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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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빠-나사띠 ㅡ 마음챙김(사띠)은 붓다 세계관에 기반한다

     

    원문: '숫따(경) 해석' 섹션의 ‘Ānāpānasati – Mindfulness (Sati) Based on Buddha’s Worldview’ 포스트 

     

    아-나-빠-나사띠 숫따(Ānāpānasati Sutta)에서 아-나-빠-나사띠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는 삼마- 사띠(까-마 산냐-에서 벗어남)를 확립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더 높은 막가 팔라를 얻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단계는 마하-사띠빳타-나 숫따(Mahāsatipaṭṭhāna Sutta)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2026년 5월 15일 작성

     

    아-나-빠-나사띠의 첫 번째 단계의 개요

     

    1. 이전 포스트인 ‘아-나-빠-나 ㅡ 붓다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세간 견해를 버림’에서, 아나-빠-나(āna + āpāna)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아-나-빠-나사띠의 첫 번째 단계를 논의했습니다.

     

    • * 세상 것에 들러붙는 것의 헛됨/위험함을 지혜로 봄(‘pajānāti’)으로써(‘vijānāti’에서 ‘pajānāti’의 초기 단계로 전환하는 것) 소따-빤나 단계에 이릅니다. 위자-나-띠(vijānāti)와 빠자-나-띠(pajānāti)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인지 모드 ㅡ 산자-나-띠, 위자-나-띠, 빠자-나-띠’와 ‘아비자-나-띠( 위자-나-띠, 빠자-나-띠, 아비자-나-띠 ㅡ 인간 이해의 더 나은 레벨’를 참조하세요.

    • * 간단히 말해, ‘위자-나-띠’는 뿌툿자나(범부)의 이해를 의미하고, ‘빠자-나-띠’는 소따-빤나 이상의 성자의 더 나은 이해를 의미합니다. 

    • * 우리는 탐함이 (마음이 만든) 수카 웨다나-를 생성할 때 탐함으로 들러붙습니다. 성냄을 통한 들러붙음은 (마음이 만든) 둑카 웨다나-에 기반합니다. 논의했듯이, 이런 웨다나-는 마나-빠(manāpa)와 아마나-빠(amanāpa)에서 시작되는데, 이는 수카 웨다나-와 둑카 웨다나-보다 훨씬 약한데(단지 미미한 좋아함/싫어함), 마음 자체가 이것들을 ‘즐거움’이나 ‘고통’으로 높입니다. ‘까-마 앗사-다와 고통은 대부분 마음이 만든 것이다’를 참조하세요.

    • * 그러나, 붓다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한 무지(아윗자- 또는 모하) 때문에 다른 모든 감각 입력(단지 중립적인 웨다나-, 즉 아둑카마수카 웨다나-를 생성함)에도 들러붙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탐함이나 성냄(둘 다 아윗자-에 뿌리를 둠)에서 일어나는 들러붙음(땅하-)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순수한 아윗자-, 즉 탐함이나 성냄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들러붙음을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립 웨다나-’를 통해서도 들러붙는 이유

     

    2. 소따-빤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중립 웨다나-에 대한 들러붙음도 왜 위험한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마음을 닙바-나에서 멀어지게 하고 ‘세상’에 묶기 때문입니다.  

     

    • * 예를 들어, 파란 하늘이나 초록 잔디밭을 볼 때,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하늘은 파랗고 잔디는 초록색이라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 * 하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풀에는 색깔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에도 색깔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무엇에도 본질적인 맛, 냄새, 음색 또는 감촉이 없습니다. 따라서, 색깔은 마음에 의해 생성된 ‘까-마 산냐-’의 일부입니다.

    • * 현대 과학은 최근에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마음이 만든 인식이 없다면, 세상에는 색깔도 소리도 맛도 냄새도 감촉도 없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불행히도 과학자들은 이를 ‘진화론’으로 설명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방향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지만, ‘완전한 설명’은 오직 부처님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 * 이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색깔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색깔이 없다는 것은 흑백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무색채의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을 참조하세요. ‘색깔에 대한 인식’은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우리(모든 유정체)에게 구축됩니다.  

