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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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빤짝칸다가 아니라 산냐-에 들러붙는다

     

    원문: ‘Key Dhamma Concepts’ 섹션의 ‘Attachment Is to Saññā, Not to Pañcakkhandha’ 포스트

     

    아윗자-(avijjā)가 일어나게 하는 촉발자는 까-마 산냐-(kāma saññā)를 통해 생성된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입니다. 이는 모든 감각 입력과 함께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 과정, 즉 동등하게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을 시작되게 합니다. 루빠 로까와 아루빠 로까에서, 아윗자-는 각각 루빠 산냐-(‘자-나의 즐거움’을 유발)와 아루빠 산냐-(‘아루빠 사마-빳띠의 즐거움’을 유발)에 의해 촉발됩니다. 

     

    2025년 11월 29일 작성

     

    빤짝칸다를 언급하는 숫따는 거의 없다

     

    1. 빤짝칸다(pañcakkhandha)라는 낱말은 다음 숫따에만 나타나는데, 빤짝칸다와 빤쭈빠-다-낙칸다 모두 ‘Khandha Sutta (SN 22.48)’와 ‘Saṅgīti Sutta (DN 33)’에 정의되어 있습니다. ‘Arahanta Sutta (SN 22.76)’에서서는 아라한의 빤짝칸다를 말합니다. 그것은 ‘Bhāra Sutta (SN 22.22)에 있는 하나의 가-타-(gāthā)와, 세 개의 테라/테리 가-타-(Thag 1.90, Thag 1.120, 및 Thig 5.8)에 나타나는데, 빤짝칸다(pañcakkhandha)가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보다 운이 더 잘 맞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Bhāra Sutta (SN 22.22)’에서 확인되는데, 왜냐하면 빤짝칸다(pañcakkhandha)가 표식 6.1에서 가-따-(gāthā)에 나타나기 전에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가 표식 1.5에 부담(burden)으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 제가 찾을 수 있는 숫따에서 빤짝칸다가 나타나는 경우는 이것들뿐입니다.

    • * 더욱이, 많은 숫따에서, 빤쭈빠-다-낙칸다-(‘루-뿌빠-다-낙칸다’부터 ‘윈냐-누빠-다낙칸다’까지)의 다섯 구성요소는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로 축약됩니다.

    • * 이것들은 ‘루-뿌빠-다-낙칸다’부터 ‘윈냐-누빠-다낙칸다’까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 예를 들어, “Idha, bhikkhu, sutavā ariyasāvako rūpaṁ pajānāti, rūpasamudayaṁ … rūpanirodhaṁ … rūpanirodhagāminiṁ paṭipadaṁ pajānāti” 구절이 ‘Vijjā Sutta (SN 22.114)’에 나타납니다. 여기서, 루-빠 니로다(rūpa nirodha)외부 루-빠의 소멸이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로 인해 마음에 일어나는 ‘마음이 만든 루-빠’의 소멸, 즉 ‘루-뿌빠-다-낙칸다’의 소멸을 말합니다. 루-빠 니로다’는 사람이 아라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 발생하며, 이때 ‘마음이 만든 루-빠’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습니다

    • * 따라서, 루-빠부터 윈냐-나까지 다섯 가지 구성요소가 숫따에 나타날 때마다, 그것들은 거의 항상 루-뿌빠-다-낙칸다부터 윈냐-누빠-다-낙칸다를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보는 것에는 외부 루빠뿐만 아니라 빤짜 우빠-다-낙칸다가 포함된다

     

    2. 그러므로, ‘루빠(rupa)’는 ‘외부 루빠’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루빠를 경험할 때 마음에 일어나는, 그것에 관한 정신적 측면을 지칭합니다. 

     

    • * 예를 들어, ‘보는 것’이 단순히 X라는 사람의 모습을 포착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쉬운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 X가 다가 오는 것을 A가 보는 ‘시각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A가 X를 한 번만 봐도 자신의 친구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순간, A에게 기쁜 감정이 일어나고 미소를 짓습니다.

