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감각 경험, 빠띳짜 사뭅빠-다, 및 빤쭈빠-다-낙칸다
원문: Key Dhamma Concepts 카테고리의 ‘Sensory Experience, Paṭicca Samuppāda, and pañcupādānakkhandha’ 포스트
감각 경험과 그 경험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미래 행복/고통을 결정합니다. 붓다께서는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 즉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로 요약된) 감각 경험에 들러붙음은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빠띳짜 사뭅빠-다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묘사합니다.
2024년 9월 14일 작성
붓다 담마를 이해하려면 ‘새로운 사고 방식’이 필요하다
1. ‘전통적(관습적) 인간 논리’를 사용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즉 띠삐따까를 향해서 결코 진전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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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는 간단한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평범한(세간적) 인간 지식에 기반한 이론들이나 근거에서는 증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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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 담마를 이해하려면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특히 그것은 감각 경험을 어떻게 보는가에 극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2. 붓다의 깨달음에 도달하신 직후, 붓다께서는 “adhigato kho myāyaṁ dhammo gambhīro duddaso duranubodho santo paṇīto atakkāvacaro nipuṇo paṇḍitavedanīyo.”라는 구절(verse)로 위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Brahmāyācana Sutta (SN 6.1)’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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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링크 주소에 있는 번역: “내가 발견한 이 담마(세계관)은 심오하고,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논리의 범위를 넘어서고, 미묘하고, 예리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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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higato kho myāyaṁ dhammo’는 ‘내가 발견한 이 담마’라는 뜻이고, ‘gambhīro’는 ‘심오한’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번역의 나머지는 잘 되었지만, ‘atakkāvacaro’는 ‘논리의 범위를 넘어서’를 뜻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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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takkāvacaro’는 ‘인간의 잘못된 논리의 범위를 넘어서’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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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higato kho myāyaṁ dhammo gambhīro duddaso duranubodho santo paṇīto atakkāvacaro nipuṇo paṇḍitavedanīyo’라는 그 구절(verse)은 DN 1, DN 14, MN 26, MN 72, MN 95를 포함하여, 많은 숫따에 나타납니다.
3. ‘Brahmāyācana Sutta (SN 6.1)’에서, 붓다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타당하다는 것을 보기가 왜 어려운지를 더 설명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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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1.5에서 시작하여, 붓다께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 구절은 “그러나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기를 좋아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좋아하고 즐긴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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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1.6 : “그들은 진리, 즉 이답빳짜야따- 빠띳짜 사뭅빠-다(idappaccayatā paṭicca samuppāda)를 보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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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답빳짜야따- 빠띳짜 사뭅빠-다는 마음이 어떻게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고 순식간에 오염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또한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의 축적을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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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마음만이 그 과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설명되면, 우리는 그것을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타당성은 인간에게 알려된 이론이나 논리 내에서는 시험될 수 없습니다. 그것에는 생각의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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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철학과 종교는 행복이 이 삶에서든 천상 영역에서든 이 세상 내의 어떤 곳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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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위 가정은 잘못되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참되다는 것을 봄으로써만 삭까-야 딧티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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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적(관습적)인 사고방식은 기쁨/행복을 제공하는 더 많은 감각적 경험을 위해 노력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이것은 미래 고통의 원인인 오염된 마음 성향으로 자주 이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셨는데, 이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논리’를 이해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그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5. 인간에게는 탐구하는 본능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 세상에 관한 모든 것을 조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많은 주제에 대해 전부 또는 심지어 일부분이라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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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inteyya Sutta (AN 4.77)’에서, 붓다께서는 특히 사람들이 피해야 할 네가지 주제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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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요한 번역: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들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은 정신을 잃거나 좌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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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네 가지 것들은 (i) 붓다의 능력, (ii) 자-나에 대한 주제, (iii) 깜마 위빠-까에 대한 주제, 및 (iv) 더 넓은 세계, 즉 다른 행성계, 다른 행성의 생명체, 등에 대한 추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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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범주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 백년 동안 그런 주제를 연구했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지식’을 습득하고 있지만, 그런 평범한(세간적) 지식은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최소한 소따빤나 단계에 이르는데 남겨진 시간이 이 생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데 도움이 되는 환경으로 태어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세계 인구의 99%가 넘게 비불교도입니다!
삼마- 사마-디는 제4자-나에 한정되지 않는다
6. 자-나(jhāna)라는 주제에 관해,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가 제4자-나에 상당한다고 말하는 ‘Saccavibhaṅga Sutta (MN 141)’의 한 구절에 대한 오해를 지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삼마- 사마-디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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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야 자-나를 육성하는 사람에게 삼마- 사마-디는 제4아리야 자-나에 상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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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마- 사마-디를 묘사하는 다른 방식은 ‘Sammāsamādhi Sutta (AN 5.113)’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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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은데,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부터 삼마- 사띠(Sammā Sati)까지 앞의 7가지 요소를 충족시킨 사람은 삼마- 사마-디를 지닌다’는 정의입니다. ‘Mahācattārīsaka Sutta (MN 117)’를 참조하세요.
