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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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ㅡ 땅하-, 마-나, 딧티와 관계

     

    원문: ‘Is There A Self?’ 섹션의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 Connection to Taṇhā, Māna, Diṭṭhi’ 포스트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는 많은 숫따에 나타나는 구절입니다. 땅하-, 마-나, 및 딧티가 어떻게 ‘왜곡된 산냐-’로 인해 일어나는지를 설명합니다. 

     

    2023년 10월 7일 작성; 2025년 5월 24일 재작성(제목 개정 포함); 2025년 5월 25일 개정(#15 및 #16 추가)

     

    소개

     

    1. 몇 개의 숫따를 사용하여 “etaṁ mama, esohamasmi (eso aham 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라는 구절의 의미를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왜곡된 산냐-’를 설명하며, 이로 인해 땅하-, 마-나, 딧티를 통해 감각 입력에 대한 들러붙음이 생긴다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 * 먼저, 이 구절에 나오는 빠알리 낱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여기서, ‘mama’는 ‘내 것’을 의미하고, ‘aham asmi’는 ‘나라는 감각’(asmi māna와 관련됨)을 의미합니다. 괄호 안에 표시된 것처럼, esohamasmi는 ‘eso aham asmi’입니다.

    • * 이 맥락에서 세 번째 낱말인 ‘me attā’는 ‘나의 이득’을 의미합니다. ‘me’(‘say’와 같은 운)는 ‘나를 위한(나에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상황에서 ‘attta/attā’가 ‘이득’ 또는 ‘가치 있는’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논의했습니다. 예를 들어, ‘앗따또 사마누빳사띠 ㅡ 어떤 것을 가치있게 봄’을 참조하세요.

    • * 그 구절은 보통사람(뿌툿자나)이 ‘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각 입력에 들러붙는 근본 원인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 그 구절은 다른 많은 숫따들과 함께 ‘Etaṁmama Sutta (SN 22.151)’에도 나옵니다. 링크에서 잘못된 영어 번역은 ‘This is mine, I am this, this is my self(이것은 내 것이고, 나는 이것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입니다.

     

    • * 그러나, 아래에 논의된 바와 같이, 그것은 “이것은 내 것이고, 나는 이것(의 일부)이고, 이것은 나에게 이득된다.”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것은’ 자신의 몸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 * 이 숫따들 중에서, 붓다께서는 (감각 입력을 경험했을 때) 루빠(rupa) 뿐만 아니라 마음에 일어나는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그리고 윈냐-나(viññāṇa)도 '이것은 내 것이다, 나는 이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이득된다'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 실체들은 빤짜 우빠-다-낙칸다(pañca upādānakkhandha)에 있습니다.

     

    루빠 ㅡ 외부 루빠가 아님

     

    3. 여기(그리고 대부분의 숫따들)에서, ‘루빠(rupa)’는 ‘외부 루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루빠’를 경험할 때 마음에 일어나는 루빠를 말합니다.

     

     

    감각 입력에 대한 들러붙음이 왜 나쁘고 결실이 없는가?

     

    4. (지적인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붓다께서 왜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들러붙음’이 나쁘다고 가르치셨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불자는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인가?’를 참고하세요.

     

    • * 위의 링크 포스트에서 지적했듯이, 의지력으로 (성적 욕망, 음식에 대한 욕망 등을 포함하여) 감각적 욕망이나 까-마 라-가를 없애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 * 위의 링크 포스트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것 자체는 미래에 고통을 초래하지 않습니다.

