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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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는  불타는 숯구덩이다 ㅡ 둑카담마 숫따

     

    원문: Buddha Dhamma 섹션의 ‘Kāma Is a Pit of Glowing Coals – Dukkhadhamma Sutta’ 포스트 

     

    둑카담마 숫따(Dukkhadhamma Sutta)는 감각적 즐거움(까-마 또는 까-마 앗사-다)이 환상일 뿐만 아니라 뜨겁게 달궈진 숯불 구덩이에 빠지는 것처럼 위험하다는 것을 간결하게 말합니다. 이 숫따를 이해하려면 부처님의 세계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모든 ‘세간 견해’(밋차- 딧티 및 삭까-야 딧티)를 버려야 합니다.

     

    2026년 5월 22일 작성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세계관

     

    1. 지난 3년여 동안 저는 ‘까-마 산냐-(kāma saññā)’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설명하는 많은 포스트를 썼습니다. 까-마 산냐-는 까-마 로까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으며, 어떤 감각 입력을 받으면 아윗자-를 유발하게 합니다. 따라서, [범부의] 모든 감각 사건에서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로 시작됩니다.  

     

    • * 달리 말하면, 우리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채로운 대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외부 세계의 어떤 대상에도 색깔이 없습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음식에도 본질적 ‘맛’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감각 기관은 내부적으로 이 ‘잘못된 인식’들을 생성합니다.  

    • * 신경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30년 넘게 이 사실을 알아 왔습니다. ‘인식(산냐-)의 환상 ㅡ 이는 과학적 합의(의견 일치)다’을 참조하세요. 그러나 그들은 진화과정에서 우리 육체가 그런 ‘잘못된 인식’(‘perception’은 ‘산냐-’를 나타내는 영어 낱말임)을 생성하도록 만들어졌다고 믿기 때문에 이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 * 우리는 시작이 없는 재탄생 과정에 내재된 ‘잘못된 인식’에 속아 왔기에, 그런 ‘잘못된 인식’을 믿지 않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물론, 현대 과학은 재탄생을 믿지 않으므로, 그들의 설명이나 세계관은 [붓다 담마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 * 이것이 바로 아-나-빠-나사띠의 첫 번째 단계가 ‘지혜로 보고’ 부처님의 세계관을 파악하여 받아들이고(āna, 아-나) 과학이 추구하는 진화론을 포함하여 모든 세간 견해를 버리는(āpāna, 아-빠-나) 것을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아-나-빠-나 ㅡ 붓다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세간 견해를 버림’을 참조하세요.

     

    어느 세계관이 올바른가?

     

    2. 두 세계관 모두 ‘내재된 잘못된 인식’(까-마 산냐-)가 없다면 삶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무색채의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를 참조하세요. 

     

    • * 현대 과학은 우리 육체가 그런 ‘잘못된 인식’을 만들어내도록 진화해 왔다고 말합니다.

    • * 붓다께서는 그런 ‘잘못된 인식’이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우리 육체와 정신적 몸에 내재되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 * 먼저 ‘색깔 인식’이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한 두 가지 설명 방식 중의 어느 것이 올바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현대 과학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것은 수십억년에 걸쳐 진화한 것일까요? 아니면 ‘가띠에 기반하여 다른 유정체로 다르게 구축된 것’일까요?

    • * 두 번째 과정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통해 작동합니다. 예를 들면, 더 좋은 가띠를 가졌지만 감각적 즐거움을 갈망하는 인간은 다채롭고 맛있는 등의 감각 경험으로 ‘삶을 즐기는’ 감각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는 반면에, 대부분의 동물들은 부도덕한 가띠로 인해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진화론의 문제점

     

