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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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하- ㅡ 마음이 만든 웨다나-를 일으키는 산냐-의 결과

     

    원문: Bhāvanā (Meditation) 섹션의 ‘Taṇhā – Result of Saññā Giving Rise to Mind-Made Vedanā’ 포스트

     

    땅하-(tanhā)(감각 입력에 매이는 경향)는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를 통해 일어나는 ‘마음이 만든 웨다나-’ 때문에 일어납니다. 육체에 오는 수카와 둑카 웨다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왜곡된 산냐-’로 인한 마음이 만든 소마낫사(somanassa) 및 도마낫사(domanassa) 웨다나-(vedanā)입니다. 특히, 까-마 라-가(kāma rāga)는 ‘왜곡된 산냐-’로 촉발됩니다.

     

    2024년 7월 13일 작성

     

    모든 유정체의 산냐-는 항상 왜곡된 산냐-다

     

    1. ‘산냐-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웨다나-를 일으킨다’ 포스트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웨다나–는 ‘마음이 만든 웨다나-’, 즉 ‘삼팟사ㅡ자-ㅡ웨다나(samphassa-jā-vedanā)’라는 사실을 논의했습니다. 먼저 그 포스트로부터 관련된 결정적인 점들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 * 산냐-(saññā)는 사람과 대상들을 인식하는 마음의 능력입니다. ‘인식’에 더하여,  산냐-는 어떤 감각 입력들은 바람직하고 다른 것들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잘못된 인상’을 일으킵니다. 붓다께서는 그 두번째 측면 때문에 산냐-를 신기루라고 칭하셨습니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를 참조하세요.

    • * 육체적 몸과 정신적 몸(간답바)을 모두 포함하여, 우리 몸은 그 왜곡된 산냐-를 공급하는 업 에너지에 의해 형성됩니다. 왜곡된 산냐-는 오염되지 않은 것임에 유의하세요. 예를 들어, 까-마 산냐-(예로서, 설탕은 달콤하고 또는 특정 여성이 다른 여성보다 더 매력적임)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모든 이(붓다 또는 아라한을 포함)에게 생성됩니다. 그 ‘왜곡된 산냐-’는 인간 몸에 내장됩니다.

    • * 각 영역과 연관된 가띠의 유형에 따라, 다른 유형의 산냐-가 다른 영역의 유정체 몸에 내장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썩은 고기를 역겨운 냄새로 경험하지만, 돼지는 그 냄새를 좋아합니다. 또한, 돼지에게 생성된 산냐-는 썩은 고기가 맛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 * 이것의 또다른 측면은 까-마 산냐-(까-마 로까에서 ‘왜곡된 산냐-’의 주된 유형)는 루빠 및 아루빠 로까 브라흐마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들은 새로운 깜마를 의미있는 정도로는 축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하면 ‘왜곡된 산냐-’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루빠와 아루빠 로까에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나와) 깜마가 축적되지 않는다

     

    2. 세상(로까)을 까-마 로까, 루빠 로까, 및 아루빠 로까라는 세 가지 주된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까-마 로까에 있는 동안, 유정체는 모든 다섯 가지 육체 감각 입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루빠 로까에 있는 자들(루빠-와짜라 브라흐마-)는 두 가지(시각 대상 및 소리)만 경험할 수 있고, 반면에 아루빠 로까에 있는 자들은 그것들의 어느 것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그들은 마음만 가집니다).

     

    • * 그러므로, (맛, 냄새, 및 감촉의 감각 경험을 하는) ‘까-마 산냐-’는 루빠 로까 또는 아루빠 로까에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비록 루빠 또는 아루빠 로까에 있는 아나리야 브라흐마들은 라-가 아누사야/상요자나(kāma rāga anusaya/saṁyojana)가 그대로 있지만, 그것은 촉발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까-마 산냐-’와 감각적 생각은 그들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 * 그러나, 루빠 로까 브라흐마(rupa loka Brahma)들은 자동적으로 ‘루빠 산냐-’, 즉 ‘각 자-나의 산냐-’를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범천계의] 낮은 영역에 있는 자들은 제1자-나의 산냐-를 받아들이고, 더 높은 영역에 있는 자들은 ‘해당하는 더 높은 자-나의 산냐-’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왜곡된 산냐-’를 즐기는 상카-라를 생성하기만 할 뿐, ‘바와 에너지(bhava energy)’를 생성할 수 있는 (아비상카-라와 함께 하는) 새로운 깜마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그 브라흐마의 깜마 에너지가 소진되면, 그들은 죽어 인간 영역에 먼저 태어나고, 이후에 모든 영역에 재탄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유사한 과정은 아나리야 아루빠 로까 브라흐마(anariya arupa loka Brahma)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그 존재로 있는 동안에 새로운 깜마는 (의미있는 정도로는) 생성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긴 휴가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보통, 아비상카-라 생성은 아래 #7에 논의하는 바와 같이, (까-마 로까의) 까-마 산냐-(kāma saññā)와 함께 시작됩니다.

