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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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따-를 자아로 ㅡ 많은 숫따에서 잘못된 번역

 

원문: ‘Is There A Self?’ 섹션의 ‘Attā as Self – Wrong Translation in Many Suttās’ 포스트

 

앗따(attā)는 맥락에 따라 ‘사람’/‘자기 자신’(평범한 의미)이나 ‘유익한/가치있는’(띨락카나에서 ‘아낫따’의 반대로 더 깊은 의미)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영어 번역에서, 항상 평범함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것은 많은 혼란/혼동으로 이어집니다. 

 

2023년 10월 13일 작성

 

아-트만/아나-트만은 앗따-/아낫따-와 동일하지 않다

 

1. 아-트만(ātman)과 아나-트만(anātman)은 힌두교에서 자아(self)와 무아(no-self)를 의미하는 산트크리트 낱말입니다. 여기서, 자아(self)는 그리스도교의 ‘영혼(soul)’, 영원한 실체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Anatman/Atman (No-Self/Self)’ 기사를 참조하세요. 

 

  • * 그 기사는 “문자 그대로 호흡 또는 정신을 의미하는 베다의 산스크리트 용어인 ātman(빠알리어로, attā)는 흔히 영어로 자아(self),영혼(soul), 또는 에고(ego)로 번역된다. 어원적으로 anātman(빠알리어로, anattā)은 부정 접두어 an과, ātman를 합하여 구성되고, 무아(no-self), 무혼(no-soul), 또는 에고없음(no-ego)로 번역된다.”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 * 그 문장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베다의 ‘anātman(아나-트만)’이 부처님의 반열반 후 단지 500여년 후에 인도에서 기원한 마하-야-나(대승) 불교의 ‘anattā(아낫따-)’(빠알리어로) 의미를 설명하는 것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번성했던 시대에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 속으로 합병되었습니다. 대영제국이 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을 때, 그 해석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도 퍼졌습니다. ‘초기 유럽 학자들의 아닛짜 및 아낫따에 대한 잘못된 해석’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불행하게도, 이제 그 잘못된 해석이 모든 곳에 [퍼져] 있습니다. ‘Ātman (Buddhism)’ 기사를 참조하세요.

  • * 이것은 테라와-다 불교에 거대한 손상을 가했고 지난 수천년 동안 많은 사람에게 [닙바-나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였습니다.

  • * 아래에서, 필자는 잘못된 해석이 어떻게 숫따 번역에서 모순(불일치)으로 이어지는지를 가리켜 보이겠습니다.

 

앗따-의 평범한 의미와 더 깊은 의미

 

2. 이전 포스트인,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서, 앗따(attā)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고, 올바른 의미는 맥락에 따라 사용되어야 한다고 논의했습니다. 더욱이, 필자는 ‘영원한 영혼(soul)’ 또는 ‘변하지 않는 자아(self)’가 없다는 것은 붓다 담마의 바탕에 자리잡고 있다고 가리켜 보였습니다.

 

  • * ‘불변의/영원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붓다께서는 관습적 의미로 ‘사람’을 말씀하셨습니다. 관습적 의미로 ‘사람’, ‘나 자신’ 등을 나타내는 빠알리 낱말은 앗따-(attā)(a 장음이 있음)입니다. 

  • * 앗따-(attā)(그리고, 또한 a 장음이 없는 atta)의 더 깊은 의미는 ‘유익한’, ‘결실있는’ 등 입니다. 그 반대는 아낫따/아낫따-(anatta/anattā), 즉 ‘결실없는’입니다.

  • * 더 깊은 의미는 틸락카나(아닛짜, 둑카, 아낫따)에 적용되는데, 틸락카나에서 아낫따는 아닛짜와 둑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모두 31영역 세상의 원하지 않는(바람직하지 않는) 특성을 나타냅니다.

  • * 두 가지 사용법은 ‘앗따- 히 앗따노- 나-토-’ 포스트에 논의되어 있습니다. 더 긴 논의는 ‘아낫따 - 어느 앗따의 반대말일까?’ 포스트에 있습니다.

  • * 더 깊은 의미는 아래에서 논의된 숫따 SN 22.33 및 SN 35.101의 맥락에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나뚬하-까 숫따

 

3.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atta/anatta (또는 attā/anattā)를 자아(self)/무아(noself)로 번역하는 것의 불합리함(터무니없음)을 지적하기 위해 한 숫따에 집중하겠습니다. 빠알리 버전은 ‘Natumhāka Sutta (SN 22.33)’에 있습니다.

