이 괴로움/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 즉 사람은 이 세상 어떤 곳에서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와 아스미 마-나(asmi māna)(‘나’라는 인식) 사이의 차이를 아는 것이 또한 필수적입니다.

     

    • * 모든 보통 사람(뿌툿자나, puthujjana)은 삭까-야 딧티(딧티 위빨라-사; 왜곡된 견해)라는 잘못된 견해와 이 세상의 어떤 것들을 ‘내 것’ 또는 ‘나’로 (산냐-로) 인식하는 것이 결실있다는 잘못된 인식(산냐 위빨라-사; 왜곡된 인식)을 모두 지닙니다.

    • * 그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는 소따빤나 단계에서 사라집니다. 소따빤나는 감각적/세간의 즐거움이 위험하다는 것을 (지혜로) 보았지만, 세간의 즐거움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남아 있습니다.

    • * 그러므로,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는 제거하기가 훨씬 더 힘들고 아라한 단계에서만 완전히 사라집니다. 아나-가-미(Anāgāmi)는 육체를 ‘나(me)’로 보는 것이 결실없다는 것을 알지만, 아나-가-미(Anāgāmi)에게 조차도 ‘me(나를/나에게)’ 또는 ‘I(나)’에 대한 산냐-(saññā)는 여전히 있습니다.

    • * 아닛짜, 둑카, 아낫따 특성을 처음 엿보는 것은 소따빤나 단계에서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닛짜, 둑카, 아낫따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면 아라한 단계에 이릅니다.

    • *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으면,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를 제거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감각적 즐거움에 사로잡힌 마음은 동요하는 마음입니다. 동요하는 마음은 붓다 담마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순한 삶을 살면서 '안도/해방'을 경험하기 전에는 그렇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전하는 자아’는 아라한 단계에 이를 때까지 존재한다

     

    11. 붓다께서는 ‘자아(self)’가 의미하는 바가 ‘사람’이라면 그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나’, ‘내 차’, ‘내 몸’ 등으로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괜찮습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인간의 형태조차도) 이런 형태가 아닐 것이라는 ‘더 깊은 진리’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흐름(lifestream)은 과거에 데와(Deva)와 브라흐마-(Brahmā)뿐만 아니라 동물과 지옥 중생의 형태였습니다. ‘환생이란 무엇인가? - 생명 흐름의 개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붓다께서는 (천상이나 브라흐마 영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구적 자아’의 개념은 잘못되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 * 모든 생명흐름(lifestream)은 “avijjā paccayā saṅkhāra” 내지 “jāti paccayā jarā, marana, soka-paridēva-dukkha-dōmanassupāyasā sambhavan’ti.”라는 빠띳짜 사뭅빠-다로 결정되는 동일한 원리에 따라 진전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포괄(일반) 용어들입니다. 여러분의 생명흐름은 또 다른 사람, 동물, 또는 데와의 그것과 같은 단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제거됩니다. 

    • * 그러나, 삭까-야 딧티를 제거하는 것은 첫 단계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나(me)라는 인식’은 아라한 단계까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삭까-야 딧티를 제거하는 것은 미래에 아빠-야-(사악처)에 태어나지 않게 합니다.

     

    12. 그러나, (‘me’, ‘I’ 등의 인식을 제거한) 아라한조차 여전히 ‘는 먹고 있다’, 또는 ‘ 팔을 긁었다’와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 * ‘Arahanta Sutta (SN 1.25)’를 참조하세요. 아라한은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살 수 없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 * 물론, 아라한은 육체가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며(빠리닙바-나), 아라한과 연관된 영혼/아-트만은 없습니다.

    • * 그러므로, 말에 매달리는 대신에, 문맥에 따라 빠알리 낱말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들러붙음은 빤짜 우빠-다-낙칸다-에 있고 빤짝칸다-에는 없다

     

    13. 또한, 위의 #2에서 필자는 'pañcakkhandhā attato samanupassati 등'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위의 'pañcupādānakkhandhā attato samanupassati 등'이라고 말했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들러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갈망하는 것, 즉 ‘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에만 들러붙습니다.

     

    • * 마음은 관심없는 어떤 것에는 결코 들러붙지 않으므로, 빤짝칸다(pañcakkhandhā)는 빠띳짜 사뭅빠-다에서 작용하지 않습니다. 감각 접촉을 하는 첫 단계 조차, 그것에는 빤쭈빠-다-낙칸다 (pañcupādānakkhandhā)가 작용합니다.

    • * 대상에 기반하여, 찟따는 이미 오염되어 일어나고(즉, pancupadanakkhandha), 들러붙음이 빤쭈빠-다-낙칸다 (pañcupādānakkhandhā)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추후 포스트에서 논의하겠습니다.

     

    요약

     

    14.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의 문맥에서 ‘atta/attā’ (그리고 anatta/anattā)라는 낱말은 결실있는(그리고 결실없는) 본질을 나타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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