    • * 비록 이것이 ‘감각 입력’의 단순한 예일지라도, 우리는 A가 X를 보았을 때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살펴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A의 마음은 과거의 광경을 상기하고 그가 본 모습을 친구 X의 모습과 비교합니다. 그 인식은 산냐-의 근본적인 수준입니다. 이를 위해 A의 마음은 ‘루빠 무더기의 과거(아띠따, atita) 요소, 또는 더 정확하게는 ‘루-빠 우빠-다-낙칸다의 과거(atita) 요소’를 사용했습니다. 친구로 인식하는 것은 즐거운 느낌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모든 감각 사건은 빤쭈빠-다-낙칸다, 즉 다섯 가지 요소 모두를 수반합니다.   

    • * 더 많은 예를 보려면, ‘정말 놀라운 속도로 빠른 생각(찟따)의 순간적 진화’를 참조하세요.

    • * 이것은 이해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 포스트들, ‘루빠와 그 진정한 의미’,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나는 웨-다나-(느낌)’, ‘산냐-와 그 진정한 의미’, ‘상카-라와 그 진정한 의미’, ‘윈냐-나와 그 진정한 의미’, ‘딧테 딧타맛땅 바윗사띠 ㅡ 산냐-와 관계’, ‘산딧티꼬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을 참고하여 명확하게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빤쭈빠-다-낙칸다가 없으면 들러붙음은 발생하지 않는다 

     

    3. 많은 사람들이 빤짝칸다에 마음이 들러붙을 때 빤쭈빠-다-낙칸다가 일어난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빠-다-나가 없는) 빤짝칸다는 오염되지 않은 마음(‘빠밧사라’ 마음이라고 함, ‘괴로움 없는(빠밧사라)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참조)을 나타내며, 그런 마음은 어떤 것에도 들러붙을 수 없습니다.  

     

    • * 우리가 위 #1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붓다께서는 거의 항상 빤짝칸다(pañcakkhandha)가 아닌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를 논의하셨습니다.

    • * 붓다께서는 빤쭈빠-다-낙칸다를 지닌 마음이 어떻게 정화될 수 있는지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빤쭈빠-다-낙칸다에서 ‘우빠-다-나(upādāna)’(들러붙음/갈망) 측면을 제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빤짝칸다가 아니라면 마음이 어떻게 감각 입력에 집착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아윗자-를 촉발할까요? (그리고 무엇이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와 함께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을 시작할까요?) 빤쭈빠-다-낙칸다 그 자체일까요? 

     

    마하-뿐나마 숫따(MN 109)

     

    4. ‘Mahāpuṇṇama Sutta (MN 109)’에서, 빅쿠가 붓다께 물었습니다. “반테, 그 들러붙음/움켜짐(우빠-다-나)은 빤쭈빠-다-낙칸다에 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움켜쥠은 빤쭈빠-다-낙칸다가 아닌 다른 것에도 일어납니까?” (빠알리 버전: “Taṁyeva nu kho, bhante, upādānaṁ te pañcupādānakkhandhā, udāhu aññatra pañcahupādānakkhandhehi upādānan’ti?”)

     

    • * 부처님의 답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 움켜쥠(우빠-다-나)는 (직접적으로) 빤쭈빠-다-낙칸다-에 대한 것이 아니지만, 빤쭈빠-다-낙칸다가 없다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Na kho, bhikkhu, taṁyeva upādānaṁ te pañcupādānakkhandhā, nāpi aññatra pañcahupādānakkhandhehi upādānaṁ“)

    • * 이것은 이해해야 할 중요한 점입니다. 붓다께서는 움켜쥠이 직접적으로 빤쭈빠-다-낙칸다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빤쭈빠-다-낙칸다가 없다면 움켜쥠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라한에게는 들러붙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뿌툿자나에게는 들러붙음이 일어납니다.

