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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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냐- 니다-나- 히 빠빤짜 상카- ㅡ 부도덕한 생각은 ‘왜곡된 산냐-’에 기반한다

 

원문: Three Levels of Practice 섹션의 ‘Saññā Nidānā hi Papañca Saṅkhā – Immoral Thoughts Based on “Distorted Saññā”’ 포스트

 

‘산냐-니다-나- 히 빠빤짜상카-(saññānidānā hi papañcasaṅkhā)’ 구절은 마음에 일어나는 오염/번뇌의 근본 원인을 잘 포착하여 보여줍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갈망하는 경향을 제거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내장된 왜곡된 산냐-’ 때문입니다.

 

2024년 1월 26일 작성; 2024년 1월 27일 개정(#6)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붓다 가르침

 

1. 붓다께서는 ‘Pheṇapiṇḍūpama Sutta (SN 22.95)’에서 산냐-(saññā)를 ‘신기루’라고 칭하셨는데, 우리는 ‘소따빤나 단계와 왜곡된/오염된 산냐-’와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에서 그것을 논의하였습니다.

 

  • * 여기서, 우리는 ‘설탕의 달콤함’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생물학적 몸속으로 내장된 ‘왜곡된 산냐-’에 의해 인간 마음에 생성된 신기루라는 증거를 제공하기 위해 위 구절이 있는 또 다른 숫따를 논의할 것입니다. 그 왜곡된 산냐-는 웨다나-(vedanā)가 아니라 ‘마음이 만든 산냐-(made-up saññā)’입니다. 그러나, ‘왜곡된 산냐-’는 ‘마음이 만든 웨다나-(mind-made vedanā)’ 또는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edanā)’로 이어지며, 즉 감각 입력에 따라 즐겁거나 불행해지게 됩니다.  

  • * 모든 유정체의 물질적 몸과 정신적 몸은 그 존재를 일으키는 업 에너지를 통해 일어납니다(또한 ‘웁빳띠 바와’라고도 칭함). 그것은 ‘웁빳띠 빠띳짜 사뭅빠-다(Uppatti Paṭicca Samuppāda)’의 ‘바와 빳짜야 자-띠(bhava paccaya jāti)’ 단계를 통해 일어납니다.

  • * 그것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붓다 가르침’입니다.

 

(육체를 가지는) 자-띠는 빠띳짜 사뭅빠-다에 의해 결정지어진다

 

2. 웁빳띠 빠띳짜 사뭅빠-다(Uppatti Paṭicca Samuppāda)의 ‘바와 빳짜야 자-띠(bhava paccaya jāti)’ 단계는 유사한 감각 자극에 대한 들러붙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avijjā paccayā saṅkhāra’). 어떤 자극에 대한 들러붙음(‘pati icca’)은 매칭되는 경험을 주는 태어남으로 이어집니다(‘sama uppāda’). 빠띳짜 사뭅빠-다 ㅡ ‘빠띠+이치차' + '사마+웁빠-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돼지로 태어남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로 행해진 저열한 행위(깜마)에 기반합니다. 사자로 태어남은 포악한 행위에 기반합니다.

  • * 따라서, ‘설탕의 달콤함’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은 돼지나 사자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돼지의 마음은 음식으로 오물을 갈망합니다. 사자는 설탕이나 오물을 갈망하지 않지만 다른 동물의 살을 갈망합니다. 자세한 것은 ‘가띠(가티)에서 바와로 그리고 자띠(자티)로 - 우리가 통제해야 할 것’과 ‘가띠(습관/성격)가 탄생을 결정한다 ㅡ 상삽빠니-야 숫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인간으로 태어남은 ‘좋은/도덕적인 가띠’에 기반하지만 까-마 라-가(감각적 즐거움을 가치있게 여기는 경향)가 혼합된 것에 기반합니다. ‘설탕의 달콤함’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은 인간 몸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피할 수 없으며, 붓다께서도 그것들을 경험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난 아라한조차도 (자-나 또는 사마-빳띠 상태에 있지 않다면) 그 ‘왜곡된 산냐-’를 생성할 것입니다.

  • * 그러나, 사람들이 그 ‘왜곡된 산냐-’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완전히 이해하면,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속지 않습니다. 그것이 붓다께서 바-히야 다-루시-리야(Bāhiya Dārucīriya)에게 단지 “diṭṭhe diṭṭhamattaṁ bhavissati, sute sutamattaṁ bhavissati, mute mutamattaṁ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ṁ bhavissatī’ti.”라고 말씀하셨을 때, (놀랍게도) 그가 이해한 것입니다. 그것은 “혀, 코, 몸 또는 마음으로 보여지고, 들려지고, 경험되는 것을 넘어서 가지[오염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바-히야 존자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실재에 대한 참된 묘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Bāhiya Sutta (Ud 1.10)’를 참조하세요. 영어 번역은 번역자가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부적절합니다.