궁극적인 목표에 자신의 노력을 집중하는 것
7. 일부 불교도들은 위 #5에 있는 처음 세 가지 범주를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것들을 상세히 분석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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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들에 대하여 어떤 개념을 가지는 것은 좋으며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상세히 연구(공부)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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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나는 고통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것이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멈추는 방법을 가르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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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그 충고에 따라 적어도 닙바-나의 첫(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는 목표에 완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성제, 성스런 팔정도, 빠띳짜 사뭅빠-다, 및 빤쭈빠-다-낙칸다에 대한 가능한 모든 것을 배우는 것을 포함하는데, 그것들은 모두 상호 연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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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모든 주제들은 우리 마음이 감각 입력(니밋따/아-람마나)에 들러붙음으로써 어떻게 오염되는지를 고찰합니다. 부패한/오염된 마음은 고통을 겪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새로운 시리즈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감각 경험을 공부하는 것의 중요성
8. 위 #7에서 청색으로 된 말씀에서, 붓다께서는 고통이 무엇이고 그것에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첫째로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일단 이해되면, 다른 두 측면은 자동적으로 명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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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말하면, 그 말씀에서 네 가지 측면은 둑카 사무다야(고통의 근본 원인)과 둑카 니로다(고통 일어나지 않고 멈춰질 수 있는 방법)와 동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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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감각 입력(니밋따)에 들러붙고, 우리가 들러붙는(땅하-) 것(의 일부)을 아-람마나(ārammaṇa)로 전환함으로써 업 에너지를 축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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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가 어떤 감각 입력에 들러붙을까요? 우리가 딧티 위빨라-사, 산냐- 위빨라-사, 및 찟따 위빨라-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들러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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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빨라-사(vipallāsa)는 ‘왜곡’, 즉 ‘참된 상태의 상황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 위빨라-사는 우리가 해당하는 아누사야/상요자나를 지니는 한, 일어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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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가지 유형의 위빨라-사는 위 순서대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를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딧티 및 찟따 위빨라-사를 제거하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산냐- 위빠라-사를 이해한(동시에 딧티 위빨라-사를 제거) 후에도, 산냐- 위빨라-사와 찟따 위빨라-사를 제거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곳이 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 바-와-나(Satipaṭṭhāna/Ānāpānasati Bhāvanā)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곳입니다.
오도하는/왜곡된 견해와 산냐-는 빤쭈빠-다-낙칸다로 이어진다
9. 사람들이 행복은 감각적 즐거움에 기반한다고 인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면, 붓다께서는 (빤쭈빠-다낙칸다와 같이) 감각적 즐거움에 탐닉하면 괴로움/고통을 초래한다고 가르치셨는데, “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즉 “간단히 말하여, 고통/괴로움의 기원은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라는 다섯 무더기에 대한 갈망(pañcupādānakkhandhā”입니다. ‘첫 숫따에 있는 불교의 에센스’ 포스트의 #2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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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의 가르침의 위 측면은 널리 이해되지 못했다하더라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훨씬 더 깊은 측면은 최근 몇 년에 논의되지 않았는데, 음식, 냄새, 감촉, 광경, 및 소리와 연관된 행복감은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우리 몸에 구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을 잃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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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행복에 대한 잘못된 감각(왜곡된 산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산(san), 즉 라-가, 도사, 및 모하의 근본원인을 이해하고 산딧티꼬(sandiṭṭhiko)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여러 숫따들(예를 들어, ‘Upavāṇasandiṭṭhika Sutta (SN 35.70)’와 ‘Paṭhamasandiṭṭhika Sutta (AN 6.47)’ )에서 가리켜 보입니다. 물론, 그 링크에 있는 번역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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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흔히 ‘다섯 집착의 무더기’로 번역된 빤쭈빠-다-낙칸다에 대한 이 포스트 시리즈에서 위 측면을 분석하겠습니다.
