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원문: Dhamma and Science 섹션의 ‘Kāma Guṇa – Origin of Attachment (Tanhā)’ 포스트(Is There a ‘Self’ 섹션으로 옮김)
- 2019년 10월 6일 작성
까-마 구나(kāma guṇa)는 이 세상에 있는 즐거운 것들입니다. 우리가 (무지를 바탕으로) 탐함이나 성냄을 통해 세상 것들에 둘러붙는(taṇhā, 땅하-) 경향이 있는 것은 까-마 구나(kāma guṇa) 때문입니다. 까-마 구나(kāma guṇa)를 기반으로, 우리는 자동적으로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를 생성합니다.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는 뒤따라서 땅하-(taṇhā)(세상 것들에 들러붙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전 포스트의 요약
1. 이전 포스트에서, 우리는 먼저 웨-다나-(vēdanā)를 위빠-까 웨-다나-(vipāka vēdanā)와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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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나중에 그 포스트에서, 우리는 웨-다나-(vēdanā)를 다르게 분류하였습니다. 육체(까-야, kāya)에서 느껴지는 그 웨-다나-(vēdanā)는 까-이까 웨-다나-(kāyika vēdanā)입니다. 다른 모든 유형의 웨-다나-(vēdanā)는 마음에서 일어나며, 그것들은 쩨따시까 웨-다나-(cetasika vēdanā)입니다. 물론, 위빠-까 웨-다나-(vipāka vēdanā)는 까-이까 웨-다나-(kāyika vēdanā) 또는 쩨따시까 웨-다나-(cetasika vēdanā)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는 모두 쩨따시까 웨-다나-(cetasika vēdan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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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까-이까 웨-다나-(kāyika vēdanā)는 둑카 웨-다나-(dukkha vēdanā), 수카 웨-다나-(sukha vēdanā), 아둑카마수카(adukkhamasukha)( (adukkhama asukha, 둑카도 아니고 숙카도 아님) 웨-다나-(vēdanā)라는 세 가지 유형이 될 수 있습니다. -
* 필요하면, 그 포스트인 ‘감각 사건에서 위빠-까 웨-다나-와 삼팟사 자- 웨-다나-’를 복습해 볼 수 있습니다.
이하는 재작성 예정이므로 삭제 표시합니다(2023년 8월 5일).
이전 포스트에 기반한 몇가지 관찰
2. 이제 몇 가지 코멘트를 더 추가해야겠습니다. 첫째, 그 까-이까 웨-다나-(kāyika vēdanā)는 모두 위빠-까 웨-다나-(vipāka vēdanā)입니다. 그것들은 신체적 고통 (부상, 질병 등)과 신체적 편안함(바디 마사지 등)을 주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둑카 웨-다나-(dukkha vēdanā), 수카 웨-다나-(sukha vēdanā), 및 아둑카마수카 웨-다나-(adukkhamasukha vēdanā)는 모두 위빠-까 웨-다나-(vipāka vēdanā)이며, 그것들은 ‘신체 접촉’, 즉 ‘까-얀짜 빠띳짜 폿탑베 짜 웁빳자-띠 까-야윈냐-낭(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āti kāyaviññāṇaṃ.)’으로만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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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모든 유형의 위빠-까 웨-다나-(vipāka vēdanā)는 눈, 귀, 코, 혀, 및 마음을 통해 옵니다. 육체를 통해 오는 위빠-까 웨-다나-(vipāka vēdanā)와는 달리, 그것들은 까-이까 웨-다나-(kāyika vēdanā)가 아닙니다. -