    3. 설명했듯이, 진화론은 생각이 뇌에서 일어난다는 중요한 전제에 기반합니다. 뇌(즉, 육체)가 죽으면 그 생명체는 죽습니다. 죽음은 생명의 절대적인 끝입니다. ‘종의 진화’는 DNA의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통해 전파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진화론’에 근거하여 주장한다면, 저는 그들과 논쟁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그런 ‘잘못된 세계관’을 버려야 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 * 이 두 가지 중의 선택에 있어서, 생각이 뇌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증거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윈의 진화론 옹호자들이 직면한 주요 난관입니다. 그들은 비활성 원자/분자로 이루어진 뇌에서 어떻게 생각이 발생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를 ‘의식의 난제’라고 부릅니다. 또한 그들은 퀄리아(qualia)라는 용어를 ‘(잘못된) 인식’을 지칭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들은 ‘퀄리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의식의 난제’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문제에 직면합니다. 둘 다 비활성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진 뇌에서 어떻게 그런 정신적 측면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 * 다윈의 이론(생각/인식이 뇌에서 발생한다는 주장과 동일)에 반하는 두 가지 증거가 더 있는데, 그것은 재탄생 이야기(‘재탄생(윤회)의 증거’를 참조)와 임사 체험(NDE)(‘임사 체험(NDE): 뇌는 마음이 아니다’ 참조)입니다. 

     

    산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4. 수백 년에 걸쳐 ‘산냐-(saññā)’라는 중요한 개념은 테라와다 불교에서조차 무시되어 왔습니다. 산냐-는 실제로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하-웨달라 숫따에 대해 모든 번역자들은 색깔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해당 구절을 잘못 해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산자-나-띠, 위자-나-띠, 및 빠자-나-띠라는 낱말들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하-웨달라 숫따 ㅡ 산자-나-띠, 위자-나-띠, 빠자-나-띠’를 참조하세요. 

     

    • * 지난 3년여 동안 저는 띠삐따까의 숫따에서 묘사된 ‘산냐-’의 개념과, 인간 몸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아라한 포함)에게 ‘까-마 산냐-’를 유도하는 데 있어 산냐-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 포스트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붓다 담마’ 섹션에 모아 두었습니다. 

    • * 하지만, 수백 년 동안 간과되어 온 이 ‘참신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접근 방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 * ‘Dukkhadhamma Sutta (SN 35.244)’는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는 것의 위험성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밝히는 짧은 숫따입니다. 이제, 붓다께서 설명하신 대로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붓다 담마’의 지난 포스트들에 모두 나와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워하시는 분들을 위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 * 저는 ‘Buddha Dhamma – Systematic’이라는 새로운 섹션을 시작하여 그런 ‘잘못된 인식’이 우리 자신의 행위를 통해 어떻게 생겨나고, 미래로 재탄생 과정을 연장시키는지 설명하겠습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것은 마치 뜨겁게 달궈진 숯불 구덩이에 기꺼이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불빛에 이끌린 나방이 죽는 것과 유사합니다. 

     

    둑카담마 숫따의 번역

     

    5. 다음은 ‘Dukkhadhamma Sutta (SN 35.244)’에 대한 저의 번역입니다. 링크 주소(Sutta Central)에는 빠알리 원문과 영어 번역이 있습니다.

     

    • * 이 짧은 숫따는 부처님의 주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데, 왜 감각적 즐거움(kāma assāda)이 단지 환상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것인지를 기술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이 만든 까-마 앗사-다’를 기반으로, 사람들이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아빠-야(apāyā)에 재탄생하기 때문입니다.

    • * 그래서 성자는 감각적 즐거움을, 불타는 숯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을 피하듯 피합니다. 둘 다 상상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 * 저는 그동안 너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피해왔지만, 모호함 없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이 메시지가 이해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짧은 숫따는 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둑카담마 숫따 (SN 35.244)

     

    표식 1.1에서: “빅쿠들이여, 빅쿠가 괴로움의 기원과 그침(괴로움에 관한 성스런 진리)을 참으로 이해하게 되면, 감각적 즐거움을 그런 방식으로 보게 되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잠재적 경향이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때 탐욕(abhijjhā)과 정신적 괴로움(domanassa) 같은 부도덕한 성질이 일어나 마음을 압도하지 않는 삶의 방식과 행위 방식을 깨닫게 된다.”

     

    표식 2.1에서:그러면 빅쿠는 어떻게 괴로움으로 이어지는 모든 것의 기원과 그침을 참으로 이해하는가?

     

    “빅쿠는 루빠의 참된 본질, 루빠의 기원, 그리고 마음속에서 루빠가 일어나는 것의 멈춤을 이해한다. 그는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의 참된 본질, 윈냐-나의 기원, 그리고 윈냐-나가 일어나는 것의 멈춤을 이해한다.”

     

    (여기서 루빠는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외부 루빠’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외부 루빠를 경험할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루빠를 뜻합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외부 루빠에는 색깔, 맛, 냄새 등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이 만든 루빠’만이 그런 추가적인 ‘마음이 만든 성질’을 지닙니다. ‘색깔은 (까-마 산냐-로 인해) 마음이 만든 것이다’를 참조하세요.)