    • * 그러나, 더 깊은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i) 감각적 욕망, 즉 까-마 라-가(kāma rāga)가 있는 한, 유혹이 강해질 때 부도덕한 행위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뇌물을 받지 않지만, 백만 달러를 제안받는다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ii) ‘감각적 즐거움’은 ‘마음이 만든’ 것이며 더 깊은 의미에서 환상이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감각적 즐거움’은 마음이 만든(mind-made)’ 것임을 깨달을 때, 마음은 감각적 즐거움을 자발적으로 포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열반을 얻기 위해 의례 의식(실랍바따 빠라마사)이 불필요한 이유입니다. 필요한 것은 ‘붓다의 세계관’( '담마와 과학' 섹션의 ‘붓다의 세계관’ 서브섹션을 참조)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곡된) 산냐-의 숨겨진 역할

     

    5. 그 두 가지 점(특히 두번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곡된) 산냐-’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 * 뿌툿자나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산냐-는 본질적으로 왜곡되어 있습니다. 즉, 그것은 실제 본질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 * 우리 대부분은 붓다께서 ‘세상의 참된 본질’(아타-부따 냐-나)을 발견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붓다께서 그 이유를 우리 몸에 내재된 (왜곡된) 산냐-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행히, 부처님 가르침의 이 ‘누락된 부분’을 되찾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세부 정보를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숫따-들이 많이 있습니다.

    • * 관련된 숫따로서는 ‘물-라빠리야-야 숫따 ㅡ 모든 것의 뿌리’에서 설명된 숫따가 있습니다.  ‘모든 것의 뿌리’라는 숫따의 명칭이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모두 ‘산냐-’에 관한 것입니다! 

     

    아윗자-는 무엇인가?

     

    6. 대부분의 사람들(특히 최소한 붓다 가르침의 세간 버전을 접한 사람들)은 라-가, 도사, 모하(또는 아윗자-)가 미래 괴로움의 근본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 * 그들은 또한 아윗자-(avijjā) 때문에 라-가(rāga)와 도사(dosa)로 감각 입력에 들러붙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윗자-는 여러가지로 정의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윗자-가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윗자-에 대한 한가지 설명입니다. ‘Avijjā Sutta (SN 56.17)’를 참조하세요.

    • * 그러나 그들의 99% 이상은 아윗자-를 설명하는 다른 방식을 모릅니다. 예를 들어, ‘Avijjā Sutta (SN 22.113)’에서, 아윗자-는 “… assutavā puthujjano rūpaṁ nappajānāti, rūpa samudayaṁ nappajānāti, rūpa nirodhaṁ nappajānāti, rūpa nirodha gāminiṁ paṭipadaṁ nappajānāti.”로 설명됩니다. 링크 주소의 번역은 “...그것은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 형태, 그 기원, 그 소멸, 그리고 그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이해하지 못할 때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빠(rupa)’가 ‘외부 루빠(external rupa)’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번역자도 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 * (아윗자-를 정의하는) 그 구절의 올바른 번역은 “...그것은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 루빠(루빠 우빠-다-나 칸다), 그 기원, 그 소멸, 그리고 그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이해하지 못할 때다.”입니다.

     

    루빠 ㅡ 루빠 우빠-다-낙칸다

     

    7. 링크된 ‘Avijjā Sutta (SN 22.113)’에 있는 번역이 왜 잘못되었는지 논의해 보겠습니다. 그 구절에서 ‘루빠’는 마음에 일어나는 ‘마음이 만든 루빠(mind-made rupa)’를 의미합니다. 동일한 ‘외부 루빠’에 대해, 동시에 동일한 ‘루빠’를 경험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서로 다른 버전의 ‘루빠’가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유형의 웨다나-, 산냐-, 상카-라, 그리고 윈냐-나가 생겨납니다. 즉, 사람들은 같은 감각 입력(예를 들어, 동일한 사람을 보는 것)에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 * 위 #3에서 이미 예시를 논의했습니다. 그 예시에서, A와 B는 이전 경험에 기반하여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산냐-를 바탕으로 X를 (친구와 적으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복잡한 과정으로, A와 B의 마음이 X와의 이전 경험을 떠올려야 합니다. 즉, 그것은 마음이 X를 순식간에 스캔한다는 뜻입니다!

    • * 여기에는 ‘루빡칸다’, 즉 ‘X에 대한 많은 이전의 시각/연상’이 포함됩니다. 그들의 마음이 (라-가와 도사와 함께) X에 대한 시각에 들러붙기 때문에, 작용하는 것은 ‘루빡칸다(rupakkhandha)’가 아니라 ‘루빠 우빠-다-낙칸다(rupa upādānakkhandha)’입니다.

