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마하-웨달라 숫따 ㅡ 산자-나-띠, 위자-나-띠, 빠자-나-띠
원문: Buddha Dhamma 섹션의 ‘Mahāvedalla Sutta – Sañjānātī, Vijānāti, Pajānāti’ 포스트
마하-웨달라 숫따는 최근 포스트에서 논의했던 산자-나-띠-, 위자-나-띠-, 및 빠자-나-띠-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제공합니다.
2026년 4월 24일 작성
소개
1. ‘Mahāvedalla Sutta (MN 43)’는 마하-꼿티따 존자와 사-리뿟다 존자 사이의 대화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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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의는 최근 포스트에서 다룬 산자-나-띠-, 위자-나-띠, 및 빠자-나-띠-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산자-나-띠 ㅡ 동물들은 대부분 이 레벨로 이해한다’와 ‘위자-나-띠, 빠자-나-띠, 아비자-나-띠 ㅡ 인간 이해의 더 나은 레벨’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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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따의 링크 주소에 있는 영어 번역에서는 그 용어들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아래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세 용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또한 윈냐-나(viññāṇa)는 의식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윈냐-나가 ‘오염된 의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잘못된 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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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의는 빠자-나-띠-(pajānātī)라는 용어를 명확히 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빠자-나-띠- ㅡ 성스런 진리에 대한 이해
2. 표식 2.2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됩니다. “Kittāvatā nu kho, āvuso, duppaññoti vuccatī’ ti?”, 즉 “뿌툿자나, 즉 지혜가 없는 보통 사람(duppañño)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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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표식 2.5)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기원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라는 성스런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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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납빠자-나-띠(nappajānāti‘, na pajānāti)’라는 낱말에 담겨 있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따라서, 빠자-나-띠는 ‘성스런 진리를 이해한다’는 의미고, 그 반대가 납빠자-나-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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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대답은 표식 3.5에서 빠자-나-띠가 ‘성스런 진리를 이해한다’라는 뜻이라고 명시함으로써 명확히 설명됩니다.
위자-나-띠 ㅡ 윈냐-나로 잘못 이해하다
3. 표식 4.2에서, “윈냐-나(viññāṇa)는 어떻게 정의됩니까?”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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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을 윈냐-나(viññāṇa)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에 대해 잘못된 결론, 즉 ‘위자-나-띠-(vijānātī)’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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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4.4에서: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잘못 인식합니까?”, 즉 “Kiñca vijān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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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은 “그것은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중립 느낌’을 잘못 인식합니다”, 즉 “Sukhantipi vijānāti, dukkhantipi vijānāti, adukkhamasukhantipi vijānāt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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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숫따는 위자-나-띠의 의미나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숫따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위자-나-띠, 빠자-나-띠, 아비자-나-띠 ㅡ 인간 이해의 더 나은 레벨’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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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위자-나-띠-(vijānātī)가 잘못되었을까요? 위 포스트에서 논의했듯이, 산냐-, 웨다나-, 및 윈냐-나는 모두 빤쭈빠-다낙칸다의 구성 요소입니다. 이것들은 마음이 ‘까-마 산냐-’로 장식된 루-빠-(rūpa)에 들러붙음으로서 생겨납니다. 즉, 어떤 ‘외부 루-빠’도 색깔, 맛, 냄새, 음색, 또는 기분좋은 감촉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윈냐-나는 산자-나-띠에 기반하여 일어나며, 그런 ‘루-빠’를 더 많이 얻고자 하는 기대로 이어지는데, 바로 그 기대가 ‘윈냐-나(viññāṇa)’입니다.
