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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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빠야와 우빠-다-나 ㅡ 들러붙음의 두 단계

 

원문: ‘Is There A Self?’ 섹션의 ‘Upaya and Upādāna – Two Stages of Attachment’ 포스트

 

'우빠야(upaya)'는 마음이 감각 입력에 들러붙는 첫 단계입니다. 초기 들러붙음이 강하면, 이후의 우빠-다-나(upādāna) 단계로 들러붙음이 계속됩니다. 니밋따(nimitta)(감각 입력)는 우빠-다나 단계에 도달하면 (감각 입력에 들러붙은) 아-람마나(ārammna)가 됩니다. 

 

2023년 11월 11일 작성

 

영문 도표 다운로드/인쇄:Upaya and Upādāna

 

까-마 다-뚜와 까-마 바와 사이의 차이

 

1. 붓다께서는 이 차이를 ‘Sanidāna Sutta (SN 14.12)’에서, “Kāmadhātuṁ, bhikkhave, paṭicca uppajjati kāmasaññā, kāmasaññaṁ paṭicca uppajjati kāmasaṅkappo, kāmasaṅkappaṁ paṭicca uppajjati kāmacchando, kāmacchandaṁ paṭicca uppajjati kāmapariḷāho, kāmapariḷāhaṁ paṭicca uppajjati kāmapariyesanā.”로 묘사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까-마 다-뚜(kāma dhātu)에 들러붙음은 까-마 산냐-(kāma saññā)로 이어지고, 까-마 산냐-(kāma saññā)에 들러붙음은 까-마 상깝빠(kāma saṅkappa)로 이어지며, 까-마 상깝빠(kāma saṅkappa)에 들러붙음은 까-막찬다(kāmacchanda)로 이어지고, … 등으로 까-마 빠리예사나-(kāma pariyesanā)로 이어진다.”입니다. 

 

  • * 그 구절은 왜 아라한과 아나가미도 까-마 산냐-를 가지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단계는 라-가(rāga), 도사(dosa), 모하(moha), 즉 산(san)(‘sañ’ 또는 ‘saṅ’으로 대체하여 쓰기도 함)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까-마(kāma)는 앗사다(assada)(감각적 즐거움에 가치를 둠)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까-마 로까(kāma loka)에 연관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아래에서 논의됩니다.

  • * 그러나, 아라한의 마음은 그 구절의 나머지 단계인 까-마 상깝빠(kāma saṅkappa), 까-막찬다(kāmacchanda), 까-마빠릴라-하(kāmapariḷāha), 까-마빠리예사나-(kāmapariyesanā) 단계를 거치지 않습니다. 깜마(업) 에너지는 이 단계들에서 생깁니다.

  • * 그러나, 아라한/아나가미 단계 아래의 모든 이들의 마음은 들러붙어 자동적으로 까-마 상깝빠(kāma saṅkappa)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빠야(upaya)’ 단계입니다.

 

2. 그 아-람마나(ārammna)가 충분히 강하면, 마음은 그것에 반복적으로 들러붙음을 계속하여(초당 수많은 찟따 위티가 마음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상기하세요), 까-막찬다(kāmacchanda), 까-마빠릴라-하(kāmapariḷāha), 까-마빠리예사나-(kāmapariyesanā)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우빠-다-나(upādāna) 단계입니다.

 

  • * 강한 들러붙음은 까-막찬다(kāmacchanda) 단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동요되어 아-람마나(ārammaṇa)를 다급하게 추구하고자 하며(kāma pariḷāha), 그다음 까-마 빠리예사나-(kāma pariyesanā) 단계에서 최대의 즐거움을 추구(또는 방해를 피함)하기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pariyesanā’는 ‘조사하다/적극적으로 관여하다’를 의미합니다.)