 

아래는 몇 가지 명료한 설명을 추가한 필자의 번역입니다. 길거나 복잡한 경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필자는 빠알리 낱말을 다음 의미로 번역했는데, tumha = 그대(you), tumhākaṁ = 그대 것(yours), pajahatha = 단념하다(마음으로, pajahatha는 기부를 의미하지 않음)입니다.

 

사-왓티에서.

 

“빅쿠들이여, 그대 것이 아닌 것을 단념하라.”

  • * “그런 것에 (들러붙음/애착을) 단념하면 그대에게 복리와 행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 것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 * (내부이건 외부이건) 루빠는 그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단념하라(그것들에 대한 땅하-/우빠-다-나를 생성하지 말라는 의미임.)

  • * 그것들에 들러붙음/애착을 단념하면 그대에게 복리와 행복이 될 것이다(여기서, ‘빠-니하_pahīna’는 ‘들러붙음/애착’을 잃는 것을 의미함.)”

 

“같은 식으로,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는 그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단념하라(그것들에 대한 땅하-/우빠-다-나를 생성하지 말하는 의미임.) 

  • * 그것들에 들러붙음/애착을 단념하면 그대에게 복리와 행복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 사원(jetavane)에 와서 사원 땅에 있는 풀, 막대, 나뭇가지, 잎사귀를 가져다가 불태우거나 그 풀, 막대, 나뭇가지, 잎사귀로 그들이 하고싶은 대로 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대들은 이 사람이 우리에게 귀중한 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귀중한 것을 불태운다고 생각하겠는가?”

  • *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스승님.” 

 

“왜 그런가?”

  • * 표식 3.6에서: “그것들(사원 땅에 있는 풀, 막대, 나뭇가지, 잎사귀)은 유용/유익하지(attā) 않거나 가치있는 어떤 것을 줄 수(attaniyaṁ)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식으로 빅쿠들이여, (내부이건 외부이건) 루빠는 그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단념하라(그것들에 대한 땅하-/우빠-다-나를 생성하지 말라는 의미임.)

  • * 그것들에 들러붙음/애착을 단념하면 그대에게 복리와 행복이 될 것이다.”

 

“같은 식으로,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는 그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단념하라(그것들에 대한 땅하-/우빠-다-나를 생성하지 말하는 의미임.) 

  • * 그것들에 들러붙음/애착을 단념하면 그대에게 복리와 행복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숫따입니다.

 

나뚬하-까 숫따의 불합리한(터무니없는) 번역

 

4. 여기 숫따 센트럴 사이트로 링크된 ‘Natumhāka Sutta (SN 22.33)’에 빠알리와 그 영어 번역이 함께 있습니다.

 

  • * 위 링크 주소의 숫따 센트럴 사이트에서 영어 번역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5.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절은 표식 3.6에 있는데, “Na hi no etaṁ, bhante, attāattaniyaṁ vā”ti.입니다.

 

숫따 센트럴 사이트에 있는 영어 번역은 “우리에게 그것(사원 땅에 있는 풀, 막대, 나뭇가지, 및 잎사귀)은 자아(self)도 아니고 자아(self)에 속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는 의미로, “우리에게 그것은 자아(self)도 아니고 자아(self)에 속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입니다.

 

  • * “풀이 자아(self)도 아니고 자아(self)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될까요?

  • * 여기서, “Na hi no etaṁ”은 “그것들(사원 땅에 있는 풀, 막대, 나뭇가지, 및 잎사귀)은 아니다.”를 의미합니다.

  • * 숫따 센트럴 사이트의 “attā vā attaniyaṁ vā”에 대한 번역은 “자아도 자아에 속하는 것도”입니다.

  • * 이것은 ‘앗따-(attā)’를 ‘자아(self)’로 번역한 비극적 결과의 아주 좋은 예입니다. ‘풀은 자아(self)도 아니고 자아(self)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6. 따라서, 요점은 숫따의 문맥에서 ‘앗따-(attā)’는 사원 땅에 있는 풀, 막대, 나뭇가지, 및 잎사귀가 어떤 가치/본질/유익함이 있는지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 * 숫따 센트럴 사이트에 있는 두번째 번역인 ‘22.33. Not Yours (1)’에는 동일한 문제가 있습니다.

  • * 똑 같은 구절이 동일한 식으로 잘못 번역된 더 긴 버전이 숫따 센트럴 사이트의 ‘Paṭhamanatumhāka Sutta (SN 35.101)’에 있습니다. 

  • * 후자의 숫따(SN 35.101)에 대한 번역이 또 다른 웹사이트에 있는데, ‘Na Tumhaka Sutta: Not Yours’입니다. 거기 결정적인 구절의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 제따 숲에 있는 풀, 막대, 나뭇가지, 및 잎사귀를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모으거나 불태운다고 가정해 보라. ‘이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모으고, 불태우거나,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은 우리다’라는 생각이 들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그것들은 우리 자아(self)도 아니고 우리 자아(self)에 속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 * 그들은 번역된 내용이 말이 되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낱말을 번역하는 것 같습니다.