     

    “이렇게 빅쿠는 괴로움으로 이어지는 모든 것이 일어남의 기원과 멈춤을 참으로 이해한다.”

     

    표식 3.1에서:그러면 빅쿠는 어떻게 감각적 즐거움(까-마 또는 까-마 앗사-다)을 보기에,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의 잠재적 경향이 없게 되는가?

     

    “사람 키보다 깊고, 붉게 달아오른 숯으로 가득 찬 숯구덩이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살고 싶고 죽고 싶지 않으며, 행복하고 싶고 고통을 피하고 싶은 사람이 지나간다고 하자. 그런데 두 명의 힘센 사람이 그 사람의 양팔을 붙잡고 그 숯불구덩이 쪽으로 끌고 간다고 하자. 그는 그들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칠 것이고, 숯불구덩이에서 도망치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저 숯불구덩이에 떨어지면, 치명적인 고통과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고 그는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빅쿠가 감각적 즐거움이 불타는 숯구덩이와 같다는 것을 보게 되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없게 된다.”

     

    표식 4.1에서:그러면 그것을 이해한 비구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겠는가?

     

    “가시로 가득한 숲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앞뒤 좌우와 위아래에 모두 가시가 있다. 그러면 그는 그 가시에 긁히지 않기 위해 매우 천천히 조심하며 걸어갈 것이다.

    세상에서 좋고 즐겁게 보이는 것들(마음이 만든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들)은 성자의 수행에서는 ‘가시’라고 불린다. 감각적 즐거움이 가시와 같음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붓다 가르침에서 말하는 ‘인드리야 상와라(indriya saṁvara)’다.)

     

    표식 5.1에서: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절제되지 않게, 즉 ‘인드리야 상와라’가 없게 되는가?

     

    빅쿠가 눈으로 어떤 형상을 본다고 하자. 그것이 즐거우면 붙잡고, 불쾌하면 싫어한다. (그들은 그런 좋아함/싫어함이 ‘까-마 산냐-’에 의해 자동적으로 촉발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마음이 멋대로 달아나도록 내버려두고, 마음은 계속해서 더 많은 ‘즐거움/분노의 감각’을 만들어내며, 그것은 높은 수준의 ‘마음이 만든 기쁨이나 분노’로까지 커질 수 있다.

     

    그것은 그가 까-마 산냐-가 어떻게 촉발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자동적으로 마음을 집착하게 만들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마음이 만든 즐거움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tañca cetovimuttiṁ paññāvimuttiṁ yathābhūtaṁ nappajānāti).”

     

    (어떤 감각 입력이든 까-마 산냐-가 촉발되면, 처음에는 단지 미세한 ‘좋아함(manāpa)’만 생깁니다. 뿌툿자나가 경험하는 강렬한 ‘기쁨’은 완전히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아라한은 단지 그 초기의 미세한 ‘좋아함’만 느낍니다. 따라서 뿌툿자나의 까-마 앗사-다는 완전히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까-마 앗사-다와 고통은 대부분 마음이 만든 것이다’을 참조하세요.)

     

    그 후 같은 구절이 다른 다섯 감각에 대해 반복된다. 즉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 혀로 맛보는 맛, 몸으로 접촉하는 감촉, 그리고 마음으로 떠올리는 기억에 대해서이다. 인드리야 상와라가 없는 뿌툿자나그것들을 모두 ‘진짜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한다.

     

    이것이 뿌툿자나에게 ‘인드리야 상와라’가 없는 방식이다.”

     

    표식 6.1에서: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인드리야 상와라를 갖추는가?

     

    빅쿠가 눈으로 어떤 형상을 본다고 하자. 그것이 즐거워도 붙잡지 않고, 불쾌해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좋아함/싫어함이 ‘까-마 산냐-’에 의해 자동적으로 촉발된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는 마음이 멋대로 달아나지 않게 하고 더 많은 ‘즐거움/분노의 감각’을 생성하지 않게 하여, ‘마음이 만든 기쁨 또는 분노’라는 높은 수준으로 증폭시키지 않게 한다.”

