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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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자-나-띠, 빠자-나-띠, 아비자-나-띠 ㅡ 인간 이해의 더 나은 레벨

     

    원문: Buddha Dhamma 섹션의 ‘Vijānāti, Pajānāti, Abhijānātī – Better Levels of Human Understanding’ 포스트 

     

    보통 사람은 세상에 대한 두 가지 레벨의 이해, 즉 산자-나-띠(sañjānātī)와 위자-나-띠(vijānātī)를 지닙니다.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면, 빤냐-(paññā)에 기반한 더 높은 레벨의 이해인 빠자-나-띠(pajānātī)를 얻습니다. 붓다 또는 아라한은 아비자-나-띠(abhijānātī)라는 가장 높은 레벨에 도달합니다. 

     

    2026년 4월 17일 작성

     

    산자-나-띠 ㅡ 모든 유정체가 이것을 경험한다

     

    1. 이전 포스트(‘세상은 '마음이 만든' 인식(산냐-)에 따라 작동한다’)에서, 우리는 모든 유정체가 산자-나-띠를 통해 자동적으로 세상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논의했습니다. 까-마, 루-빠, 아루빠 로까에 있는 존재들에게 산자-나-띠(sañjānātī)는 각각 까-마 산냐-, 자-나 산냐-, 아루빠 사마-빳띠 산냐-를 통해 발생합니다. 

     

    • * 그리고, 가장 최근의 이전 포스트(‘산자-나-띠 ㅡ 동물들은 대부분 이 레벨로 이해한다’)에서, 우리는 동물(까-마 로까의 동물계에 있는 동물들)이 대부분 산자-나-띠에 기반하여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논의했습니다. 산자-나-띠는 두 가지 레벨에서 작동하는데, (i) 감각 입력에 대한 ‘타고난 감각’의 인식, (ii)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생을 최적화하는 ‘타고난 감각’입니다.

    • * 이 이전 포스트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일상적인 틀 안에서) 논리적으로 사고하여 산자-나띠에 대한 특정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논의했습니다. 이러한 ‘더 높은 차원’의 이해는 윈냐-나(viññāna)에 기반하며 위자-나-띠(vijānātī)라고 불립니다.

    • * ‘위자-나-띠’라는 두 번째 레벨은 모든 평범한 사람에게 가능합니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신피질을 가진) 발달된 뇌를 가지고 있어 ‘내재된’ 산냐-를 넘어 윈냐-나를 통해 사고할 수 있습니다.

    • * 그런 탐구를 바탕으로, 현대 과학은 최근 산자-나-띠에 기반한 이해 수준이 세계의 참된 본질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 탐구 결과들은 ‘루-빠 사무다야 ㅡ 마음에 의해 다채로운 세상이 창조된다’와 ‘인간의 삶은 무색채의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를 포함하여, 여러 포스트에서 논의되었습니다.

     

    산자-나-띠 ㅡ 두 가지 상반된 측면

     

    2. 필자가 여러 포스트에서 강조했듯이, 산냐-(saññā)는 각자가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타고난 감각’입니다.

     

    • * 여기서, ‘타고난 감각’이란 생각할 필요없이 자동적으로 마음에 ‘사실’(비록 많은 경우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로 떠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냐-는 본래 타고난 정신적 몸/육체에 붙어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은 각기 다른 종류의 산냐-를 지니고 있으며, 동물계 내에서도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 * 산자-나-띠(sañjānāti)라는 낱말은 ‘잘못된/왜곡된 인식’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그것이 세상의 참된 본질을 보여 준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붓다께서는 2600여년 전에 가리켜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에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산냐-에 기반한) 산자-나-띠의 첫 번째 측면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적입니다. ‘인간의 삶은 무색채의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를 참조하세요.

    • * 붓다께서는 그런 잘못된 ‘타고난 감각’이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자동적으로 일어나 세상의 31개 영역, 즉 까-마, 루-빠, 아루빠의 각 영역에서 삶을 유지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를 들어, 자-나에 있을 때에는 일시적으로 까-마 산냐-를 극복하고 자-나 산냐-를 갖게 되지만, 이것 또한 ‘이 세상’에 속한 것이지 닙바-나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나 산냐-는 까-마 산냐-보다 더 나은 산냐-의 형태입니다.

