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type":"img","src":"https://cdn.quv.kr/f5120tiws%2Fup%2F5c9ef7f87c581_1920.png","height":80}
  • 붓다 담마
  • 주요 담마 개념
  • 리빙 담마
  • 방 안의 코끼리
  • 담마와 과학
  • 세 단계 실천
  • 빠띳짜 사뭅빠다(연기)
  • 자아가 있는가?
  • 바와나(명상)
  • 아비담마
  • 담마빠다(법구경)
  • 숫따(경) 해석
  • 붓다 담마ㅡ상급
  • 음성법문
  • JBM 법문-녹취
  • 원문 홈
  • {"google":["PT Serif"],"custom":["Nanum Gothic","Noto Sans KR","Nanum Barun Gothic"]}

     

    '자-나또 빳사또'와 아-자-니야 ㅡ 기억해야 할 결정적인 말들

     

    원문: Elephants in the Room 섹션의 ‘Jānato Passato” and Ājāniya – Critical Words to Remember’ 포스트

     

    ‘자-나또 빳사또(jānato passato)’는 ‘알고 이해한다’를 의미합니다. 어떤 것을 단지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담마 짝쿠(dhamma cakkhu, 담마의 눈)로 알고 보는’ 자는 ‘뿌리사 아-자-니야(purisa ājāniya)’, 즉 성자입니다.

     

    2024년 5월 18일 작성; 2024년 6월 26일 개정(#6 추가)

     

    자-나-띠(jānāti)와 빳사띠(passati)

     

    1. ‘Antarāmala Sutta (Iti 88)’는 자-나또(jānato)와 빳사또(passato)의 결정적인 의미를 설명합니다. 자-나-띠(jānāti)는 ‘듣고 어느 정도 이해하다’를 의미하고, 빳사띠(passati)는 ‘가르침(담마)를 파악함으로써 완전한 이해’를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아감에 따라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 * 탐함(로바), 성냄(도사), 및 미혹함(모하)은 사람의 성격에 흠을 내는 ‘세 가지의 내부 얼룩’입니다. 위 링크의 영어 번역은 그 개념을 얻기에 충분히 좋습니다. 그것을 통독해 보세요. 더 자세한 내용은 ‘다사 아꾸살라와 아낫따 - 결정적인 연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표식 4.1에서: “Luddho atthaṁ na jānāti, luddho dhammaṁ na passati”, 즉 “탐하는 사람은 진리를 모른다(atthaṁ). 탐하는 사람은 그 진리를 나타내는 담마를 보지 못한다.”

    • * 표식 7.1에서: “Duṭṭho atthaṁ na jānāti, duṭṭho dhammaṁ na passati”, 즉 “성내는 사람은 진리를 모른다(atthaṁ). 성내는 사람은 그 진리를 나타내는 담마를 보지 못한다.”

    • * 표식 10.1에서: “Mūḷho atthaṁ na jānāti, mūḷho dhammaṁ na passati”, 즉 “미혹한 사람은 진리를 모른다(atthaṁ). 미혹한 사람은 그 진리를 나타내는 담마를 보지 못한다.”

     

    2. ‘Cūḷabyūha Sutta (Snp 4.12)’에서는 그것을 더 설명합니다. 표식 1.3에서, “Yo evaṁ jānāti sa vedi dhammaṁ”는 “그것을 이렇게 알고 보는 자는 누구나 가르침을 이해한다.”를 의미합니다.

     

    • * 웨디(vedi)는 빳사띠(passati), 즉 ‘깊은 이해’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힌두교의 베다(Veda)는 그 낱말에 기원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깟사빠 부처님 시대의 빠알리어에서 나왔습니다. 네, 깟사빠 부처님은 고따마 부처님 이전 수백만(무수한) 년 전에 사셨습니다. 고따마 부처님 전에 이 지구에는 한 분이 아니라 세 분(까꾸산다, 꼬나-가마나, 및 깟사빠)의 부처님이 계셨습니다. ‘Mahāpadāna Sutta (DN 14)’를 참조하세요.

    • * ‘Kapila Sutta/dhammacariya Sutta (Snp 2.6)’는 또 다른 예입니다.

    • * 자-나-띠(jānāti)는 때때로 평범한 의미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Vatthugāthā (Snp 5.1)’와 ‘Sippa Sutta (Ud 3.9)’를 참조하세요. 반면에, 그것은 ‘Posālamāṇavapucchā (Snp 5.15.)’에서 더 깊은 의미를 나타냅니다.