    • * 다시 말해, 그 들러붙음에는 촉발자가 있습니다. 그 촉발자는 그 다음 구절에서 설명됩니다.

     

    5. 그 다음,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더 설명하셨습니다. “들러붙음(더 정확하게는, 의식적인 들러붙음 즉 우빠-다-나)은 직접적으로 빤쭈빠-다-낙칸다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들러붙음 또는 움켜쥠, 즉 우빠-다-나는 빤쭈빠-다-낙칸다에 대한 찬다라-가(chandarāga)로 인한 것이다. (Yo kho, bhikkh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chandarāgo taṁ tattha upādānan’ti)”

     

    • * 이제, 의문은 ‘그 찬다라-가가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인가?’입니다. 그것은 (까-마 로까의 ‘까-마 산냐-’인) ‘왜곡된 산냐-’입니다!

    • * 이것이 바로 그 숫따에 숨겨진 중요한 요점입니다!

    • * 동일한 설명이 Cūḷavedalla Sutta (MN 44)’에 주어져 있는데, 정확히 동일한 구절입니다.

    • * 그러나, 그 촉발자는 많은 다른 숫따에서 논의됩니다. 

     

    촉발자는 (까-마 로까)의 까-마 산냐-다!

     

    6. 그 촉발자(‘까-마 산냐-’)는 많은 숫따에서 논의됩니다. 문제는 그 심오한 숫따가 영어로 (또는 싱할라어로도)  바르게 번역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7. 그러므로, 물-라빠리야-야 숫따와 이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인 산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다른 많은 숫따들이 있습니다. 마음은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매력적인 외부 세계를 나타내도록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지만, 외부 세계는 궁극적 실재에서는 그런 매력이 전혀 없습니다. 빠라맛타(paramattha, ‘parama’ + ‘attha’)는 ‘궁극적 진리’를 의미합니다.   

     

    • * 예를 들어, 우리가 화려한 세상을 보더라도 세상에는 색깔이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장미의 ‘붉은 색’은 ‘왜곡된 또는 거짓된 산냐’’입니다.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맛, 냄새, 소리, 그리고 신체 접촉은 ‘까-마 산냐-(kāma saññā)’ 때문입니다.

    • * ‘색깔은 (까-마 산냐-로 인해) 마음이 만든 것이다’ 포스트를 적극 추천합니다. 그 포스트는 (우리를 유혹하는) 대상의 색깔은 ‘마음이 만든’ 것이며, 대상 자체 또는 빛과 관련없다는 것을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보여줍니다. 

    • * 맛이나 냄새와 같은 다른 모든 ‘매력적인 감각 자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안에 내재된 ‘까-마 산냐-’로 인해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 * 그러므로, 까-마 산냐-는 까-마 로까에서 찬다라-가(chandarāga)로 들러붙은 것으로 이어지는 촉발자입니다. 그러나, 아라한에게는 찬다라-가빤쭈빠-다-낙칸다도 없기 때문에 들러붙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환상적인 감각적 즐거움에 속는다

     

    8. 이것은 완전히 이해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꽃에 색깔이 없다면, 우리가 꽃에 들러붙을까요? 어떤 음식이 맛없다면, 우리가 그것을 먹고 싶어할까요? 다른 모든 감각 접촉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감각 접촉도 참된 ‘즐거운 감각’을 유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들에 들러붙을까요?  

     

    • * 다른 매우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조사해보면, 그것들은 우리가 실제로 그런 ‘즐거운 감각’을 경험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예를 들어, 설탕이 달콤한 맛이 나는 것은 그것에 수크로우스 분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과학자들은 쉽게 말해 줄 것입니다.

