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빠띠소따가-미 ㅡ 사띠빳타-나 부미와 닙바-나를 향해 감
원문: Sutta Interpretation 섹션의 ‘Paṭisotagāmi – Moving Toward Satipaṭṭhāna Bhumi and Nibbāna’ 포스트
빠띠소따가-미(Paṭisotagāmi)는 ‘재탄생 과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경향에 맞서 닙바-나로 가는 길을 닦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까-마 라-가(kāma rāga)의 부정적인 결과와 그것이 어떻게 까-마 산냐-(kāma saññā)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두 가지를 모두 극복하는 것’입니다.
2025년 8월 16일 작성
빠띠소따가-미 대 아누소따가-미
1. 이전 포스트인 ‘빤쭈빠-다-낙칸다의 성장 ㅡ 아누소따가-미’에서, 우리는 고통으로 가득찬 재탄생 과정에 갇힌 것, 즉 ‘아누소따가-미(anusotagāmi)’와 같은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의 성장’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습니다.
* 거기서, ‘아누소따가-미(anusotagāmi)’(‘anu sota gāmi’)는 재탄생 과정의 흐름(sota)으로(anu) 계속 참여하는(gāmi) 것을 의미합니다. 소따(sota)라는 낱말은 성스런 길(예를 들어, ‘성스런 길의 흐름’에 들어간 ‘소따빤나/Sotapanna’와 같음, ‘Dutiyasāriputta Sutta (SN 55.5)’ 참조)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재탄생 과정의 흐름(‘바와소따/bhavasota’와 같음, ‘Mahaddhana Sutta (SN 1.28)’ 참조)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맥에서 낱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 특정 낱말 ‘아누소따가-미(anusotagāmi’)’와 ‘빠띠소따가-미(paṭisotagāmi)’의 의미는 ‘Anusota Sutta (AN 4.5)’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 그 숫따에서 설명했듯이, ‘아누소따가-미’는 감각적 즐거움에 탐닉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빠띠소따가-미’는 감각적 즐거움에 탐닉하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않고, 충만하고 순수한 정신적 삶을 살며, 비록 그것이 (감각적 즐거움의 상실로 인한) 고통을 감수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감각적 즐거움을 피하는 사람입니다.
* 아래에서는 ‘즐거운 감각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조차 왜 닙바-나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논의해 보겠습니다. 또한 논의했듯이, 그런 ‘즐거운 경험’은 어차피 궁극적 실재의 신기루입니다(물론, 그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며 아라한들도 그것들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한 ‘만들어진 산냐-’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과 ‘빠띳짜 사뭅빠-다는 외부 세계도 창조한다!’를 참조하세요.
사띠빳타-나 부미에 도달하는 것이 빠띠소따가-미의 목표다
2. ‘빤쭈빠-다-낙칸다의 성장 ㅡ 아누소따가-미’에서(그리고 많은 이전 포스트들에서), 우리는 ‘아누소따가-미’ 과정을 논의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다음 도표에 대해 간략하게 논의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까-마 다-뚜를 향해 뒤로 돌아가야 하고, 거기서 까-마 산냐-를 극복해야 하며, 그 다음에 까-마 산냐-에서 자유로운 사띠빳타-나 부미로 뛰어들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 그곳은 성스런 삼마- 사띠(까-마 산냐-가 없음)가 있는 ‘안전한 곳’이며, 그곳에서 처음으로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합니다. 그때, 마음은 아주 잠깐만 그것에 머뭅니다.
* 그 후, 소따빤나는 사띠빳타-나를 육성하여 사띠빳타나 부미에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더 높은 도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영문 도표 다운로드/인쇄: ‘Overcoming Kāma Saññā’
사띠빳타-나 부미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별 과정
3. 먼저, ‘뒤로 돌아가서’ 까-마 다-뚜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일련의 단계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 먼저,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에서 ‘새로운 강한 깜마(kamma)’를 짓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앞서 논의했듯이, 이 단계는 빠띳짜 사뭅빠-다의 ‘우빠다-나 빳짜야- 바와(upādāna paccayā bhava)’ 단계에서 시작되며 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 그러나 ‘우빠다-나 빳짜야- 바와’ 단계의 씨앗은 상요자나와 가띠로 인해 의식적 사고 없이(즉, 자동적으로) 뿌라-나 깜마 단계에서 싹틉니다. ‘빤쭈빠-다-낙칸다의 성장 ㅡ 아누소따가-미’의 #10을 참조하세요.