     

    3. 그러나, 루빠 로까와 아루빠 로까 브라흐마들이 경험하는 자-나 또는 사마-빳띠도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로 인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유형의 왜곡된 산냐-는 왜 새로운 깜마를 축적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 *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까-마 로까에 일어나는 왜곡된 산냐-의 유형은 외부 대상과 감각 상호작용으로 인한 것입니다. 특히, 그것들은 음식(맛), 향기(냄새), 및 성관계를 포함하는 감각 접촉입니다. 그런 경험을 추구할 때 까-야 깜마(도둑질, 살생, 성적 비행)에 관여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또한 연관된 와찌 깜마(거짓말, 쓸데없는 말, 거친 말, 중상/비방하는 말)로 이어질 수 있는데, 그것들은 연관된 부도덕한 생각들(다른 이들의 것을 탐함, 화냄/증오, 및 10가지 세간 사견)을 통해 일어납니다. ‘열가지 부도덕한 행위(다사 아꾸살라)’를 참조하세요.

    • * 반면에, 루빠 로까와 아루빠 로까 브라흐마들이 경험하는 자-나 또는 사마-빳띠는 외부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자-나 또는 사마-빳띠]은 자신의 마음내에서 일어납니다. 자-나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훔치거나, 죽이거나, 다른 사람들과 연관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와찌 깜마(거짓말, 쓸데없는 말 등)에 관여할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다른 이들의 것을 탐할 필요가 없고 다른 이들을 향해 화냄/증오를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4. 따라서, (루빠 로까 또는 아루빠 로까의) 브라흐마로 일단 태어나면 그들은 아꾸살라 깜마에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그 두 로까에는 까-마 라-가 아누사야/상요자나를 촉발시키는 감각 대상들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새로운 깜마도 축적하지 않습니다.

     

    • * 그 때문에, 다음 그림은 루빠 또는 아루빠 로까에서는 확장하는 콘(cone)이 없습니다

    • * 그것은 까-마 다-뚜가 일부 숫따에서 히-나 다-뚜(hīna dhātu, hīna는 ‘저열한’을 의미함)로 표시된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아꾸살라 깜마(특히 재탄생을 가져오는 것)는 까-마 로까에 있는 동안에 생성됩니다. 그것은 인간 영역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데와-(Devā)는 다사 아꾸살라(dasa akusala)에 참여할 이유가 더 적기 때문입니다.  

     

    빠밧사라 마음은 아라한에게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5. 위 그림은 아라한이 항상 ‘빠밧사라 마음(pabhassara mind)’을 가진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빠밧사라 마음’은 아라한과에 도달될 때에만 경험됩니다. 그 다음, 마음은 그 아라한의 ‘까-마 다-뚜(kāma dhātu)’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결코 ‘까-마 바와(kāma bhava)’에 도달되지 않으며 빠리닙바-나(반열반)에 이를 때까지 항상 ‘까-마 다뚜’ 단계에 있습니다.  

     

    • * 빠밧사라 마음과 까-마 다-뚜에 있는 아라한의 마음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 * 빠밧사라 마음은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를 가지지 않습니다. 빠밧사라 마음에 있는 모든 7가지 정신 요소(쩨따시까)는 어떤 왜곡이나 오염이 없습니다

    • * 반면에, 살아 있는 아라한의 마음은 그 아라한이 [몸으로] 태어난 ‘웁빳띠 바왕가(uppatti bhavaṅga)’의 마음성향[왜곡된 산냐-]으로 ‘까-마 다뚜(kāma dhātu)’ 단계에 있습니다.