    • * 그 때문에 붓다께서는 (과학자들과 같은) 그들과 토론을 벌여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확증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기술’(과학적 연구)에만 의존하여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 * 우리의 몸과 환경이 어떻게 생겨나서 내재된 산냐-로 ‘즐거운 감각’을 제공하는지 지혜롭게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담마 짝쿠(법안)’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 더욱이, ‘마음이 만든’ 즐거움을 영원히 쫓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냐-’가 마음이 만들어낸 신기루라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Pheṇapiṇḍūpama Sutta (SN 22.95)’에 설명된 것과 같음). 위 #6을 참조하세요. 

     

    붓다께서는 처음에 가르치시기를 주저하셨다

     

    9. 이것이 바로 붓다께서 붓다후드(Buddhahood)를 성취하신 후, 새롭게 발견하신 담마를 가르치지 않으려고 결정하신 이유입니다. 붓다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발견한 이 담마는 깊고,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평화롭고, 숭고하며, 세간의 논리 범위를 초월하고(atakkāvacaro), 미묘하여, 오직 지혜로운 자(paṇḍita)만이 이해할 수 있다.”

     

    • * 빠알리 구절: “adhigato kho myāyaṁ dhammo gambhīro duddaso duranubodho santo paṇīto atakkāvacaro nipuṇo paṇḍitavedanīyo.” ‘Brahmāyācana Sutta (SN 6.1)’를 참조하세요.

    • * 그 다음 몇 구절이 중요한데, “Ālayarāmā kho panāyaṁ pajā ālayaratā ālayasammuditā. Ālayarāmāya kho pana pajāya ālayaratāya ālayasammuditāya duddasaṁ idaṁ ṭhānaṁ yadidaṁ idappaccayatāpaṭiccasamuppādo. Idampi kho ṭhānaṁ duddasaṁ yadidaṁ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ṁ. Ahañceva kho pana dhammaṁ deseyyaṁ; pare ca me na ājāneyyuṁ; so mamassa kilamatho, sā mamassa vihesā”ti.”입니다.

    • * 번역: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 것에 쉽게 들러붙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즐긴다. 그들(duddasaṁ)은 이 이답빳짜야따- 빠띳짜 사뭅빠-다(idappaccayatā paṭicca samuppāda)를 보기 어렵다. 또한 상카-라의 생성을 멈추고(sabba saṅkhāra samatho), 모든 윤회의 속박을 끊고(sabba upadhi paṭinissaggo), 땅하-의 소멸(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이 어떻게 닙바-나(nibbāna)에 이르는지 보기도 어렵다. 그리고 내가 이 담마를 가르치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나는 가르치는데 지칠(vihesā) 뿐이다.”

    • * 그 다음, 숫따는 브라흐마 사함빠띠(Brahma Sahampati)가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을 때 붓다께서 결국 자신의 담마를 가르치는데 동의한 과정을 설명합니다(표식 5.1).

    • * 우리 부처님(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이전 부처님들도 새로 발견하신 담마를 처음에는 가르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위빳시 부처님으로 유사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Mahāpadāna Sutta (DN 14)’를 참조하세요. 이 숫따는 여러 이전 부처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위빳시 부처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우리는 ‘왜곡된 산냐-’ 문제를 다룰 때 조심해야 한다

     

    10. 우리가 이 모든 ‘감각적 즐거움’이 ‘마음이 만든’ 것임을 이해하게 되면, 그것을 ‘Alagaddūpama Sutta (MN 22)’의 ‘불타는 숯불 구덩이’에 비유하기가 쉽습니다. 그 소위 ‘감각적 즐거움’에 속아, 우리는 아빠-야-(apāyā)에 재탄생하는 아꾸살라 깜마(akusala kamma)를 저지릅니다!

     

    • * 그러나, ‘감각적 즐거움’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많은 유형의 ‘산냐-’가 우리 생존에 필수적입니다. 우리 몸은 주변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특정한 유형의 산냐-를 갖도록 설계되었습니다.

    • *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지 않는 한, 또는 그런 행위가 다른 이를 해치거나 ‘즐거운 행위’에 지나치게 빠져들 위험이 없다면, ‘감각적 즐거움’을 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붓다께서는 빅쿠나 재가자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빅쿠들에게 음식을 공양할 때, 그들은 영양가 있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려고 노력합니다.

