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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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까-야 딧티 ㅡ ‘나’와 ‘내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

 

원문 : Paṭicca Samuppāda 섹션의 ‘Sakkāya Diṭṭhi – Wrong View of “Me” and “Mine”’ 포스트

- 2021년 2월 4일 작성; 2021년 2월 5일 개정(#9 및 #10 추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는 인간과 관련된 변하지 않는 본질에 대한 잘못된 견해입니다. 재탄생을 믿지 않는 유물론자(물질주의자)들은 본질이 자신의 몸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극단은 육체가 죽더라도 살아남는 변하지 않는 ‘정신적 요소’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삭까-야 딧티의 정의

 

1. 여러 숫따(sutta)에서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는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참고 문헌 1). “.. 잘 알지 못하고 평범하며 성자의 가르침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견해 중 하나를 지니고 있다. 한 그룹의 사람들은 루-빠(rūpa, 물질 형태)에 대해 4가지 방식, 즉, 루-빠를 내 것으로 여기거나, 나를 루-빠로 여기거나, 루-빠가 내 속에 있다고 여기거나, 내가 루-빠 속에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그 다음, 정신 요소인 웨-다나-(vēdanā, 느낌) … 산냐-(saññā, 지각/인식) … 상카-라(saṅkhāra, 생각 방식) … 윈냐-나(viññāṇa, 의식) 중의 하나 이상을 내 것으로 여기거나, 나를 그것으로 여기거나, 그것들이 내 속에 있다고 여기거나, 내가 그것들 속에 있다고 여기는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

 

  • * 유물론자(물질주의자)들은 오늘날 첫 번째 그룹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재탄생을 믿지 않으며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몸만 ‘나’로 삼습니다. 그들은 웃체다 딧티(uccheda diṭṭhi)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견해를 ‘유물관’이라고 부릅시다.

  • * 오늘날 큰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마음은 육체가 죽더라도 살아남아 창조주와 합쳐져 영구적인 존재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붓다께서는 마음이 네 가지 요소(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로 나눠질 수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 각각은 루-빠와 같이 4가지 방식으로 ‘내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16가지 잘못된 견해 중의 하나 이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간결하게 하기 위해 이것을 영혼관(soul-view)이라고 하겠습니다.

  • * 그러므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에 대해 20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 (위-사띠왓투까- 삭까-야 딧티, vīsativatthukā sakkāya diṭṭhi)중 하나 이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삭까-야 딧티를 제거하는 것이 닙바-나로 가는 첫 단계다

 

2. 왜 그것들이 (붓다 담마에 따르면) 잘못된 견해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붓다께서 멈출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어떤 종류의 고통/괴로움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 * 보통 사람들은 고통/괴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 고통스런(괴로운) 느낌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적 고통(부상, 질병) 또는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고통/괴로움일 수 있습니다.

  • * 그러나 붓다께서는 그 종류의 고통/괴로움들은 ‘다스릴(관리할)’ 수만 있고 멈출 수는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잘 먹고, 운동 등을 하고, 부상/질병에 대한 의사의 조언에 따라 다스릴(관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신적 고통/괴로움은 소박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관리할(다스릴)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붓다께서는 미래 생에 일어날 수 있는 고통/괴로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미래 탄생과 관련된 모든 고통/괴로움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육체의 죽음으로는 우리가 경험한 어떤 종류의 고통/괴로움도 끝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육체가 죽으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동물 영역을 포함하는 31영역 중 한 곳에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 * 붓다께서는 이 과정(‘상사-라_saṃsāra’라고 함)에서 대부분은 사악처(아빠-야-, apāyā)에 태어나며 동물 영역은 그 사악처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동물 이외의 다른 사악처의 존재(유정체)는 볼 수 없다하더라도, 동물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보다 훨씬 가혹하다는 것을 알(볼) 수 있습니다.

  • * 핵심은 그런 미래 고통은 멈춰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닙바-나(Nibbāna)입니다.

  • * 이 세상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이해할 때,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하고 소따빤나(Sotapanna)가 됩니다. 그 다음, 성스런 팔정도를 따라 아라한(Arahant)이 되어 닙바-나(Nibbāna)를 얻습니다.

 

가장 나쁜 잘못된 견해가 웃체다 딧티(물질주의/유물론)다

 

4. 위의 논의로부터 붓다 담마의 주된 이점(혜택)은 사람들이 닙바-나(Nibbāna)에 도달하도록 돕는 것이며, 따라서 재탄생 과정(상사-라, saṃsāra)에서 미래 고통(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현재 지니고 있는 몸은 ‘결과’이고 그 육체에서 일어나는 웨-다나-(vēdanā, 느낌)는 완전히 멈춰질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목갈라나 존자도 맞아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빠리닙바-나, Parinibbāna) 후에 목갈라나 존자의 모든 고통(괴로움)은 끝났습니다. [범부 중생인]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죽음 후에 더 많은 미래 고통(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 * 따라서 가장 나쁜 잘못된 견해는 자신의 삶이 [육체의] 죽음으로 끝난다고 간주하는 것임이 아주 분명해야 합니다. [육체의] 죽음에서 끝난다고 하는 경우에는, 붓다 담마를 더 깊은 레벨에서 공부해도 별 이득이 없습니다. ‘세속적인 불교도’가 될 수 있고 단지 도덕적인 삶만 살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 불교’라는 말은 ‘군중 속에 혼자 있음’ 또는 ‘죽은 채로 걸어감’이라는 말과 꼭 같이 모순된 말입니다.

