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상카-라, 깜마, 깜마 삐-자, 깜마 위빠까
원문 : Key Dhamma Concepts 섹션의 'Sankhāra, Kamma, Kamma Bīja, Kamma Vipāka' 포스트
- 2016년 5월 12일 개정, 2019년 2월 23일 개정; 2023년 3월 16일 개정; 2023년 5월 23일 개정
이 (제목의) 용어들에 대해 혼란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요한 담마 개념들이고, 재탄생과 연기(Paticca Samuppāda, 빠띳짜 사뭅빠-다)와 같은 다른 주요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구분이 필요합니다. 먼저, 앞의 ‘산(San)이란 무엇인가? 상사-라(삼사-라)의 의미’ 포스트를 읽은 다음에 이 포스트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깜마는 아비상카-라를 통해 행해짐
1. “Punnābhi saṅkhāra, apunnābhi saṅkhāra, āneñjābhi saṅkhāra ayaṃ vuccathi avijjā paccayā saṅkhāra". 이 구절은 불선뿌리(아꾸살라 물-라, akusala-mūla) 연기에서,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nkhāra)’라는 짧은 구절이 상세하게 설명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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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아비상카-라(abhisankhāra)(‘아비_abhi’는 ‘더 높은’ 또는 ‘더 강한’을 의미함)만이, 즉 아윗짜-(avijjā, 무명)가 함께 하는 상카-라(sankhāra) 만이 재탄생 과정으로 이끕니다. 예를 들어, ‘숨쉬기’ 또는 ‘걷기’는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를 수반하며 ‘말하기’는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그것들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아니며 깜마 생성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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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뿐나-비 상카-라(punnābhi sankhāra)는 ‘뿐나(punna) + 아비상카-라(abhisankhāra)’이고, 이와 유사하게 나머지 두 개도 또한 아비상카-라(abhisankhāra)입니다. 아뿐나(apunna)는 ‘부도덕한’, 뿐나(punna)는 ‘도덕적인’, 아-넨자(ānenja)는 ‘높은 선정에 드는’ 것을 각각 의미합니다. 세 가지 유형 모두 31 영역(존재계, 세상) 중의 한 곳으로 재탄생되게 합니다. 즉, 아뿐나-비 상카-라(apunnābhi sankhāra)는 가장 낮은 4가지 영역으로, 뿐나-비 상카-라(punnābhi sankhāra)는 5~27 영역으로, 아-넨자-비 상카라(ānenjābhi sankhāra)는 28~31 영역으로 각각 재탄생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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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모든 아비상카-라(abhisankhāra)는 아윗짜-(avijjā, 무명), 즉, 31가지 세상의 실제 특성(아닛짜, 둑카, 아낫따)을 모르는 무지로 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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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닙바-나(Nibbāna, 열반)를 얻을 때까지 주로 아빠-야(apāya, 악처, 가장 낮은 4가지 영역)에 태어나지 않도록 전략적으로 뿐나-비 상카-라(punnābhi sankhāra)를 축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래에서 보겠습니다.