     

    까-마 산냐-는 라-가, 도사, 모하/아윗자-를 통해 들러붙음을 촉발시킨다

     

    3. 제가 위 #2에서 요약한 내용이 소따-빤나가 되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붓다 세계관이라는 점을 가리켜 보이고 싶었습니다.

     

    • *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러한 구체적인 분석을 거치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몇 번의 설법만으로 소따-빤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전생에 ‘빠-라미따-(pāramitā)’를 충족했고 ‘약간의 도움’만 필요했습니다.

    • * 오늘날에는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현대 과학이 부처님의 세계관을 입증해 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 다음 포스트부터는 부처님의 세계관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의 핵심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아-나-빠-나사띠 숫따의 개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로까 산냐-’는 사띠빳타-나 부-미에는 없다

     

    4. 우리 마음은 내장된 ‘까-마 산냐-’를 통해 ‘풀을 초록색이다’ 또는 ‘하늘은 파란색이다’라는 인식을 자동으로 만들어냅니다.

     

    • * 우리는 ‘까-마 로까’에서 ‘까-마 산냐’를 경험하는 한편, 루빠 로까와 아루빠 로까에 있는 브라흐마들은 ‘자-나 산냐-’와 ‘아루빠 사마-빳띠 산냐-’를 경험합니다. 세 가지 모든 유형의 산냐-는 세상에 속하는데, 이를 합하여 ‘로까 산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 인간으로서, 우리는 까-마 산냐-를 극복하여 ‘허구의 인식’을 피해야 합니다. 사띠빳타-나의 육성은 마음을 까-마 산냐-에서 벗어나 사띠빳타-나 부-미에 이르게 합니다.     

    • * 그때에 까-마 산냐-로부터 방해가 없이 통찰 명상(위빠사나-)을 행할 수 있습니다. 

     

    사띠빳타-나- 부-미 ㅡ 사마타가 있는 곳

     

    5.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에 대해 알았든 몰랐든, 마음은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는 순간에 처음으로 그 안에 들어갑니다. 이는 설법을 듣거나 배운 담마 개념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찰나의 순간에 일어납니다.  

     

    • * 마음이 온전히 담마 개념에 집중되면, 다른 세속적 생각에 빠질 틈이 없습니다. 이전 포스트(아-나-빠-나 ㅡ 붓다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세간 견해를 버림)에서 가리켜 보였듯이, 호흡에 집중하는 것은 탐함과 성냄의 생각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무지의 생각을 억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호흡’ 또한 ‘이 세상’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 * 사띠빳타-나 부-미는 우리 안에 구축된 ‘까-마 산냐-’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지는 곳입니다.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는 동안에는 ‘까-마 산냐-’가 아윗자-를 촉발시킬 수 없으므로, 아윗자-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사마타(Samatha) 상태’입니다.

    • * 다음 도표는 이 핵심을 설명합니다.

       

    영문 도표 다운로드/인쇄: ‘Overcoming Kāma Saññā -3’ 

     

    • *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경우(그리고 하늘이 정말 파랗다고 생각하고 속는 경우), (마음이 뿌라-나 깜마 단계를 넘어서 오염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재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강력한 깜마’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자동적으로 ‘뿌라-나 깜마’ 단계에 들어감으로써 ‘까-마 로까’ 안으로 여전히 들어갑니다. 이는 위의 도표에서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지만, 향후 포스트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겠습니다.  

     

    붓다 담마에서 사마타

     

    6. ‘Samathavipassanā Sutta (SN 43.2)’에서는 닙바-나에 이르는 길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위빠사나-를 육성하려면 ‘까-마 산냐-를 극복하고(그리고 마음에 일어나는 빤짜 니-와라나의 가능성을 건너뛰어) 사띠빳타-나 부-미에 들어가야 합니다. 즉 사마타는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을 때에만 얻을 수 있습니다.  