    • * 특정한 산냐- 세트가 각 영역의 삶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또한 재탄생 과정을 영속화하여 미래의 고통을 영속화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붓다께서는 산자-나-띠의 그 두 번째 측면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경험된 앗사-다(감각적 즐거움)는 대부분 마음이 만든 것이다’와, ‘아닛짜는 '마음이 만든' 앗사-다가 본질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외부 루-빠’는 산냐-만을 유발하고, ‘마음이 만든 루-빠’는 들러붙음을 유도한다

     

    3. 현대 과학이 증명했듯이, 세상에는 색깔이 있거나, 맛있거나, 냄새나는 것이나, 듣기 좋은 음악이나, 유쾌/불쾌한 감촉이 없습니다. 하지만, 외부 세계에는 사물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사과는 사과 나무에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사과나 나무 자체에는 색깔이 없습니다.

     

    • * 더 놀라운 사실은, 태양이 여전히 ‘햇빛’(전자기파)을 방출하더라도, 인간 레벨의 ‘까-마 산냐-’가 없다면 우리는 빛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의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과학이 확인한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놀라운 사실입니다. 빛/색깔의 산냐-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 * 그런 세상에서는 인간의 삶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빠띳짜 사뭅빠-다(자연)는 우리의 눈, 뇌, 그리고 마노마야 까-야(간답바)를 통해 ‘빛의 환상’을 주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 * 자연이 세상과 우리를 그렇게 설계한 것은 오직 우리(모든 인간)가 그런 광경, 소리, 음악 등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빠띳짜 사뭅빠-다의 기본입니다.

    • *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고 이를 멈추기 전까지는, 우리의 삶은 재탄생의 순환 속에서 무한히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재탄생이 아빠-야-(apāy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좋지 않습니다. (빠자-나-띠의 레벨에서) ‘지혜로 그 진실을 깨달은’ 소따빤나는 아빠-야-에 재탄생하는 것에서 벗어납니다.

    • * 아라한은 (가장 높은 아비자-나-띠 레벨에서) 이를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재탄생의 사이클이 끝나는 것입니다. ‘둑카 ㅡ 괴로움에 대해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진리’를 참조하세요. 

     

    아라한은 까-마 산냐-를 잃지 않고, 오직 땅하-만 잃는다

     

    4. 재탄생 과정에서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외부 루-빠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외부 루-빠(감각 입력)는 색깔, 맛, 냄새, 음색, 또는 ‘쾌적한 감촉’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들이 좋아함을 생성할 수 있을까요?

     

    • * 색깔, 맛 등의 산냐-를 생성하는 것은 우리 삶에 필수적이지만(이는 좋은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서는 훨씬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합니다. 땅하-로 (왜곡된 산냐-, 즉 산자-나-띠에 기반한) 다채롭고 맛있는 ‘마음이 만든’ 루-빠에 대한 들러붙음이 미래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하-는 오직 ‘감각적 즐거움’이 환상이며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만 제거될 수 있습니다.

    • * 그것이 완전히 이해되면, 마음은 유정체를 재탄생 사이클에 묶는 열 가지 상요자나를 모두 차례로 끊어낼 수 있습니다. 그 후, 아라한은 그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들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땅하-(들러붙음)를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 * 우리가 논의한 바와 같이, 아라한도 딸기를 빨갛게 보고 달콤하게 느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딸기의 ‘붉음’과 ‘단맛’을 자동으로 생성하는) 산자-나-띠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산자-나-띠는 모든 유정체에게 내재되어 있으며, 살아 있는 아라한은 이에 상응하는 ‘까-마 산냐-’를 경험합니다. ‘들러붙음의 기원 ㅡ 라-가는 산냐-에 의해 촉발된다’와 ‘땅하- ㅡ 산냐-는 마음이 만든 웨다나-로 이어짐’을 참조하세요.

    • * 아라한의 마음은 색깔, 맛, 냄새 등 어떤 감각에도 들러붙지 않습니다. 이는 아라한이 특히 (재탄생 과정의 열 가지 족쇄 중의 하나인) 까-마 라-가 상요자나(kāma rāga saṁyojana)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깜마 니로다 ㅡ 이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참조하세요.