* 위 포스트에서 논의된 첫 번째 도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이 도표는 되돌아가야 할 단계를 보여줍니다.
영문 도표 다운로드/인쇄: ‘Growth of Pañcupādānakkhandha’
4. 위 도표의 단계 5부터 시작하여 단계 4에서 단계 1까지 추적하여 ‘뒤로 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역주: ‘추적하여 ‘뒤로 가야’ 한다’는 것은 꾸살라물라 연기를 강화하여 아꾸살라물라 연기를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에 해당할 수 있음).
* 부처님 이전에는 아무도 단계 1부터 단계 4(뿌라-나 깜마 단계)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상기)해야 합니다. 알라-라 깔-라-마와 같은 요기(수행자)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삼가고, 의식적인 생각, 말, 행동을 통해 지은 아꾸살라 깜마(akusala kamma)도 삼가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닙바-나를 이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은 “내가 오계를 어기지 않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또한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면, 나는 나쁜 재탄생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붓다께서는 이를 잘못된 견해로 거절하셨습니다.
* ‘Mahākammavibhaṅga Sutta (MN 136)’에서, 붓다께서는 “그러나 그들이 ‘살생을 삼가고 (세간적) 바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할 때, 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까-야 딧티는 사띠빳타-나 부미에서 처음으로 제거된다
5. 붓다께서는 위 숫따의 표식 20.1 ~ 20.3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사람이 그 삶의 대부분을 세간 팔정도에 따라 살았다고 해도, 죽음의 순간이나 내생에서도 그 세간 팔정도는 [팔사도로] 바뀔 수 있습니다. 세간 팔정도를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도 자신을 재탄생 과정(윤회)에 묶어두는 열 가지 상요자나(족쇄) 중의 어떤 것도 없애지 못했습니다.
* 마음에서 열 가지 상요자나를 없애는 것은 소따빤나 단계에서 삭까-야 딧티를 깨뜨리는 것(즉, 로꿋따라 삼마- 딧티를 얻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때가 아빠-야(악처)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 보장되는 때입니다. 이는 뿌툿자나의 마음이 처음으로 사띠빳타-나 부미에 도달(까-마 산냐-에서 벗어남)할 때 일어납니다.
* 그것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람의 마음은 이 생이나 내 생에서 세간 삼마- 딧티와 밋차- 딧티 사이를 오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꿋따라(출세간) 삼마- 딧티를 얻기 전까지는 아빠-야에 재탄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단계 1은 다섯 가지 하위 상요자나가 제거될 때까지 일어난다
6. 이제, 로꿋따라(출세간) 삼마- 딧티를 얻는다는 것은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의 무익함(헛됨)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위 두 번째 도표를 참고하여 삭까-야 딧티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먼저, 삭까-야 딧티 상요자나(sakkāya diṭṭhi saṁyojana)를 가진 모든 이들의 마음은 감각 입력을 받으면 반드시 단계 1을 거치게 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 마음은 열 가지 상요자나 모두와 함께 감각 입력에 들러붙습니다. 소따빤나나 사까다-가-미조차도 까-마 라-가 상요자나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계 1을 거칩니다. ‘까-마 라-가는 '왜곡된 산냐-'로 인해 일어난다’를 참조하세요. (다섯가지 하위 상요자나를 제거하고 까-마 산냐-를 극복한) 아라한뜨와 아나-가-미의 마음만이 단계 1을 거치지 않습니다.
* 단계 1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로 시작하여 감각 입력에 기반한 새로운 빠띳짜 사뭅빠-다 사이클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상카-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아윗자-가 어떻게 상카-라의 생성을 촉발하는지 살펴봄으로써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상카-라(단계 1의 상깝빠와 그 이후 단계의 아비상카-라)는 산쩨따나-(오염된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뿌툿자나는 삭까-야 딧티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지 ‘사띠빳타-나 부미(그리고 닙바-나)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단계 1에서 상깝빠가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 비록 소따빤나나 사까다-가-미가 그런 잘못된 견해를 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까-마 산냐-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그들은 여전히 까-마 라-가 상요자나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도 또한 단계 1을 거칩니다.