     

    • * 위 도표는 ‘들러붙음의 기원 ㅡ 라-가는 산냐-에 의해 촉발된다’ 포스트에 있는 도표를 변경한 것입니다. 그 포스트에서는 그 반대, 즉 마음이 어떻게 단계적 순서로 오염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 * ‘Samatha Sutta (AN 10.54)’는 사람이 사마타를 지니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한 비유를 제시함으로써 이를 확증합니다. 그 비유는 누구나 깨끗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얼굴에 기미(주근깨)나 여드름 같은 흠집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 * (표식 2.6에서): 마찬가지로, (소따-빤나 단계 이상에 있는)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이 빤짜 니-와라나(pañca nīvaraṇa), 즉 까-막찬다, 브야-빠-다, 티나밋다, 웃닷짜꾹꿋짜, 위찌낏차-에 의해 ‘오염되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거기서, ‘ajjhattaṁ cetosamathassa’는 ‘사마타(samatha)’를 지칭합니다.

    • * 마음이 ‘까-마 산냐-’의 영향 아래 있을 때(이는 뿌툿자나에게 항상 해당됨), 필연적으로 빤짜 니-와라나(pañca nīvaraṇa)로 오염됩니다. 즉, 아윗자-(avijjā)가 일어납니다. 그 때문에 푸른 하늘을 볼 때에도 아윗자-가 일어납니다! 이는 까-마 라-가를 제거하지 못한 모든 사람, 즉 아나-가-미 단계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발생합니다.

    • * 따라서, 닙바-나의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처음으로 사마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마음이 사띠빳타-나 부-미에 들어갑니다.  

     

    아-나-빠-나사띠의 까-야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다

     

    7. 이 시점에서 ‘Kāya Sutta (SN 46.2)’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숫따는 이 포스트와 관련된 두 가지 개념을 명확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 * 첫째, 표식 1.2에서: 붓다께서 “빅쿠들이여, 이 까-야(kāya)는 아-하-라(āhāra)에 의해 유지된다. 아-하-라가 있어야만 계속될 수 있고, 아-하-라가 없으면 계속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를 가리키는 것이지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라한 단계에 도달한 때부터 ‘빤쭈빠-다-낙칸다 까-야’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빤짜 니-와라나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아라한이 육신의 음식으로 유지되는 육체를 가지고 살더라도 그렇습니다.

    • * 빤짜 니-와라나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의 아-하-라(āhāra)지만, 각 빤짜 니-와라나는 고유한 아-하-라를 지니고 있습니다.

    • * 따라서, 이 숫따에서 설명한 대로, 수바 니밋따(subha nimitta)와 빠띠까 니밋따(paṭigha nimitta)는 까-막찬다와 브야-빠-다에 대한 아-하-라이고, 아요니소 마나시까-라(ayoniso manasikāra)는 티나밋다, 웃닷짜꾹꿋짜, 및 위찌낏차-에 대한 아-하-라입니다. 

    • * 표식 8.1: 그러므로, 수바 니밋따(매력적인 감각 입력), 빠띠가 니밋따(불쾌한 감각 입력), 그리고 아요니소 마나시까-라(‘까-마 산냐-’가 어떻게 라-가, 도사, 또는 적어도 모하/아윗자-를 통해 자동적으로 땅하-를 촉발시키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에 대한 아-하-라입니다.