  • * 위 도표는 그 단계를 요약하며, (앗잣따 까-야 / 바힛다 까-야, 뿌라-나 깜마 / 나와 깜마, 등과 같은) 핵심 개념을 가리킵니다. 앞으로 있을 포스트에서 그것을 논의할 것입니다. 이 차트를 인쇄하여 이 섹션의 어떤 포스트를 읽을 때를 준비해 보세요.

 

3. 위 구절에서 ‘까-마 다-뚜(kāma dhātu)에 들러붙음’은 ‘오염된 마음과 함께 들러붙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 몸’으로 살고 있는, 즉 ‘인간 영역에 살고 있는’ 결과를 의미합니다. 다-뚜(dhātu)는 일반적으로 개체의 ‘기본’ 초기 상태입니다.

 

  • * 그것은 바왕가(bhavaṅga) 개념과 함께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아라한은 인간 탄생시에 생성된 웁빳띠 바왕가(또는, ‘마음의 타고난 상태’)로 여전히 살아갑니다. 감각 입력(아-람마나)를 접할 때, 찟따 위티(citta vithi)는 그 웁빳띠 바왕가(uppatti bhavaṅga)로 시작하고, 초기 산냐-는 그 웁빳띠 바왕가에 따라 일어납니다. ‘바와와 바왕가 - 알기 쉽게 설명됨!’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바왕가 개념이 생소한 사람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라한은 까-마 다-뚜(kāma dhātu)에 있지만, 까-마 바와(kāma bhava)에 있지 않다는 사실만 명심하세요. 아라한들은 모든 세 가지 바와(까-마, 루빠, 및 아루빠 바와)에서 자유롭습니다(벗어났습니다).

  • * 감각 입력을 받을 때 마음에 [일어나는] 사건의 순서를 조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들러붙기 전’의 감각 입력이 니밋따(nimitta)입니다.

 

아라한은 까-마 다-뚜에 있지만 까-마 바와에 있지 않다

 

4. 아라한은 모든 세 가지 바와, 즉 까-마 바와(또는, 11가지 영역으로 된 까-마 로까), 루빠 바와(또는, 16가지 루빠-와짜라 브라흐마 영역으로 된 루빠 로까), 및 아루빠 바와(또는, 4가지 아루빠-와짜라 브라흐마 영역으로 된 아루빠 로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 * 그러나, 아라한은 까-마 바와(인간 영역)에 태어났으며, 따라서 육체가 죽을 때까지 까-마 다-뚜(kāma dhātu)에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산(san)(라-가, 도사, 모하)를 생성하지 않고 까-마 로까(인간 영역)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 * 감각 입력이 어떤 유정체에게 들어올 때, 마음은 세 가지 바와/로까- 중의 하나에서 시작합니다. 인간 또는 동물의 마음은 태어났을 때의 (까-마 다-뚜 내의) 해당하는 웁빳띠 바왕가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루빠-와짜라 브라흐마의 마음은 (루빠 바와 내의) 해당하는 웁빳띠 바왕가 상태에서 시작할 것이라는 등입니다.

 

까-마 다-뚜에서 까-마 바와로 전환은 깜마(상깝빠)를 필요로 한다

 

5. 이 초기 ‘까-마 다-뚜(kāma dhātu) 단계’에서 ‘까-마 산냐-(kāma saññā)’가 생성되는 것은 이미 까-마 바와(kāma bhava)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붓다께서 아래  Paṭhamabhava Sutta (AN 3.76)에서 설명하신 바와 같이, 까-마 바와((kāma bhava)에 이르기 위해서는 깜마(오염된 의도, 즉 산쩨따나-)가 일어나야 합니다. 까-마 산냐-의 생성은 바힛다 윈냐-나(bahidda viññāṇa) 단계에 있는 동안 까-마 바와(kāma bhava) 바로 전에 일어납니다. 아라한의 마음은 바힛다 윈냐-나(bahidda viññāṇa)를 넘어 앗잣따 윈냐-나(ajjhatta viññāṇa) 단계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 * ‘Paṭhamabhava Sutta (AN 3.76)’에서 “Kāmadhātuvepakkañca, ānanda, kammaṁ nābhavissa, api nu kho kāmabhavo paññāyethā”ti?”라고 말씀하시는데, “깜마가 일어나지 않으면(kammaṁ nābhavissa), 까-마 다-뚜에서 까-마 바와로 전환이 일어나겠는가?”라는 의미입니다. 대답은 “아닙니다.”입니다. 