  • * 삿사따 딧티(sassata diṭṭhi)(영원한 영혼을 믿음)를 갖는 것도 나쁘고 다른 극단입니다. 그들은 지옥에 보내져 영구적으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것을 꺼리거나 두려워할 수 있지만, ‘합법한(정당한)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 있는 어떠한 결점(문제점)도 보지 못합니다.

  • * 필자는 웃체다 딧티(uccheda diṭṭhi)를 가진 사람들은 본질적인 도덕적 나침반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 나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유물론자들은 완벽하게 도덕적인 삶을 살지만 (유혹이 충분히 강할 때)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가 더 쉽습니다.

 

영혼이 없다면, 무엇이 재탄생하는가?

 

5. 유물관과 영혼관이라는 두 가지 견해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유물관은 사람은 단지 이 생만 사는 것이고 죽으면 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관을 가진 사람들은 도덕적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인 경우) 천국에 태어나기를 희망하거나 (힌두교의 경우) 영원하다고 하는 브라흐마 영역에 태어나기를 희망합니다.

 

  • * 대부분의 사람들은 붓다께서 말씀하신 견해(정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탄생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이 영혼관과 어떻게 다른지 아는 것이 어렵습니다.

  • * 차이점을 빠르게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부처님의 견해를 힌두교의 견해와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에서는,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이며, [계속해서 태어나는] 많은 재탄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와 힌두교에서는 모두 수많은 재탄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그 과정은 (아라한으로) 닙바-나(Nibbāna)에 도달하면 끝납니다. 힌두교에서는 마하- 브라흐마(Mahā Brahma) 영역에 태어나면 끝납니다.

  • * 힌두교와 불교의 또 다른 주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힌두교에서 미래 생은 동일한 아-트만(ātman)(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영혼과 유사함)의 환생(reincarnation)입니다. 환생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단지 이동하는 (영혼으로서) 동일한 본질을 내포합니다.

  • *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는 생에서 생으로 이동하는 그런 영혼 또는 아트만(ātman)이 없습니다. ‘환생(reincarnation)’ 대신에 재탄생(rebirth)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재탄생은 환생과 어떻게 다른가?

 

6. 환생(reincarnation)은 다음 생으로 옮겨지는 독특하고 변하지 않는 무언가 인간에게 있음을 암시합니다. 몸은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생에서 생으로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고유한 생명력’(‘아-트만_ātman’이라고 하는 나의 특성)이 있습니다.

 

  • * 바가바드 기타 제2장 22절(‘Bhagavad Gita: Chapter 2, Verse 22’)에서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사람이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처럼, 죽을 때 영혼은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으로 들어간다."

  • * 따라서, [힌두교에서] 사람은 ‘다른 몸’(겉옷)으로 태어날 수 있지만 본질(개인적 정체성, 즉 아-뜨만)은 남아 있습니다.

  • *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서 그 메커니즘은 매우 다릅니다. 이 과정은 본질적으로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로 규정됩니다. ‘개성(성격)’은 한 존재(bhava, 바와)에서 다른 존재로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 있습니다. 필자는 ‘환생이란 무엇인가? - 생명 흐름의 개념’ 포스트에서 그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바와의 개념 ㅡ 개성은 관련없다

 

7.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서 파악해야 할 핵심 개념은 ‘바와(bhava)’라는 개념입니다. ‘생명흐름(lifestream)’은 오로지 업 에너지에 기초하여 바와(bhava)에서 바와(bhava)로 전환합니다. 고정된 상태로 유지되는 ‘개성(성격)’은 없습니다.

 

다양한 유형의 현명하지 못한 생각, 말, 및 행동(다른 유형의 상카-라에 의해 규정됨)은 다른 유형의 바와(bhava)와 자-띠(jāti)로 이어집니다.

 

  • * 그러나, 인접한 생에서는 ‘가띠(gati)’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성격/습관에 유사성이 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가띠(gati)는 다음 바와(bhava)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동물에 적합한 부도덕한 삶을 살았다면, 동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 * 그것은 빠띳자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로 설명됩니다. 아윗자-(avijjā)로 인해 일어나는 상카-라(saṅkhāra)(각자의 생각, 말, 행동)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과정의 시작 부분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무렵에, 그것은 어떤 유형의 바와(bhava, 존재)와 그 존재로 태어남(자띠, jāti)으로 이어집니다.

  • * 예를 들어, 사람이 (‘아-넨자-비상카-라_āneñjābhisaṅkhāra’로) 아루빠-와짜라 자-나(arupāvacara jhāna)를 경작하면, 아루빠-와짜라 브라흐마(arupāvacara Braham)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의 세 가지 넓은 범주로 인해 일어나는 다양한 바와(bhava)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설명은 ‘상카-라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의  # 5를 참조하세요.

