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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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생이란 무엇인가? - 생명 흐름의 개념

     

    원문: Paṭicca Samuppāda 섹션의 ‘What Reincarnates? – Concept of a Lifestream’ 포스트

    2016년 8월 3일 개정; 2021년 2월 8일 재작성; 2021년 2월 14일 개정; 2022년 8월 7일 개정

     

    환생 대 재탄생

     

    1. 환생은 힌두교 개념으로, 거기서 ‘아-트마(ātma) 또는 영혼(soul)은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리그베다(Rigveda)는 그것을 낡은 옷을 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는 사람에 비교합니다. ‘삭까-야 딧티 ㅡ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서는 환생하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재탄생입니다. 우리는 산사라(sansara, 윤회)를 통한 긴 여정에서 다양한 ‘습관’과 ‘캐릭터(‘가띠’라고 함)’를 포함하는 많은 깜마 씨앗(kamma seed, kamma beeja)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것들은 다른(다양한) 유형의 재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상카-라, 깜마, 깜마 삐-자, 깜마 위빠까’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이 인간 존재의 끝에서, 현생을 유지하는 깜마 씨앗의 업 에너지는 소진됩니다.  그 순간 새로운 생이 새로운 강한 깜마 씨앗으로 시작됩니다. 새로운 씨앗의 선택은 그 자체가 복잡한 과정이며 이용 가능한 깜마 씨앗의 효력에 달려 있지만, 그것은 한 ‘생각-순간(thought-moment)’에 일어납니다.

    • * 중생에 대해 붓다께서 묘사하신 것을 먼저 요약해 보겠습니다. 다음 사실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백합니다.

     

    상사-라(재탄생 과정)는 인식가능한 시작이 없다

     

    2. 삼마삼붓다 깨달음에 이른 날 밤에, 붓다께서는 전생들의 재탄생 과정을 뒤돌아보셨습니다. 붓다께서는 불과 몇 순간에 수많은 겁을 뒤돌아보실 수 있었지만, 아무리 멀리 뒤돌아보아도 ‘시작’을 볼 수 없으셨습니다. 붓다께서는 재탄생 과정의 상상할 수 없이 긴 시간을 나타내기 위해 많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 * 예를 들어, 앗수 숫따(‘Assu Sutta, SN 15.3’)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빅쿠들이며, 이 재탄생 과정은 그 시작이 인식(식별)가능하지 않다(na pannāyati, 나 빤나-야띠). 존재(중생)는 그 마음이 무지로 덮이고 갈망의 족쇄로 이 재탄생 과정에 묶여 있다.”

    • * 예를 들어, 나카시카 숫따(‘Nakhasikha Sutta, SN 20.2’)에 다음과 같이 언급된 것처럼,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그 모든 재탄생들 중에서 매우 드뭅니다. “빅쿠들이여,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중생는 손톱에 있는 이 약간의 모래만큼 적다. 그러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이 거대한 땅(지구)에 있는 모래만큼 많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재탄생 과정의 이 고통/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지체하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 * 더 자세한 내용은 ‘인간영역에 재탄생하는 기회를 붓다께서 묘사하신 방법’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생명 흐름의 개념

     

    3. 붓다께서는 재탄생 과정을 겪는 중생을 묘사하기 위해 ‘삿따(satta)’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삿따 숫따(‘Satta Sutta, SN 23.2’)에서 라-다(Rādha) 존자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 그들은 이것을 ‘지각있는 존재(중생, sentient being)’라고 부릅니다. 지각있는 존재(중생)는 어떻게 정의됩니까?”

     

    • *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라-다여, 좋아함(찬다, chanda), 강하게 좋아함(라-고, rāgo), 마음껏 즐김(난디-, nandī), 그리고 들러붙는(땅하-, taṇhā) 경향이 있을 때, ‘갈망들이 있는 유정체’(삿따, satta)를 말할 수 있다.” 빠알리 낱말인 삿따(satta) 그 자체는 ‘들러붙는(to attach)’을 의미합니다.