2.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산(san)은 산쩨-다나(sancetana, san+cetana)로 어떤 것을 행할 때 획득하는 것입니다. 상카-라(sankhāra, san+kāra)는 단순히 산(san)을 획득하도록 이끄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재탄생으로 이끌 수 있는 아윗자-(avijjā, 무명)를 통해 일어나는 상카-라는 아비상카-라(abhisankhāra, 강성 상카-라)입니다. 상카-라(sankhāra)와 아비상카-라(abhisankhāra)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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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행위를 한다는 것은 상카-라(sankhāra)를 축적하는 것입니다. 그 행위가 탐함, 성냄, 미혹함으로 행해질 때 아비상카-라(abhisankhāra, 강성 상카-라)가 됩니다. 상카-라(sankhāra)는 형색, 소리, 맛 등의 감각 대상을 경험하는 마음을 더 많이 일으켜 즐기기 시작할 때 아비상카-라(abhisankhāra, 강성 상카-라)가 됩니다. 이로서 윤회의 수레바퀴가 구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닙바-나는 이해하기 어려운가?’ 포스트의 9번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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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 성자도 살아가기 위해 상카-라(sankhāra)를 축적합니다. 숨쉬는 것도 까-야 상카-라(kāya sankhāra, 신행)입니다. 그러나 아라한 성자는 보거나 들은 것 등에 집착하여 형성된 ‘구르는 과정’을 멈추었습니다. 이 ‘구르는 과정’은 아비상카-라(abhisankhāra)로 이끄는 ‘Paticca Samuppāda’ 섹션에서 자세히 기술된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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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카-라(sankhāra)가 라-가(rāga), 도사(dosa), 모하(moha)를 수반할 때, 그것들은 재탄생(윤회)으로 이끌 수 있는 아비상카-라(abhisankhāra, 강한 상카라)로 불립니다.
3. 아비상-카라(Abhisankhāra)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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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행위들은 살아가는 중에 나쁜 결과로 이끌고 4 악처(아빠-야, apāya)에 태어나게 합니다. 이들이 ‘아뿐나-비 상카-라(apunnābhi sankhāra, apuñña abhi sañ khāra)’, 즉 부도덕한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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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중에 좋은 결과로 이끌고 선처에 태어나게 하는 행위들을 ‘뿐나-비 상카-라(punnābhi sankhāra)’, 즉 ‘공덕 행위’라고 부릅니다. 이 행위들은 선처(인간계, 천신계, 색계)로 이끌므로 수많은 겁 동안 갇혀 있을 수 있는 악처로 태어나지 않게 합니다. 그러므로, 뿐나-비 상카-라(punnābhi sankhāra, puñña abhi sañ khāra)를 축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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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호흡 명상 등을 통해 세간 자-나(lōkiya jhānā), 즉, 세간의 더 높은 명상 상태(가장 높은 네 가지 무색계에 태어나게 하는 아루-빠 자-나)를 계발하면, 4가지 무색 범천 세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들 또한 상사-라(sansāra)를 더욱 연장시키며, ‘아-넨자-비 상카라(ānenjābhi sankhāra, āneñja abhi sañ khāra)’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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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넨자(āneñja)는 원래 ‘더 이상 재탄생하지 않고’ 그래서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면 흥미롭습니다. 알라라 깔라마 및 웃다까라마 뿟따를 포함하여 고대 요기들(힌두교 수행자)은 이 무색계 영역에서는 무한한 수명을 가지며 그곳에 태어나는 것을 ‘궁극적 해탈’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붓다께서는, 그곳에서 수많은 겁(무수한 년)동안 지속하는 지극히 오랜 기간을 지낼 수 있지만, 그곳에서도 한정된 수명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용어가 아-넨자-비 상카-라(āneñjābhi saṅkhāra)와 (잘못) 연관되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띠삐따까에서도 그렇게 사용됩니다. ‘Paṭiccasamuppāda Vibhaṅga’에서는 ‘avijjā paccayā saṅkhāra’ 단계를 “Tattha katame avijjā paccayā saṅkhārā? Puññābhisaṅkhāro, apuññābhisaṅkhāro, āneñjābhisaṅkhāro.”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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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그 요기들은 까-마 로-까(kāma lōka, 욕계) 또는 루빠 로-까(rupa lōka) 존재에 대한 모든 욕구를 일시적으로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닛짜(anicca) 특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감춰진 아윗자-(avijjā) 즉 아윗자- 아누사야(avijjā anusaya)를 지니고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아비상카-라(abhisankhāra)는 재탄생의 사이클, 즉 윤회를 연장시키는 행위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결실을 가져오는 각 행위(아비상카-라)에 의해 생성된 잠재적 에너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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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행위는 마음, 말, 또는 몸을 통해 행해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마노- 상카-라(manō sankhāra)’, 와찌 상카-라(vaci sankhāra), 까-야 상카-라(kāya sankhāra)로 이끕니다. 오염된 행위는 아비상카-라(abhisankhāra)입니다.