* 참고: 삭까-야 딧티 상요자나가 제거되면, 다른 두 가지 상요자나도 동시에 제거됩니다. 까-마 라-가 상요자나가 제거되면, 빠띠가 상요자나도 제거됩니다. 따라서, 아나-가-미의 경우, 다섯 가지 하위 상요자나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빤쭈빠-다-낙칸다의 성장은 (닙바-나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고통을 의미한다
7. 단계 1이 일어나는 한,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지혜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핵심은 빤쭈빠-다-낙칸다 과정이 도표의 오른쪽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고 마음을 왼쪽(까-마 다-뚜 단계)으로 향하게 할 때, 어느 순간에 (일시적으로) 까-마 산냐-를 극복하고 사띠빳타-나 부미로 도약합니다.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는 중에 모든 막가 팔라를 성취합니다.
* 다시 말해, 새로운 빤쭈빠-다-낙칸다 과정을 시작하는 것은 항상 결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을 사띠빳타-나 부미(그리고 닙바-나)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도표의 오른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 이것이 붓다께서 “괴로움/고통은 빤쭈빠-다낙칸다와 같다(‘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고 간결하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첫 숫따에 있는 불교의 에센스’의 #8을 참조하세요.
* 이것은 또한 ‘삽베- 상카-라- 아닛짜-(Sabbē saṅkhārā aniccā)’, 즉 ‘모든 상카-라는 아닛짜- 특성을 가진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생성은 항상 사람을 닙바-나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 위 매우 중요한 개념을 여러 방식으로 논의했습니다. 예를 들어, ‘앗따또 사마누빳사띠와 소따빤나 단계’, ‘아닛짱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 ㅡ 결정적 구절’를 참조하세요.
* 닙바-나가 있는 곳에는 31 영역 세계가 전혀 없습니다. ‘로까와 닙바-나(알로까) ㅡ 완전한 개관’을 참조하세요.
* 위 관련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 소따빤나 단계의 핵심입니다. 명확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포럼에서 문의해 주세요.
왜 사띠빳타-나 부미에 도달해야 할까요?
8. 뿌툿자나(또는 아나-가-미 단계 아래의 모든 이)의 마음은 항상 까-마 로-까에 빠지므로,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단계를 되짚어 가야 하고, 그 다음에 까-마 산냐-를 극복하여 사띠빳타-나 부미에 도달해야 합니다.
* 마음이 까-마 산냐-에 갇혀 있는 한, 부처님의 더 깊은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까-마 산냐-는 (마음을 적어도 뿌라나 깜마 단계의 앗잣따/바힛다 윈냐-나에 유지하게 하는) 빤짜 니-와라나(pañca nīvaraṇa)를 촉발합니다.
* 그 다음, 마음이 (그 순간의 가띠에 기반하여) 그 감각 입력에 까-마 구나(kāma guṇa)로 들러붙으면, 그것은 또한 순식간에 ‘나와 깜마’ 단계로 더 진전합니다.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을 참조하세요.
* 요약하자면, 까-마 라-가 상요자나를 제거하지 않은 사람(아나-가-미 단계 아래의 모든 이)의 마음은 항상 사띠빳타-나 부미와 닙바-나에서 멀어지는 ‘아누소따가-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빠띳짜 사뭅빠-다는 외부 세계도 창조한다!’에서 논의했듯이, 세상의 본질은 그것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사띠빳타-나 부미에 도달하기 위한 주요 단계
9. 이제, 뿌툿자나가 닙바-나의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 단계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따빤나가 될 때, 그 사람은 이 포스트에 있는 도표의 어떤 세부 사항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다음 단계들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i. ‘나와 깜마’ 단계가 멈춥니다. 즉, 그때에 사람은 오염된 말을 하지 않고, 오염된 행위를 하지 않고, 오염된 생각도 생성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위 도표의 단계 4와 단계 5는 일어나지 않습니다(역주: 아뿐냐-비상카-라에 의한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지 않고 뿐냐-비상카-라에 의한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난다는 것에 해당할 수 있음).