 

왜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아야 하는가?

 

7. 더 깊은 설명은 (자기 자신의 육체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참으로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따라서 그런 것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그리고, 일반적으로 다섯 무더기) 조차도 원인과 조건(빠띳짜 사뭅빠-다)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 육체를 늙지 않게 할 수 있는가요? 할 수 없습니다. 뿌툿자나(보통 인간)는 육체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 * 그 측면은  나뚬하-까 숫따(Natumhāka Sutta)의 또 다른 버전인 ‘Natumhāka Sutta (SN 12.37)’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 * 거기 영어 번역은 이전 경우처럼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수반된 개념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8. 더 많은 설명은 나뚬하-까 숫따(Natumhāka Sutta)의 다른 버전들인, ‘Paṭhamanatumhāka Sutta (SN 35.101)’와 ‘Dutiyanatumhāka Sutta (SN 35. 102)’에 있습니다.

 

그 두 개의 숫따는 훨씬 더 상세히 들어가, (자신의 눈, 귀, 여러 유형의 윈냐-나 등과 같이, 보통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내부의 어떤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점을 가리켜 보입니다.

 

  • * 필자는 현재 포스트 시리즈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최근 업데이트 참조). 이 시리즈는 ‘자아가 있는가?’ 섹션의 ‘아낫따는 자아를 지칭하는가?(Does 'Anatta' Refer To A 'Self'?)’ 서브섹션입니다.

 

모든 상황에 앗따-(attā)를 자아(Self)로 번역할 때 불합리함(터무니없음)

 

9(7). ‘Attavagga’에서, “Attā hi attano nātho”는 “자아/자기(Self)는 참으로 자아/자기(self)의 주인이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 * 앗따왁가(Attavagga)라는 제목은 거기서 자아(The Self)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붓다 담마에서는 ‘영원한 자아(everlastion self)’가 없으므로,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위 #2를 참조하세요. 영어 제목은 ‘유익한 것(What is Benefical)’과 같은 어떤 것을 가리켜야 합니다. 유익한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닙바-나(Nibbāna)입니다.

  • * 담마빠다(Dhammapada)의 그 섹션은 자기 자신(평범한 의미로, ‘attā’)에게 (더 깊은 의미로, ‘atta’ 특성의) ‘유익한’ 것에 관한 것입니다.

  • * 그러므로, 그 구절 전체를 걸쳐, 두 가지 의미가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필자는 ‘앗따- 히 앗따노- 나-토-’ 포스트에서 게송 160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10(8). 그 숫따 센트럴(Sutta Central) 사이트에 4가지 번역이 있는데, 다른 세 가지 번역은 더 낫지만 여전히 완전한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Dhp 157–166: Attavagga—Bhante Suddhāso (suttacentral.net)’를 참조하세요.

 

  • * 주된 문제는 띠삐따까(Tipitaka)의 어떤 구절을 낱말별로 대응하여 번역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습니다. (i) 일부 빠알리 낱말은 어떤 언어의 단일 낱말로 번역할 수 없습니다. 번역자는 그런 낱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빠알리 낱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ii) 어떤 낱말이 이중 의미를 가질 때, 번역자는 양 의미의 사용법을 알아야 합니다.

  • * 필자는 이 문제가 특히 현재 영어 번역에서 흔히 일어나기 때문에 별도의 섹션에서 그것을 논의했습니다. ‘방 안의 코끼리’ 섹션의 ‘첫 번째 코끼리: 띠삐따까에 대한 낱말별 번역(Word-for-Word Translation of the Tipiṭak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11(9). ‘앗따-(attā)’에는 사람 또는 자아/자기(self)라는 평범한 의미가 있지만, 그 의미는 앗따(atta)(a 단음이 있음)와 결코 연관되지 않습니다.

 

  • * 더욱이, 무아(no-self)로 ‘앗따-(attā)’의 부정은 숫따-(suttā)에서 아낫따-(anattā)( ‘na’ + ‘attā’)로 결코 사용되지 않습니다.

  • * 그 부정 사용법은 띨락카나(Tilakkhana)에서 아닛짜(anicca)와 둑카(dukkha)와 관련하여 아낫따(antta) 또는 아낫따-(anattā)로만 있습니다. 거기서, 아닛짜, 둑카, 및 아낫따는 세간 존재들의 불만족한/위험한 특성/본질을 묘사합니다. 이제 그것을 논의해 보겠습니다.