     

    산자-나-띠에서 위자-나-띠로 그리고 빠자-나-띠로

     

    5. 유정체가 적어도 위자-나-띠의 능력이 없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없고 빠자-나-띠의 레벨, 즉 소따빤나에 이를 수 없습니다. 

     

    • * 그렇기 때문에 네 가지 아빠-야-(동물 포함)에 속한 유정체들은 빠자-나-띠의 레벨에 이를 수 없습니다.

    • * 동물은 산자-나-띠만 있고 위자-나-띠는 없습니다. ‘산자-나-띠 ㅡ 동물들은 대부분 이 레벨로 이해한다’을 참조하세요. 인간은 더 높은 레벨의 위자-나-띠를 가질 수 있지만, 다섯 가지 장애(빤짜 니-와라나)로 인해 항상 마음이 흐려져 있으므로 이성적 사고 능력이 제한적입니다.

    • * 빠자-나-띠와 아비자-나-띠를 통한 더욱 높은 레벨의 이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의 참된 본질’을 이해한 자에게만 가능합니다. (i) 감각적 즐거움의 환상적 본질(즉, 아닛짜 특성)과, (ii) 그것이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면, 마음은 일시적으로 빤짜 니-와라나(pañca nīvaraṇa)에서 벗어나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합니다. 과학자들이 (i)은 이해하지만 (ii)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주목하세요.

    • * 인간계 또는 그 이상의 영역에 있는 유정체들은 위자-나-띠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위자-나-띠를 바탕으로 삶을 개선하는 많은 발명품(바퀴, 전기, 인터넷 등)을 만들어냈습니다.

    • * 이처럼 향상된 이해 수준(위자-나-띠)은 감각 경험을 통한 타고난 세상 감각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현대 과학이 발견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과학은 루-빠가 ‘마음이 만든 것’임을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6. 최근 현대 과학은 우리의 오감이 모두 ‘세상의 참된 본질’을 정확히 나타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다시 말해, 위자-나-띠는 산자-나-띠의 결함을 명확히 했습니다. ‘마음이 만든 인식이 없다면, 세상에는 색깔도 소리도 맛도 냄새도 감촉도 없다’을 참조하세요.

     

    • * 그 포스트에서 논의했듯이, 우리는 딸기를 ‘빨갛고’ ‘달콤하다’고 인식하지만, 실제로 외부 세계의 딸기에는 색깔도 맛도 없습니다. 그 포스트를 주의 깊게 읽고 직접 조사하여 이 중요한 사실을 확인해 보세요.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은 바로 이 중요한 사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 * 이는 우리가 마음으로 경험하는 루-빠가 외부 세계에 있는 루-빠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 위의 예에서, 세상의 딸기는 본질적인 ‘붉은색’이나 ‘단맛’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완나 루-빠(vaṇṇa rūpa)는 ‘붉은 딸기’이고,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라사 루-빠(rasa rūpa)는 ‘단맛’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위 예에서는 색깔이나 맛이 없는) 외부 루-빠와 (위의 예에서는 색깔과 맛이 있는) 숫따에 따른 루-빠 사이의 차이입니다.

    • * 많은 분들이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 ㅡ 대부분 오해임’와 ‘루빠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를 읽었을지 모르지만, 그 차이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숫따에 나타나는 ‘루-빠’(마음이 만든 버전)과 세상에 있는 ‘외부 루-빠’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셨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만든 루-빠’와 ‘외부 루-빠’ 사이의 극명한 차이

     

    7. 이제 모든 분들이 ‘바깥 세상’에 있는 ‘외부 루-빠’와 마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상응하는 ‘루-빠’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이해하셨기를 바랍니다.

     

    • * 부처님 시대에( 그리고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것(광경, 소리, 맛, 등)이 실제로 외부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딸기는 빨갛고 단맛이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 * 현대 과학이 외부 사물(대상)에 색깔이 없고, 음식에 맛이나 냄새 등이 없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된 것은 불과 지난 수십 년 사이의 일입니다. ‘마음이 만든 인식이 없다면, 세상에는 색깔도 소리도 맛도 냄새도 감촉도 없다’를 참조하세요.