빠띳짜 사뭅빠-다는 빤쭈빠-다-낙칸다의 축적을 묘사한다
10.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은 세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을 묘사하는데, (i) 감각 경험(웨다나-/산냐-), (ii) 아비상카라로 그 경험에 반응하는 방법, 및 (iii) 그 반응 (즉, ‘깜마 윈냐-나’를 통한 깜마 생성)이 각자의 미래에(삶 중에 또한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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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냐-의 결정적인 역할은 최근 몇 년에 감춰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웨다나-는 ‘마음이 만든(mind-made) 것이고 산냐- 위빨라-사, 즉 왜곡[이 강화]된 산냐-로 인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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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모든 감각 경험은 내부 루빠, 즉 눈(짝쿠), 귀(소-따), 코(가-나), 혀(지와-), 몸(까-야), 및 마음(마노-)과 접촉하는 외부 루빠(광경, 소리, 맛, 냄새, 감촉, 및 기억)에 의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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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미래 괴로움의 구축(빤쭈빠-다-낙칸다)은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일어나고 이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상카-라와 아비상카-라
11. 빠띳짜 사뭅빠-다에 있는 용어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아윗자-(avijjā)는 이 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한 모르는 것입니다. 상카-라(sankhāra)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것들이 라-가, 도사, 또는 모하와 함께 일어나면, 그것들은 아비상카-라(abhisankhāra)가 되고 ‘업 에너지’라는 미묘한 에너지를 생성합니다. 따라서, 라-가, 도사, 또는 모하가 있는 상카-라(sankhāra)에는 고유한 접두사 ‘abhi’가 붙으며, 그것들이 아비상카-라(abhisankhār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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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적인 감각 경험은 윈냐-나(viññāna)입니다. 그것이 순수한 경험(즉, 단지 보는 것)이면, 그것을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na)’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가, 도사, 또는 모하가 그 위빠-까 윈냐-나에 반응하여 일어난다면, 마음은 어떤 추가적인 것(기대)을 더하고, 그것은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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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론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na)는 상카-라(saṅkhāra)만 가지고,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로 인해 일어납니다. (라-가, 도사, 또는 모하가 없는) 순수한 상카-라만 일어난다면, 위빠-까 윈냐-나만 일어날 것입니다. 즉 단지 사건을 경험하기만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 밖의 나무를 보거나 지붕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상카-라를 가진 위빠-까 윈냐-나입니다. 반면에, 사람을 볼 때 마음에 정욕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라-가가 일어남으로 인한 ‘오염된 마음’을 수반합니다.
왜곡된 산냐-는 오염되지 않았지만, 오염된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12. ‘순수한 상카-라’를 가진 생각은 제따시까(정신 요소)로서 웨다나-와 산냐-만 가집니다. 반면에, 아비상카-라를 가진 생각은 탐함(로바), 성냄(도사/빠띠가), 질투(잇사) 등과 같은 아소바나(‘오염된’을 의미) 쩨따시까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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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다나와 산냐-는 모든 생각과 함께 일어나는 두 가지 정신 요소입니다. 그것들은 ‘보편 쩨따시까(universal cetasika)’입니다. 산냐-는 감각 대상을 식별하는 반면에, 웨다나-는 그 식별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나쁜, 또는 중립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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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감각입력/세상의 참된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그 식별은 왜곡되었고(‘왜곡된 산냐-’), 그것은 ‘마음이 만든 웨다나-(mind-made vedanā)’로 이어집니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예에서, 꿀을 먹는 것에 의해 달콤함이라는 ‘왜곡된 산냐-’,즉 ‘잘못된 식별’이 발생하는데, 이는 사실상 ‘수카 웨다나-’, 즉 ‘좋은 느낌’입니다. 육체적 몸 접촉만 ‘실제 수카/둑카 웨다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꿀의 달콤함으로 인한 ‘수카 웨다나-’는 산냐-입니다. 그 때문에 호랑이나 소는 꿀을 달콤한 것으로 맛보지 않는데, ‘꿀의 달콤함’은 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의한 ‘만들어진 산냐-’입니다. 호랑이는 꿀이 아니라 다른 동물의 살에 대해 ‘수카 산냐-’를 생성합니다. 마찬가지로, 소는 꿀이 아니라 풀을 좋은 것으로 맛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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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툿자나의 산냐-가 비록 항상 왜곡되어 있지만, ‘왜곡된 산냐-’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라-가, 도사, 또는 모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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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근원을 이해할 때까지는 그 ‘왜곡된 산냐’로 인해 뿌툿자나에게는 오염된 생각이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이 포스트 시리즈에서 그 개념들을 더 논의하겠습니다.
빠띳짜 사뭅빠-다의 진행은 감각 입력(아-람마나)와 함께 시작된다
13. 이제, 누군가 “(아비상카-라를 가진) 생각들이 어떻게 아윗자-로 인해 일어나는가? 그것은 원인없이 일어나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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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비상카-라를 가진) 의식적이고 오염된 생각은 감각 입력(니밋따/아-람마나)에 대한 반응으로만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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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답빳짜야따- 빠띳짜 사뭅빠-다는 이 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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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방 안의 코끼리’ 섹션의 ‘일생 중의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During a Lifetime)’ 서브섹션에서 논의했지만, 이 시리즈에서 상세하게 그 측면의 일부를 논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