위자-나-띠는 빤냐-로 향상될 수 있다
4.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빤냐-로 평범한 숙고/조사를 통해) 윈냐-나로 산자-나-띠가 참된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경험된 루-빠는 외부 세계의 루-빠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위자-나-띠, 빠자-나-띠, 아비자-나-띠 ㅡ 인간 이해의 더 나은 레벨’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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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산자-나-띠 ㅡ 동물들은 대부분 이 레벨로 이해한다’를 참조하세요. 이는 동물에게는 빤냐-(paññā)가 발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행히도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지 못하게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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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말해, 인간은 신피질을 포함한 뇌가 잘 발달했기 때문에 빤냐-(paññā)를 발달시킬 수 있지만, 동물은 그렇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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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동물은 산자-나-띠에 따라 작용하고, 대부분의 인간들도 위자-나-띠에 따라 작용하는데, 위자-나-띠는 주로 산자-나-띠에 의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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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20~30년 사이에 현대 과학은 산자-나-띠가 외부 세계의 참된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식(산냐-)의 환상 ㅡ 이는 과학적 합의(의견 일치)다’를 참조하세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최근의 발견을 알지 못하는데, 이는 그 포스트와 ‘위자-나-띠, 빠자-나-띠, 아비자-나-띠 ㅡ 인간 이해의 더 나은 레벨’ 포스트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래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빤냐-(paññā)를 기르는 능력을 아직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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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빤냐-는 윈냐-나와 함께 육성될 수 있으며, 이는 다시 위자-나-띠를 산자-나-띠 수준 이상으로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음 구절에서 가리켜 보인 바와 같이, 빤냐-(paññā)와 윈냐-나(viññāṇa)가 서로 관련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빤냐-는 윈냐-나를 통해 육성될 수 있다
5. 표식 5.1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ṁ—ime dhammā saṁsaṭṭhā udāhu visaṁsaṭṭhā?”, 이는 “지혜(빤냐-)와 윈냐-나(viññāṇa), 이 두 가지는 섞여 있습니까, 아니면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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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은 “그 두 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혼합되어 있습니다.”입니다. 왜냐하면 위자-나-띠 수준에서 세상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면, 빠자-나-띠라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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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포스트(‘산자-나-띠 ㅡ 동물들은 대부분 이 레벨로 이해한다’)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동물들은 오직 산자-나-띠를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높은 차원인 빠자-나-띠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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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동물은 결코 성스런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또는 인간계 위의 영역에 있는 존재)만이 위자-나-띠의 수준에서 시작하여 빠자-나-띠 차원으로 나아가 성스런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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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6.4에서: 빤냐-(paññā)를 사용(bhāvetabbā)함으로써, 윈냐-나(viññāṇa)를 완전히 이해(pariññeyyaṁ)해야 합니다. 그때 빤냐-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아비담마에서 빤냐-가 소바나 쩨따시까(sobhana cetasika)인 것에서 분명합니다. 열 가지 잘못된 견해(재탄생을 믿지 않는 것을 포함)를 버린 사람은 윈냐-나의 참된 본성, 즉 ‘내재된 까-마 산냐-’ 때문에 항상 오염된 상태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빤냐-를 육성할 수 있습니다.
웨다나-와 산냐-는 ‘서로 관련된다’
6. 표식 7.1 ~ 7.6에서: 웨다나는 “수카(sukha), 둑카(dukkha), 그리고 아둑카마수카(adukkhamasukha) (중립).”로 정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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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8.2에서: 질문은 “인식(산냐-)은 어떻게 정의됩니까?”이고, 대답은 “그것은 산자-나-띠를 통해 알려지기 때문에 인식(산냐-)라고 불립니다(‘Sañjānāti sañ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saññāti vuccat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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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8.4에서: 질문은 “그것은 무엇을 인식합니까?(‘Kiñca sañjānāti?’)”이고, 대답은 “그것은 파란색, 빨간색, 흰색을 인지합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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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은 예시로 제시되었습니다. 색깔(파란색, 빨간색, 흰색 등)을 보는 것은 산자-나-띠(sañjānāti), 즉 ‘내재된 산냐-를 통해 아는 것’의 예입니다. 우리가 논의했듯이, ‘색깔’은 햇빛이나 우리가 보는 사물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는 최근 현대 과학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 ‘루-빠 사무다야 ㅡ 마음에 의해 다채로운 세상이 창조된다’을 참조하세요. 색깔과 빛깔은 모두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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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채 인상’은 마음 속에서 ‘마음이 만든 산냐-’(우리 인간에게는 까-마 산냐-)로 일어납니다. 세상은 ‘무색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다채로운 세상’으로 인식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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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깔은 마음이 만든 인식이라고 붓다께서는 2600여년 전에 가르치셨지만, 현대 과학은 최근에야 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웨다나-, 산냐-, 윈냐-나 ㅡ 분리되지 않음