* 그 순간에, 그것들은 모두 우뻭까- 웨-다나-(upekkhā vēdanā)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거나, 담마가 마음에 떠 오릅니다. 그것들은 ‘짝쿤짜 빠띳짜 루-뻬 짜 웁빳자-띠 짝쿠윈냐-낭, 소-딴짜 빠띳짜 삿데 짜 웁빳자-띠 소-따윈냐-낭, 가-난짜 빳띳짜 간데 짜 웁빳자-띠 가-나윈냐-낭, 지완-짜 빠띳짜 라세 짜 웁빳자-띠 지와-윈냐-낭, 및 마난짜 빠띳짜 담메 짜 웁빳자-띠 마노윈냐-낭(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ñāṇaṃ, sō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āti sotaviññāṇaṃ,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āti ghānaviññāṇaṃ, jivhāñca paṭicca rase ca uppajjāti jivhāviññāṇaṃ, and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āti manoviññāṇaṃ).’입니다. ‘까-얀짜 빠띳짜 폿탑베 짜 웁빳자-띠 까-야윈냐-낭(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āti kāyaviññāṇaṃ)’는 여기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세요. -
* 그 후,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가 그 ‘초기 위빠-까 웨-다나-(initial vipāka vēdanā)’ 다음에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소리를 들은 후에, 즉 ‘소-딴짜 빠띳짜 삿데 짜 웁빳자-띠 소-따윈냐-낭(sō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āti sotaviññāṇaṃ) 후에, 두 단계가 더 진행되어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가 일어납니다. 그것들은 ‘차착가 숫따(Chachakka Sutta, MN 148)에 있으며, “소-딴짜 빠띳짜 삿데 짜 웁빳자-띠 소-따윈냐-낭, 띤낭 상가띠 팟소, 팟사 빳짜야- 웨다나-(sō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āti sōt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 paccayā vedanā).” 구절입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논의했듯이, 팟사 빳짜야- 웨-다나-(phassa paccayā vēdanā)는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입니다. 그것들은 탐함, 성냄, 무지로 인해 일어나는 웨-다나-(vēdanā)입니다. -
* 이제, 이 포스트에서 마지막 단계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왜 탐함을 통해 어떤 감각 입력에 들러붙고, 혐오(싫어함)를 통해 다른 것들에 들러붙을까요?
‘까-마 구나’란 무엇인가?
3. 붓다께서는 이 세상이 5가지 육체 감각의 눈을 즐겁게 하는 시각 대상,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 등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까-마 로-까(kāma lōka, 욕계)의 각 존재(유정체)는 그 고유의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감각 대상’ 세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그것들을 까-마구나(kāmaguṇa, 감각 자질)라고 칭하셨습니다. 알다시피, 까-마(kāma)는 ‘감각적’을 의미합니다. ‘구나(guna)’는 ‘자질’ 또는 ‘특색’을 의미합니다. 까-마구나(kāmaguṇa)는 띠삐따까(Tipiṭaka)에서 한 낱말로 되어 있지만, 필자는 그 의미를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까-마 구나(kāma guṇa)’라고 두 낱말로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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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사람은 특정 유형의 음식을 좋아합니다. 각 동물 종들에게는 그 고유의 ‘좋아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사자와 호랑이는 고기를 좋아합니다. 소는 고기를 먹지 않고 풀을 먹습니다. 돼지는 온갖 쓰레기 음식을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
* 인간으로서, 우리는 특정 시각 대상, 소리, 맛, 냄새, 및 신체 접촉을 즐깁니다. 사람이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그런 감각 접촉으로 인해 수카 웨-다나-(sukha vēdanā)가 생성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라한(Arahant)들도 그것을 느낍니다.