    • * 다시 말해, X라는 사람의 ‘스냅샷’을 받으면 A나 B의 마음은 과거 ‘X의 스냅샷’을 즉시 훑어보며 X를 인식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 그 이상입니다. 그 마음은 또한 그런 과거 만남과 관련된 감정(웨나다-, 산냐-, 상카-라, 그리고 윈냐-나)을 훑어보는데, 그때가 마음이 X를 친구 또는 적으로 인식할 때입니다.

    • * 감각 사건이 모든 ‘다섯가지 집착의 무더기’, 즉 ‘빤짜 우빠-다-낙칸다’를 촉발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아라한에게는 루빠(루빠 우빠-다-낙칸다)가 일어나지 않는다 

     

    8. 아라한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아윗자-(avijjā)를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따라서, ‘Avijjā Sutta (SN 22.113)’에 따라, 그들은 형태(루빠)와 그 기원을 이해하고 성스런 길을 통해 형태(루빠)의 소멸을 얻었을 것입니다(위 #6 참조).

     

    • * 이제, 왜 ‘루빠(rupa)’가 ‘외부 루빠(external rupa)’를 지칭하지 않는지 분명해져야 합니다(예를 들어, 위에서 논의한 ‘X를 보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 * 아라한은 (과거에 X와 만난 적이 있다면) X를 알아볼 것입니다. X가 친구였든 적이었든, 아라한의 마음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으로 X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루빠(루빠 우빠-다-낙칸다)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루빠 니로다(rupa nirodha)’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 * 그 때문에 ‘아라한이 보는 것’은 ‘딧테 딧타맛땅 바윗사띠(diṭṭhe diṭṭhamattaṁ bhavissati)’로 표현됩니다. ‘딧테 딧타맛땅 바윗사띠 ㅡ 산냐-와 관계’와 ‘루빠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따라서, 위 #6에서 언급된 ‘니로다(소멸)’는 ‘외부 루빠(external rupa)’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루빠 우빠-다-낙칸다의 일어남이 멈추는 것만을 의미합니다.

     

    아라한에게는 빠띳짜 사뭅빠-다가 작용하지 않는다

     

    9. 또한, 아라한에게는 ‘루빠 우빠-다-낙칸다(rupa upādānakkhandha)’뿐만 아니라 ‘다섯 가지 우빠-다-낙칸다(pañca upādānakkhandha)’가 모두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은 아라한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각 감각적 입력은 뿌툿자나(puthujjana)에게 빠띳짜 사뭅빠-다가 시작되게 합니다. ‘로까 숫따 ㅡ 세상의 기원과 그침’ 포스트의 #12를 참조하세요.

     

    • * 빠띳짜 사뭅빠-다 사이클을 시작하려면, 마음은 ‘뿌라나 깜마(purana kamma)’ 단계에서 감각 입력에 자동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집착해야 합니다.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강조했듯이, 핵심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 링크들을 주말(혹은 그 이상) 동안 살펴보는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 * 이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제 “etaṁ mama, esohamasmi (eso aham 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라는 구절을 다시 논의해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감정은 ‘외부 루빠’와 연관되지 않는다

     

    10. 위에서 논의했듯이, 감각적 즐거움은 세상의 외부 물질(external rupa)이 마음과 접촉하여 일련의 정신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붓다께서는 정신적 측면을 네 가지 범주, 즉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그리고 윈냐-나(viññāṇa)로 요약하셨습니다.

     

    • * ‘Avijjā Sutta (SN 22.113)’에서, (위 #6 참조) 붓다께서는 ‘루빠 니로다(rupa nirodha)를 성취하기 위한 요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루빠’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절에서 말하듯이, 뿌툿자나는 루빠(rupa)를 루빠 우빠-다-나 칸다(rupa upādāna khandha)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 * 뿌툿자나는 ‘외부 루빠)가 마음에 기쁨이나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고 믿습니다.