7. 표식 9.1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Yā cāvuso, vedanā yā ca saññā yañca viññāṇaṁ——ime dhammā saṁsaṭṭhā udāhu visaṁsaṭṭhā?”, 이는 “웨다나-, 산냐-, 및 윈냐-나, 이것들은 섞여 있습니까, 아니면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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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은 “그 세 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섞여 있습니다.”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완전히 구분해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느끼는(웨다나-) 것을 인식하고(산냐-), 인식하는(산냐-) 것을 산자-나-띠(sañjānātī)로 잘못 알기(윈냐-나)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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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3에서 간략히 논의했듯이,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의 생성은 마음이 ‘까-마 산냐-(kāma saññā)’로 장식된 ‘루-빠’를 받아들이고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를 생성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수카 웨다나-’가 있는 그 ‘왜곡된 루-빠’에 들러붙으면, 상카-라(깜마) 생성으로 이어지고, 그 오염된 마음은 그런 루-빠를 더 많이 얻고자 하는 욕망을 만들어냅니다. 그 기대는 윈냐-나에 있습니다. 이것이 웨다나-, 산냐-, 및 윈냐-나 사이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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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산냐-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웨다나-를 일으킨다’를 참조하세요. 거기서 논의된 바와 같이, 초기 웨다나-의 대부분은 산냐-를 통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음은 이 초기의 순한 웨다나를 생성하고 강화하여 훨씬 더 강렬한 삼팟사ㅡ자-ㅡ웨다나-(samphassa-jā–vedanā)로 발전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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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비해, 아라한이 느끼는 웨다나-는 초기 마나-빠/아마나-빠 수준에 머무르며 강렬한 수카/둑카 수준으로까지 상승하지 않습니다. 아래 #14, #15를 참조하세요.
소따빤나 아누가미에게 위자-나-띠는 빤냐-와 함께 빠자-나-띠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8. 표식 11.1에서, “ ‘Neyyaṁ panāvuso, dhammaṁ kena pajānātī’ ti?”, 즉 “빠자-나-띠-(pajānātī)를 통해 담마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절차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 ‘Neyyaṁ kho, āvuso, dhammaṁ paññācakkhunā pajānātī’ ti”, 즉 “빤냐- 짝쿠, 즉 ‘지혜의 눈’을 개발함으로써 빠자-나-띠 수준에 이를 수 있습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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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네이양(Neyyaṁ)’은 ‘절차’를 의미하고 빠자-나-띠-(pajānātī)는 빤냐- 짝쿠(paññā cakkhu)로 담마(부처님의 가르침)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 번역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명확히 하지 않았지만, 빠자-나-띠-는 피상적인 이해가 아니라 (소따빤나 아누가미로서) 빤냐- 짝쿠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며, 소따빤나 단계에서 담마 짝쿠(dhamma cakkhu)로 바뀌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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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다음 질문인 “ ‘Paññā panāvuso, kimatthiyā’ ti?”, 즉 “빤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에 대한 대답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대답은 “ ‘Paññā kho, āvuso, abhiññatthā pariññatthā pahānatthā’ ti”, 즉 “빤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며 (번뇌를)를 버리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입니다.
빤냐- 짝쿠는 소따빤나 단계에서 담마 짝쿠로 바뀐다
9. 빤냐-는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하며 닙바-나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빤냐-는 이 세상에서 닙바-나로 가는 ‘디딤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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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사람은 열가지 잘못된 견해를 버리고 세간적 삼마 딧티(mundane samma diṭṭhi)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빤냐-의 초기 단계도 거치지 못합니다. 세간적 삼마 딧티에 도달하는 열쇠는 웃체다 딧티, 즉 육체의 죽음으로 삶이 끝난다는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논의했듯이, 이 견해는 생각/인식/느낌 등이 뇌에서 발생한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웃체다 딧티를 가진 가진 과학자가 산자-나-띠-의 오류를 깨달은 후에도 빠자-나-띠-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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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툿자나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들러붙음의 위험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의 빤냐-는 자라고, 소따빤나 아누가미 단계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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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숙고 중에 그들은 마음 속에 삼마- 딧티를 확립함으로써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합니다. 그 순간, 빤냐-는 냐-나로 높아집니다.