까-마 구나는 시각 대상, 소리, 맛, 냄새, 및 몸 감촉을 유인하고 있다
4. 그런 수카 웨-다나-(sukha vēdanā)는 초기 위빠-까 웨-다나-(vipāka vēdanā) 직후에 일어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논의했듯이, 신체 접촉 이외의 감각 접촉으로 인한 모든 위빠-까 웨-다나-(vipāka vēdanā)는 우뻭카- 웨-다나-(upekkhā vēdanā)입니다. 그것들은 중립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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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초기 접촉 직후, 까-마 구나(kāma guṇa)가 작용합니다. 많은 숫따(sutta)에서 까-마 구나(kāma guṇa)에 대해 논의하고 있으며, 모두 다음과 같이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닙바-나수카 숫따(Nibbānasukha Sutta, AN 9.34)에는 “빤찌메, 빅카웨, 까-마구나-. 까따메 빤짜? 짝쿠윈네이야- 루-빠- 잇타- 깐따- 마나-빠- 삐야루-빠- 까-무-빠상히따- 라자니-야-, 소따윈네이야- 삿다-, 가-나윈네이야- 간다-, 지와-윈네이야- 라사-, 까-야윈네이야- 폿탑바-, 잇타- 깐따- 마나-빠- 삐야루-빠- 까-무-빠상히따 라자니-야. 이메 코, 빅카웨, 빤짜 까-마구나-(Pañcime, bhikkhave, kāmaguṇā. Katame pañca? Cakkhuviññeyyā rūp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sotaviññeyyā saddā, ghānaviññeyyā gandhā, jivhāviññeyyā rasā, kāyaviññeyyā phoṭṭhabb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Ime kho, bhikkhave, pañca kāmaguṇā).”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
* 번역: “이 다섯 가지 유형의 감각 자질(kāmaguṇa, 까-마구나)이 있다. 어떤 다섯 가지인가? 눈으로 경험하며 그것이 기분 좋고, 즐겁고, 매력적이며, 사랑스럽고, 유혹적이며, 갈망으로 이끄는 형태(rūpā, 루-빠-)가 있다. 기분 좋고, 즐겁고,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고, 유혹적이며, 갈망으로 이끄는 소리(sadda, 삿다)가 있다. (다른 세 가지 감각도 유사하게 기술됨)
‘까-마 구나’로 인한 ‘웨다나-’는 ‘삼팟사 자- 웨다나-’가 아니다
5. 그러나, 까-마 구나(kāma guṇa)로 인해 일어나는 이 소-마낫사 웨-다나-(sōmanassa vēdanā)는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가 아닙니다. 까-마 구나(kāma guṇa)로 인한 소-마낫사 웨-다나-(sōmanassa vēdanā)는 보통 사람뿐만 아니라 아라한(Arahant)에게도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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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가지 예를 들어 명확하게 해 보겠습니다. 설탕이나 꿀에는 단맛의 ‘까-마 구나(kāma guna)’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부터 아라한까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아름다운 여성은 보통 사람부터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그와 같이 보일 것입니다. -
* 그러나, 위 #2의 “띤낭 상가띠 팟소, 팟사 빳짜야- 웨다나-(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 paccayā vedanā)”는 아라한(Arahant)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록 아라한(Arahant)이 까-마 구나(kāma guṇa)로 인한 소-마낫사 웨-다나-(sōmanassa vēdanā)를 경험할지라도, 아라한은 그 ‘기분좋은/감각 느낌’에 들러붙지 않을 것입니다. -
* 그러므로, 아라한(Arahant)이 꿀맛을 느낄지라도 더 어떤 갈망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아라한(Arahant)은 세간의 어떤 즐거운 것(시각 대상, 소리, 냄새, 맛, 및 신체 접촉)도 미래 고통(괴로움)으로 이어질뿐임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갈망을 순전히 의지력만으로는 억누를 수 없고 억압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 이해는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 이후에 옵니다.
‘까-마 구나’로 인한 인한 ‘웨다나-’는 ‘사-미사 웨다나-’다
6. 까-마 구나(kāma guna)로 인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그 웨-다나-(vēdanā)들을 칭하는 특별한 명칭이 있습니다. 그 명칭은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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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미사(sāmisa)라는 낱말은 ‘감각 세상과 관련된’ 또는 ‘까-마 로-까(kāma lōka)’를 뜻하는 ‘아-미사(āmisa)’라는 키워드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미사 수카 웨-다나-(sāmisa sukha vēdanā)는 까-마 로-까(kāma lōka)의 특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을 의미합니다. -
* 보통 사람뿐만 아니라 아라한(Arahant)도 비슷한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를 경험할 것입니다. 까-마 로-까(kāma lōka)의 모든 감각 사건은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입니다. 아래에서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의 유형에 대해 간략하게 논의하겠습니다. -
* 우리는 최초의 윈냐-나(viññāna)(짝쿠, 소-따, 가-나, 지와-, 까-야 윈냐-나)가 위빠-까(vipāka)로 인해 일어났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들과 관련된 위빠-까 웨-다나-(vipāka vēdanā)는 우뻭카- 웨-다나-(upekkhā vēdanā)입니다. (유일한 예외는 ‘까-야 윈냐-나_kāya viññāna’로, 이것은 dukkha, sukha, 또는 adukkhamasukha vēdanā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
* 이러한 위빠-까 웨-다나-(vipāka vēdanā)에 바로 뒤이어서 까-마 구나(kāma guna)가 작용하고,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가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
*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가 일어난 이후에만 “띤낭 상가띠 팟소, 팟사 빳짜야- 웨다나-(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 paccayā vedanā)”가 작용합니다.