5. 공덕행(뿐나-비 상카-라, punnābhisankhāra)도 윤회를 연장시키므로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붓다께서는 공덕행을 하는 것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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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회를 연장시키지 않고 공덕행을 하는 방법이 있으며, 이 방법은 ‘선뿌리 연기(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로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붓다께서 가르치신 연기법의 본질적인 이 부분이 지금까지 2천년이 넘도록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공덕행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덕행에 대한 보답을 바라는 그러한 마음은 ‘탐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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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담마의 용어로 말하면, ‘냐-나 삼빠윳따, 소마낫사 사하가따 찟따(ñāna sampayutta, somanassa sahagata citta)’를 일으켜야 합니다. 이 마음(citta)은 가장 높은 도덕적인(소바나, sobhana) 마음으로서, 지혜와 기쁨이 있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현상의) 참 성품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지혜는 10가지 사견을 제거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를 더 높은 레벨로 이해함에 따라 자라게 됩니다. 이 지혜는 아라한 단계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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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좋은 행위는 자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그에 따른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물질적인 것이나 선정의 즐거움을 바라게 되면, 공덕이 적은 ‘냐-나 윕빠윳따(ñāna vippayutta)’(지혜가 없는) 도덕적 마음으로 바뀌거나 부도덕한 ‘아뿐나-비 상카-라(apunnābhi sankhāra)’까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아래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깜마(상사-라_윤회를 연장시키는 행위)
업 에너지(kammic energy)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구르는 과정’에 의해 상카-라(sankhāra)에서 아비상카-라(abhisankhāra)로 바뀔 때 생성됩니다. 예를 들어, 대상을 볼 때, 그것은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로 인한 상카-라(sankhāra)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거나, 그것을 얻는 방법을 생각한다면, 아비상카-라(abhisankhāra)가 됩니다. 여기서 이제 그 사람은 그 대상에 대한 의도를 가지고, 무엇을 얻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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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붓다께서 ‘나는 의도가 업이라고 말한다(cētana ham Bhikkhave kamman vadami)’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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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깜마(kamma, 업)는 의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업은 마음, 말, 또는 몸으로 지을 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업은 마음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말이나 행위도 할 수 없습니다(자세한 것은 ‘아비담마’ 섹션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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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면, 산책하려는 의도는 미래에 ‘선 과보’나 ‘불선 과보’를 생성하는 어떤 힘도 없는 깜마(kamma, 업)입니다. 이 깜마는 그 일을 한 결과만 생기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닙바-나(nibbāna, 열반)에 이르는 열쇠는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 감각적 즐거움)에 대해 가치를 두고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앗사-다(assāda)는 싱할라어로는 아-스와-다(āsvāda)입니다. 감각적 즐거움이 결국에는 실속없는 것, 즉,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및 아낫따(anatta)임을 볼 때까지는 이를 멈출 수 없습니다. ‘세 단계 실천’ 섹션의 ‘앗사-다, 아-디-나와, 닛사라나(Assāda, Ādīnava, Nissaran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깜마 삐-자(깜마 씨앗) 또는 깜마 바와
