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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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냐- ㅡ 우리의 모든 생각은 '왜곡된 산냐-'와 함께 일어난다

 

원문: ‘Is There A Self?’ 섹션의 ‘ Saññā – All Our Thoughts Arise With “Distorted Saññā” ’ 포스트

 

'산냐-(saññā vipallāsa)'는 붓다 담마에서 매우 중요한 정신 실체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왜곡된 산냐-’와 함께 일어나며, 그것은 괴로움 없는 ‘순수한 마음’, 즉 빠밧사라 찟따(pabhassara citta)를 감추게 합니다. 

 

2023년 11월 4일 작성

 

산냐-의 기본 정의 ㅡ 식별/인식하다

 

1. 산냐-(saññā)의 기본 개념은 ‘Mahāvedalla Sutta (MN 43)’의 다음 구절에 있는데, “‘Sañjānāti sañ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saññāti vuccati. Kiñca sañjānāti? Nīlakampi sañjānāti, pītakampi sañjānāti, lohitakampi sañjānāti, odātampi sañjānāti,”로서, 링크 사이트에는 “그것이 인식하기 때문에 인식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인식하는가? 그것은 푸르고, 붉고, 희다고 인식한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 * 그것이 ‘산냐-’의 기본 정의며, 그곳의 번역은 그 문맥에서 올바릅니다.

  • * 그 정의는 또한 색 뿐만 아니라 불, 집, 또는 존(John)처럼 이름과 관련된 사람과 같은 낱말의 의미를 인식하기 위한 대상에 대한 친숙도 포함합니다.

  • * 이 기본 개념은 ‘산냐-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에 논의되어 있는데, 읽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 * 아라한은 그들이 ‘아라한과 사마-디(Arahant-phala samādhi)’에 들어 있을 때 이 유형의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산냐-’를 가집니다. 

 

대부분의 숫따에 나타나는 더 깊은 의미

 

2. 그러나, 아라한 아래에 있는 유정체의 산냐-는 아누사야/상요자나(또는 각인된 오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로 인한 오염된 산냐-(defiled saññā)와 함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찟따-들(cittās)(대략적으로 생각들로 번역됨)은 ‘오염된 산냐-’와 함께 일어납니다.

 

  • * 또 달리 말하면, 아라한 단계 아래의 모든 이들에게 아-람마나(ārammaṇa)(감각 입력)는 산자-나-띠(sañjānāti)(오염된 산냐-와 함께 인식함)와 해당하는 위자-나띠(vijānāti)(오염된 인식)과 함께 이해됩니다.

  • * 그러나, 막가 팔라와 함께 성스런 길에서 진전하면, 점점 더 많은 아-람마나가 산자-나-띠와 위자-나띠 대신에 빠자-나띠(pajānāti) 또는 아비자-나-띠(abhijānāti)와 함께 이해됩니다. 그것은 아누사야/상요자나의 일부가 막가 팔라(도과)로 약해지거나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 * 이제, 우리는 그런 오염을 논의하기 전에, 또다른 결정적인 점을 말할 필요가 있는데,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가 일어나는 것은 까-마 로까(kāma loka)에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라한에게도 일어나는데, 그것은 오염된 것이 아니라 왜곡되었을 뿐입니다.

 

왜곡된 산냐-

 

3. 더욱이,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는 까-마 로까에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자동적으로 일어나므로, 그것은 다섯 감각 기능을 통해 감각 입력을 경험하는 아라한에게도 (즉, 그들이 사마-빳띠에 들어있지 않는 한) 일어납니다.

 

  • * 우리 모두는 웁빳띠 바왕가(uppatti bhavaṅga)로 태어납니다. 그것은 이 인간 바와의 처음에 움켜잡은 마음 성향(mindset)입니다. 그것은 아라한과(Arahanthood) 후에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 * 마음이 휴면 상태라면(즉, 잠자는 동안과 같이 아-람마나를 활발히 구하지 않는다면), 그 웁빳띠 바왕가로 되돌아갑니다. 아-람마나가 마음에 들어오면, 일련의 찟따(찟따 위티)가 웁빳띠 바왕가에 기반하여 일어납니다.

  • * 이것이 바로 마음이 자동적으로  왜곡된 산냐-(saññā)와 함께 아-람마나를 아는 이유입니다.

  • 필자는 곧 있을 포스트에서 이것을 더 논의하겠지만, ‘바와와 바왕가 - 알기 쉽게 설명됨!’ 포스트를 복습해 보면 좋습니다.