    • * 달리 말하면, ‘지각있는 존재(중생)’가 이 세상의 것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납니다. 인간, 동물, 천신(데와) 등으로 다양한 시기(때)에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어떤 존재를 (영혼과 같은) ‘변하지 않는 실체’로 연관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삿따(satta)는 인간처럼 행하고, 동물로 태어났을 때  그 삿따(satta)는 동물처럼 행하는 등입니다.

    • * 필자는 ‘삿따(satta)’를 묘사하는 영어 낱말로 ‘lifestream(생명 흐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지각있는 존재(sentient being, 중생)’라는 용어가 삿따(satt)를 지칭하는 것으로 더 적합합니다. 그 반면에, ‘생명 흐름(lifestream)’는 삿따(satta)가 상사-라(Saṃsāra)에서 겪는 전체 과정을 지칭합니다.

    • * 주어진 생명 흐름(lifestream)은 재탄생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핵심’이나 ‘영혼’이나 ‘아트만’이라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 반면에, 그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 한, 재탄생 과정에 있는 삿따(satta)가 있습니다(또는 재탄생 과정에 삿따가 있습니다).

     

    보디삿따는 특별한 삿따다

     

    4. 고따마 부처님은 모든 다른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동안 붓다가 되기 위해 불굴의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그 노력 과정이 충분하게 되었을 때, 수많은 겁 전에 디빵까라(Deepankara) 부처님에 의해 ‘보디삿따(Bodhisatta, 보살)’로 선언되셨습니다.

     

    • * 보디삿따(Bodhisatta, 보살)는 붓다(Buddha)가 되기로 되어 있는 특별한 삿따(satta)입니다. ‘보디(bodhi)는 ‘해방/벗어남을 향하여’를 의미합니다. 붓다가 되기 위한 충분한 빠라미따-(paramitā, 바라밀)을 삿따(satta)가 충족하였을 때, 그 삿따는 기존의 붓다에 의해 ‘보디삿따(Bodhisatta)’라고 선언됩니다. ‘빠-라미따-와 니야따 위와라나 ㅡ 신화인가 실화인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보디삿따(Bodhisatta, 보살)가 된 후에도 동물로는 태어날 수 있습니다(그러나 ‘아빠-야-_apāyā’의 다른 3 영역에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 * 그러므로, 중생(sentient being)은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만 주어진 바와(bhava)에 태어납니다. 그것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 묘사되어 있으며,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로 시작하고 '바와 빳짜야- 자-띠(bhava paccayā jāti)' 및 ‘자-띠 빳짜야- 자라-, 마라나, 소까ㅡ빠리데-와ㅡ둑카ㅡ도-마낫수빠-야사- 삼바완’띠(jāti paccayā jarā, marana, soka-paridēva-dukkha-dōmanassupāyasā sambhavan'ti)’로 끝납니다.

    • * 그 전체 과정에서 ‘특별한/특정한 존재’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 존재 내에서 미래 존재(bhava, 바와)와 태어남(jāti, 자-띠)은 아윗자-(avijjā)로 행해진 과거 깜마(saṅkhāra, 상카-라)에만 의존합니다!

     

    삿따 상태를 초월하여 뿍갈라 단계에 도달한다

     

    5. 다른 모든 중생들(sattā, 삿따-)은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참된 제자(아리야, Ariya)로부터 그것(재탄생 과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하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삿따(satta) 상태’를 극복합니다.

     

    • * ‘satta’는 ‘saththa’로 발음된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초기 유럽 학자들이 채택한 '띠삐따까 영어' 규약 ㅡ 제1부’를 참조하세요.

    • * 예를 들어 빠타마뿍갈라 숫따(‘Paṭhamapuggala Sutta, AN 8.59’)에 설명된 것과 같이 8 부류의 아리야(Ariya, 성자)들이 있습니다.