    • * 요점은 자-나또(jānato)가 처음에 생기고, 더 진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빳사또(passato)(완전한 이해)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깊은 이해(passato)를 위해서는 위빠사나(통찰 명상)가 필요합니다.

     

    자-나-띠/빳사띠와 자-나또/빳사또

     

    3. 빠알리어는 활용(굴절)을 사용하는 고도의 굴절 언어인데, 그것은 낱말의 형태가 시제(과거/현재시제 등), 인칭(1인칭/2인칭 등), 수(단수/복수 등), 성별(남성/여성 등), 법(직설법/가정법 등), 태(수동태/능동태 등), 및 격(주격/목적격 등)을 나타내기 위해 변함(‘어형 변화’라고도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접두사 또는 접미사를 추가하여 행해지는데, 심지어 낱말 자체의 내부 구조도 변화시켜 행해집니다. 반면에, 영어는 굴절(활용)이 적고 분석적이라고 간주되는데, 낱말 순서와 보조 동사에 더 많이 의존하여 의미를 전달합니다.

     

    • * 그래서, 영어와 같이 낱말 순서와 추가 보조 낱말에 의존하는 대신에, 빠알리어와 같은 고도의 굴절 언어는 단일 낱말에 많은 정보를 채웁니다. Kurt Schmidt의 “PāliㅡBuddha’s Language”는 좋은 자료입니다. ‘문법 기초’에 관한 ‘부록 B’는 어형 변화에 대해 안내하고 동일한 낱말이 어떻게 시제, 성별 등을 나타내기 위해 변경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자-나-띠(jānāti)’는 ‘알다’를 의미하고, 안 자는 ‘자-나또(jānato)’입니다. 통상의 말에서, 자-나-띠(jānāti)는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을 아는 것’과 같이, ‘어떤 일, 장소 등에 대해 알다’를 의미할 것입니다.

     

    • * 물론,  붓다 담마에서, ‘자-나-띠(jānāti)는 사성제, 빠띳짜 사뭅빠-다, 및 틸락카나와 같은 여러 결정적인 바탕(근본)의 면에 대해 아리야로부터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일한 식으로, ‘빳사띠(passati)’는 ‘보다(이해하다)’를 의미하고, 본(이해한) 자는 ‘빳사또(passato)’입니다. 통상의 말에서, 빳사띠(passati)는 ‘나무를 보는 것’과 같이, ‘눈으로 보다’를 의미할 것입니다.

     

    • * 물론,  붓다 담마에서, ‘빳사띠(passati)’는 ‘담마의 눈 / 담마 짝쿠(dhamma cakkhu)로 보는 것’이라는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사성제, 빠띳짜 사뭅빠-다, 및 틸락카나 등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성취한 자가 빳사또(passato)입니다.

     

    ‘자-나또/빳사또’ ㅡ 예

     

    4. 짝쿠(시각, 육체적 눈이 아님)를 이해하는 것은 삭까-야 딧티를 제거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Sakkāyadiṭṭhipahāna Sutta (SN 35.166)’를 보세요. 링크에서, “Cakkhuṁ kho, bhikkhu, dukkhato jānato passato sakkāyadiṭṭhi pahīyati” 구절은 “눈을 괴로움(고통)으로 알고 보면, 실체론적 견해가 포기된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 * 대부분의 낱말별 직역과 같이, 그 설명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그것들을  현명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지는지, 즉 그것이 어떻게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먼저 그 설명을 붓다 또는 붓다의 제자(성자)로부터 듣고(자-나또, jānato), 그 다음 그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여(빳사또, passato)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해야 합니다.  

    • * 동일한 식으로, ‘Paṭhama avijjāpahāna Sutta (SN 35.79)’는 짝쿠(cakkhu), 루빠(rupa), 짝쿠 윈냐-나(cakkhu viññāṇa) 등의 ‘아닛짜(anicca) 특성’에 대해 먼저 듣고 그 설명을 완전히 이해함으로써 아윗자-(avijjā, 무지)를 제거하는 것에 대해 동일하게 말합니다.

    • * 여러 다른 숫따들은 모든 상요자나(saṁyojana)를 제거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Tassa evaṁ jānato evaṁ passato kāmāsavāpi cittaṁ vimuccati, bhavāsavāpi cittaṁ vimuccati, avijjāsavāpi cittaṁ vimuccati.”입니다. 더 많은 숫따 중에 ‘Cūḷasuññata Sutta (MN 121)’, ‘Cūḷasakuludāyi Sutta (MN 79)’, 및 ‘Mahāsaccaka Sutta (MN 36)’를 참조해 보세요.