 

오염된 산냐-

 

4. 문제는 (감각 입력, 즉 아-람마나를 접하여)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감촉하거나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만약 마음이 그것을 관심있는 것으로 인식하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것에 들러붙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 그 들러붙음은 위 #3에서 논의된 왜곡된 산냐-에 기반됩니다. 아라한도 그 왜곡된 산냐-를 생성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마음에서 모든 아누사야/상요자나를 제거했기 때문에 그것에 들러붙지 않습니다. 아라한 단계 아래의 모든 이들에게는 특정한 감각 입력에 따라, 그 왜곡된 산냐-는 자동적으로 오염된 산냐-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 최근에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와  ‘앗따또 사마누빳사띠 ㅡ 어떤 것을 가치있게 봄’ 포스트에서 논의된 구절들은 마음이 왜 세상 것들에 순간적으로 들러붙는지를 논의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에 유익할 수 있다는 각인된 잘못된 견해왜곡된 산냐-입니다.  그런 견해/산냐-는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구함으로써 괴로움(고통)을 극복하기를 바라면서, 재탄생 과정을 계속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라-가(rāga)의 기원입니다

 

잘못된 견해와 오염된 산냐-는 라-가로 이어진다   

 

5. (세상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극복하게 할 수 있다고) 우리 마음에 각인된 그 개념 때문에, 우리 마음은 찬다라-가(chandarāga)(‘chanda’는 ‘좋아함’을 의미함) 또는 단순히 라-가(rāga)를 생성하는데, 그것은 까-마 라가(kāma rāga), 루빠 라-가(rupa rāga), 아루빠 라-가(arupa rāga)라는 세가지 주된 유형일 수 있습니다. 그런 들러붙음을 묘사하는데 다른 낱말이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로-바, 라-가 및 까-막찬다, 까-마라-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 포스트의 #3에서 가리켜 보인 바와 같이, 라-가(rāga)의 올바른 빠다 니룻띠(pada nirutti, 어원)는 ‘라-(rā)’ + ‘악가(agga)’이며, 여기서, ‘라-(rā)’는 ‘(윤회 여정의) 여행’을 의미하고, ‘악가(agga)’는 ‘우선시하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라-가(rāga)’는 ‘(윤회 여정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문에 붓다께서는 세계를 까-마 라-가, 루빠 라-가, 및 아루빠 라-가가 각각 우세한 까-마 로까(kāma loka), 루빠 로까(rupa loka), 및 아루빠 로까(arupa loka)로 나누셨습니다.

  • * 세 가지 유형의 라-가(rāga) 모두 ‘산냐- 위빠라-사 ㅡ 왜곡된 인식’으로 [다시] 이어질 수 있습니다.

 

6. Saññā Sutta (SN 27.6)는 “Yo, bhikkhave, rūpasaññāya chandarāgo, cittasseso upakkileso”, 즉 “루빠 인식에 대한 갈망과 탐함찟따에 일어나는 오염이다”라고 기술합니다. 

 

  • * 그런 찬다라-가(chandarāga)는 소리, 냄새, 맛, 감촉(폿탑바, phoṭṭhabba), 또는 (마음에 직접 들어오는) 담마-(dhammā)일 수 있습니다.

  • * (찬다라-가를 통해) 그런 들러붙음에 기반하여, ‘Sañcetanā Sutta (SN 26.7)’에 기술된 바와 같이  ‘오염된 쩨따나’(산쩨따나-, sañcetanā)가 마음에 일어납니다. 링크 주소에서 “Yo kho, bhikkhave, rūpasañcetanāya uppādo”를 영어로 번역한 것은 “Mendicants, the arising of intentions regarding sights(시각 대상에 관한 의도).”입니다. 이것은 모든 곳에 평범한 의미를 기계적으로 삽입한 또다른 예입니다.