10. 표식 13.1에서, 다음 질문이 제기됩니다. “ ‘Kati panāvuso, paccayā sammā diṭṭhiyā uppādāyā’ ti?”, 즉 “삼마- 딧티가 발생하는 조건은 몇 가지 입니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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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답은 “parato ca ghoso, yoniso ca manasikāro”, 즉 “다른 성자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parato ghoso),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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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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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자로부터 배우는 것은 요니소 마나시까-라, 즉 괴로움을 초래하는 오염의 근원입니다. ‘요니(yoni)’라는 낱말은 문자 그대로 ‘여성의 출산 기관’(아기가 태어나는 곳)입니다. 마음은 감각 입력과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세간적 즐거움’에 들러붙음으로써 오염됩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감각 입력은 신기루이며, 인상은 ‘까-마 산냐-’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앞서 논의했듯이, 현대 과학은 최근에 이를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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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니소 마나시까-라와 ‘까-마 산냐-’ 사이의 관계는 ‘불교의 들러붙지 않음은 요니소 마나시까-라에 기반한다’에서 논의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위 #9에서 가리켜 보였듯이, 웃체다 딧티를 가진 과학자가 산자-나-띠-의 오류를 깨달은 후에도 빠자-나-띠-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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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냐-(saññā)는 (흔히 ‘인식/perception’으로 번역되지만)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번역어가 없는 매우 중요한 정신 요소(쩨따시까)입니다. 산냐-는 모든 유정체의 생존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재탄생 과정을 영속시키거나 연장시켜 미래의 괴로움을 초래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마하-웨달라 숫따 ㅡ 산자-나-띠-, 위자-나-띠-, 빠자-나-띠-에 대한 명료한 설명
11. 이제, 마하-웨달라 숫따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왜 어떤 숫따들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지, 그리고 왜 낱말 하나하나를 직역하는 것이 완전히 오도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물론, 이 특정 사례에서, 숫따 센트럴의 번역자는 산자-나-띠, 위자-나-띠, 빠자-나-띠라는 세 용어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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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 산냐-의 더 깊은 의미부터 시작하여, 산자-나-띠(sañjānātī)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도 많은 포스트들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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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자-나-띠에 대한 이해를 확고히 하도록 적어도 반나절 정도는 산냐-에 대한 이전 포스트들을 다시 읽어 보세요. 적어도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바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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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위자-나-띠와 빠자-나-띠에 대한 이해를 확고히 하도록 최근 포스트인 ‘산자-나-띠 ㅡ 동물들은 대부분 이 레벨로 이해한다’와 ‘위자-나-띠, 빠자-나-띠, 아비자-나-띠 ㅡ 인간 이해의 더 나은 레벨’을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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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마하-웨달라 숫따의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 산자-나-띠, 위자-나-띠, 빠자-나-띠라는 세 용어 사이의 극적인 차이를 확실히 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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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의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산냐-와 웨다나-는 우리의 감각 경험을 결정짓는다
12. ‘산냐-(saññā)’와 ‘웨다나-(vedanā)’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두 빠알리 낱말입니다. 이 두 낱말은 우리의 감각 경험(‘위빠까 측면’)을 정의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 말, 행동으로 반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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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데, 산냐-는 마음이 ‘마음을 즐겁게 하는’,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또는 ‘중립적인’ 광경, 소리, 맛, 냄새, 및 감촉으로 이루어지는 외부 세계를 나타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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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경험에 기반하여, 마음은 자동으로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를 생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각 입력에 들러붙는 방식입니다. 이것들은 마음을 산만하게 하고 닙바-나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붓다께서는 수카 웨다나-조차도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처럼 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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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어함’을 나타내는 다른 감각 입력이 있으며, 이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은 둑카 웨다나-를 생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에도 들러붙어 ‘그것들을 제거할’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 생각들은 본질적으로 둑카 웨다나-를 촉발시킬 뿐만 아니라 마음을 닙바-나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붓다께서는 그것들을 마치 창에 두 번 찔린 것처럼 다루라고 가르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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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모든 감각 입력은 ‘좋아함’이나 ‘싫어함’을 생성하지 않고 ‘중립, 즉 아둑카마수카 웨다나-’를 생성합니다. 그것들은 우리 마음을 오도(여전히 마음을 닙바-나에서 멀어지게 함)하는데, 붓다께서는 그것들이 ‘아닛짜 본질’임을 이해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예를 들어, ‘푸른 하늘’을 볼 때, 우리는 그것에 들러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하늘이 본질적으로 파랗다고 믿지만, 실제로 하늘은 무색채입니다. 이것은 라-가(rāga)와 도사(dosa)가 나타나지 않을 때에도 모하/아윗자-(moha/avijjā)로 들러붙는 한 예입니다.