    • * 막가 팔라의 각각에, ‘자-나또 빳사또(jānato passato)’는 자라서 아라한과에서 완결됩니다.

     

    ‘자-나또 빳사또’는 아라한과로 이어진다

     

    5.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배움으로써 성스런 길을 시작하고(자-나또, jānato), 그것이 완전한 이해로 이어질 때(빠사또, passato), 모든 아-사와-를 제거하고 아라한과에 도달합니다.

     

     

    6. 짧은 “Saṁyojanasamugghāta Sutta (SN 35.55)”는 동일한 것은 간결하게 말합니다.

     

    • * “Cakkhuṁ kho, bhikkhu, anattato jānato passato saṁyojanā samugghātaṁ gacchanti”는 “짝쿠는 육체적 눈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올바른 설명을 듣고 짝쿠(육체적 눈, 뇌, 및 짝쿠 빠사다 루빠와 함께 완전한 시스템)가 어떻게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일어나는지를 완전히 이해할 때, 마음에서 모든 열 가지 상요자나-를 를 제거하게 될 것, 즉 아라한이 될 것이다.”

    • * 동일한 식으로, 루빠, 짝쿠 윈냐-나, 짝쿠 삼팟사, 및 짝쿠 삼팟사-ㅡ자-ㅡ웨다나-에 대해 동일하게 해야 합니다.

    •  

    ‘자-나또 빳사또’는 성자(뿌리사 아-자-니야)가 되게 한다

     

    7. ‘Sabhiya Sutta (Snp 3.6)’에서, 사비야(Sahiya)는 붓다께 누구를 웨다궁(vedaguṁ, 지식의 달인), 아누위다땅(Anuviditaṁ, 통찰하는 지혜를 가진 자), 위리야와-띠(viriyavāti, 필요한 노력을 할 수 있는 자)라고 부를 수 있으며, 누가 아-자-니요(Ājāniyo, 완전히 성취한 성자)가 될 수 있는지, “Kiṁpattinamāhu vedaguṁ, Anuviditaṁ kena kathañca viriyavāti; Ājāniyo kinti nāma hoti, Puṭṭho me bhagavā byākarohi”라고 물었습니다. 즉, “사람이 ‘지식의 달인’이라고 불리려면 무엇을 달성해야 합니까? 사람이 필요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어떻게 ‘통찰하는 지혜’를 개발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어떻게 순종마(뿌리사 아-자-니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제 질문에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물었습니다.

     

    • * 붓다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뿌리사 아-자-니요(purisa ājāniyo)가 되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상세히 설명되어야 할 심오한 숫따입니다.

    • * (위 번역과 같이) 많은 영어 번역에서, ‘ājānīyo(아-자-니-요)’는 성자(아리야)를 지칭할 때조차도 ‘thoroughbred(순종마)’로 번역됩니다. 예를 들어, ‘Potaliya Sutta (MN 54)’를 보세요. 그 이유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성자(아리야)를 잘 훈련된 말에 비유

     

    8. 부처님 시대에는, 좋은 군대의 일부로 잘 훈련된 말(앗사-자-니-요, assājānīyo = assa ājānīya 라고 함)의 대대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앗사(assa)’는 말을 의미하고, ‘아-자-니-야(ājānīya)’는 ‘탁월한 질’을 의미합니다. 그런 말들은 음식을 갈망하지 않고 항상 배우고 연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아-자-니-야(ājānīya)’라는 낱말은 월등히 훈련된 말을 묘사하는 평범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 * ‘Assājānīya Sutta (AN 5.203)’, ‘Assājānīya Sutta (AN 8.13)’, 및 ‘Assājānīya Sutta (AN 3.142)’에서, 붓다께서는 아리야의 훈련을 ‘전투 준비가 된 말’에 비유하셨습니다.

    • * 오늘날, 그런 말은 ‘thoroughbred(순종마)’라고 불립니다. 특별한 종의 말인 thoroughbred(순종마)는 영국에서 개발되었고 그 속도, 민첩성, 및 활력으로 유명합니다. 이 용어는 순종 또는 혈통이 있는 동물에도 적용되는데, 특히 말에 적용됩니다. 그러나, ‘thoroughbred(순종마)’는 비록 비유는 좋지만, 성자(아리야)를 묘사하는 데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습니다.