    • * 그 성자들은 “소따-빤노, 소따-빳띠팔라삿치끼리야-야 빠띠빤노(소따-빤나 아누가-미), 사까다-가-미-, 사까다-가-미팔라삿치끼리야-야 빠띠빤노(사까다-가-미 아누가-미), 아나-가-미-, 아나-가-미팔라삿치끼리야-야 빠띠빤노(아나-가-미- 아누가-미), 아라하-, 아라핫따-야 빠띠빤노(아라한뜨 아누가-미). (Sotāpanno,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sotāpanna anugāmi), sakadāgāmī, sakad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sakadāgāmi anugāmi), anāgāmī, an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anāgāmī anugāmi), arahā, arahattāya paṭipanno (arahant anugāmi).)”입니다.

    • * 또 다른 특별한 삿따(satta)는 자신의 노력으로 ‘삿따(satta) 상태’를 극복합니다. 그것은 빳쩨까 붓다(Pacceka Buddha)입니다. 빳쩨까 붓다(Pacceka Buddha)는 고따마 붓다(Buddha Gotama)와 같은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가 되기 위한 모든 빠라미따-(paramitā)를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빳쩨까 붓다(Pacceka Buddha)는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처럼 담마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빳쩨까 붓다(Pacceka Buddha)가 재세하는 동안에 닙바-나(Nibbāna)를 얻을 수 있는 삿따(satta)들은 많지 않습니다.

     

    모든 삿따들은 재탄생 과정에 갇혀 있다

     

    6. 그러므로,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중생은 재탄생 과정에 갇혀 있습니다.

     

    • * 그들은 모두 ‘삿따(satta)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래에 아빠-야-(apāyā, 사악처)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 * 그 31영역 중 어느 영역에서든 삿따(satta)의 생명흐름(lifestream)은 재탄생 과정(윤회)에 머무르는 것의 결실없음과 위험이 이해될 때까지 끊임없이 흐를 것입니다.

    • * 그 위험은 재탄생 과정에서 대부분의 태어남이 사악처(apāyā, 아빠-야-)에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 #3에서 ‘삿따(satta)’를 설명하는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라-다여, 좋아함(찬다, chanda), 강하게 좋아함(라-고, rāgo), 마음껏 즐김(난디-, nandī), 그리고 들러붙는(땅하-, taṇhā) 경향이 있을 때, ‘갈망들이 있는 중생’(삿따, satta)을 말할 수 있다.” 

    • * 붓다께서는 중생을 ‘세상의 즐거움’에 들러붙어 있는 자로 언급하셨습니다.

     

    삿따 숫따의 나머지

     

    7. 라-다(Rādha) 존자에게 ‘삿따(satta)’의 의미를 설명하신 후, 붓다께서는 그 중생들이 왜 상상할 수 없는 고통(괴로움)으로 가득한 재탄생 과정에 갇혀 있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다음은 숫따 센트럴(Sutta Central)에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입니다(필자의 수정부분은 굵은 글씨와 밑줄로 표시됨).

     

    “어떤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가 모래성을 만들며 놀고 있다고 가정해 보라. 그 아이들은 그 모래성에 대한 탐함, 바람, 좋아함, 목마름(갈증), 열정, 및 갈망을 없애지 않는 한,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환상하고, 귀중하게 간직하고, 자신들의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라면, 그 쓸모없는 모래성에 대한 탐함, 바람, 좋아함, 목마름(갈증), 열정, 및 갈망을 제거한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이 손수 그것들(모래성들)을 흩뜨리고 부수고 해체하여 그것들과 놀 수 없게 되도록 한다.

