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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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

     

    원문: ‘Is There A Self?’ 섹션의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 What Does It Mean?’ 포스트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는 많은 숫따에 나타나는 구절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보통 사람의 잘못된 견해를 요약합니다. 

     

    2023년 10월 7일 작성; 2024년 11월 9일 개정

     

    앗따-는 ‘영혼’ 또는 ‘변하지 않는 자아’를 의미하지 않는다

     

    1. ‘영원한 영혼(soul)’ 또는 ‘변하지 않는 자아(self)’가 없다는 것은 붓다 담마의 바탕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절에서 앗따-(attā)를 자아(self)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 * 그런 실체가 영혼(soul)으로 있다면, 빠리닙바-나(재탄생의 그침)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영원한 영혼이 있다면 영원히 존재해야 합니다. 알다시피, 아라한은 사후에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혼(또는 힌두교의 아-뜨만)이 없다는 것은 붓다 담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런 자아(self)가 존재하는지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 *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붓다께서는 자신의 이전 태어남(전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모순이 있을까요? [모순이] 없습니다. 붓다께서는 생에서 생으로 진전하는 생명흐름(lifestream)이 있고 그 생명흐름은 아라한이 죽을 때 진전함이 그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 * 위 문제는 많은 이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한번은 한 데와(천신)가 부처님께 “왜 아라한들은 ‘나는 말합니다’ 또는 ‘그들은 나에게 말합니다’와 같이 말합니까? 그것은 모순이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붓다께서는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Arahanta Sutta (SN 1.25)’를 참조하세요.

    • * ‘불변의/영원한 나’라는 개념이 붓다 담마에서 모순이지만, 관습적/대화 방식으로 ‘I(나는/내가)’, ‘me(나를/나에게)’, 또는 ‘myself(나 자신)’을 사용하는 것은 충분히 좋습니다.

     

    결정적 사실 / 관습 용어

     

    2. 먼저, 몇 가지 사실/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 * ‘I(나는/내가)’, ‘me(나를/나에게)’, 및 ‘mine(내 것)’에 대한 빠알리 낱말은 각각 ‘아항(aham)’, ‘메-(mē)’, 및 ‘마마(mama)’입니다. 영원한 ‘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나(I, me), 및 내 것(mine)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살 수 없습니다. 붓다께서도 관습적(vohāra) 의미에서 그 낱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 *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영혼(soul)이나 힌두교의 아-뜨만(ātman) 같은 ‘변하지 않는 나’는 없습니다.

    • * 그 대신, 항상 변하는 ‘생명흐름(lifestream)’이 불교의 원인과 결과 원리, 즉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 따라 진전합니다. 그 ‘생명흐름’은 행복과 고통을 경험하지만, 고통이 장기적으로 지배적입니다. ‘환생이란 무엇인가? - 생명 흐름의 개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예를 들어, 인간은 그 때의 원인/조건에 따라 데와(천신) 또는 동물로 미래에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 * 그 고통은 아라한으로 죽음으로만 끝납니다.

     

    앗따-의 관습적 의미와 더 깊은 의미

     

    3. (위 #1에서 가리켜 보인 바와 같이) ‘불변의/영원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붓다께서는 관습적 의미로 ‘사람’을 말씀하셨습니다. 관습적 의미로 ‘사람’, ‘나 자신’ 등을 나타내는 빠알리 낱말은 앗따-(attā)(a 장음이 있음)입니다. 

     

    • * 앗따-(attā)(그리고, 또한 a 장음이 없는 atta)의 더 깊은 의미는 ‘유익한’, ‘결실있는’ 등 입니다. 그 반대는 아낫따/아낫따-(anatta/anattā), 즉 ‘결실없는’입니다.

    • * 두 가지 사용법은 ‘앗따- 히 앗따노- 나-토-’ 포스트에 논의되어 있습니다. 더 긴 논의는 ‘아낫따 - 어느 앗따의 반대말일까?’ 포스트에 있습니다.

    • * 더 깊은 의미는 틸락카나(아닛짜, 둑카, 아낫따)에 적용되는데, 틸락카나에서 아낫따는 아닛짜와 둑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모두 31영역 세상의 원하지 않는(바람직하지 않는) 특성을 나타냅니다.