 

마음은 항상 세 가지 로까-/다-뚜 중의 하나로 향한다

 

3. 여섯 감각 중의 어떤 것을 통해 감각 입력을 받지 않을 때, 마음은 ‘웁빳띠 바왕가 상태(uppatti bhavaṅga state)’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그것과 함께 태어난 마음성향(상태)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남은 ‘좋은 깜마 위빠까’의 결과이므로, 모든 인간의 그 상태는 긍정적인(좋은) 것입니다. 아빠-야(사악처)에 있는 자들만이 부정적인, 즉 ‘나쁜’ 웁빳띠 바왕가 상태입니다.

 

  • * 웁빳띠 바왕가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마음은 활동하지 않으며, 자와나 찟따-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섯 감각 중의 어떤 것을 통해 아-람마나가 받아들여질 때, 마음은 그 웁빳띠 바왕가 상태에서 깨어나고 그 아-람마나에 집중, 즉 활동적이 됩니다.

  • * 이것은 자동차가 ‘중립 상태’에 있다가 단기어에 들어갈 때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립 기어에 있는 동안에, 자동차는 정상이지만 움직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 * 인간은 인간 존재의 끝까지 그 웁빳띠 바왕가 상태를 잃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난 아라한도 자-나 또는 사마-빳띠 상태에 있지 않다면 그 웁빳띠 바왕가 상태에서 마음을 가집니다.

 

4. 아-람마나를 받으면, 인간 마음은 웁빳띠 바왕가 상태에서 깨어나고 인간 바와에 해당하는 ‘까-마 다-뚜’ 단계로 먼저 향합니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인간 바와와 연관된 ‘까-마 산냐-(kāma saññā)’를 수용합니다. 그것은 ‘설탕의 달콤함’, ‘여성의 아름다움’, 또는 ‘배설물의 악취’와 같은 ‘왜곡된 산냐-’를 포함합니다. 

 

  • * 반면에, 돼지는 배설물 더미와 함께 ‘매력적인 냄새’의 ‘왜곡된 산냐-’를 수용할 것입니다. 실재에서, 배설물은 숫닷-타까(현대 과학 용어로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좋거나 나쁜’ 질을 지니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숙고가 요구되는 더 심오한 점입니다.

  • * 우리는 마술사가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마술쇼를 보고 흥분합니다. 그러나 마술사는 항상 속임수를 씁니다. 그 속임수를 알고 나면, 마술쇼를 보고 흥분하는 것이 없습니다. 

  • * ‘왜곡된 산냐-’는 세상의 가장 훌륭한 마술 속임수입니다. 자연 자체가 마술사입니다. [속임수가] 너무 훌륭해서 부처님 외에는 누구도 그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육체는 그 ‘왜곡된 산냐-’를 제공하도록 만들어졌으므로, 그 속임수를 드러내기 위해 (과학 실험을 포함하여, 세간적 기술에 기반하여) 아무리 많은 조사를 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실패합니다.

  • * 그 속임수가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페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가 필요합니다.  위 #2에 설명된 바와 같이, 붓다께서는 특정 가띠로 행해진  깜마가 어떻게 해당하는 ‘왜곡된 산냐-’를 지니는 태어남으로 이어지는지를 묘사하셨습니다. 그것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붓다 가르침’입니다.  

 

‘산냐-니다-나- 히 빠빤짜상카-(saññānidānā hi papañcasaṅkhā)’

 

5. 우리가 진행하면서, 필자는 ‘왜곡된 산냐-’에 대한 여러 결정적인 숫따를 논의할 것입니다. 위의 구절은 ‘Kalahavivāda Sutta (Snp 4.11)’에 나와 있습니다. 전체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Na saññasaññī na visaññasaññī, Nopi asaññī na vibhūtasaññī; Evaṁ sametassa vibhoti rūpaṁ, Saññānidānā hi papañcasaṅkhā”.

 

  • * 띠삐따까(Tipitaka)에서, 낱말들은 텍스트의 행들을 압축하기 위해 합쳐집니다. 그 구절을 확장시키면 다음과 같습니다. 

“Na sañña saññī na visañña saññī, Nopi asaññī na vibhūta saññī; Evaṁ sametassa vibhoti rūpaṁ, Saññā nidānā hi papañca saṅkhā”입니다.