  • * 그 깜마는 위 #1의  “kāmasaññaṁ paṭicca uppajjati kāmasaṅkappo” 단계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깜마는 (아비)상카-라로 행해지고, 상깝빠(saṅkappa)는 찟따 상카-라(citta saṅkhāra)를 의미합니다.

  • * #1의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까-마 상깝빠(kāma saṅkappa)의 일어남은 두 번째 단계에서 발생합니다. 관련된 단계를 주의 깊게 살펴보겠습니다.

 

까-마 다-뚜가 까-마 바와로 = 니밋따가 아-람마나로

 

6. 니밋따(감각 입력)는 마음과 연관된 아누사야/상요자나(anusaya/saṁyojana)의 유형에 따라 마음에 라-가(rāga), 도사(dosa), 또는 모하(moha)를 촉발시킬 것입니다. 그 니밋따가 붙잡히고/수용되면, ‘니밋딱가-히 호띠(nimittaggāhī hoti)’가 되고 그것이 아-람마나(ārammaṇa)입니다.

 

  • * 아라한의 마음은 니밋따(nimitta)에 들러붙지 않을 것입니다(“na nimittaggāhī hoti.”). 아라한 단계 아래의 모든 자들은 니밋따와 각자의 남아 있는 아누사야/상요자나(anusaya/saṁyojana)에 따라 니밋따를 붙잡거나 붙잡지 않을 것입니다. 

  • * 오염된 니밋따를 붙잡지 않는 비결은 감각 입력에 들러붙는 자신의 성향을 점차적으로 개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 훈육, 즉 ‘인드리야 상와라(indriya saṁvara)’를 기르는 것입니다. ‘Saṁvara Sutta (AN 4.14)’를 참조하세요.

 

7. 니밋따(감각 입력)가 들어올 때, 마음은 웁빳띠 바왕가(또는 ‘타고난 바왕가’)에서 벗어나 적어도 하나의 상요자나가 가능하게 되면 즉시 니밋따에 들러붙습니다.

 

  • * 아라한의 마음에는 어떤 상요자나도 없으므로, 어떤 니밋따도 붙잡지 않을 것입니다.

  • * 우리는 니밋따(nimitta)에 의해 생성된 웨다나-(vedanā)의 유형을 살펴보면 ‘가능한 들러붙음’에 대한 좋은 지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육체적 웨다나-만 실제적이다 ㅡ 다른 것들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8. ‘인간 마음의 오염 ㅡ 상세한 분석’ 포스트의 #6에 논의된 바와 같이, 육체적 느낌(사-리-리까 웨-다나-, sārīrika vēdanā)만이 육체가 느끼는 실제 웨다나-입니다. 그것들은 붓다께서도 경험하신 수카 및 둑카 웨다나-입니다.

 

  • * 다른 감각 문들에서는 육체적 수카 및 둑카 웨다나-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아둑카마숙카(adukkhamasukkha)(수카도 아니고 둑카도 아닌) 웨다나-로 들어옵니다.

  • * 위 사실은 아비담마에서 아주 분명한데, 육체를 제외한 모든 감각 문들(눈, 귀, 코, 혀, 마음)은 처음에 아둑카마숙카 웨다나-(adukkhamasukkha vedanā)를 생성합니다(참고 자료 1)

  • * 다른 감각 문을 통해 오는 니밋따는 그 영역에 따른 다양한 유형의 산냐-를 생성할 수 있으며, 그것들은 소마낫사(마음이 만든 즐거운)와 도마낫사(마음이 만든 즐겁지 않은) 웨다나-를 일으킵니다.