     

    8. ‘Kāyagatāsati Sutta (SN 43.1)’에서는 닙바-나에 이르는 길이 ‘까-야가따-사띠(Kāyagatāsati)’(kāya gatā sati, 즉 ‘까-야’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해당 링크 주소에서는 이는 ‘육체’를 암시하여, ‘몸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 * 위 논의로부터, 까-야(kāya)가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 * 육체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닙바-나(표식 1.5에서 ‘라-각카요 도삭카요 모학카요’로 정의됨)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 * 그런데, ‘까-야가따-사띠’는 ‘Kāyagatāsati Sutta (MN 119)’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특히 ‘빤쭈빠-다-낙칸다 까-야’의 ‘뿌-라나 깜마’ 단계를 통해 아리야 자-나(Ariya jhāna)를 얻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아나리야 요기들은 마음이 그 단계에 이르기 전에 아나리야 자-나-(anariya jhānā)로 넘어갑니다. ‘까-마 산냐-를 극복 ㅡ 사띠빳타-나 부미 또는 자-나’의 #3을 참조하세요. 

     

    사마타는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다

     

    9. 까-야 숫따(Kāya Sutta, SN 46.2)의 표식 8.2에서 붓다께서는 반대편에 있는 삿따 봇장가(일곱가지 깨달음의 요인)가 닙바-나로 인도하며, 이는 요니소 마나시까-라(아요니소 마나시까-라의 반대)에 의해 유지된다고 가리켜 보이십니다.

     

    • * ‘사띠빳타-나 부-미 ㅡ 로까 산냐-에서 벗어남’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삿따 봇장가(Satta Bojjhaṅga)는 마음이 빤짜 니-와라나에서 벗어난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는 동안에만 육성될 수 있습니다.

    • * 다시 말해, 위빠사나-(닙바-나로 이끄는 삿따 봇장가를 육성)는 마음이 빤짜 니-와라나에서 벗어난 사마타(Samatha)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 * 이제, #6에서 #8까지 모든 내용에 일관성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막가 팔라를 얻기 위해 위빠사나-를 육성하려면, 마음은 먼저 빤짜 니-와라나에서 벗어난 사띠빳타-나 부-미에 들어가 사마타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까-마 산냐-의 영향 하에 있는 한, 빤짜 니-와라나에 의해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빤짜 니-와라나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에게 아-하-라이므로, 사마타가 없이는  삿따 봇장가(즉, 위빠사나-를 행함)의 육성이 불가능합니다.   

     

    10. ‘Sāriputta Sutta (AN 3.33)’와 ‘Udayamāṇavapucchā (Snp 5.14)’는 담마 개념완전히 집중(purejavaṁ)할 수 있도록(‘dhammatakka purejavaṁ’) ‘까-마 산냐-’(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빤짜 니-와라나)를 제거해야 한다고 명시하는 두 개의 다른 숫따입니다. ‘dhammatakka purejavaṁ’에 대한 언급은 각 숫따의 표식 5.2와 표식 3.2에 나타납니다.

     

    • * 사띠빳타-나 부-미에 들어가는 것, 즉 ‘마음챙김’ 즉 ‘사띠’에 도달하는 것은 오직 네 가지 사띠빳타-나를 육성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Sati Sutta (SN 47.44)’를 참조하세요. 이는 전체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 안의 ‘뿌라-나 깜마’ 단계 또는 ‘까-예 까-야(kāye kāya)’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 이것이 바로 아-나-빠-나사띠의 첫 번째 단계가 ‘까-야-누빳사나-’(전체 ‘빤쭈빠-다-낙칸다 까-야’의 숙고)를 포함하고 두 번째 단계가 ‘까–예 까-야-누빳사나-’(빤쭈빠-다-낙칸다 까-야의 ‘뿌라-나 깜마’ 단계만 숙고)를 포함하는 이유입니다.

     

    ‘뿌라-나 깜마’와 ‘나와 깜마’ ㅡ 둘 다 극복되어야 한다

     

    11. (호흡명상을 통해 자-나를 얻은) 알-라라 깔라-마와 같은 고대 요기(수행자)들은 나와 깜마 단계의 (육체, 말, 및 마음을 통해 지은) 아꾸살라 깜마를 삼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뿌라-나 깜마’ 단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그 고대 요기(수행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 * 그러나, ‘뿌라-나 깜마’ 단계의 ‘초기 깜마 생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재탄생 사이클의 족쇄(열 가지 상요자나, 일곱 가지 아누사야, 네 가지 아-사와 등은 동일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임)를 끊을 수 없습니다.