    • *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연구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신경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퀄리아(qualia)’와 같은 전문 용어 때문에 과학적 발견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3년 넘게 해왔지만, 포스트를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위자-나-띠에서 빠자-나-띠로 가는 큰 발걸음이다

     

    8. 놀랄 일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수많은 생을 그 ‘위빠리-따 / 왜곡된 산냐-’ 속에서 살아왔기에, 이 새롭고 놀라운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각적 즐거움’이 허구임을 고려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우울해지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우울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붓다께서 “감각적 즐거움은 작은 만족감과 큰 고통과 괴로움을 준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Alagaddūpama Sutta (MN 22)’을 비롯한 여러 숫따에 나옵니다. ‘감각적 즐거움’의 이런 ‘환상적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되기를 바랍니다.  

     

    • * 이것이 바로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새롭게 깨달으신 세계관을 가르치는 것을 꺼리셨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 * ‘Brahmāyācana Sutta (SN 6.1)’에서, 붓다께서는 보통 인간(뿌툿자나)이 자신의 가르침의 타당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표식 1.5부터 그 이유를 설명하시는데, 그 구절은 “그러나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에 집착하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사랑하고 즐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 * 특히 부처님 시대에는, 사람들은 감각 경험이 환상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현대 과학이 이를 입증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놀라운 발견은 ‘퀄리아(qualia)’라는 전문 용어에 가려져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 * 색깔, 냄새, 맛 등으로 이루어진 ‘경험된 현실’은 마음에서(의식은 뇌에서 일어난다고 믿는 많은 과학자들에 따르면, 뇌에서) 생성됩니다.

     

    위자-나-띠에서 빠자-나-띠로 전환하기 어려운 이유

     

    9. 과학자들은 재탄생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를 걱정할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색깔, 맛 등의 지각(산냐-)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화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생명은 비활성 분자들이 더 복잡한 형태로 변형되면서 시작되었고, 지각과 다른 ‘정신적 실재’(다양한 종류의 산냐-뿐만 아니라 기쁨과 슬픔과 같은 느낌을 포함)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 * 물론, 그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즉 복잡한 분자 덩어리가 어떻게 느낌, 지각, 그리고 의식을 발생킬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의식의 난제’라고 부릅니다. 과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난관에 갇혀 있었고, 비활성 물질이 의식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할 때까지 이 난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 * 대부분의 사람들은 색깔, 맛 등이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과학적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퀄리아’라는 전문 용어에 가려져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여전히 색깔이 사물이나 햇빛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 * 이것이 바로 과학자들이 가진 위자-나-띠(vijānātī) 레벨의 이해로는 빠자-나-띠(pajānātī) 레벨에 도달하기에 여전히 부족한 이유입니다. 위 #5를 참조하세요. 그 과학자들(모두 뿌툿자나)은 육체의 죽음으로 생명이 끝난다는 믿음에 기반한 열 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식이 뇌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 내재된 즐거움을 즐기지 않는가?

     

    10. 어떤 이들은 ‘왜곡된 산냐-’ 문제를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즐거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은 뇌/마음이 세상 것에 매력적인 색깔이나 맛 등을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색깔 있는 것들을 보는 것은 그것이 본래 그런 색깔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우리를 속여 그렇게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특히 어떤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들을 즐기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 *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그런 볼 거리, 음식, 음악 등을 즐기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

    • *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 접근 방식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i) 만약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않고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내생에서 결과가 덜 심각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생에 어떤 깜마를 지었는지 알 수 없으며, 그 깜마는 여전히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 중의 일부는 아빠-야-(악처)에 재탄생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ii) 만약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당연히 아빠-야-에 재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 * 재탄생 과정이 없다면 당연히 이 두 가지 모두 무효화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할 필요조차 없게 됩니다.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만으로도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 즉 ‘세속 불교도’들이 많습니다. ‘재탄생(윤회)과 닙바-나(열반)가 없는 불교는?’의 #3을 참조하세요. 이런 세속 불교도들은 열 가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세간 팔정도’에도 있지 못합니다. ‘밋차- 딧티, 간답바, 및 소-따빤나 단계’를 참조하세요.   