    • * 여러 번 강조했다시피, 인간 몸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통해 ‘까-마 산냐-’(왜곡된 산냐-)가 인간 존재에 내장되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까-마 산냐-’를 생성합니다. 비록 (인간 몸으로 태어난) 아라한과 아나-가-미도 ‘왜곡된 산냐-’를 갖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것에 들러붙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어떻게 왜곡된 산냐-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매커니즘을 ‘듣고 이해’(자-나또 빳사또, jānato passato)했기 때문입니다.

     

    6. 일상 생활을 할 때, 아라한의 마음은 감각 입력에 집중하지 않을 때에는 ‘웁빳띠 바왕가’ 상태에 (즉, 까-마 다-뚜에) 있습니다.

     

    • * 감각 입력이 들어올 때, 웁빳띠 바왕가 상태에서 나와서 감각 입력에 집중하는데, 이것이 “Kāma dhātuṁ paṭicca uppajjati kāma saññā.”입니다. 따라서, 아라한은 까-마 로까에 있는 다른 이들과 같이 ‘왜곡된 산냐-’를 받아들이고, 마음은 여전히 까-마 다뚜에 있습니다. 이제 아라한의 마음은 ‘바힛다 윈냐-나(bahidda viññāṇa)’ 단계에 있습니다. 아래 그림을 참조하세요.

    • * 그러나, 아라한의 마음은 까-마 다-뚜(kāma dhātu)를 넘어서 “kāma saññaṁ paṭicca uppajjati kāma saṅkappo.”라는 다음 단계의 ‘까-마 바와(kāma bhava)’에 도달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까-마 라-가 아누사야/상요자나(kāma rāga anusaya/saṁyojana)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자동적으로 ‘까-마 상깝빠(kāma saṅkappa)’를 생성할 때만 일어납니다.

    • * 아라한(또는 아나-가-미)은 ‘까-마 라-가 아누사야/상요자나’를 제거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까-마 상깝빠, 즉 ‘그 감각 입력에 대한 오염된 생각’을 생성하지 않으므로 까-마 바와에 이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라한은 설탕을 달콤한 것으로 맛보거나 아름다운 여성을 아름답게 보지만 그것에 들러붙어 까-마 상깝빠(kāma saṅkappa)를 생성하지는 않습니다.

    • * 우리는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의 #10에서 위 시간 순서를 논의했습니다. 또한, 아래 #7을 참조하세요.  

    • * 그러나, 일부 아라한들은 ‘아라한 팔라 사마-빳띠(Arahant phala samāpatti)’에 들어감으로써 ‘빠밧사라 마음(pabhassara mind)’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래 ‘주 1’을 참조하세요.

     

    왜곡된 산냐-는 아나-가미 단계 아래의 모든 이들을 앗자따 윈냐-나로 이끈다

     

    7. 이제, 아나-가-마 단계 아래의 모든 이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 * ‘왜곡된 산냐-’는 까-마 로까의 상위 7가지 영역(인간 및 데와 영역)에서 오염된 마음(및 깜마 축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까-마 로까의 인간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보겠습니다.

    • * ‘왜곡된 산냐-’(이 경우에는 ‘까-마 산냐-’)는 “kāma saññaṁ paṭicca uppajjati kāma saṅkappo” 단계를 통해 아나-가-미 단계 아래의 모든 이들을 ‘오염된 마음(오염 레벨이 다름)’으로 이끕니다. 그것은 까-마 라-가 아누사야/상요자나(kāma rāga anusaya/saṁyojana)가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까-마 상깝빠’를 생성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약하고 초기 단계’의 깜마 축적입니다. 이것은 앗잣따 윈냐-나 단계고, 마음은 이제 ‘까-마 바와(kāma bhava)’에 있습니다.

    • * 마음이 어떻게 더 오염될 수 있는지, 특히 마음이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에 도달하면 어떻게 더 오염될 수 있는지 논의해 보겠습니다. 이 단계들은 자동적이 아니고 그 순간의 마음성향(가띠)에 달려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것은 통제가 가능하고 ‘앗잣따 윈냐-나’ 단계를 넘어 더 오염되는 것도 멈출 수 있습니다.  