     

    같은 식으로, 그대는 이 세상에 있는 마음을 기분좋게 하는 것들에 대한 욕망(바람)을 흩뜨리고 부수고 해체하고 그것들을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갈망이 끝나도록 수행해야 한다. 그대는 … 느낌 … 지각(인식) … 상카-레(saṅkhāre) … 윈냐-낭(Viññāṇaṃ)에 대한 욕망을 흩뜨리고 부수고 해체하여 그것들과 놀 수 없게 되도록 해야 한다. 라-다여, 닙바-나(Nibbāna)는 땅하-(taṇhā)의 제거다(땅학-카요 히, 라-다, 닙바-난’띠, taṇhākkhayo hi, rādha, nibbānan’ti).”

     

    모래성을 쌓고자 하는 욕망을 극복하는 것

     

    8. 따라서, 붓다께서는 ‘삿따(satta) 상태’에 있는 모든 유정체들의 거동(행위)을 해변에서 모래성을 만들며 즐기는 어린 아이들에 비교하셨습니다. 무지(avijjā)로 인해 그들은 모래성을 만들며 즐기는 것의 부질없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 *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실제 가르침(사성제/빠띳짜 사뭅빠-다/띨락카나)을 듣고 이해할 때까지, 이 세상에서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것의 부질없음과 위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모래성을 짓는 아이들은 시간을 낭비할 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삿따(satta)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아빠-야-(apāyā)에 재탄생하는 길을 닦습니다.

    • * 이 세상의 참된(진정한) 본질을 ‘보기’ 시작하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하고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가 됩니다. 그 ‘시각(비전)’은 모든 의심(vicikiccā, 위찌낏짜-)도 제거하고 의례의식(silabbata parāmāsa, 실랍바따 빠라-마-사)이 재탄생 과정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볼 때, 완전히 확립됩니다. 그 시점에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는 소따빤나(Sotapanna)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 * 그러나, 그것은 성스런 팔정도의 시작일 뿐입니다. 아직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 잘못된 시각/견해)만 제거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시각/비전’(Sammā Diṭṭhi, 삼마- 딧티)으로, 다른 7단계를 따르고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에 이르러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서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를 제거하고 아라한뜨(Arahant) 단계에서 찟따 위빨라-사(citta vipallāsa)를 제거해야 합니다. ‘위빨라-사(딧티, 산냐, 찟따)는 상카-라에 영향을 미친다’를 참조하세요.

     

    뿌툿자노는 인간 영역에 있는 삿따다

     

    9. 마지막으로, ‘삿따(satta) 상태’(즉, 사성제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인간은 ‘뿌툿자노(puthujjano)’입니다. 따라서, 뿌툿자노(puthujjano) (보통 ‘잘 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많이 번역됨)는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지닌 인간입니다.

     

    • * 쭐-라웨달라 숫따(‘Cūḷavedalla Sutta, MN 44’)에서, 담마딘나-(Dhammadinnā) 존자는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 (정체성 견해)는 어떻게 생겨납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 * 존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 성자의 가르침를 접하지 못한 ‘잘 알지 못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다음 견해 중 하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 그룹의 사람들은 루-빠(rūpa, 물질 형태)에 대해 4가지 방식으로 잘못된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루-빠를 내 것으로 여기거나, 나를 루-빠로 여기거나, 루-빠가 내 속에 있다고 여기거나, 내가 루-빠 속에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정신 요소인 웨-다나-(vēdanā, 느낌) … 산냐-(saññā, 지각/인식) … 상카-라(saṅkhāra, 생각 방식) … 윈냐-나(viññāṇa, 의식) 중의 하나 이상을 내 것으로 여기거나, 나를 그것으로 여기거나, 그것들이 내 속에 있다고 여기거나, 내가 그것들 속에 있다고 여기는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전 포스트인 ‘삭까-야 딧티 ㅡ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의 #1에서 이것을 논의했습니다.) 

    • * 따라서, 고통/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세계관(world vision)’을 이해하지 못한 모든 중생(인간, 데와, 브라흐마, 및 모든 다른 중생)은 ‘삿따(satta)’입니다. 인간 영역의 삿따(satta)는 뿌툿자노(puthujjano)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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