깜마(아비상카-라)가 행해 졌을 때, 그 업(깜마)의 업 잠재력(kammic potential)이 깜마 비-자(kamma beeja, 깜마 씨앗)로 축적됩니다. 업 씨앗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미래에 그 결과를 야기하는 에너지 또는 잠재력입니다. 업 씨앗은 ‘깜마 바와(kamma bhava)’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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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 씨앗은 예를 들면 사과나무 씨앗과 같은 보통 씨앗에 비유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로 자랄 가능성은 사과 씨앗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과 씨앗이 흙 없고 건조한 곳에 놓여져 있다면 싹이 트지 않을 것입니다. 흙에 심어져 수분과 영양분이 적절하게 공급되면, 싹이 트고, 사과나무로 자라서, 수많은 사과 씨앗이 더 생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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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마찬가지로, 업 씨앗에는 적당한 조건이 되면 싹이 트거나 결실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업 씨앗은 숫닷-타까 단계 이전에 있는 에너지입니다. 이 업 씨앗은 원 행위(업행)에 상당하는 충격으로 결과를 산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한 행위와 불선한 행위 모두에 적용됩니다. 결과는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깜마란 무엇인가? - 깜마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가?’ 포스트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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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업 씨앗을 많이 없애는 것이 또한 가능합니다. 우리가 나쁜 업 씨앗을 획득할 때, 우리는 다른 유정체에게 빚을 진 것과 같습니다. 빚을 갚음으로써 빚이 없어지는 것과 같이, 공덕행을 할 때 그 공덕을 회향하거나 또는 아리야 메따 바와나(Ariya metta bhavana, 성자 레벨의 자애명상)를 함에 따라 윤회과정에서 축적한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공덕회향(빳띠다나) - 그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포스트, 및 ‘5. 아리야 멧따 바-와나(자애 명상)’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아닛짜(anicca)’라는 말은 ‘무상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업 씨앗의 업 에너지도 결국에는 그 힘을 잃게 됩니다. 힘이 유지되는 것은 특정한 업의 강도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면, 부모나 아라한을 죽이는 것과 같은 ‘아-난따리야 아꾸살라 깜마(ānantariya akusala kamma)는 지연없이 (바로 다음 생에서) 그 과보가 생기게 되므로 그 힘을 잃을 수가 없습니다.
깜마 위빠-까(깜마 씨앗 또는 ‘깜마 바와’의 결과)
깜마(kamma)와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를 구별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깜마는 행위이고, 깜마 위빠-까는 결과입니다. 누군가 나쁜 상황에 직면하여 ‘이것은 내 업이다.’라고 하며 슬퍼하거나 비탄할 때, 실제 의미는 ‘과거에 행한 것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입니다. 이 일은 ‘업(kamma)’이 아니라, ‘업의 과보(kamma vipāka)’입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할 때, 그 업 에너지는 깜마 삐-자(kamma beeja, 깜마 씨앗)로 축적됩니다. ‘깜마 삐-자’는 깜마 바와(kamma bhava, 업유)라고도 합니다. 그 때에 그 업 에너지는 미래에 업의 과보(kamma vipāka)를 일으킬 수 있는데, 이 경우에 업의 과보는 적당한 조건이 함께 할 때 일어나게 됩니다.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를 피하는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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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당한 조건(흙, 수분, 햇빛)이 나타나지 않으면 씨앗이 싹트지 않는 것과 같이, 업의 과보(kamma vipāka)도 적당한 조건이 함께 하지 않으면 현실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쁜 상황이 되지 않게 마음챙기는 행위를 하면, 나쁜 과보를 피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난따라와 사마난따라 빳짜야-’ 포스트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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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메따 바와나(metta bhavana, 자애 명상)를 하면 깜마 씨앗을 많이 없앨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쁜 업 씨앗을 획득할 때, 우리는 다른 유정체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그 빚을 갚으면 업 씨앗을 없앨 수 있습니다. 빚을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자신이 아는 행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용서를 구하고, 자신이 선행을 하여 그 공덕을 모든 유정체에게 회향하는 것입니다. 모든 유정체에게 공덕을 회향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윤회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유정체에게 빚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깜마, 빚(부채), 및 명상’ 포스트를 보세요.