  • * 그 짧은 구절은 “빅쿠들이여(빅쿠들에게), 시각 대상에 관하여 오염된 의도가 일어난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 * 거기서, rūpasañcetanā (rūpa sañ cetanā)는 단순히 쩨따나-(cetanā)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산 쩨따나-(sañ cetanā)’, 즉 ‘오염된 쩨따나-(defiled cetanā)’를 가리킵니다. 알다시피, ‘산(sañ)’은 오염(원)을 가리킵니다. ‘산(San)이란 무엇인가? 상사-라(삼사-라)의 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산(sañ)’은 다른 철자로 쓰여질 수도 있다

 

7. 빠알리 낱말 산(sañ)은 다양한 낱말 조합에서 ‘san’ 또는 ‘saṅ’으로 라틴어 철자와 함께 쓰여질 수도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 * ‘Bhikkhaka Sutta (SN 7.20)’ 에서, “Saṅkhāya loke carati” 구절은 “(빅쿠는) 오염원을 줄여 없애는 일을 하며 세상에 산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산 카-야(saṅ khāya)’는 ‘우리 번뇌를 줄여 없애는’ 것을 의미합니다.  링크의 영어 번역문에서는 그 구절이 ‘그리고 세상을 자세히 살펴본 후 방황한다’로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한, ‘menditcant’는 일반적으로 ‘거지(begger)’를 의미하므로, ‘빅쿠(bhikkhu)’를 ‘menditcant’라고 번역하는 것은 무례한 것입니다. [빅쿠의] 실제 의미는 이 숫따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빅카띠(bhikkhati)가 ‘구걸하다’를 의미하지만, 숫따에서는 빅쿠가 다른 이들로부터 음식을 얻지만 왜 빅쿠를 거지로 칭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것들은 부적절한 의미가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사례들입니다.

  • * ‘카야(khaya)’는 ‘Dutiyakāla Sutta (AN 4.147)’의 개시 구절의 마지막 부분인 “.. āsavānaṁ khayaṁ pāpenti”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끝내는 또는 줄여 없애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 구절은 거기에 “.. 그들은 점차적으로 번뇌의 끝으로 이어진다. ”로 올바르게 번역되어 있는데, 거기서, ‘빠-뻰띠(pāpenti)’는 ‘이어진다’를 의미합니다. 

  • * 그러므로, ‘산 카-야(saṅ khāya)’는 ‘우리의 오염을 줄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람마나 ㅡ 감각 사건의 시작 

 

8. 감각 사건에서 산냐-(saññā)의 결정적 역할을 자세히 검토하려면, 우리는 과정의 처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마음이 6가지 감각 문 중의 하나를 통해 감각 입력(아-람마나)에 들러붙을 때, 그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 * 이 포스트와 함께 시작하여, 필자는 ‘자아가 있는가?’ 주 섹션 내에 ‘감각 경험 - 더 깊은 분석(Sensory Experience – A Deeper Analysis)’이라는 새로운 서브섹션에서 산냐-에 관련된 일부의 매우 중요한 문제를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필자는 또한 ‘자아가 있는가?’ 내의 서브섹션을 다음과 같이 재정리하였습니다.

  • * 새로운 서브섹션인 ‘감각 입력 - 더 깊은 분석(Sensory Experience – A Deeper Analysis)’ 앞에 두 개의 서브섹션이 있습니다.

  • * 첫 번째 서브섹션은 ‘아낫따는 자아를 지칭하는가?(Does 'Anatta' Refer To A 'Self'?)’ 입니다. 이 서브섹션은 ‘숨겨진 순수한 마음(빠밧사라 찟따, pabhassara citta)’에 대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 * 두 번째 서브섹션은 ‘감각 경험 ㅡ 붓다 세계관의 기초(Sensory Experience – Basis of Buddhā’s Worldview)’입니다. 이것은 감각 입력(아-람마나)을 받을 때 마음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일련의 기존 포스트들입니다. 이 서브섹션은 새로운 서브섹션에 대한 필요한 배경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또다른 섹션(‘생명의 기원’ 섹션에 있는 ‘붓다의 세계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아-람마나에 대한 반응 ㅡ 아라한, 세카, 및 뿌툿자나

 

9. 감각 입력(아-람마나)이 마음에 들어올 때, 아라한 대비 보통 사람(뿌툿자나)의 마음에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곧 있을 포스트에서 이것을 상세히 논의할 것이지만, 아래 숫따는 기본 개념을 제공합니다.

 

  • * ‘Upavāṇasandiṭṭhika Sutta (SN 35.70)’는 “Idha pana, upavāṇa, bhikkhu cakkhunā rūpaṁ disvā rūpappaṭisaṁvedī ca hoti rūparāgappaṭisaṁvedī ca” 라고 하는데, “우빠와나여, 눈으로 시각 대상을 보고, 또한 그 시각 대상에 대해 갈망을 생성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입니다.