    • * 주: atta와 attā는 ‘aththa’와 ‘aththā’로 발음됩니다. ‘참고 자료 1’을 참조하세요.

     

    4. 모든 언어에서 어떤 낱말들은 이중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영어 낱말의 다수는 동일한 철자로 동일하게 발음되지만 문맥(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어, ‘Why Words Have Different Meanings in Different Contexts’를 참조하세요.

     

    • * 올바르게 번역하려면 두 가지 언어와 문맥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띠삐따까(Tipitaka)를 영어로 번역하는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빠알리어(띠삐따까의 언어)에 능숙하지도 않고 붓다 담마의 깊은 기본 개념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 * 이것은 심각한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방 안의 코끼리’ 섹션의 ‘첫 번째 코끼리: 띠삐따까에 대한 낱말별 번역(Word-for-Word Translation of the Tipiṭak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뿌툿자나의 세계관 ㅡ 세상은 앗따(가치있는) 특성/본질이다

     

    5. 붓다의 세계관을 듣지/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가능한 한 더 많은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가치있거나 결실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어떤 메커니즘을 모릅니다. 고통스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감각적 즐거움에 피난처를 구합니다.

     

    • * 따라서, 일반적으로 인간 사회는 그 마음성향(사고방식)을 중심으로 구축됩니다. 보통 사람(뿌툿자나)의 목표는 좋은 일자리를 얻거나 사업을 하여 감각적 즐거움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 * 마찬가지로, 비즈니스 모델은 사람들이 감각적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이 모색됩니다.

    • * 감각적 즐거움을 구하는 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 견해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입니다.

    • * 그 모델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마음성향(사고방식)이 수천 년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되어 온 이유입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감각적 즐거움은 지속적인 행복을 주지 못하는 이유, 즉 삭까-야 딧티가 잘못된 견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세계관의 결함/모순

     

    6. 위 모델이 맞다면, 수백만/수십억 달러를 번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모든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고통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 첫째, 우리는  모두 부유한 사람들의 자살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만약 감각적 즐거움이 지속적인 행복을 주고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은 ‘행복을 살’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감각적 즐거움이 (질병이나 정신적 우울로 인한) 어떤 고통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 둘째,  감각적 즐거움을 경험하는 우리의 능력은 나이가 들수록 저하합니다. 음식의 맛이 예전 같지 않고, 냄새에 대한 반응이 떨어지며, 성생활을 즐길 수 있는 능력도 떨어집니다. 보고 듣는 능력도 나이가 들수록 감소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뇌 기능도 저하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이나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새로운 수단’의 발명으로도 신체 기능의 불가피한 저하를 보상해 줄 수는 없습니다.

    • * 젊을 때는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함으로써 어떤 고통도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화재로 인해 집이 전소되어도 돈이 충분하다면 다른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배우자와 다툼이 생기면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들을 할 만큼 충분한 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도 나이가 들면서 ‘새로운 소유물’을 즐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음식 맛을 보는 능력이 떨어지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맛이 밋밋할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과 결혼하더라도 일정 나이가 지나면 성생활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아닛짜, 둑카, 아낫따 ㅡ 세상의 즐거움을 갈망하는 것의 결함

     

    7. 최근의 3개 포스트인, ‘아닛짜 본질 ㅡ 세간적 즐거움을 쫓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닛짱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 ㅡ 결정적 구절’, ‘둑카 ㅡ 괴로움에 대해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진리’에서, 세속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일시적 행복을 주더라도, 어떻게 결국 고통으로 이어지는지를 논의했습니다.  그 포스트들에서는 두 가지 측면의 특성(아닛짜와 둑카)을 논의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관련된 세번째 측면인 아낫따 특성(본질), 즉 세속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의 결실없음과 결국 어떻게 난감하게 되고 많은 고통을 받게 되는지에 대해 논의합니다. 