  • * 논의한 바와 같이, 빤쭈빠-다낙칸다/빤짜 우빠-다-낙칸다(또는 부처님에 따르면 ‘로까 사무다야’)의 축적은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에서 ‘아꾸살라 축적’(빠빤짜 상카-)의 생성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뿌라-나 깜마(purāna kamma)’ 단계의 ‘왜곡된 산냐’에 기반한 ‘상깝빠(saṅkappa) 생성’과 함께 시작됩니다.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러나 우선 다양한 유형의 산냐-를 언급하는 다음 구절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6. ‘에왕 사메땃사 위보띠 루-빵(Evaṁ sametassa vibhoti rūpaṁ)’은 ‘산냐-의 참된 본질을 일단 이해하면, 마음이 만든 루빠-가 마음에 일어나지 않는다’를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부도덕함을 우선시하는 것, 즉 빠빤짜’(빠빤짜 상카-, papañca saṅkhā)를 통해 아꾸살라(akusala)가 축적되는 것은 ‘왜곡된 산냐-’를 지칭하는 산냐-에서 유래한다(nidāna)는 것입니다. 이제 구절의 첫째 부분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 * ‘나 산냐 산니-(na sañña saññī)’는 ‘자연적으로 내장된 왜곡된 산냐-’로서는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또한 그 ‘왜곡된 산냐’가 경험되지 않고는 그것을 해결할 수 없으며 (예를 들어, 사람이 움맛따까-, 즉 미쳤다면), 그것이 ‘나 위산냐- 산니-(na visañña saññī)’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 * 예를 들어, 산냐-를 완전히 잃고 ‘아산냐-(asañña)’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아산냐 산냐-’ 기법(아산냐 바-와나-)을 육성한 자들은 결국 어떤 산냐-도 생성하지 않는 ‘아산냐- 영역’에 있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아산냐 산냐-(asañña saññā)’ 상태는 의식이 없게 될 때이며, 의식이 없는 동안에는 찟따-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어떤 유형의 산냐-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음, ‘나 위부-따 산니-(na vibhūta saññī)는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왜곡된) 산냐-’가 없이, 즉 아-루빠 사마-빳띠-에 있을 때는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묘사는 ‘Kalahavivāda sutta niddesa’에 있습니다.

  • * 우리가 경험하는 ‘왜곡된 산냐-’의 참된 본질은 ‘물-라빠리야-야 숫따 ㅡ 모든 것의 뿌리’ 포스트에서 논의했습니다.  숫따의 이름에 내포된 바와 같이, 이 ‘모든 것의 뿌리’를 파악하는 것이 빠빤짜 상카-(papañca saṅkhā)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핵심입니다. 또한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왜곡된 산냐-’는 ‘자-나또(jānato) 및 빳사또(passato)’ 단계를 거친 후 사띠빳타나를 통해 제거될 필요가 있는 ‘수바(subha) 및 빠띠가 산냐-(patigha saññā)’를 포함합니다.

 

‘왜곡된 산냐-’는 살아 있는 아라한과 함께 남아 있다

 

7. ‘왜곡된 산냐-’를 경험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지혜로 이해하여 아라한과(Arahanthood)에 도달됩니다. 핵심은 그 ‘왜곡된 산냐-’, ‘신기루’, 또는 ‘속임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윗자-(avijjā)로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과정을 거치고 미래 웁빳띠(uppatti)를 생성할 때(바와 및 자-띠) 우리 마음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 재탄생(자-띠)은 자동적으로 그 신기루, 즉 ‘왜곡된 산냐-’를 보여줍니다.

 

  • * 그것은 속임수임을 듣고(자-나또, jānato) 완전히 이해할(빳사또, passato) 때까지 영구적으로 재탄생 과정을 계속하는 악순환입니다

  • * (‘왜곡된 산냐-’를 제거한 후의) 이상적인 산냐-는 오직 빠밧사라 찟따(pabhassara citta)에서만 일어나는 산냐-임에 주목하세요. ‘아라한뜨 팔라 사마디(Arahant phala samadhi)’에 들어 있는 아라한은 그 ‘순수한 찟따’를 경험합니다. 그 ‘빠밧사라 찟따(pabhassara citta)’는 아라한뜨 팔라(Arahant phala) 순간에 처음 경험됩니다. 

  • * 그 반면에, 아라한이 ‘까-마 다-뚜(kāma dhātu)’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논의한 바와 같은 ‘까-마 산냐-와 함께 하는 찟따’를 경험합니다. 더욱이, 자-나(jhāna) 또는 사마-빳띠(samāpatti)에 있는 아라한은 ‘루빠 산냐-’(자-나의 즐거움) 및 ‘아루빠 산냐-’(사마-빳띠의 즐거움)가 함께 하는 찟따를 각각 경험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것들에도 들러붙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왜곡된 산냐-’를 경험한다 ㅡ 띠삐따까 증거

 

8. ‘Nibbānadhātu Sutta (Iti 44)’는 살아 있는 아라한을 “Tassa tiṭṭhanteva pañcindriyāni yesaṁ avighātattā manāpāmanāpaṁ paccanubhoti, sukhadukkhaṁ paṭisaṁvedeti. Tassa yo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ayaṁ vuccati, bhikkhave, saupādisesā nibbānadhātu.”로 묘사합니다.