‘까-마 라-가’는 ‘사-미사 웨다나-’에 들러붙게 된다
7. 인간 세계에는 유혹하는 광경, 소리, 맛, 냄새, 및 신체적 편안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들은 까-마(kāma)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까-마 구나(kāma guna)입니다. 그들에게 들러붙고 까-마 상깝빠(kāma saṅkappa)(와찌 상카-라 또는 위딱까/위짜-라)를 기르는 것이 까-마(kāma)(그리고 ‘까-마 라-가_kāma rāg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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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닙베디까 숫따(Nibbedhika Sutta, AN 6.63)에는 “상깝빠 라-고- 뿌리삿사 까-모-, 네떼 까-마- 야-니 찌뜨라-니 로-께-..(Saṅkappa rāgō purisassa kāmō, Nete kāmā yāni citrāni lōkē..)”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역: “사람의 까-마(kāma)는 이 세상에 있는 그 즐거운 것들(citrāni lōkē)에 들러붙게 되어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아름다운 것들은 까-마(kāma)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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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까-마 구나, 까-마, 까-마 라-가, 까-막찬다’ 포스트를 적극 추천합니다. 거기에는 이 개념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더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삼팟사 자- 웨다나-’와 ‘사-미사 웨다나-’의 차이
8. 이제 우리는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edanā)와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 사이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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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는 아라한(Arahant)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입니다. 그것들은 설탕의 달콤함이나 향수와 같은 기분 좋은 냄새입니다. -
* 반면에,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edanā)는 매우 개인적입니다. 그것들은 아라한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이 얼마나 강하게 일어나는지는 자신의 가띠(gati)와 특정 아-람마나(ārammana)에 달려 있습니다. -
* 우리는 또한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 때문에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edanā)가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들이 유혹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감각 입력에 들러붙게 됩니다. 그 매혹적인 광경, 소리 등에서 ‘숨겨진 고통(괴로움)’을 보지 못하는 한,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한 갈망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
*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게 되는 것이 ‘탕하-(taṇhā)입니다. 사람들은 탐함, 성냄, 및 무지를 통해 들러붙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논의해 보겠습니다.