  • * 예를 들어, 인간은 썩은 고기의 끔찍한 맛과 역겨운 냄새를 경험합니다. 돼지에게는 그 반대입니다! 맛과 냄새 모두 순전히 산냐-와 함께 생성됩니다. 그러나 인간과 돼지는 다치면 동일한 둑카 웨다나-를 경험합니다. 육체 접촉만 실제 둑카 및 수카 웨다나-로 이어집니다

  • * 까-마 로까에서 다양한 영역의 다양한 유정체의 마음은 그 영역에 해당하는 가띠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산냐-를 생성하도록 선천적으로 세팅됩니다. 따라서, 썩은 고기 또는 배설물에 대한 돼지의 산냐-와 인간의 산냐-는 정반대입니다. 돼지는 소마낫사 웨다나-를 생성할 것이고, 인간은 도마낫사 웨다나-를 생성할 것입니다. 아라한들은 (평범한 사람과 같이) 썩운 고기에 대해 동일하게 불쾌한 산냐를 가지지만, 도마낫사 웨다나-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아라한은 부상으로 육체적 둑카 웨다나-를 경험하지만, (보통 사람과는 달리) 그  때문에 도마낫사 웨다나-를 생성하지는 않습니다.  

 

니밋따는 아-람마나로 전환한다

 

9. 어떤 감각 입력과 웁빳띠 바왕가에 기반하여, 마음은 아라한이 아니라면 특정한 오염 상태(빤쭈빠다낙칸다)에서 시작합니다. 보통 사람이 감각 입력에 강하게 들러붙지는 않을지라도, 왜곡된 산냐-가 자동적으로 생성되는데, 그 이유는 아닛짜 특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하겠습니다.

 

  • * 그러므로, (아라한의 마음 외의) 모든 마음은 그 마음과 연관된 잘못된 견해와 오염된 산냐-로 인해 시작부터 어느 정도 오염됩니다. 따라서, 괴로움 없는 순수한 마음(빠밧사라 찟따)은 항상 숨겨져 있습니다. 필자는 앞서 별도의 섹션에서 이에 대해 논의했으며, ‘자아가 있는가?’ 주 섹션 아래에 ‘괴로움 없는 순수한 마음을 회복(Recovering the Suffering-Free Pure Mind)’ 서브섹션을 만들어 관련 포스트들을 추출해 놓았습니다.

  • * 다시 말해서, 모든 들러붙음은 빤쭈빠다낙칸다(pancupadanakkhandha)에 대한 것이며, 결코 빤짝칸다(pancakkhandha)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 * 감각 입력이 아-람마나가 된 후에 사건의 순서는 ‘감각 경험 ㅡ 붓다 세계관의 기초(Sensory Experience – Basis of Buddhā’s Worldview)’ (‘담마와 과학’ 섹션의 ‘생명의 기원’ 서브섹션에서 발췌함) 서브섹션에서 논의되었습니다.

  • * 현재의 새로운 서브섹션인 ‘감각 경험 - 더 깊은 분석(Sensory Experience – A Deeper Analysis)’에서, 우리는 니밋따가 어떻게 아-람마나가 되는지를 논의합니다(그것은 ‘까-마 다-뚜’에서 ‘까-마 바와’로 전환되는 것과 같습니다).

  • * 재 배열된 ‘자아가 있는가?’ 주 섹션에 있는 흐름을 따라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10. 필자는 ‘’ 섹션의 ‘괴로움 없는 순수한 마음을 회복(Recovering the Suffering-Free Pure Mind)’ 서브섹션에서 이 포스트에 있는 개념의 일부를 논의했습니다. 특히,  ‘인간 마음의 오염 ㅡ 상세한 분석’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필자는 위 논의에 따르도록 그 포스트의 주 도표를 [다음과 같이] 약간 개정하였습니다.