    • *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색깔은 만들어졌다. 색깔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며 다채로운 대상을 무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익은 과일을 색깔(‘산냐-’)로 판단하여 따는 데, 이는 생과일을 먹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색깔 빛’의 신호등을 사용하지 않고는 사고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인간 삶을 사는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색깔있는 대상들의 예는 많습니다.

    • * 사실, 대부분의 동물은 생존을 위해 내재된 산냐-에 의존합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이런 측면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 * 붓다께서 담마를 다루는 것은 독사를 다루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Alagaddūpama Sutta (MN 22)’(숫따에서 관련 구절에 링크시켰음)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가르침을 지혜롭게 다루지 않으면,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뿌툿자나의 아윗자- ㅡ 산냐-와 관계

     

    11. 우리 모두는 뿌툿자나가 마음에 일어나는 라-가, 도사, 및 모하로 깜마를 축적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 우리는 또한 뿌툿자나가 ‘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즉 아윗자-(avijjā)로 인해 그것이 일어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 하지만 뿌툿자나가 모르는 ‘세상의 참된 본질’이 무엇일까요? 

    • * 우리는 그것이 여러 방법으로 설명되는 것을 들었는데, 사성제를 모름, 세상의 아닛짜, 둑카, 아낫따 본질을 모르는 것 등입니다.

    • * 예를 들어, ‘Avijjā Sutta (SN 56.17)’에서는 무지란 고통, 고통의 기원, 고통의 그침, 그리고 고통의 그침에 이르는 실천에 대해 모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Avijjā Sutta (SN 22.113)’에서는 무지란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이 루-빠(그리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 그것의 기원, 그것의 그침, 그리고 그것의 그침에 이르는 실천을 이해하지 못할 때”라고 합니다. ‘Avijjā Sutta (SN 45.1)’에서는 무지란 성스런 팔정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 * 위의 논의에서, 우리는 아윗자-(avijjā)의 또 다른 핵심 측면이 ‘왜곡된 산냐-’의 역할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물-라빠리야-야 숫따(Mūlapariyāya Sutta)’에서 강조되는데, 여기서 ‘물-라빠리야-야’는 ‘모든 것의 뿌리’를 의미합니다.

     

    산냐-는 아윗자-가 일어나게 하는 촉발자다

     

    12.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의 시작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과정의 시작과 동일합니다. 둘 다 산냐-(까-마 로까의 우리에게는 까-마 산냐-)에 의해 촉발된 아윗자-(avijjā)와 함께 일어납니다.

     

     

    빤쭈빠-다-낙칸다(또는 아윗자-)는 사띠빳타-나 부-미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13. 그리고, ‘까-마 산냐-를 극복 ㅡ 사띠빳타-나 부미 또는 자-나’ 포스트의 #12에서, 마음이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는 동안에는 빤쭈빠-다-낙칸다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켜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과 관련된 모든 유형의 ‘왜곡된 산냐-’(아윗자-와 빤짜니-와라나를 촉발함)가 거기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아윗자-가 일어나게 하는 촉발자가 사띠빳타-나 부-미에는 없습니다. 

     

    • * 이것이 바로 ‘까-마 산냐-’의 영향을 받지 않고 (소따빤나 단계 이상의 막가 팔라를 얻는 데 필요한) 심오한 담마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 * 삭까-야  딧티(잘못된 견해)는 소따빤나 단계에서 제거되지만, 삭까-야(빤쭈빠-다-낙칸다)는 아라한 단계에서만 그칩니다. 즉, 빤쭈빠-다-낙칸다는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시작될 수 없습니다.

    • * 아라한과를 이루는 순간에, 빤쭈빠-다-낙칸다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아라한은 세상에서 분리됩니다. 물론, 아라한이 태어났을 때 가지고 있던 육체는 죽을 때까지 살아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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