     

    현생에 미치는 영향

     

    11. 재탄생 과정의 타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현생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 * 우선, 그런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며 행하는 모든 부도덕한 행위는 이 생 자체에서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거짓말, 도둑질, 성적 부정행위, 심지어 살인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알고 있습니다! 모든 범죄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들러붙음에서 비롯됩니다.

    • * 다음을 생각해 보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술쇼가 착시 현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즐겨 봅니다. 유일하게 분명한 이점은 일시적인 ‘즐거운 마음 상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술쇼(또는 영화)를 끊임없이 계속 본다면 금방 질려버릴 것입니다.

    • * 인생의 즐거운 순간들이 마치 ‘끊임없이 펼쳐지는 마술쇼’와 같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싫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마술쇼나 영화를 몇 시간 동안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진지한/중대한 일(노력)입니다.

    • * 하지만, 재탄생 과정이 자연의 섭리라면, (유혹때문에 행한 악업으로 인해)  수십억년 동안 고통스러운 아빠-야-에 머물 수 있기 때문에, 재탄생 과정에 대한 함의는 더욱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다

     

    12. 이 세상에 대한 사성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에 대한 열 가지 잘못된 견해를 버려야 합니다. 그 잘못된 견해의 대부분은 재탄생이 없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밋차- 딧티, 간답바, 및 소-따빤나 단계’를 참조하세요.

     

    • * 열 가지 잘못된 견해 중의 많은 부분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는 삶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 * 그러한 견해는 의식과 관련된 정신 현상, 느낌(웨다나-)과 지각(산냐-) 등이 뇌에서 발생한다는 견해와 동일합니다.

    • * 비록 그런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많은 과학자들을 포함) 대부분이 도덕적일지라도, 그러한 사고방식은 특히 감각적 즐거움의 유혹에 빠졌을 때 부도덕한 행위에 쉽게 빠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많은 ‘도덕적인 사람들’이 거액의 뇌물이나 성적인 상황과 같은 다양한 상황에서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소따빤나에게도 까-마 산냐-를 극복하기가 어렵다

     

    13. 감각적 즐거움이 환상임을 이해하는 사람들(즉, 소따빤나)도 까-마 산냐-(kāma saññā)를 극복하고 아나-가-미에 이르기가 어렵습니다. 소따빤나는 잘못된 견해만 제거했을 뿐, 까-마 산냐-에 대한 땅하-(taṇhā)를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 * 이것이 바로 성스런 길이 삼마 딧티(‘위빠리-따 산냐-’를 이해)에서 시작되는 이유입니다. 소따빤나는 ‘위빠리-따 산냐-’(우리의 까-마 로까에서는 ‘까-마 산냐-’)를 극복하고 아나-가-미 단계에 이르기 위해 사띠빳타-나를 육성해야 합니다.

    • * 붓다께서 (여러 숫따에서 설명하신) 루-빠에 대한 설명도 영어권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와하라까 테로님도 산냐-(saññā)의 결정적인 역할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 * 이제, 우리의 논의와 관련된 몇 가지 숫따의 내용, 즉 숫따에서 루-빠는 ‘마음이 만든 루-빠’와 ‘외부 루-빠’를 모두 지칭한다는 사실을 살펴 보겠습니다. 물론, 붓다께서는 현대 과학처럼 ‘세속적으로 검증 가능한 증거’ 없이 말씀해야 하셨습니다.

     

    숫따에서 지칭하는 루-빠는 ‘외부 루-빠’가 아니다

     

    14. 붓다께서 ‘루-빠(rūpa)’라는 용어로 무엇을 의미하셨는지 논하는 몇 가지 숫따를 살펴보겠습니다. 

     

    • * ‘Khajjanīya Sutta (SN 22.79)’에서, 붓다께서는 루-빠를 “Ruppatīti kho, bhikkhave, tasmā ‘rūpan’ti vuccati.”로 정의하셨습니다. 여기서 핵심 낱말은 ‘룹빠띠(ruppatī)’입니다. 링크된 주소의 영어 번역에서는 이를 ‘deformed(변형된, 기형의)’로 번역했지만, 룹빠띠(ruppatī)의 정확한 의미는 ‘고통으로 이끄는 것’과 같은 어떤 것입니다.