    • * 위 #3에서 논의한 예에서, A와 B는 각각 X를 친구와 적으로 인식합니다. 따라서 A는 X와 어울리는 것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반면, B는 X를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X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최악의 경우, X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상황이 악화되면 B가 X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감정은 (왜곡된/잘못된) 산냐-로 인해 일어난다

     

    11. 그러나, 붓다께서는 A와 B가 모두 잘못되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 * A는 X를 보고 기쁨을 느끼는 반면, B는 싫어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두 감정은 모두 산냐-(왜곡된/잘못된 산냐-)로 인해 일어납니다.

    • * 필자는 ‘왜곡된/잘못된 산냐-(saññā)’를 일으키는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강조했듯이, 이는 복잡한 과정이지만, 도과(막가 팔라)를 얻는 데 필요한 수준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 * 매우 중요한 ‘왜곡된/잘못된 산냐-’의 역할은 ‘산냐-니다-나- 히 빠빤짜 상카- ㅡ 부도덕한 생각은 '왜곡된 산냐-'에 기반한다’ 포스트에서도 논의되었습니다. “etaṁ mama, esohamasmi (eso aham 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라는 구절과의 연결을 만들기 위해 이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12. 뿌툿자나는 육체를 통해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를 제공하고 마음에 소마낫사 웨다나-(somanassa vedanā)를 제공할 수 있는 외부 루빠(external rupa)를 추구합니다. 또한 육체를 통해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를 제공하고 마음에 도마낫사 웨다나-(domanassa vedanā)를 제공할 수 있는 외부 루빠(external rupa)를 피하려고 합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외부 루빠’에 들러붙습니다. 그들은 또한 아둑카마 수카(adukkhama sukha), 즉 ‘중립 느낌’을 가지는 무지를 통해 들러붙습니다. 여기서는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첫 번째 경우에 집중하겠습니다.

     

    • * 뿌툿자나(puthujjana)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광경, 소리, 맛, 냄새, 및 감촉을 제공하는) 모든 외부 루빠(external rupa)를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왜곡된/잘못된 산냐-’에 속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따라서, 그들은 그것에 들러붙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구절 중의 ‘에땅 마마(etaṁ mama)’ 부분입니다.

    • * (시작없는 재탄생 과정을 통해) 그런 들러붙음의 반복으로, ‘나라는 감각’(asmi māna)이 확립됩니다.

    • * 물론, 그 두 가지는 기쁨/행복이 ‘외부 루빠’에 있다는 잘못된 견해(diṭṭhi)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들은 ‘외부 루빠’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즉 그것들이 가치 있다고(attā)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절의 마지막 부분인 ‘에소 메 앗따-(eso me attā’입니다. 이는 ‘앗따또 사마누빳사띠 ㅡ 어떤 것을 가치있게 봄’ 포스트에서 자세히 논의됩니다. 여기서, ‘attato samanupassati(앗따또 사마누빳사띠)’는 ‘무언가를 atta/attā(앗따/앗따-)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13. 물론, 그런 경험에서 일어나는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그리고 윈냐-나(viññāṇa) 또한 매우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이 다섯 가지 실체는 다섯 무더기(오온), 즉 빤짝칸다(pañcakkhandha)입니다. 우리는 오온을 갈구하고 마음 가까이에 두려고 하기 때문에(즉, 오온에 대한 우빠-다-나를 품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항상 ‘빤짜 우빠-다-나 칸다(pañca upādāna khandha)’ 또는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가 됩니다.

     

    • * 따라서, 그런 루빠(rupa)와 그에 수반되는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윈냐-나(viññāṇa)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를 들어, 고급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을 좋아하고, 운전하거나 심지어 그 자동차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즐깁니다.

    • * 이것이 본질적으로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또는 사람이 들러붙는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 중의 하나에 대한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 * 여기서, ‘에땅 마마(etaṁ mama)’는 (땅하-에 기반한) ‘이것은 내 것’을 의미하고, ‘에소하마스미(esohamasmi)’ 그 땅하-에 기반한 ‘나라는 감각’을 의미하며, ‘에소 메 앗따-(eso me attā)’는 ‘이것은 나에게 결실있고/유익하다’는 잘못된 견해(딧티)를 의미합니다.