 

번역: “그들의 다섯 감각 기관은 남아 있다. 그들의 감각 기관이 작용하는 한, 그들은 유쾌함/불쾌함을 경험하고 육체적 즐거움/고통을 느끼는 것을 계속한다. 그들에게 탐함, 성냄, 미혹함이 소멸된 것을 무엇이 남은 닙바-나(열반)의 요소라고 한다.”  여기서, ‘남은 것’은 감각 기관이 있는 그들의 육체입니다. 여기서, ‘유쾌함과 불쾌함’은 ‘왜곡된 산냐-’의 두 가지 주된 유형을 말하는데,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경험’은 ‘수바 산냐(subha saññā)’고, ‘좋지 않은 경험’은 ‘빠띠가 산냐-(patigha saññā)’입니다.  우리가 논의한 것처럼, 예를 들어, 그들은 ‘설탕의 달콤함’이나 ‘썩은 고기의 악취’를 경험합니다.  

 

  • * 핵심은 그들의 마음은 뿌툿자나에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뿌라나 깜마’를 거치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라한에게는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에 더 이상의 추가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 * 부처님조차도 인간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왜곡된 산냐-를 경험하셨습니다. 다양한 붓다 특성을 묘사할 때, ‘Brahmāyu Sutta (MN 91)’는 “Rasapaṭisaṁvedī kho pana so bhavaṁ gotamo āhāraṁ āhāreti, no ca rasarāgapaṭisaṁvedī”, 즉 “붓다께서는 맛을 경험하시지만, 맛에 대한 들러붙음을 경험하지는 않으신다”라고 말합니다.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음으로 깜마를 축적하기 시작한다

 

9. 그러므로, 인간 몸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은 ‘왜곡된 산냐-’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붓다 또는 아라한의 마음은 그것을 넘어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마술쇼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합니다.

 

  • * 까-마 라-가 아누사야/상요자나를 지닌 모든 이들의 마음은 자동적으로 아-람마나에 들러붙고 ‘우빠야(upaya) 단계’, 즉 ‘뿌라-나 깜마(purāna kamma)’ 단계가 시작됩니다. 이 첫 번째 단계에서는 자와나 찟따(javana citta)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깜마 축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한채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 * 그러나, 마음이 아-람마나에 관심이 있으면, ‘우빠-다-나(upādāna) 단계’, 즉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두 번째 단계입니다. 깜마 축적은 자와나 찟따(javana citta)와 함께 두 번째 단계에서 일어납니다. 이 과정은 의식적으로 일어나며, 여기서 우리는 와찌(vaci) 및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즉, 와찌 및 까-야 깜마를 생성함)에 관여합니다.

  • * 우빠야 및  우빠-다-나 단계는 ‘우빠야와 우빠-다-나 ㅡ 들러붙음의 두 단계’ 포스트에서 논의했습니다. 동일한 과정을 설명하는 대체적 방법은 그것을 ‘뿌라-나 깜마(purāna kamma)’와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로 칭하는 것입니다. 그 논의는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 포스트에 있습니다.

  • * 그 대체적 용어는 다른 숫따들에 나타납니다. 명명법을 아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 단계로 이행

 

10. 우리가 그 아-람마나(ārammaṇa)에 대해 까-마 구나(kāma guṇa)를 생성한다면, 깜마 축적(kamma accumulation), 즉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로 이행합니다. 그것은 감각 입력(아-람마나)이 그것을 추구하도록 마음이 확신하기에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음 도표에 묘사되어 있습니다(그리고 또한 아라한과 아나-가-미의 마음은 까-마 산냐-가 있는 ‘까-마 다-뚜’ 단계에서 멈춥니다). 첫 찟따 위티와 함께 일단 시작되면, (i) 강한 깜마가 와찌/까-야 상카-라와 함께 행해지거나, (ii) 마음챙김을 하여 ‘나와 깜마’ 단계의 시작 부분에서 멈출 때까지 깜마 축적이 계속됩니다.  

영문 다운로드/인쇄:Kamma accumulation with citta vithi

 

  • * 아-람마나가 까-마 구나를 촉발(그리고 까-막찬다를 생성)시키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다면, 첫 찟따 위티(citta vithi)에서 자와나 찟따(javana citta)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와 깜마(nava kamma)는 행해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위 도표에서 보듯이, 찟따 위티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 우리 마음을 거쳐가는 대부분의 감각 입력의 경우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작은 부분에만 들러붙습니다. 

  • * 까-마 구나가 어떻게 마음에 일어나는지에 대한 자세한 것은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명백히, 까-마 구나(kāma guṇa)는 아라한의 마음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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