13. 모든 감각 경험은 우리 마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감각 입력을 ‘고통으로 이끄는 것’으로 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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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12의 설명은 ‘Salla Sutta (SN 36.6)’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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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산냐-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웨다나-를 일으킨다’을 참조하세요. 산냐-(saññā)는 부처님 가르침의 심오한 측면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복잡한 개념입니다. 산냐-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산냐-와 그 진정한 의미’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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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산냐-는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생성되며, 이는 ‘산냐- ㅡ 빠띳짜 사뭅빠-다의 감춰진 측면’에서 간략하게 가리켜 보였습니다.
강렬한 까-마 수카는 마음이 만든 것이다
14. 아라한의 마음은 ‘까-마 다-뚜(kāma dhātu)’에 머물면서 까-마 산냐-(kāma saññā)를 경험하지만 그것에 들러붙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의 #6에 있는 도표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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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꽃다발을 보지만, 그저 꽃다발로만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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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들은 또한 ‘꿀의 달콤한 맛’을 느끼지만, 이는 약한 ‘마나-빠(manāpa)’ 상태에서만 나타납니다. 이는 뿌툿자나(puthujjana)처럼 강렬한 ‘까-마 수카(kāma sukha)’로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마나-빠(manāpa)’는 ‘기분좋은 감각’이며, 이는 뿌툿자나가 느끼는 ‘수카 웨다나-’(‘삼팟사ㅡ자-ㅡ웨다나’)의 초기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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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들도 역겨운 광경 또는 역겨운 맛을 접했을 때 반대되는 ‘아마나-빠(amanāpa)’(불쾌감)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는 뿌툿자나의 경우처럼 극심한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15. 이는 ‘Nibbānadhātu Sutta (Iti 44)’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들(아라한들)은 여전히 다섯가지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다. 감각이 작용하는 한, 그들은 계속해서 좋고 싫은 것(‘manāpāmanāpaṁ’ 또는 ‘manāpa’과 ‘amanāpa’)을 경험하고, 즐거움과 고통(‘sukhadukkhaṁ’)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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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왜곡된 산냐-’를 통해 생성된 초기 수카 웨다나-(마나-빠)는 매우 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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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툿자나가 경험하는 더욱 강렬한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는 ‘고도로 증폭된’ 버전입니다. 그 ‘증폭’은 마음이 감각 입력에 대해 ‘마음이 생성한’ 까-마 구나(kāma guna)로 들러붙을 때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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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은 ‘들러붙음의 기원 ㅡ 라-가는 산냐-에 의해 촉발된다’에서 다루었습니다. 향후 포스트에서는 뿌툿자나에게 있어 ‘마음이 만든’ 증폭과 그로 인해 인지되는 증폭된 ‘까-마 수카’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이 설명은 ‘Pañcakaṅga Sutta (SN 36.19)’와 ‘Indriyabhāvanā Sutta (MN 152)’에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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