깜마 비-자(업 씨앗)가 싹터 생기는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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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현생이나 내생의 삶 중에 결과로 나타나는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가 있으며, 이 깜마 위빠-까로 이끄는 깜마 바와(깜마 삐-자)를 ‘빠윳띠 깜마 바와(pavutti kamma bhava)’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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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재탄생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의 유정체로 나타나는 강한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가 있으며, 이 깜마 위빠-까로 이끄는 깜마 바와(깜마 삐-자)를 ‘웁빳티 깜마 바와(uppatthi kamma bhava)’라고 합니다.
두 가지 각 경우에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형태는 강도가 약해질 수 있으며 깜마 바와(깜마 삐-자)의 효력이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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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 성자가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재탄생이 없으므로, 입멸 전에 결실이 되지 않은 모든 깜마 씨앗은 재탄생을 이루는 데 효력이 없게 됩니다. 아라한 성자에게는 아윗짜-(avijjā, 무명)가 제거되었으므로, ‘아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ūla paticca samuppāda, 불선뿌리 연기) 사이클’이 그치게 되어 ‘바와 빠짜야- 자띠(bhava paccayā jati)’에 의한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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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아라한 성자도 삶의 과정 중에 조건에 따라 나타날 기회가 된, 특히 강한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는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붓다께서도 생의 마지막 해에 육체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라한 성자가 행하는 것과 같은 ‘다른 유정체에 대한 공덕 회향’이 있더라도, 다른 유정체가 그 공덕을 받을 수 없다면 빚은 갚아지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공덕회향(빳띠다나) - 그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붓다께서도 ‘갚아지지 않은 빚’이 얼마간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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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이 긴 윤회의 여정에서 무수한 깜마(kamma, 업)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깜마 씨앗이 적절한 조건에서 결실이 맺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점이 이것입니다. 씨앗이 오랫동안 싹이 틀 가능성의 상태로 있다가 알맞은 조건(흙, 물 등) 하에서만 싹이 틀 수 있는 것과 같이, 깜마 씨앗은 알맞은 조건이 될 때에만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로 결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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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대부분의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는 생기지 않도록 억눌려질 수 있고, 주의깊음(요-니소 마나시까라)으로 행함에 따라 깜마 씨앗이 싹트지 않게 하여 피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차분한 마음이 도움이 됩니다. 동요된 마음은 이성적으로 결정할 수 없게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열쇠 - 5가지 장애’ 포스트를 보세요. 마음을 덮어 씌우는 다섯가지 장애(빤짜 니와라나, panca nivarana)를 해결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아비상카-라를 축적하지 않고 공덕행을 하는 방법
대부분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불자가 된 사람조차도 이것(제목의 방법)을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공덕행만 하면 닙바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숙고할 ‘중요한 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삶 중에 나쁜 일 및/또는 나쁜 재탄생(사악처로 재탄생)으로 이끄는 아뿐나-비 상카-라(apunnābhi sankhāra, 부도덕한 행위)를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붓다 담마’ 섹션의 ‘대통합이론인 담마(The Grand Unified Theory of the Dhamm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아뿐나-비 상카-라(apunnābhi sankhāra)’는 정의상 ‘아꾸살라(akusala)’이지만, 가장 나쁜 종류들입니다. 이들은 빨리어로 ‘빠-빠(pāpa)’, 싱할라어로 ‘파우(paw)(cow와 같이 운이 맞춰짐)라고 하며, 도덕적인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세 단계 실천’ 섹션의 ‘도덕적인 삶과 기본 원칙(Moral Living and Fundamentals)’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2. 뿐나-비 상카-라(punnābhi sankhāra, 공덕행)에는 자신의 의도가 좋지 않다면 아뿐나-비 상카-라(apunnābhi sankhāra, 해로운 행)가 따를 수 있습니다. 선행을 하고 보답을 바란다면, 그 바램은 ‘탐함’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선행은 자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좋은 결과를 생기게 합니다. 