    • * 그 ‘뿌라-나 깜마’ 단계는 ‘까-마 로까’에 있는 우리에게는 내장된 ‘까-마 산냐-’를 통해 자동적으로 촉발됩니다. 따라서, ‘나와 깜마’ 단계를 삼가는 것은 자동적인 ‘초기의 마음 오염 과정’을 중단시키지 못합니다. 이는 ‘Kammanirodha Sutta (SN 35.146)’에 간결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Vappa Sutta (AN 4.195)’, ‘Nigaṇṭha Sutta (AN 3.74)’, ‘Devadaha Sutta (MN 101)’를 포함하여 다른 숫따들에 논의되어 있습니다. 링크의 영어 번역에서는 ‘뿌라-나 깜마(purāna kamma)’가 ‘old kamma(과거 깜마)’로 잘못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초기 깜마(initial kamma)’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에 유의하세요. 깜마 생성이 두 단계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뿐입니다.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을 참조하세요.

    • * 향후에 위 숫따들의 일부를 논의하겠습니다.  

     

    아-나-빠-나사띠의 첫 번째 단계에 있는 까-야 상카-라

     

    12. 위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sati Sutta (MN 118)’ 참조)의 첫 번째 단계의 ‘까-야(kāya)’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입니다.

     

    • * 그러므로, 아-나-빠-나사띠의 첫 번째 단계의 까-야-누빳사나-(Kāyānupassanā)는 전체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와 관련된 모든 유형의 상카-라에 초점을 맞춥니다.

    • * 따라서, 첫 번째 단계의 “ ‘passambhayaṁ kāya saṅkhāraṁ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passasissāmī’ti sikkhati ”라는 구절(표식 18.4)은 전체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의 상카-라 생성을 고요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passambhayaṁ’는 전체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와 관련된 모든 상카-라를 고요히 하거나 멈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 * 부처님 시대에, 일부 뿌툿자나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단 한 번의 설법을 듣고 (아-나-빠-나사띠의 첫 번째 단계를 통해)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나와 깜마’ 단계에서 시작하여, 점차 ‘뿌라-나 깜마’ 단계로 나아가, 잠시 동안 까-마 산냐-를 극복하여 소따-빤나 팔라 순간에 도달했습니다(위 도표를 참조). 그들은 이미 ‘빠라미따(paramita)’를 상당부분 충족한 상태였고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미해결 문제를 명확히 하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까-예 까야’의 ‘미묘한 상카-라’에 대한 아-나-빠-나사띠의 두 번째 단계

     

    13.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한 후에는 사띠빳타-나 부-미에 마음대로 들어가기 위해 아-나-빠-나사띠의 두 번째 단계를 육성해야 합니다. 이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노력인데, 까-마 산냐-를 극복하고 오랫동안 마음을 사띠빳타-나 부-미에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 * 사띠빳타-나의 육성은 인드리야 상와라(indriya saṁvara), 사띠 삼빠잔나(sati sampajañña), 등 여러 단계를 포함하므로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DN 22)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 * (막가 팔라를 통해 얻은 아리야 깐따 실라로) 소따-빤나는 비교적 쉽게 마음을 ‘뿌라-나 깜마’ 단계(‘빤쭈빠-다-낙칸다 까-야’ 내의 ‘까-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까-예 까-야-누빳사나-(Kāye Kāyānupassanā)’라고 불리는 이유이며, 이후의 인드리야 상와라, 사띠 삼빠잔나 등의 단계는 ‘정식 명상 세션’을 통해 육성될 수 있습니다.