땅하- - 탐함, 성냄, 무지를 통해 들러붙게 됨
9. 까-마 로-까(kāma lōka)에는 ‘유쾌하고 유혹적인 것’이 있는 것과 같이, ‘불쾌한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썩은 음식은 맛이 끔찍하고, 우리는 시끄럽거나 고강도의 소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감각 입력(ārammana, 아-람마나)에 접하게 될 때 사-미사 둑카 웨-다나(sāmisa dukkha vēdanā)를 생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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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에게도 ‘들러붙게’ 됩니다. 우리는 쏘는 맛의 음식이나 거친 소음에 대해 불평하고 그것들을 피하는 행동을 할지도 모릅니다. -
* 그렇기 때문에 땅하-(taṇhā)는 탐함 또는 성냄을 통해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것들의 진정한 특성을 모르는 무지로 인해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게 됩니다. ‘땅하-, 탐함과 미워함과 미혹함을 통해 어떻게 들러붙는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우리는 사-미사 수카 웨-다나-(sāmisa sukha vēdanā)와 사-미사 우뻭카- 웨-다나-(sāmisa upekkhā vēdanā)로 인해 탐함과 무지를 통해 들러붙게 됩니다. 모두가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를 느끼지만, 모두가 동일한 식으로 사-미사 웨-다나-(sāmisa vēdanā)를 통해 들러붙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삼팟사 자- 웨다나-’는 각자의 가띠와 특정 아-람마나에 의존
10. 우리는 이미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edanā)가 어떻게 각자의 성향/습관(gati, 가띠) 및 특정 아-람마나(ārammana)로 인해 일어나는지는 논의했습니다. ‘감각 사건에서 위빠-까 웨-다나-와 삼팟사 자- 웨-다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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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은 (업 결과가 없는 것외에는) 어떤 가띠(gati)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탕하-(taṇhā)를 생성하지 않으며, 따라서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edanā)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
* 다른 모든 이들은 다양한 방식과 다양한 레벨로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는지는 그 특정 아-람마나(ārammana)와 그 사람의 가띠(gati)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은 시끄러운 음악을 좋아하는 반면에, 나이든 어른들은 그런 음악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음식, 냄새, 섹스 등의 각 범주에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들러붙습니다. -
* 나쁜 아-람마나(bad ārammana)를 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도하게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교제한다면 그런 활동에 말려드는 것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
* 동일한 식으로, 이미 좋은 가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좋은 습관 (가띠, gati)을 기르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좋은 아-람마나(ārammana)’를 접하게 됩니다.
요약
11. 지금까지, ‘차착까 숫따(Chachakka Sutta, MN 148)’에 따라 감각 입력이 들어올 때 사건의 진행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예를 들어 외부 것이 아-람마나(ārammana)일 때, 일련의 사건은 ‘착쿤짜 빠띳짜 루-뻬 짜 웁빳자-띠 짝쿠윈냐-낭(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ñāṇaṃ)’으로 시작합니다. 그 초기 단계에서 그것은 단지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na)입니다. ‘아-야따나 사이의 접촉이 위빠-까 윈냐-나로 이어진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포스트에서 우리는 “짝쿤짜 빠띳짜 루-뻬 짜 웁빳자-띠 짝쿠 윈냐-낭, 띤낭 상가띠 팟소, 팟사 빳짜야- 웨다나-(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 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 paccayā vedanā)”의 진행 과정을 논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단계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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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아-람마나(ārammana)(이 경우에는 시각 대상)는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na)로 각자의 시선을 사로 잡습니다. 이 경우, 그것은 짝쿠윈냐-나(cakkhuviññāṇa)입니다. -
* 즉시, 까-마 구나(kāma guna)가 작용하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대상이라면 각자는 사-미사 수카 웨-다나-(sāmisa sukha vēdanā)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든 아라한이든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
* 그 다음, 위 구절의 다음 부분인 “띤낭 상가띠 팟소, 팟사 빳짜야- 웨다나-(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 paccayā vedanā)”가 순식간에 마음에 일어납니다. 자신의 ‘산 가띠(san gati)’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특정 유형의 대상에 들러붙는 경향이 있다면, 그 대상에 들러붙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싫어하는 대상이라면, 사-미사 둑카 웨-다나-(sāmisa dukkha vēdanā)를 일으키고 여전히 혐오나 분노로 들러붙을 것입니다. -
* 이제, 또 다른 보통 사람은 어떤 식으로도 들러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특정 아-람마나(ārammana)가 자신의 ‘타입’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 사람은 그것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라한(Arahant)은 어떤 아-람마나(ārammana)에도 (좋아함, 싫어함, 또는 무지를 통해) 들러붙지 않습니다.
다음 포스트
12. 이것(위 요약)을 다루기 위해 몇 개의 포스트가 필요했지만, 필자는 이들 기본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숫따(sutta)의 나머지 부분을 모두 보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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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논의에서 또 다른 중요한 것은 그 감각 사건이 각각 분리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들은 연속적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은 한 번에 하나의 아-람마나(ārammana)를 처리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몸 감촉을 느끼는 것을 모두 동시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
* 다음 포스트에서, 우리는 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을 논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