선행은 삶 중에 좋은 일이 생기게 하고 인간계 이상의 선처에 재탄생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뿐나-비 상카-라(punnābhi sankhāra, 공덕행)는 닙바-나(Nibbāna, 열반)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탐하는 의도가 없이 행해야 합니다. 소-따빤나(Sōtapanna, 수다원) 성자는 이러한 이해로 자동적으로 공덕행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따라서 성스런 길(Ariyan way)은 선행을 하고 그 선행의 공덕을, 보답으로 어떤 것을 바라지 않고 모든 유정체와 나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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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공덕행(뿐나-비 상카-라, punnābhi sankhāra)을 할 때는 아뿐나-비 상카-라(apunnābhi sankhāra, 해로운 행)가 따를 수 있으므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좀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누군가 굶주린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음식을 제공하는 행위는 원래 당연히 좋은 결과를 생기게 합니다. 그러나, 제공자가 ‘이 선행으로 내가 미래에 더 맛있는 음식을 얻게 되기를..’과 같은 바라는 마음으로 행하게 될 때, 그것은 탐하는 의도(cētana, 쩨-따나)가 있는 ‘탐욕스런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그 선행을 무효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탐욕스런 마음은 나쁜 일로 이끄는 다른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를 또한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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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함정은 탐함과 성냄과 미혹함이 결합되지 않은, 순수한 의도로 선행을 할 때 피할 수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이 허기가 없어지도록 단지 연민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굶주린 사람(또는 음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할 때 가져야 할 마음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행하더라도 음식 제공자가 그 선행의 이득을 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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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닛짜(anicca, 어떤 누구라도 결국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만족한 상태로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특성)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자동적으로 좋은 것에 대한 바램(갈망)을 멈출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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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더하여, 이전의 ‘나쁜 깜마 씨앗’이 싹트는 가능성을 없앨 수 있는 행을 추가로 함에 따라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행은 종종 ‘뿐나 아누모-다나(punna anumōdana)’로 잘못 쓰고 있으나, ‘빳띠다나(pattidana, 공덕 회향)’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뿐냐 깜마 - 다-나, 실-라, 바-와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사람들은 그 선행의 공덕을 모든 유정체와 나누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고 긴 윤회의 삶 속에서 모든 유정체에게 빚을 쌓아왔으며, 그 빚은 갚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깜마, 빚(부채), 및 명상’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그래서 공덕을 나누는 것은 사실 ‘위상카-라(visankhāra), 즉 이전 상카-라의 힘을 줄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행한 나쁜 깜마의 과보로부터 그 영향을 줄이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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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항상 선하고 공덕이 되는 행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으며, 보시를 특히 권장하셨습니다. 우리는 공덕을 나누는 것에 의해 이전 나쁜 행위의 영향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덕을 나누는 것은 그 공덕으로 자신에게 생길 좋은 결과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는 자신의 원래 그 행위로 획득된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탐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물론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닛짜’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순수 의지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3. 아비상카-라의 세 번째 종류인 ‘아-넨자-비 상카-라(ānenjābhi sankhāra)’는 호흡 명상이나 까시나 명상과 같은 사마타 수행을 통해 달성된 더 높은 명상 상태(무색계 선정)와 관련된 행입니다. 수행자는 더 높은 명상 상태를 얻기 위해 추구한 것이며, 이는 즐거움을 탐하는 마음으로 추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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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명상 테크닉으로는 아사와(asava, 번뇌)를 뿌리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 습관, 성격(가티), 및 갈망(아사와)’ 포스트와 ‘닙바-나로 가는 방법 - 아-사와의 제거’ 포스트를 보세요.