     

    까-마 로까에서 추가적인 깜마 축적의 시간 순서

     

    8. 전체 시간 순서는 아래 그림이 보여줍니다.

     

     

    9. #6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바힛다 윈냐-나(bahidda viññāṇa)는 ‘왜곡된 산냐-’를 가지지만 라-가(rāga) 도사(dosa), 모하(moha)의 오염이 없습니다. 아나-가-미 또는 아라한의 마음은 여기서 멈춥니다. 즉, 더 이상의 깜마 축적이 없습니다.

     

    • * #7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5가지 하위 상요자나가 있는 모든 이들에게는 바힛다 윈냐-나(bahidda viññāṇa)는 순식간에 앗잣따 윈냐-나(ajjhatta viññāṇa)로 됩니다.

     

    10. 일단 ‘앗잣따 윈냐-나’ 단계에 들어가면, 위 차트에 나와 있고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 포스트에서 논의된 것처럼, 마음은 여러 단계를 통해 빠르게 더 오염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좀 더 논의하겠습니다.

     

    • *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까지, 확장은 느립니다. 즉 깜마 축적은 느립니다. 먼저, ‘오염된 앗잣따 윈냐-나’와 함께, 마음은 ‘외부 루빠’에 대한 그 자신의 버전을 만듭니다. 예를 들어, 외부 대상을 볼 때, 그 마음이 만든 루빠는 ‘짝쿠윈네이야- 루-빠-(cakkhuviññeyyā rūpa)’라고 불립니다. ‘감각 입력에 기반한 인간 마음의 오염’과 ‘인간 마음의 오염 ㅡ 상세한 분석’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이제 들러붙음은 까-마 구나를 생성하는 마음과 함께 더 강해집니다. ‘까-마 라-가는 루빠 라-가와 아루빠 라-가를 압도한다’와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러나,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 단계에서, (와찌 및 까-야 아비상카-라와 함께) 의식적으로 깜마-를 축적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문에 그것을 ‘나와(새로운) 깜마’ 단계라고 합니다. 미래 삶에서 위빠-까를 가져오는 깜마 에너지는 여기서 생성됩니다.

    • * 차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깜마 축적은 까-막찬다(kāmacchanda), 까-마 빠릴라-하(kāma pariḷāha) 등으로 가속화하고, 까-야, 와찌, 마노 깜마를 행하는 다사 아꾸살라(dasa akusala )로 끝납니다.

    • * 이것들을 단계적 순서로 논의했지만, 모든 이 단계들은 몇 초내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 * 더 자세한 것은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 ㅡ '빠띳짜 사뭅빠-다'의 결정적 단계’를 참조하세요. 이 개념들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포스트들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포스트 순서를 체계적으로 따르는 한 가지 방법은 ‘New / Revised Posts’에 있는 ‘Uncovering the Suffering-Free (Pabhassara) Mind (with chart B1) – 8/5/23’ 포스트부터 시작하여 이 포스트까지 읽는 것입니다[역주: https://cafe.naver.com/puredhamma/2923 에 정리된 번역 포스트를 일부 참조할 수 있음]. 나아가면서 메모를 하면 좋습니다.

     

    마음이 항상 활동하지는 않는다 ㅡ 바왕가 상태

     

    11. 기억해야 할 결정적인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각 입력(아-람마나)이 6가지 문(5가지는 물질적 문)중의 하나를 통해 들어올 때까지 우리 마음은 대기 상태(웁빳띠 바왕가 상태)에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들어오는 문에 상관없이 마음은 모든 감각 입력을 분석합니다.

     

    • * 대기 상태에 있는 동안, 마음은 활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동이 걸린 차가 중립 기어 상태에 있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동이 걸려 있지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차량에 기어를 넣으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은 바왕가 상태, 즉 대기 상태에서는 활동하지 않습니다.

    • * 아-람마나(감각 입력)가 들어오면, 마음은 중립 바왕가 상태에서 벗어나, 아-람마나를 알게 되고(웨다나-), 자동적으로 아-람마나와 연관된 산냐-를 받아들입니다.

    • * 마음이 아-람마나에 관심이 있으면, 위 두번째 그림에 있는 단계를 거칩니다. 아-람마나(그리고 그것에 수반되는 산냐-)에 관심이 없으면, 마음은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하루 동안 수많은 것들을 보지만(또는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감촉하지만), 아주 작은 부분에만 집중합니다!

