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까-마 라-가는 '왜곡된 산냐-'로 인해 일어난다
원문: Three Levels of Practice 섹션의 ‘Kāma Rāga Arises Due to “Distorted Saññā”’ 포스트
(성욕을 포함하여) 까-마 라-가(kāma rāga)는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로 인해 일어나며, 그런 ‘왜곡된 산냐-’는 우리가 육성한 가띠(gati)에 기반하여 일어납니다. 필자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023년 12월 28일 작성
소개
1. 필자가 보기에, 우리의 ‘왜곡된 산냐-’를 이해(그리고 확고하게)하는 것은 소따빤나 단계에 이르는 것과 또한 아나-가-미 단계에 이르기 위해 ‘까-마 라-가’를 제거하는 것에 모두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으로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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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에서 그 주된 개념을 논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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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우리의 윈냐-나(전체 마음성향)를 마술사에 비유하셨는데, 마술쇼는 왜곡된 산냐-에 기반함을 알아내셨습니다. 빠알리 낱말인 산냐-(saññā)는 전통적으로 인식(perception)으로 번역되지만, 그것은 위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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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이, ‘마술 행위’와 ‘왜곡된 산냐-’는 어떤 자나 그밖의 어떤 것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생과 전생에서 우리가 육성한 가띠(gati)에 기반하여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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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것의 요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 결론을 더욱 명확하게 하는 하나의 숫따를 논의해 보겠습니다.
아-난다 숫따(SN 8.4)의 배경
2. 다음은 ‘Ānanda Sutta (SN 8.4)’를 간략히 요약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링크에서 영어 번역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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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 아-난다 존자와 완기-사 존자를 탁발을 나갔습니다. 걸어가는 중에 완기-사 존자는 자신의 마음에 (성욕의) ‘까-마 라-가’가 일어나서 괴롭히기 시작했음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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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따에서는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아름다운 여성을 보았고 욕정의 생각이 존자에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빠알리어로, 이 ‘불타는 감정’은 ‘까-마 빠릴라-하(kāma pariḷāha)’입니다. 모든 성인(adult)은 성적 맥락에서 그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강렬한 ‘까-마 라-가(kāma rāga)’가 일어나면, 사람에게는 그 욕구를 빨리 채우기 위한 어떤 행위를 하도록 촉구하는 ‘불타는 갈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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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툿자나(보통 사람)는 그 압박의 마음, 즉 ‘불타는 갈망’의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성적 행위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 불타는 긴박감, 즉 ‘까-마 빠릴라-하(kāma pariḷāha)’에 기반하여 잠시 감성을 잃고 매우 부적절한 행위를 할 수도 있습니다.
3. 완기-사 존자는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던 것 같습니다. 존자는 그것의 위험함을 깨닫고 아-난다 존자에게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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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2.1에서: “Kāmarāgena ḍayhāmi, cittaṁ me pariḍayhati; Sādhu nibbāpanaṁ brūhi, anukampāya gotam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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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기-사 존자는 “저는 (성적) 즐거움에 대한 불타는 욕망에 이르렀습니다. 제 마음은 불타고 있습니다. 이 갈망의 불을 어떻게 끌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요.”라고 청하셨습니다.
4. 다음 구절에서, 아-난다 존자는 “도반의 마음이 왜곡된 인식 때문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Saññāya vipariyesā, cittaṁ te pariḍayh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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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또는 모든 다른 영어 번역)에서 번역의 문제는 ‘인식의 왜곡’이 의미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링크에서 영어 번역이 말하는 전부입니다. 늘 그렇듯이, 번역자는 의미없는 낱말별 번역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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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산냐-’의 개념에 관해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포스트가 필요했습니다. ‘세 단계 실천’ 섹션의 ‘인식(산냐-) 이해를 통한 소따빤나 단계(Sotapanna Stage via Understanding Perception (Saññā))’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해당 서브섹션의 첫 번째 포스트는 필요한 배경에 대한 링크로 시작하는 ‘소따빤나 단계와 왜곡된/오염된 산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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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개념을 포함하는 많은 숫따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 숫따는 자세히 설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있을 포스트에는 그 배경이 필요할 것입니다. 불분명한 점이 있다면 지금이 포럼에서 문의할 때입니다.