  • * 여기서, 붓다께서는 (소따빤나 단계 이상이지만 아직 아라한이 아닌, 즉 ‘세카_Sekha’인) 빅쿠가 특정한 감각 입력에 들러붙은 경우를 말씀하십니다. 그 빅쿠는 그가 시각 대상을 본 것을 압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에 들러붙은 것(라-가를 생성)을 압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Santañca ajjhattaṁ rūpesu rāgaṁ ‘atthi me ajjhattaṁ rūpesu rāgo’ti pajānāti”인데, “그들은 그 시각 대상에 대한 갈망이 그들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는다(‘atthi me ajjhattaṁ rūpesu rāgo’ti pajānāti).”입니다. 여기서, ‘atthi me ajjhattaṁ’는 ‘나에게 일어났다’를 의미합니다.

 

10. 뿌툿자나(puthujjana)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할 것인데, 그들은 ‘rūparāgappaṭisaṁvedī’만 경험할 것입니다. 즉 그들은 볼 때, (대상이 관심있는 것이라면) 이미 들러붙어 있습니다.

 

  • * 구절에서, ‘rūpappaṭisaṁvedī’는 ‘rūpa paṭisaṁvedī’를 의미하고, ‘rūparāgappaṭisaṁvedī’는 ‘rūpa rāga paṭisaṁvedī’를 의미합니다. (들러붙음 없이) 단지 보는 것은  ‘rūpa paṭisaṁvedī’와 함께 발생하고, 들러붙음은 ‘rūpa rāga paṭisaṁvedī’와 함께 발생합니다. 

  • * 따라서, 아라한은 ‘rūpa paṭisaṁvedī’ 단계만 거치고, ‘rūpa rāga paṭisaṁvedī’ 단계는 거치지 않습니다.

  • * 세카(Sekha)(아라한 단계 아래의 성자)에게는 어떤 유형의 아누사야/상요자나가 남겨진 것에 따라, 그들은 ‘rūpa rāga paṭisaṁvedī’ 단계를 거칠 수도 있지만, 행한 후에는 알 것입니다. 마음챙김에 의해, 그들은 그것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멈추도록 노력합니다.

 

라-가 빠띠상웨디- ㅡ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11. 여기서 결정적인 점은 ‘rāga paṭisaṁvedī’라는 둘째 단계가 일어날 때, 그것은 ‘paṭisaṁvedī’라는 첫째 단계 후에 찰나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둘째 단계는 (아누사야 또는 상요자나가 아니라) 그 순간에 분명한 각자의 ‘오염된 가띠(defiled gati)’에 의해 결정됩니다

 

  • * 다음 예와 함께 그것을 이해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고요한 마음 상태에 있는 뿌툿자나(X)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X가  실수로 또다른 사람 Y를 화나게 하는 행위를 하고, Y가 X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가정해 보세요. Y로부터 화가 난 말을 들은 X는 고요한 마음 상태에 있었으므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고 해명하려 하지만, (어쨌든 좋지 않았던) Y는 X에게 계속 욕설을 하고 X를 밀칩니다.

  • * 그 동안에, X의 마음성향은 바뀌었습니다. 그의 마음 상태는 점차 나빠지고, 어느 시점에서 그는 ‘rāga paṭisaṁvedī’ 단계에 도달합니다. 이 특별한 경우에는 라-가(rāga)가 아니라, 도사(dosa) 또는 빠띠가(patigha)입니다.

  • * 그러나, X가 아라한이라면, 그의 마음성향은 Y가 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밀고, 심지어 때리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 * 세카(Sekha)라면, 반응은 X와 아라한의 반응 사이의 어떤 정도가 될 것입니다.

 

12. 필자는 ‘감각 경험 ㅡ 붓다 세계관의 기초(Sensory Experience – Basis of Buddhā’s Worldview)’ 서브섹션에서(특히 그곳의 두 번째 포스트에서 네 번째 포스트), 사건의 이 순서를 논의했지만 초기 단계(“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를 상세히 논의하지는 않았습니다. 

 

  • * 본질적으로,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ñāṇaṃ”는 ‘rūpa paṭisaṁvedī’ 단계고,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는 ‘rūpa rāga paṭisaṁvedī’ 단계입니다. ‘땅하-와 우빠-다-나 사이의 차이’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완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곧 있을 몇 개의 포스트에서 첫 번째 단계인 ‘rūpa paṭisaṁvedī’까지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는 그것을 결코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 * 곧 있을 포스트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된 섹션과 포스트들을 복습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 배경 자료들을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므로 포럼에서 주저하지 말고 질문해 주세요. 어떤 질문도 잘못된 질문이 아니며 질문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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