4. 선정 상태는 닙바-나(Nibbāna, 열반)을 추구할 때 자동적으로 얻어질 수 있습니다. 닙바-나를 추구하면서 얻어진 선정은 아나-리야 자-나(anāriya jhāna, 세속 선정)가 아니라, 아리야 자-나(Ariya jhāna, 출세간 선정)입니다. 여기서 목표는 닙바-나(Nibbāna, 열반)을 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과정(열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카-라(sankhāra)는 축적되지 않습니다. 이것에서 ‘열반을 구하는 것은 또 다른 갈망(아사와, 번뇌)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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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닙바-나(Nibbāna, 열반)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갈망을 제거함에 따라 얻어집니다. 열반은 탐함을 제거하고 성냄을 제거하고 미혹함을 제거한 상태입니다. 이는 ‘라-각카요- 닙바-난, 도-삭카요- 닙바-난, 모-학카요- 닙바-난(rāgakkhayō Nibbānan, Dōsakkhayō Nibbānan, Mōhakkhayō Nibbānan)’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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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닙바-나’에 대한 갈망을 찬다(chanda)라고 합니다. ‘찬다(chanda)’는 ‘네 가지 정신력의 기초_성취수단(사따라 이띠빠다, Satara Iddhipada)’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이 ‘닙바-나를 좋아함(찬다)’은 나머지 세가지(위리야_노력, 찟따_주된 생각, 위만사_이성적 조사)가 활성화되도록 연료를 공급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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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닙바-나(열반)을 구할 때는 이 세상의 어떤 다른 것도 갈망하지 않습니다. 열반을 구하는 자는 세상의 진정한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위-만사_이성적 조사) 부지런히 생각하고 활동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세상의 진정한 특성을 이해)가 얻어지면, 마음은 자동적으로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갈망을 포기합니다.
까-야, 와찌, 마노- 상카-라
1. 상카-라(sankhāra)는 몸의 움직임과 말과 생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들을 각각 ‘까-야(kāya), 와찌(vaci), 및 마노-(manō) 상카-라’로 부릅니다. 그것들이 탐함, 성냄, 또는 미혹함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단지 상카-라(sankhāra)입니다. 그러나 탐함, 성냄, 또는 미혹함으로 행해진다면 아비상카-라(abhisankhāra)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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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서는 ‘상카-라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2. 간단히 말하면, 마노- 상카-라(manō sankhāra)는 우리들의 가티(gathi/gati, 성향)에 기초하여 자동적으로 생깁니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모든 우리 생각은 까-야 상카-라(kāya sankhāra)입니다. 와찌 상카-라(vaci sankhāra)는 말을 하기 위해 입, 입술, 혀 등을 움직일 때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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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마음 속으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마음 속으로 조용히 그 어떤 것을 염하는 것입니다. 그것 또한 와찌 상카-라(vaci sankhāra)이며, 또한 위딱까(vitakka)와 위짜-라(vicāra)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담마 개념을 생각하고 숙고할 때, 그것을 사위딱까(savitakka) 및 사위짜라 (savicara)라고 부릅니다. 접두어로서, 사(sa)는 ‘좋은’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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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와찌 상카-라(vaci sankhāra)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와찌- 상카-라의 바른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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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노 상카라(manō sankhāra)는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업의 과보)를 통해 오는 감각 입력에 따라 자동적으로 생기는 느낌(웨-다나-, vēdanā)과 인식(산냐-, saññā)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즐거움은 와찌 상카-라(vaci sankhāra)를 통해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곳에 조용히 앉아서 엄청난 양의 와찌 상카-라(vaci sankhāra)를 생성하면서, (나쁜 깜마를 축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경험을 완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어 깊은 잠에 들 때까지 이러한 와찌 상카라(vaci sankhāra)를 생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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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들 때 오염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를 위해 담마 개념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이 되게 하거나 배경음악을 듣는 것과 같이 볼륨을 낮게 하여 경을 염송(찬팅, chanting)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숫따 찬팅(빠알리 원문 포함)’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러한 행위를 통해 쉽게 잠들 수 있고, 편안한 잠도 취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상카-라로 행해진 깜마 - 상카-라의 유형’ 포스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