    • * 마하-사띠빳타-나 숫따는 ‘웨다나-수 웨다나-누빳사나-’, ‘찟떼 찟따-누빳사나-’, 및 ‘담메 담마-누빳사나-’에 대한 병행 섹션들을 통해 두 번째 단계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네 섹션은 모두 ‘빤쭈빠-다-낙칸다 까-야’의 ‘뿌라-나 깜마’ 단계에 관한 것입니다.    

    • * 그 노력의 결과는 ‘까-예 까-야’ 단계를 극복하고 까-마 산냐-에서 벗어난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 즉 사마타(Samatha)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마타 상태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더 높은 막가 팔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 * 따라서, 이제 아-나-빠-나사띠 숫따에 담긴 청사진이 명확해야 합니다. 사띠빳타-나를 육성하기 전에 반드시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해야 합니다.

     

    아-나-빠-나사띠의 세 번째 단계

     

    14. 닙바-나의 소따-빤나 단계에 이르면 삼마- 딧티(의 초기 단계)를 얻습니다. 이로써, 소따-빤나는 영구적인 어떤 사띠 수준을 지닙니다. 이 사띠를 통해, 소따-빤나는 아빠-야가-미(apāyagāmi) 행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소따-빤나가 아빠-야에 재탄생하는 것에서 벗어난 이유입니다.

     

    • * 그러나, 소따-빤나는 더 높은 막가 팔라를 얻기 위해 사띠빳타-나 부-미에 마음대로 들어가려면 사띠빳타-나를 육성해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삼마- 사띠(또는 사띠 숩봇장가)가 있습니다. 그 능력을 기르는 것이 닙바-나에 이르는 일곱 단계(삿따 봇장가)의 첫 단계입니다. 다시 말해,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을 때에만 사띠 숩봇장가(Sati Subbojjhaṅga)를 가질 수 있습니다.

    • * 그러면,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는 동안(즉, 사띠 숩봇장가와 함께), 담마위짜야 숩봇장가(Dhammavicaya Subbojjhaṅga) 또는 위빠사나-(Vipassanā)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삿따 봇장가의 남은 단계와 더 높은 막가 팔라로 이어지게 합니다. 

     

    중요한 ‘명료한 설명’

     

    15. 어떤 사람들은 ‘Ānāpānassati Sutta (MN 118)’에서 ‘앗사-사빳사-사(assāsapassāsa)’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를 의미한다는 증거로 “Kāyesu kāyaññatarāhaṁ, bhikkhave, evaṁ vadāmi yadidaṁ—assāsapassāsā.” 구절을 언급합니다.

     

    • * 실제로, 링크 주소에 있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말하건대, 들숨과 날숨은 신체의 한 측면이라는 것이다.”

    • * 따라서, 그들은 까-예수 까-얀나따라-항(Kāyesu kāyaññatarāhaṁ)을 ‘육체와 관련된 또 다른 몸’으로 번역하고, 그  ‘다른 몸’을 ‘들숨과 날숨’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 * 그러나, 올바른 설명은 까-예수 까-얀나따라-항(Kāyesu kāyaññatarāhaṁ)가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의 초기 부분인 ‘뿌라-나 깜마’(초기 깜마 생성) 단계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띠빳타-나의 마지막 단계(사띠빳타-나 부-미에 들어가기 직전)에서는 그것은 ‘뿌라-나 깜마’ 단계의 초기 부분, 즉 앗잣따바힛다 까-야을 구체적으로 가리킵니다(‘Iti ajjhattaṁ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bahiddhā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까-예 까-야-누빳사나 ㅡ 사띠빳타-나의 세부 사’의 #8을 참조).  

    • * “Kāyesu kāyaññatarāhaṁ, bhikkhave, evaṁ vadāmi yadidaṁ—assāsapassāsā”라는 구절의 올바른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빅쿠들이여, 나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 안에 있는 ‘다른 까-야’에 대해 배우고(assāsa) 또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해야(passāsa) 한다고 말한다.”  

    • * 또한 앗사-사/빳사-사(assāsa/passāsa)는 자-나또/빳사또(jānato/passato)와 동일하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자-나또 빳사또와 아-자-니야 ㅡ 기억해야 할 결정적인 말들’을 참조하세요.