5. 다음 구절(표식 3.3)에서, 아-난다 존자는 완기-사 존자에게 정욕을 일으킬 수 있는 감각 입력에 관여하는 것을 삼가하도록 다음과 같이 권하십니다. “매력적이고,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감각 입력을 멀리 하세요”, 즉 “Nimittaṁ parivajjehi, subhaṁ rāgūpasaṁhita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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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니밋따(Nimitta)에 묶이면, 그 니밋따는 감각 입력(그리고 아-람마나로 변함)입니다. 빠리왓자(parivajja)는 삼가하거나 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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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바 니밋따(subha mimitta)는 매력적인/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각 입력입니다. 그것에 관여하면, 그것은 라-가(이 경우에는 정욕)를 생성시킬 수 있고, 그것이 ‘라-구-빠상히땅(rāgūpasaṁhitaṁ)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감각 입력은 뿌툿자나(puthujjana)에게만 수바 니밋따(subha nimitta)입니다. 아리야(Ariya)는 그것이 라-가(rāga)와 그리고 결국 괴로움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6. 그것이 감각 기능의 절제를 육성하는(indriya saṁvara) 모든 것입니다. 우선 세카(Sekha)(또는 세카, 즉 유학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로서 그것을 해야 합니다. ‘Saṁvara Sutta (SN 35.98)’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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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염원/번뇌가 외부 감각 대상(이 경우에는 여성)에 없다하더라도, (즉, 세카로서) 수행하는 동안에는 그런 유혹적인 감각 입력을 피해야 합니다. (사띠빳타-나를 육성함으로써, 아래 참조) 까-마 라-가(kāma rāga)를 제거한 후에는, 정욕의 흔적을 생성하지도 않고 아름다운 여성이 가득한 하렘(harem)에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7. 최근 포스트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웨다나-(느낌)는 마음이 만든 것이며 ‘왜곡된 산냐-’에 기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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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의했다시피, 설탕의 달콤함과 여성의 아름다움은 ‘왜곡된 산냐-’고 웨다나-가 아닌데, 유혹적인 음악이나 장미의 냄새/향기도 유사하게 ‘왜곡된 산냐-’고 웨다나-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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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그런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을 때, 그것은 ‘마음이 만든 웨다나-’, 즉 ‘삼팟사ㅡ자-ㅡ웨다나-’로 이어집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나는 웨-다나-(느낌)’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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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가 느끼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감각 입력은 그 포스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립 느낌(아둑카마수카 웨다나-)으로만 생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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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만든 웨다나-’는 ‘왜곡된 산냐-’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제거될 수 있습니다. 사띠빳타-나의 육성은 그 이해에 기반합니다.
8. 아-난다 존자는 표식 4.1에서 다음과 같이 지침을 더 주십니다. “Saṅkhāre parato passa, dukkhato mā ca attato; Nibbāpehi mahārāgaṁ, mā ḍayhittho punappuna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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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을 때, 그것은 마노, 와찌, 및 까-야 아비상카-라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완기-사 존자는 걷고 있었으므로 마노 아비상카-라만 생성하였을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는 그런 아비상카-라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며(parato passa) 그것들은 괴로움으로 이어지는(dukkhato) 것이며 그것들을 유익한 것으로 간주하지 말아야(mā ca attato) 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말씀하십니다. 링크의 영어 번역은 ‘앗따또(attato)’를 ‘자아(self)’로 잘못 번역하고 있습니다. ‘앗따또 사마누빳사띠' ㅡ 어떤 것을 가치있게 봄’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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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감각 입력을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강한(mahā) 라-가(rāga)를 없애는 첫 단계입니다. 정욕의 불이 태우는 것을 멈추세요(mā ḍayhittho punappunaṁ). ‘마-(mā)’는 멈춤/피함을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사띠빳타-나의 적용
9. 다음 구절인 표식 5.1에서, “Asubhāya cittaṁ bhāvehi, ekaggaṁ susamāhitaṁ; Sati kāyagatā tyatthu, nibbidābahulo bhava”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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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감각 입력의 아수바(asuba) 본질’에 집중할 때(Asubhāya cittaṁ bhāvehi), 사마디로 바뀝니다(ekaggaṁ susamāhitaṁ). 마음챙김으로(Sati kāyagatā), 마음은 까-마 로까에서 벗어납니다(nibbidābahulo bhava). 여기서, ‘닙비다-(nibbidā)’는 ‘세상에서 벗어나게 됨’을 의미하고, ‘바훌로(bahulo)’는 ‘많이/매우’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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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있을 포스트에서 ‘사띠 까-야가따-(sati kāyagatā)’ 또는 ‘까-야가따- 사띠(kāyagatā sati)’에 대해 더 논의하겠습니다. 이 구절에 있는 ‘까-야가따- 사띠(kāyagatā sati)’에 대한 참조는 우리가 집중할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의 초기 버전입니다.