ii. 마음이 까-막찬다(kāmacchanda)를 촉발할 수 있는 감각 입력에 집중되지 않습니다. 즉, 단계 2가 촉발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이 까-마 라-가(또는 빠띠가)를 촉발할 수 있는 감각 입력에 집중되어서는 안됩니다(역주: 뿐냐-비상카-라에 의한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지 않고 아넨자-비상카-라 레벨의 아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난다는 것에 해당할 수 있음). 이것을 수바(subha) 또는 빠띠가 니밋따(paṭigha nimitta)를 취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이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iii. 세상의 아닛짜, 둑카, 아낫따 특성, 즉 빤쭈빠-다-낙칸다에 들러붙는 것이 무의미하다(헛되다)는 것을 숙고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까-마 산냐-를 극복하고, 까-마 다뚜 단계를 뛰어넘어 사띠빳타-나 부미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계입니다(역주: 꾸살라물라 연기가 일어나게 하고 꾸살라물라 연기가 계속되어, 사띠빳타-나 부미로 도약되어 팔라 찟따가 일어나게 하는 단계에 해당할 수 있음).
이 단계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또는 한 시간 안에 완료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과정이 수년이 걸릴지라도, 이 모든 단계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빅쿠는 배경을 설정하는 데 평생을 바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제 자리에 들어맞으면’ 그 단계들은 모두 짧은 시간 안에 완료될 것입니다.
* 아나리야 요기(예를 들어, 부처님 당시의 알라-라 깔-라-마)는 위의 (i)과 (ii)는 완수할 수 있었지만 (iii)은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스런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미래 괴로움/고통은 부서지지 않은(끊어지지 않은) 상요자나로 인한 까-마 산냐-의 자동적인 촉발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소따빤나 단계에 빨리 도달할 수 있을까?
10. #9의 세 가지 필수 단계는 모두 한 번의 법문을 듣거나 명상/숙고에 깊이 몰두하는 동안에 충족될 수도 있습니다. 띠삐따까에는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한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좋은 예로 앙굴리말-라 존자가 있는데, 존자는 처음에 부처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짧은 시간, 아마도 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소따빤나에 도달했습니다.
* 그런가 하면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심지어 부처님과 가까이 살고) 오랫동안 빅쿠로 지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좋은 예로 (보디삿따께서 밤에 왕궁을 나설때 말등에서 수행했던 찬나 빅쿠가 있습니다. 찬나 빅쿠는 보디삿따께서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신 후에 빅쿠가 되었지만, 수다원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은 부처님의 반열반(빠리닙바-나) 이후였습니다.
* 오늘날의 상황은 찬나 빅쿠의 상황과 더 비슷합니다.
11.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만난 지 한 시간 내에 이 모든 단계를 완료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부처님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화가 시작되자, 마음은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변화를 겪었습니다. ‘앙굴리말라 이야기 - 붓다 담마에 대한 많은 통찰’를 참조하세요. 그는 전생에 빠-라미따(‘필요한 배경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함)의 대부분을 성취했을 것입니다.
* 반면에, 찬나 빅쿠의 경우에는, ‘배경을 마련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렸습니다. 그는 부처님과 다른 아라한들의 수많은 설법을 들었을 테지만, 오랜 기간이 지나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위 #10을 참조하세요.
* 핵심은 다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용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때, 온전히 노력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자(삽뿌리사 또는 깔야-나밋따)의 긴 설법을 주의 깊게 듣거나, 필요한 모든 인쇄물을 모아 마음이 세 단계를 거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숙고하는 것(위빠사나)에 몰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그 단계들을 거치도록 인도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도덕하거나 탐닉하는 삶을 살면서 한 시간 안에 ‘모든 것을 끝내려고’ 애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까-마 라-가는 '왜곡된 산냐-'로 인해 일어난다’를 참조하세요.
이 세 단계는 숫따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필자는 수많은 관련 숫따를 바탕으로 그런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단지 제안이나 지침으로만 여겨져야 합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논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