 

모든 바와는 고통/괴로움으로 이어진다

 

8. 아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과정은 아윗자-(avijjā)로 행해진 모든 (아비)상카-라가 어떻게 다양한 바와(bhava)와 자-띠(jāti)로 이어지는지를 묘사합니다. 이것은 아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과정의 첫 번째 단계, 즉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입니다. 마지막 무렵에, 그것은 바와(bhava)로 이어집니다.

 

  • * 그 바와(bhava)는 31영역 중의 어느 곳에 태어남(자-띠, jāti)으로 이어집니다. 예외없이, 모든 자-띠(jāti)는 결국 고통으로 끝납니다. 그것이 아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과정의 마지막 단계, 즉 “자-띠 빳짜야- 자라-, 마라나, 소까ㅡ빠리데-와ㅡ둑카ㅡ도-마낫수빠-야사- 삼바완’띠( "jāti paccayā jarā, marana, soka-paridēva-dukkha-dōmanassupāyasā sambhavan’ti.)”입니다.

  • * 다음 포스트에서,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라는 잘못된 견해가 어떻게 우리를 상사-라(saṃsāra), 즉 재탄생 과정에 묶어 유지하는지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단계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환생(reincarnation)이 아닙니다.

  • * 그 과정을 이해할 때까지 사람은 아윗자-(avijjā)를 지닙니다. 즉, 4가지 성스런 진리에 대해 무지합니다.

  • * 한 가지 더 이해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인식 사이의 차이

 

9. 대부분의 문헌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자아 환상’이나 ‘개성(인격)에 대한 믿음’, 즉 ‘자아’ 또는 ‘내’가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묘사합니다(‘삭까-야 딧티’를 구글 검색하여 볼 수 있음). 여기서 ‘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인식’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소-따빤나(Sōtapanna)는 잘못된 견해(diṭṭhi, 딧티)를 제거했지만, 잘못된 인식(saññā, 산냐-)은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 * 그러나 ‘자아’(또는 ‘아-뜨마’라고도 하는 ‘영혼’)에 대한 이 인식(saññā, 산냐-)은 아래에서 논의하는 것처럼 띠삐따까(Tipitaka)에 따르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에서 생으로 옮겨온 산냐-(saññā)입니다. 산냐-(saññā)에 대한 논의는 ‘리빙 담마’ 섹션의 정신 무더기 중의 ‘산냐-’ 관련 부분을 참조하세요.

  • * ‘자아(self)’ 또는 ‘나’라는 선천적 감각으로 깊이 내재된 관념은 마-나(māna) 쩨따시까(cetasika)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 무례한 대우를 받으면 기분이 상하게 된다는 것은 여전히 마-나(māna)가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나-가-미(Anāgāmi) 성자조차도 나쁜 대우를 받는다고 인식하면 다소 동요될 수 있습니다. 아스미 마-나(asmi māna)라고 하는 마-나(māna)의 구성 요소는 여전히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마-나(māna)는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가 아니라 아라한뜨(Arahant)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소-따빤나는 불변하는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만 제거한다

 

10.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에서 제거되는 것은 자신과 관련된 ‘영혼’과 같이 변하지 않고 영구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diṭṭhi)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이것이 비록 필수적이지만) 지속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과 일치합니다.

 

  • * 중생과 관련된 (‘영혼’ 또는 ‘아-뜨마’와 같은) ‘진정한 본질’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때,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라는 잘못된 견해가 사라집니다.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 따르면 생명흐름(lifestream)은 진화합니다. ‘아낫따락카나 숫따 내의 아낫따-, 영혼이나 아-뜨마 없음’를 참조하세요.

  • * 그러므로. ‘자아’에 대한 인식이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 단계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것은 초등학교 어린이가 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힘쓰는 것과 같습니다.

 

참고 문헌

 

1. 다음 구절은 예를 들어, 쭐-라웨달라 숫따(Cūḷavedalla Sutta, MN 44)와 같은 많은 경들에 나타납니다. 

“앗수따와- 뿌툿자노, 아리야-낭 아닷사-위 아리야담맛사 아꼬위도 아리야담메 아위니-또, 삽뿌리사-낭 아닷사-위 삽뿌리사담맛사 아꼬위도 삽뿌리사담메 아위니-또, 루-빵 앗따또 사마누빳사띠, 루-빠완땅 와- 앗따-낭, 앗따니 와- 루-빵, 루-빠스밍 와- 앗따-낭. 웨다낭 … 뻬 … 산냐-앙 … 상카-레 … 윈냐-낭 앗따또 사마누빳사띠, 윈냐-나완땅 와- 앗따-낭, 앗따니 와- 윈냐-낭, 윈냐-나스밍 와- 앗따-낭. 에왕 코, 아-우소 위사-카, 삭까-야 딧티 호띠-.”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ṃ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ṃ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rūpaṃ, rūpasmiṃ vā attānaṃ. Vedanaṃ … pe … saññāṃ … saṅkhāre … viññāṇaṃ attato samanupassati, viññāṇ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smiṃ vā attānaṃ. Ev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 diṭṭhi hot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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