 

앗따/아낫따와 앗따-/아낫따-는 틸락카나에 관한 것이다

 

12(10). 세상의 아닛짜와 둑카 특성과 관련하여 아낫따의 더 깊은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는 ‘Anicca Sutta (SN 22.12)’, ‘Dukkha Sutta (SN 22.13)’, ‘Anatta Sutta (SN 22.14)’, 및 ‘Yadanicca Sutta (SN 22.15)’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 시리즈에서 더욱 자세히 들어가는 더 많은 숫따들이 있습니다. 

 

  • * 첫번째 숫따(SN 22.12)에서는 “rūpaṁ, bhikkhave, aniccaṁ, vedanā aniccā, saññā aniccā, saṅkhārā aniccā, viññāṇaṁ aniccaṁ”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의미는 “빅쿠들이여,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는 모두 아닛짜 특성이 있다. 그것들에 들러붙으면 영구적 행복(즉, 고통이 없음)으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는 “Evaṁ passaṁ,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즉 “이것을 보고, 배운 성스런 제자들은 그것들에 대한 갈망을 잃기 시작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 두번째 숫따(SN 22.13)에서는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는 모두 둑카 특성이 있고(즉, 그것들은 고통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배운 성스런 제자는 것들에 대한 갈망을 잃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동일한 구절을 반복하십니다.

  • * 세번째 숫따(SN 22.14)에서는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는 모두 아낫따(가치없는/결실없는) 특성이 있고, 따라서, 배운 성스런 제자는 것들에 대한 갈망을 잃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동일한 구절을 반복하십니다. 앗따(atta) 및 앗따-(attā)는 31영역 이 세상이 유익할 수 있는지 또는 고통을 영구적으로 제거하는지를 다루는 띨락카나(Tilakkhana)의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그 경우에, ‘아낫따(antta)’(‘na’ + ‘atta’)와 ‘아낫따-(anattā)’( ‘na’ + ‘attā’)는 각각 두 낱말의 부정을 나타냅니다.

 

13(11). 그 다음, 네번째 숫따(SN 22.15)는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시는데, “루-빠는 아닛짜 특성이다. 그것들에 들러붙으면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아낫따(가치없는/결실없는) 특성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네 가지 무더기에 대해 반복하십니다.

 

“웨다나-는 아닛짜 특성이다. 그것들에 들러붙으면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아낫따(가치없는/결실없는) 특성이다.”

“산냐-는 아닛짜 특성이다. 그것들에 들러붙으면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아낫따(가치없는/결실없는) 특성이다.”

“상카-라는 아닛짜 특성이다. 그것들에 들러붙으면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아낫따(가치없는/결실없는) 특성이다.”

“윈냐-나는 아닛짜 특성이다. 그것들에 들러붙으면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아낫따(가치없는/결실없는) 특성이다.”

 

아닛짜와 아낫따에 대한 잘못된 번역의 불합리함(터무니없음)

 

14(12). ‘Yadanicca Sutta (SN 22.15)’에 있는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아닛짜, 둑카, 및 아낫따 사이의 관계를 기술함). “형태(form)는 무상하다(impermanent). 무상한 것은 괴로움(고통)이다. 괴로움(고통)인 것은 무아(not-self)다.” 그 다음, 그것은 다른 네 가지 무더기에 대해 반복됩니다.

 

“느낌(feeling)은 무상하다(impermanent). 무상한 것은 괴로움(고통)이다. 괴로움(고통)인 것은 무아(not-self)다.” 

“인식(perception)은 무상하다(impermanent). 무상한 것은 괴로움(고통)이다. 괴로움(고통)인 것은 무아(not-self)다.”

“선택들(choices)은 무상하다(impermanent). 무상한 것은 괴로움(고통)이다. 괴로움(고통)인 것은 무아(not-self)다.”

“의식(consciousness)은 무상하다(impermanent). 무상한 것은 괴로움(고통)이다. 괴로움(고통)인 것은 무아(not-self)다.”

 

  • * 물론, 그 다섯가지 모든 실체는 무상하며, 모두가 그것을 알 수 있지만, 부처님만이 아닛짜 본질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 * 다음 부분인, “무상한 것은 괴로움(고통)이다.”는 평범만 의미에서조차 진실이 아닙니다.(예를 들어, 두통이 영구적이면 더 많은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집니다!)

  • * 마지막으로, “괴로움/고통인 것은 무아(not-self)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될까요?

 

더 자세한 내용은 ‘주요 담마 개념’ 섹션의 ‘아낫따 - 체계적 분석(Anattā – A Systematic Analysis)’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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