10. 이어지는 구절(표식 6.1)에서는 ‘아니밋따(animitta) 단계’에 이를 수 있게 되는 후의 나중 단계, 즉 마음이 자발적으로 감각 입력(니밋따)에 들러붙음을 포기할 수 있는 때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아나-가-미가 육성하는 사띠빳타나의 다음 버전인데, “Animittañca bhāvehi,mānānusayamujjaha; Tato mānābhisamayā, upasanto carissasī’t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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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니밋따(nimitta)를 취하지 않고 명상하여, (아라한 단계에서) 마-나 아누사야(māna anusaya)를 완전히 버리고, ‘나를/내가’라는 감각(마-나 아누사야)를 극복할 때, 불타는 충동이 없이 ‘완전히 쿨링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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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이 숫따에 대한 간결한 서술입니다.
아라한 단계에 이르는 세 단계
11. 위 논의에 따라, 우리는 닙바-나(아라한과)에 이르는 길을 다음과 같이 넓게 범주화할 수 있습니다.
i. 뿌툿자나/소따빤나로서, 갈망을 야기하는 감각 입력을 피함.
ii. 까-마 로까(kāma loka)에 대한 ‘왜곡된 산냐-’의 개념을 이해하고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를 육성함.
iii. 루빠 로까(rupa loka)와 아루빠 로까(arupa loka)에 대하여 (ii) 단계를 반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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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계 (ii)는 아나-가-미() 단계에 이르기 위해 필요하지만, 단계 (i)에도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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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주로 단계 (i)과 단계 (ii)에 집중할 것입니다.
성욕이 일어남에 대한 전통적 해결책
12.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합니다. 그것은 시각 대상, 음식, 음악, 향기, 및 육체 접촉에 대한 갈망을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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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행위의 범주는 그것이 성폭행과 다른 매우 높은 부도덕한 성행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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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다른 감각적 유혹(시각 대상, 소리, 맛, 및 냄새)에 대한 들러붙음은 또한 까-마 로까(kāma loka, 욕계)에 마음을 묶습니다(그리고 그 모두는 ‘왜곡된 산냐-’에 기반합니다). 까-마 라가(kāma rāga)라는 용어는 그 모두를 포함합니다.
13. 대부분의 종교(그리고 비종교의 스승들)는 까-마 로까(욕계)에 기반한 그런 부도덕한 행위(그러나 주로 성적 측면에 집중)를 피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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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그것이 까-마 라-가(kāma rāga)와 함께 하는 ‘불타는 감각’, 즉 ‘까-마 빠릴라-하(kāma pariḷāha)의 원인은 외부 대상이라는 가정에 그들의 권고/충고가 기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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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실천의 처음에 ‘감각 절제’를 충고하셨지만, 그 자체가 ‘까-마 라-가 아누사야(kāma rāga anusaya), 즉 ‘까-마 라-가 상요자나(kāma rāga saṁyojana)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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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괴로움이 없는 순수한 마음’은 (단순히 감각 절제로 제거할 수 없고, 지혜, 즉 빤냐-로서만 제거할 수 있는) 아누사야/상요자나의 층으로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감춰진 순수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괴로움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붓다께서 발견하실 때까지 그것은 감춰져 있었습니다.
14. 논의한 바와 같이, ‘순수한 마음’(빠밧사라 마음, pabhassara mind)은 7가지 유형의 아누사야(anusaya) 또는 10가지 유형의 상요자나(saṁyojana)로 덮여 있습니다. ‘홈’ 섹션의 ‘도표로 본 불교’에 있는 ‘괴로움 없는 순수한 마음을 회복(Recovering the Suffering-Free Pure Mind)’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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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움 없는 순수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잘못된 견해(사견)을 제거함으로써 3가지 유형의 상요자나(삭까-야 딧티, 위찌낏차-, 실랍바따 빠라-마사)을 제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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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단계는 까-마 라-가(빠띠가도 동시에 제거됨)를 제거하는 것이며, 아나-가-미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나머지 5가지 상요자나(마-나 상요자나와 마-나 아누사야를 포함)는 아라한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4단계의 닙바-나에 대한 조건’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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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다른 가르침은 괴로움의 끝에 이를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다른 종교(그리고 붓다 담마의 세간 버전)는 도덕적 삶을 사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해결책일 뿐입니다. 간단한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암에 걸렸을 때, 처음에 열이 있는 징후를 보일 수 있는데, 아스피린을 섭취함으로써 열을 내릴 수 있지만, 그것은 암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