     

    • * 위 포스트에서 가리켜 보인 바와 같이, 보통 사람(뿌툿자나)은 행복하게 되는 하나의 방법만 압니다. 그것은 다섯 가지 육체 감각, 즉 마음을 즐겁게 하는 형색, 소리, 맛, 냄새, 및 신체 접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 보통 사람은 괴롭거나 고통스런 경험을 접할 때에도, 괴로움을 극복(또는 그것에 대한 보상)하기 위해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 이러한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의존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형색, 소리, 맛, 냄새, 및 신체 접촉이 외부 세계에서 이용 가능하고, 그것들이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인식에 기반합니다.

    • * 붓다께서는 그 잘못된 견해를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감각적 즐거움이 행복을 가져오고 괴로움을 극복하게 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라고 하셨고, 그 잘못된 인식을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감각적 즐거움이 행복을 가져오고 괴로움을 극복하게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라고 하셨습니다.

    • * 삭까-야 딧티를 제거함으로써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가 됩니다. 산냐- 위빠라사[찟따 위빨라사 포함]의 제거는 단계적으로 일어나며 아라한 단계에서만 완전히 제거됩니다. 따라서, 우선 삭까-야 딧티에 집중합시다.

     

    감각적 즐거움은 지속적인 행복을 주는가?

     

    8. 아이들은 ‘현재 순간에 살기’ 때문에 모래성을 쌓는 것을 즐깁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모래성을 쌓는 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장기적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세속적인 것(집, 자동차 등)을 얻는 것에 집중합니다.

     

    • * 그러므로, 뿌툿자나는 집이나 자동차와 같은 자산을 얻거나 음식을 먹거나, 영화를 보거나, 성관계를 가지는 등의 즐거움을 주는 활동을 할 때 즐거워집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손상되거나 파괴되면, 그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또한, 어떤 ‘즐거움을 주는 활동’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지구상에서 가장 좋은 음식도 제한된 양만큼만 먹을 수 있으며, 한 번에 두 편 이상의 영화를 보면 두통을 유발할 수 있으며, 성행위는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 * 그러므로, 뿌툿자나는 향상 다른 유형의 감각적 즐거움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활동도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결국 약물을 복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약물이 다른 문제들을 잊는 가장 쉬운 방법이고 빨리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즐거움의 결과’를 얻으려면 복용량을 계속 늘려야 하며, 짧은 시간 내에 과다복용하여 심지어 죽게 됩니다. '불충족/불만족'이라는 느낌이 있는데, 그것이 ‘아낫따 본질’의 한 측면입니다.

    • * 그러므로, 그런 어른들(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보통 사람, 즉 뿌툿자나)조차도 그들의 행위들이 또한 지속적인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 * 또다른 깊은 측면은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괴로움이 없는 순수한 마음’(pabhassara citta, 빠밧사라 찟따)에서 더 멀어지게 하고, 따라서 그런 활동들은 아닛짜 본질(anatta nature)입니다. 즉, (장기적으로는)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형색, 소리, 맛, 냄새, 및 신체 접촉이 있는 세상은 아낫따 본질(anatta nature)(결실없음)이며, 이것은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앗따 본질(atta nature)’은 31영역에 없습니다. 인간 세계는 물론이고, 데와 또는 브라흐마 영역에도 없습니다.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9. 논의한 바와 같이(위 #7의 포스트들을 참조), 감각적 즐거움은 세상의 외부 루빠에 관여하여 일련의 정신 현상의 발생으로 이어집니다. 붓다께서는 정신적 측면을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라는 네가지 범주로 요약하셨습니다.

     

    • * 뿌툿자나는 육체를 통해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와 마음에 소마낫사 웨다나-(somanassa vedanā)를 줄 수 있는 외부 루빠를 추구합니다.

    • * 뿌툿자나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형색, 소리, 맛, 냄새, 및 신체 접촉을 주는) 모든 외부 루빠를 매우 가치있게 여깁니다. 물론, 그런 경험으로 일어나는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도 매우 가치있게 여깁니다. 그 다섯 가지 실체는 다섯 무더기, 즉 빤짝칸다(pañcakkhandha)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갈망하고 우리 마음에 가까이 유지하려는(즉, 그것들에 대한 우빠-다-나를 가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빤짜 우빠-다-나 칸다(pañca upādāna khandha), 즉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가 됩니다

     

    10. 그러므로, 그런 루빠와 동반하는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를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급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 차를 운전하는 것은 즐기거나 그 차에 대에 생각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 * 그것이 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 (또는 들러붙는 모든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 중의 어떤 하나에 관하여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라는 구절이 본질적으로  의미하는 것입니다.