    • * 반면에, 노새(수당나귀와 암말의 자손)는 게으른데, 잘 먹고 자고 싶어합니다. 노새(assakhaḷuṅka – assa khaḷuṅka)는 말과 같지만 열등한 질이고 결코 전투 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앗사(assa)’는 말을 의미하고, ‘카룬까(khaḷuṅka)’는 ‘열등한 질’을 의미합니다.

    • * ‘Assakhaḷuṅka Sutta (AN 9.22)’,Assakhaḷuṅka Sutta (AN 3.140)’, 및 ‘Assakhaḷuṅka Sutta (AN 8.14)’는 assa khaḷuṅka(앗사 카룬까)를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열등한 질의 사람’, 즉 뿌리사카룬까-(purisakhaḷuṅkā, purisa khaḷuṅkā)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뿌리사(purisa)’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9. 뿌리사 아-자-니요(purisa ājāniyo, 성자)에 비하여, (부처님의 더 넓은 세계관에 접근하지 않고) 다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합니다.

     

    • * ‘Nappiya Sutta (AN 10.87)’는 특정 빅쿠들이 왜 다른 빅쿠들의 존경을 얻지 못하는지를 묘사합니다. 그들은 수행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기존의 징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무시하고, 갈망과 분노 등을 버리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 숫따는 그들이 행하는 다른 많은 나쁜 행위들에 대해 논의합니다.

    • * (이 숫따에서도) 다시, 게으른 노새에 비유됩니다. 표식 13.1을 보세요.

    • * 거기의 숫따 전체를 읽어보면 좋습니다.

     

    아리야 자-나와 아나리야 자-나의 명상 기술

     

    10. 특히 빅쿠일 경우에는, 자-나(jhāna)의 육성은 성스런 길의 진전에 중요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아리야 자-나(Ariya jhāna)라는 말은 띠삐따까에 나타나지 않지만, 붓다께서는 아리야-와 아나-리야-에 의해 육성되는 자-나- 사이를 분명히 구분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산다(Sandha)라는 빅쿠는 부처님을 방문했을 때, 노새(khaḷuṅkā)처럼 명상하지 말고 전투를 위해 훈련된 말(Ājānīya)처럼 명상하도록 질책받았습니다. ‘Sandha Sutta (AN 11.9)’를 참조하세요.

     

    • * 그 숫따 전체를 읽어보면 좋습니다.

    • * 표식 2.16에서, 숫따는 아나리야 요기(수행자)가 자-나(jhāna)를 육성하는 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들은 땅, 물, 불, 및 바람(에 집중된 마음으로)을 명상한다. 그들은  무한한 공간, 무한한 의식, 없음(무소유), 또는 인식도 아니고 인식아님도 아님(비상비비상) 차원(에 집중된 마음으로)을 명상한다.”

    • * 호흡 명상(또는 흙덩이 또는 불을 사용한 아나리야 ‘까시나 명상’)은 그 범주에 속한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호흡 명상은 ‘바람 요소’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 * 아리야는 어떻게 명상할까요? 그것은 표식 3.13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리야(성자)는 지, 수, 화, 풍(에 집중된 마음으로)을 명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한한 공간, 무한한 의식, 없음(무소유), 또는 인식도 아니고 인식아님도 아님(비상비비상) 차원(에 집중된 마음으로)을 명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과 저(다른) 세상(에 집중된 마음으로)을 명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이고, 들리고, 생각되고, 알게 되고, 얻어지고, 구해지고, 또는 마음에 의해 탐구된 것(에 집중된 마음으로)을 명상하지 않는다.”

    • * 다음 포스트에서 그것을 더 논의하겠습니다.

     

    11. 여러 숫따들은 잘 훈련된 말과 게으른 노새 사이의 차이에 아리야 자-나와 아나리야 자-나의 질을 비유합니다.

     

    • * 또한, ‘jāna(to)’와 ‘jhāna’는 매우 다르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더욱이, 발음하는 법(그리고 ‘띠삐따까 영어’ 규약으로 쓰는 법)을 이해하면 좋습니다. ‘빠알리 낱말 ㅡ 쓰기와 발음’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google":["PT Serif"],"custom":["Nanum Gothic","Noto Sans KR"]}{"google":["PT Serif"],"custom":["Nanum Gothic","Noto Sans KR","Nanum Barun Gothic"]}
    {"google":["Noto Sans KR"],"custom":["Nanum Goth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