     

    삭까-야 딧티와 관계

     

    14. 따라서, 감각 입력에 들러붙음은 땅하-, 마-나, 및 딧티와 함께 일어납니다.

     

    • * 후자(diṭṭhi)는 구체적으로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입니다. 먼저, 소따빤나 단계에서 삭까-야 딧티(그리고 관련된 ‘위찌낏차’와 ‘실랍바따 빠라마사’)를 제거합니다.

    • * 땅하-(taṇhā)는 까-마 라-가(kāma rāga), 루빠 라-가(rupa rāga), 아루빠 라-가(arupa rāga)로 나타납니다. 까-마 라-가(감각적 즐거움과 그에 따른 빠띠가에 들러붙는 경향)는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루빠 라-가(자-나의 즐거움에 대한 갈애)와 아루빠 라-가(아루빠 사마-빳띠에 대한 갈애)는 아라한(Arahant)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 * 까-마 라-가(kāma rāga)와 빠띠가(paṭigha)가 제거되면 까-마 로까(kāma loka)에 재탄생하는 것이 멈춥니다. 루빠 라-가(rupa rāga)와 아루빠 라-가(arupa rāga)가 제거되면 각각 루빠 로까(rupa loka)와 아루빠 로까(arupa loka)에 재탄생도 멈춥니다. 그 ‘자-나/사마-빳띠(jhānic/samāpatti)의 즐거움’ 또한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 * 마지막으로. 마-나(māna) (‘나’라는 감각)도 아라한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 * 그 시점에, 사람은 잘못된/왜곡된 산냐-에 기반하여 우리 자신이 (각자를 위해) 만든 31영역의 세상(대부분 고통을 주고, 드물게는 한바탕의 즐거움을 경험함)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길은 단계적으로 육성되어야 한다

     

    15. 많은 사람들이 재탄생 과정을 멈추는 닙바-나의 최종 결과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그 최종 결과는 아나-가-미가 궁극적 실재에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이라는 개념과 같은) ‘영원한 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성취됩니다.

     

    • *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 생각을 숙고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현명하지도 않습니다. 그 생각에 집중하면 스트레스는 물론 정신적 문제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최근 포럼에서 그런 사례 하나를 논의했습니다. ‘소따빤나’라고 해도 그런 생각에 집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 *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 영혼 형태의 실체라는 개념이 실제의 실재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 * 먼저, 삭까-야 딧티를 제거하는 데 집중하여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여, 동물 영역을 포함한 아빠-야-(apāyā)에 재탄생하는 것에서 벗어나세요. 그 다음, 사띠빳타-나를 육성하여, 사까다-가-미와 아나-가-미 단계에 도달하고 까-마 로까에서 재탄생하는 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 후에만 ‘나’라는 감각을 제거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때쯤이면 그렇게 할 동기가 생기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  

    자신의 존재를 잃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16. 붓다께서는 다음과 가르치신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내가 말하는 것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다.” ‘Alagaddūpama Sutta (MN 22)’을 참조하세요. 유사한 말씀이 여러 숫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Titthāyatana Sutta (AN 3.61)’을 참조하세요.

    •  

    • * 보디삿따(보살)로써, 그 분은 궁극적 실재에서 ‘자아’나 ‘나’가 존재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찾아 멈추려고 노력하셨습니다.

    • * 그 탐구가 ‘붓다후드(Buddhahood)의 달성으로 이끌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분은 존재의 참된 실체, 즉 궁극적 실재에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셨습니다. 이는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해결한 결과입니다.

    • * 마찬가지로, 초기 단계를 육성하는 사람은 결국 실제로 ‘영혼 유형’의 영구적 존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 * 어쨌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영혼’이 정말로 존재한다면(그것이 자연에 내재되어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주: 이 포스트는 구 포스트인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을 재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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