    • *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바힛다 윈냐-나(bahidda viññāṇa)와 앗잣따 윈냐-나(ajjhatta viññāṇa) 단계에 많이 들어갈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 단계에 이른 후에도, 마음챙김을 하고 있다면 멈추고 아-람마나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합니다.

    • * 더욱이, 아나-가미 단계에 도달함으로써 일단 까-마 라-가 아누사야/상요자나가 제거되면, 모든 아-람마나에 대해 그 모두를 바힛다 윈냐-나 단계에서 멈출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논의해 온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는 이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힛다 및 앗잣따 단계

     

    12. 바힛다(bahidda)는 ‘바히라(bahira)’ + ‘잇다(iddha)’에서 유래하며, 여기서  ‘바히라(bahira)’는 ‘외부’를 의미하고 ‘잇다(iddha)’는 ‘확립된’을 의미합니다. 잇디(iddhi)는 다르며 ‘초능력(신통력)’을 의미합니다.

     

    • * ‘확립된’으로 잇다(iddha)의 의미는 ‘Gavesī Sutta (AN 5.180)’와 ‘Cetiya Sutta (SN 51.10)’에 있습니다.

    • * 따라서, ‘바힛다 산냐-(bahidda saññā)’는 외부 감각 입력으로 인해 일어나고 유정체에서 확립되거나 나타나는 산냐-입니다. (음식의 맛이나 여성의 아름다움과 같은) 까-마 산냐-는 우리 인간의 몸에 내장됩니다. 그것들은 ‘마음이 만든 웨다나-’, 즉 ‘삼팟사ㅡ자-ㅡ웨다나-’를 일으킵니다.

    • * 뿌툿자나(또는 소따빤나조차도)는 산냐-가 더 깊은 레벨에서 실제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만든 웨다나-’에 들러붙을 수 있습니다. 일단 그 메커니즘이 이해되면, 자신이 본질적으로 속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붓다께서 산냐-를 ‘Pheṇapiṇḍūpama Sutta (SN 22.95)’에서 신기루 또는 환영이라고 칭하신 이유입니다.

     

    13. 위의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는 ‘바힛다 산냐-(bahidda saññā)’가 ‘앗잣따 산냐-(ajjhatta saññā)’로 진화합니다.

     

    • * 여기서  앗잣따(ajjhatta)는 ‘앗자(ajjha)’ + ‘앗따(atta)’에서 유래하며,  ‘앗자(ajjha)’는 ‘자신’를 의미하고 ‘앗따(atta)’는 ‘유익한/의미있는’을 의미합니다.

    • * 아나-가-미 단계 아래에 있는 이들(‘바힛다 산냐-’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바힛다 산냐-’에 자동적으로 들러붙을 것입니다.

     

    주 1

     

    일부 아라한들은 자-나 사마-빳띠(jhāna samāpatti)에 들어갈 수 있고, 그때에는 물론 마음이 ‘까-마 다-뚜(kāma dhātu)’ 단계에 있지 않습니다.  루빠와짜라 자-나 사마-빳띠에 있는 동안에 마음은 ‘루빠 다-뚜(rupa dhātu)’에 있고, 아루빠와짜라 사마-빳띠에 있는 동안에 마음은 ‘아루빠 다-뚜(arupa dhātu)’에 있습니다.

     

    • * 일부 아라한들은 ‘아라한뜨 팔라 사마-빳띠(Arahant phala samāpatti)에 이를 수 있으며, ‘빠밧사라 마음(pabhassara mind)’은 사마-빳띠 동안에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위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31영역에 속하는 모든 세 가지 다-뚜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은 아라한이 왜곡된 산냐-가 없이 사는 유일한 때입니다.

    • * 훨씬 더 적은 수의 아라한만이 빠밧사라(pabhassara) 마음도 없는 ‘니로다 사마-빳띠(nirodha samāpatti)’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라한이 빠리닙바-나에 도달할 때, 즉 육체가 죽어 31영역의 이 세상에서 벗어날 때와 동일한 상황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멈추는 ‘니로다 사마-빳띠’에는 인식이 없습니다. 위의 그림에서는 그 마음의 상태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아라한의 육체가 죽을 때, 그것은 동일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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