    • * 그 다음 구절은 그 정의를 명확히 하지만, 링크된 주소의 영어 번역 역시 번역자 자신이 루-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 만든 루-빠에 들러붙음의 결과로, 추위, 더위, 굶주림, 갈증으로 고통 받고, 파리, 모기, 바람, 햇볕, 파충류 등과의 접촉으로 변형된다.”, 그것은 루-빠의 환상적 본질을 깨닫기 전까지는 재탄생 과정에 갇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 * 따라서, ‘룹빳띠(ruppatī)’는 아닛짜(anicca)아낫따(anatta)처럼 상응하는 낱말이 영어에 없습니다. 이러한 낱말들의 의미는 자세히 설명되어야 합니다.  

     

    15. 숫따의 표식 11.2에서, “rūpaṁ niccaṁ vā aniccaṁ vā’ ti?”, 즉 “루-빠는 닛짜(nicca) 본질인가, 아니면 아닛짜(anicca) 본질인가?”라고 묻습니다.

     

    • * 답변은 ‘루-빠는 아닛짜 본질이다’입니다. 그리고 (아닛짜 본질의) 루-빠에 들러붙으면 미래 고통으로 이어진다고 설명됩니다. 루-빠의 아닛짜 본질은 그것이 잘못된/왜곡된 산냐-를 통해 전적으로 마음이 만들고 무색, 무미한 감각 입력의 참된 본질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아닛짜는 '마음이 만든' 앗사-다가 본질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을 참조하세요.

    • * 그것을 알면, 그런 루빠를 ‘이것은 내 것이다, 나는 이것이다, 이것은 나의 이득/행복을 위한 것이다’(‘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 ti)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명백한 답은 ‘아니오’입니다.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ㅡ 땅하-, 마-나, 딧티와 관계’을 참조하세요.

    • * (마음을 즐겁게 하는 색깔, 맛, 냄새 등을 가진) ‘마음이 만든 루-빠’는 사람을 부도덕한 행위로 이끌어 미래 고통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또 다른 ‘복합어’로는 ‘캇자니-야(khajjanīya)’가 있는데, 이는 ‘누군가의 몰락, 파멸 또는 고통으로 이끄는 것’을 의미합니다. ‘캇자니-야(khajjanīya)’는 문자 그대로는 ‘멸망하다’는 의미로, ‘먹히다’를 의미합니다.

    • * 숫따의 나머지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있는데, 읽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포럼에서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 숫따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다른 숫따 몇 개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룹빠띠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더 많은 숫따들

     

    16. ‘Piṅgiyamāṇavapucchā (Snp 5.17)’에서는 “Ruppanti rūpesu janā pamattā; Tasmā tuvaṁ piṅgiya appamatto.”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태만한 이들은 루-빠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러므로, 삥기야여, 부지런히 노력하여 루-빠를 포기하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요한 것은 외부 루-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루-빠’만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딸기를 먹는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딸기의 맛이나 색깔에 대한 갈망을 버리면 됩니다.

     

    • * ‘Sunakkhatta Sutta (MN 105)’에서, “taṇhā kho sallaṁ samaṇena vuttaṁ, avijjāvisadoso chandarāgabyāpādena ruppati,” 구절은  “붓다께서는 갈망은 창과 같고, 무지의 독은 욕망과 악의에 의해 고통받아진다.”로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 * ‘Upaṭṭhāna Sutta (SN 9.2)’에서, “salla viddhassa ruppato”라는 구절은 “창에 찔렸을 때 고통받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이 ‘Kāma Sutta (Snp 4.1)’에도 있습니다.  “salla viddhova ruppati”라는 구절 역시  “창에 찔렸을 때 고통받음”을 의미합니다.

    • * 비슷한 구절이 있는 또 다른 숫따로 ‘Uṭṭhāna Sutta (Snp 2.10)’이 있습니다. 또한 위 #6의 말미에 있는 링크들을 참조하세요.

    • * 마지막으로, ‘마음이 만든 루-빠’를 경험하는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아라한들도 그런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달리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무색채의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을 참조하세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루-빠에 대한 들러붙음을 점차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지력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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