    • * 마찬가지로, ‘앗사 사띠(assa sati)’와 ‘빳사 사띠(passa sati)’는 각각 ‘사띠를 확립하는 법을 배우다’와 ‘그것을 잘 이해하다’라는 뜻입니다. ‘앗사-사 빳사-사 ㅡ 그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을 참조하세요. 

     

    16. 이는 ‘Ānāpānassati Sutta (MN 118)’의 다음 구절(표식 25.6), “Vedanāsu vedanāññatarāhaṁ, bhikkhave, evaṁ vadāmi yadidaṁ—assāsapassāsānaṁ sādhukaṁ manasikāraṁ.”을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 * 해당 구절을 위 링크 주소에서는 “내가 말하건대,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세심하게 기울이는 것은 느낌의 한 측면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저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 * 사띠빳타-나를 행할 때, 네 가지 부분, 즉 ‘까-예 까-야-누빳사나-’, ‘웨다나-수 웨다나-누빳사나-’, ‘찟떼 찟따-누빳사나-’, 및 ‘담메 담마-누빳사나-’를 모두 살펴봅니다. 즉, ‘까-예 까-야’, 즉 ‘뿌라-나 깜마’ 단계와 관련된 웨다나-, 찟따, 및 담마(빠띳짜 사뭅빠-다)를 살펴봅니다. 

    • * 그래서 그 구절은 “빅쿠들이여, 나는 ‘마음이 만든 웨다-나’가 어떻게 약한 단계에서 일어나서 ‘뿌라-나 깜마’ 단계에서도 강해질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두깡 마나시까-랑(sādhukaṁ manasikāraṁ)’ 부분은 ‘웨다나-의 그 측면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 * ‘까-마 앗사-다와 고통은 대부분 마음이 만든 것이다’ 포스트에서 그 측면을 설명했습니다.

     

    17.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Icchānaṅgala Sutta (SN 54.11)’에서 부처님은 석 달간의 우기 안거를 아-나-빠-나사띠에 머물러 보냈다고 명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다섯 가지 장애를 완전히 뿌리뽑으시고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서 왜 석 달 동안 다섯 가지 장애(빤짜 니-와라나)를 제압하면서 보내셨을까요? 

     

    • * 그 혼란은 위자-나-띠(vijānāti)와 빠자-나-띠(pajānāti)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붓다께서는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을 육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붓다께서는 아-나-빠-나사띠 사마-디(Ānāpānasati samādhi)에서 (까-마 산냐-에서 벗어난) ‘수카 위하라(sukha viharana)’에 머무르셨는데, 이는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 * 잇차-난갈라 숫따(Icchānaṅgala Sutta)는 ‘아-나-빠-나사띠는 호흡에 대한 것이 아니다 ㅡ 잇차-난갈라 숫따’ 포스트에서 설명했습니다.

     

    요약

     

    18. 이전 포스트(아-나-빠-나 ㅡ 붓다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세간 견해를 버림)와 함께, 이 포스트로 아-나-빠-나사띠 숫따의 개관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두 포스트는 아-나-빠-나사띠 숫따(MN 118)와 마하-사띠빳타-나 숫따(DN 22)에 대한 넓은 개관을 제공합니다.  

     

    • * 아-나-빠-나사띠의 첫 번째 단계, 즉 부처님의 세계관을 이해하고(아-나) 세간 견해를 버림(아-빠-나)으로써 소따-빤나 단계에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설명하는 새로운 포스트 시리즈를 시작하겠습니다.

    • * 아-나-빠-나사띠에 관한 이 두 포스트는 ‘숫따(경) 해석’ 섹션에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최근 포스트들은 ‘붓다 담마’ 섹션에 있으며 지난 3년 넘게 다른 섹션에 올린 것이 있습니다. ‘New / Revised Posts’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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