영문 도표 다운로드/인쇄:Contamination of Mind from Kāma Dhātu Stage – 2

 

우빠야는 까-마, 루빠, 또는 아루빠 바와로 태어남을 의미한다

 

11. 이 세상의 31 영역은 세 가지 ‘바와(bhava, 존재)’, 즉 까-마 바와, 루빠 바와, 및 아루빠 바와로 나누어집니다.

 

  • * 까-마 바와(kāma bhava)에 태어난 모든 이들의  마음은 보통 까-마 다-뚜(kāma dhātu)의 감각 입력에 의해 촉발됩니다. 따라서, 아라한의 마음도 (오염되지 않은) 까-마 다-뚜(kāma dhātu) 단계에서 시작합니다. ‘오염된 산냐-(defiled saññā)와 함께 감각 입력에 들러붙은 후에만 마음은 ‘까-마 바와(kāma bhava)’단계에 도달합니다.

  • * 또 다른 예로, 루빠-와짜라 브라흐마(rupāvacara Brahma)의 마음은 ‘루빠 다-뚜(rupa dhātu)’ 단계에서 시작합니다.  ‘오염된 루빠 산냐-(defiled rupa saññā)에 들러붙은 후에만 그 마음은 ‘루빠 바와(rupa bhava)’에 도달합니다.

  • * 유사하게, 아루빠-와짜라 브라흐마(arupāvacara Brahma)의 마음은 ‘아루빠 다-뚜(arupa dhātu)’ 단계에서 시작합니다.  ‘오염된 아루빠 산냐-(defiled arupa saññā)에 들러붙은 후에만 그 마음은 ‘아루빠 바와(arupa bhava)’에 도달합니다.

  • * 이것은 ‘Paṭhamabhava Sutta (AN 3.76)’에 분명하게 설해져 있습니다.

 

12. 더욱이, 각 바와(bhava) 내에서, 유정체는 자신이 태어난 가띠(또는 ‘웁빳띠 바왕가’)에 따라 자신의 독특한 바와에 들어갑니다.

 

  • * 예를 들어, 사람과 돼지를 생각하면, 모두 까-마 바와(kāma bhava)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부류는 서로 매우 다른 가띠(또는 ‘웁빳띠 바왕가’)를 가집니다. 

  • * 그러므로, 배설물의 더미를 보고, 돼지의 마음은 자동적으로 좋아하는 산냐-가 되고, 소마낫사(마음이 만든 즐거운) 웨다나-가 일어납니다.

  • * 아라한과 뿌툿자나(보통 인간)는 인간 바와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배설물의 무더기를 보고, 모두 즐겁지 않은 산냐-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도마낫사(마음이 만든 괴로운) 웨다나-는 그 마음이 배설물 더미를 자동적으로 싫어하는 보통 인간에게만 일어납니다. 아라한은 인간 바와로 태어났지만, ‘인간 바와’ 또는 ‘모든 바와’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소마낫사 또는 도마낫사와 함께 하는 들러붙음은 아라한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 * 달리 말하면, 아라한의 마음은 까-마 다-뚜(kāma dhātu) 단계에는 도달하지만, 까-마 바와(kāma bhava) 단계에는 결코 도달하지 않습니다

  • * 필자는 요점을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것을 반복했습니다. 사띠빳타나 숫따(Satipaṭṭhana Sutta)를 완전히 이해하고 또한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와 아닛짜(anicca) 본질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면, 이 개념들을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참고 자료

 

1. ‘Bhikkhu_Bodhi-Comprehensive_Manual_of_Abhidhamma’ (2000년, Bhikkhu Bodhi 저); 링크를 클릭하여 pdf 파일을 열어 내려 받을 수 있습니다. P114의 ‘Chapter III’를 참조하세요. 여기서는, 오직 수카와 둑카 웨다나-만이 육체를 통해 생성됩니다. 모든 다른 것은 산냐-에서 일어나는 마음에 의해 생성된 소마낫사 및 도마낫사 웨다나-로 이어지는 데, 그 부분은 거기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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