    • * 여기서, ‘etaṁ mama’는 (땅하-에 기반한) ‘그것은 내 것’을 의미하고, ‘esohamasmi’는 그 땅하-에 기반한 ‘나’(마-나)라는 감각을 의미하며, ‘eso me attā’는 그것이 ‘나’에게 결실있고/유익하다는 잘못된 견해(딧티)를 의미합니다.

    • * 따라서, 감각 입력에 들러붙음은 땅하-, 마-나, 및 딧티와 함께 일어납니다. 후자는 구체적으로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입니다. 먼저 삭까-야 딧티를 제거합니다. 땅하-(taṇhā)는 꺄-마 라-가, 루빠 라-가, 및 아루빠 라-가로 나타납니다. 까-마 라-가(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는 경향)는 아나-가-미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루빠 라-가(자-나의 즐거움을 갈망함), 아루빠 라-가(사마-빳띠의 즐거움을 갈망함), 및 마-나(māna, ‘나’라는 감각)는 아라한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11. 붓다께서는 많은 다른 숫따 중의 ‘Etaṁmama Sutta (SN 22.151)’에서 그것을 설명하셨습니다. 링크에서 그 숫따에 대한 빠알리 원문과 숫따 센트럴의 번역문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필자는 그 번역문을 개정하여 오역을 바로 잡았습니다.

     

    “빅쿠들이여, (보통) 사람들무언가(루빠)를 ‘이것은 내 것이다(etaṁ mama), 이것은 ‘나’다(esohamasmi 또는 eso aham asmi), 이것은 나에게 이득된다(eso me attā)’고 간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번째 부분인 에소하마스미(esohamasmi)는 자신의 몸/몸 부분에만 적용된다는 것에 유의하세요. 세 가지 모두는 자신이 들러붙어 있는  모든 루빠에 적용됩니다. 아스미(asmi)와 아스미 마-나(asmi māna)는 ‘나(me)’라는 생각을 나타내는데, 즉 마-나 아누사야(māna anusaya) 또는 마-나 상요자나(māna samyojana)며, 그것은 아라한 단계에서만 없어집니다. ‘Seyyohamasmi Sutta (SN 35.108)’를 참조하세요.

     

    • * 위 링크에서 다음 구절(표식 1.5)은 불완전합니다. 전체 구절은 “rūpe kho, bhikkhave, sati, rūpaṁ upādāya, rūpaṁ abhinivissa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입니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루빠를 경험하면, 그 사람은 그것에 대해 우빠-다-나(upādāna)를 일으키고 '이것은 내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가지게 되어 행운이다. 이것이 나에게 유익할 것이다'라는 견해와 함께 아비상카라(abhinivissa)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 * 그다음, 붓다께서는 모든 루빠(내부 또는 외부)는 아닛짜 본질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루빠)에 대한 들러붙음으로 아비상카-라를 생성하면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 * 그 구절은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에 대해 반복됩니다.

     

    표식 1.18로 시작되는 구절은 틸락카나(또는 사성제/빠띳짜 사뭅빠-다)를 이해하는 자들은 그런 들러붙음이 미래 괴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12. 이 설명을 통해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구절의 의미가 분명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 다음 포스트에서는, 아낫따와 삭까-야 딧티에 관련된 또다른 유사한 구절을 논의하겠습니다.

     

    참고 자료

     

    1. 수많은 년 전(1800년대)에 채택된 독특한 ‘띠삐따까 영어’ 표기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초기 유럽 학자들이 채택한 '띠삐따까 영어' 규약 ㅡ 제1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띠삐따까(Tipiṭaka)의 영어 버전은 1900년대 초에 이 형태로 쓰여졌고, 그것은 숫따 센트럴(Sutta Central) 사이트를 포함하여, 대부분 영어 웹 사이트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버전입니다. 빠알리 낱말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Pāli Glossary – (A-K)”도 또한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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