     

    그 후 같은 구절이 다른 다섯 감각에 대해서도 반복된다. 즉 귀로 듣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 혀로 맛보는 맛, 몸으로 접촉하는 감촉, 그리고 마음으로 떠올리는 기억에 대해서이다.

     

    이것이 성자(막가 팔라를 얻은 자)인드리야 상와라를 지니는 방식이다.”

     

    표식 7.1에서: “그러나 그 빅쿠가 이런 방식으로 처신하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마음챙김을 잃어 때때로 부도덕한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체 없이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그런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을 빠르게 제거한다.”

     

    표식 8.1에서: “그 생각들을 얼마나 빨리 제거해야 하는지는 다음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하루 종일 달구어진 쇠솥이 있다고 하자. 그 위에 물방울 두세 개를 떨어뜨리면, 그 물방울은 즉시 마르고 증발해버린다.

     

    마찬가지로, 빅쿠가 인드리야 상와라로 처신하고 살아가더라도, 마음챙김을 잃으면 때때로 능숙하지 못한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생각들을 즉시 버리고 제거한다.

     

    이것이 빅쿠가 인드리야 상와라로 일깨워 감각적 산란이 자신을 압도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주: 이것이 소따빤나가 사띠빳타나를 육성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완성되면 아라한과에 도달합니다. 그 이후 아라한의 마음은 어떤 감각 입력에도 자동적으로 들러붙음을 멈춥니다.)

     

    표식 8.4에서: “그 빅쿠가 이런 방식으로 처신하고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친척이나 가족 같은 이들)은 ‘오라, 다시 재가생활로 돌아와 삶의 즐거움과 부를 누려라!’고 말하면서, 그를 다시 재가 생활로 유혹하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처신하고 살아가는 (막가 팔라를 성취한) 빅쿠가 수행을 그만두고 더 낮은 재가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표식 9.1에서: “이것은 다음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갠지스강은 동쪽으로 흐른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삽과 여러 도구를 가지고 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우리가 이 갠지스강을 서쪽으로 흐르게 만들겠다!’

     

    빅쿠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갠지스강은 동쪽으로 흐른다. 그것을 서쪽으로 흐르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그 많은 사람들은 좌절하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빅쿠가 이런 방식으로 처신하고 감각적 즐거움을 멀리하는 것은 감각적 즐거움이 아무 가치가 없고 마음이 만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해는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그가 더 낮은 재가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즐거움과 고통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6. 최근 포스트인 ‘까-마 앗사-다와 고통은 대부분 마음이 만든 것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 * 인간 육체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자동적으로 까-마 산냐-를 경험하는데, 이 까-마 산냐-는 어떤 감각 입력에 대해 미묘한 ‘호감’을 줍니다. 붓다께서는 이를 ‘마나-빠(manāpa)’라고 부르셨습니다. ‘Nibbānadhātu Sutta (Iti 44)’를 참조하세요.

    • * 아라한도 미묘한 ‘호감’을 느끼지만, 마음이 그것에 들러붙지 않습니다. 따라서, 처음의 ‘호감’은 마음 속에서 강렬한 즐거움의 느낌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 * 반면에, 뿌툿자나의 마음은 (‘까-마 라-가 상요자나’ 때문에) 최초의 ‘호감’에 자동적으로 들러붙게 되고, 그 들러붙음은 여러 단계를 거쳐 더욱 강해집니다. 들러붙음이 증가함에 따라, ‘마음이 만든 웨다나-’(삼팟사 자- 웨다나-)도 증가합니다. 따라서, 특정한 감각 입력에 대해 뿌툿자나에게는 ‘강렬한 기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 그것이 뿌툿자나가 더 많은 그런 즐거움을 추구하고 깜마 에너지를 축적하여 아빠-야에 재탄생으로 이어지는 부도덕한 행위에 빠지게 만듭니다. 

     

    7. 어떤 다른 감각 입력들은 미묘한 ‘비호감’을 주는 까-마 산냐-를 촉발시킵니다. 붓다께서는 이를 ‘아마나-빠(amanāpa)’라고 부르셨습니다.    

     

     

    즐거움/고통의 점진적인 강화

     

    8. 까-마 산냐-(kāma saññā)에 의해 촉발되는 마음 오염의 주요 단계(많은 세부 단계가 있음. 예를 들어, ‘빤쭈빠-다-낙칸다의 성장 ㅡ 아누소따가-미’을 참조)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꿀을 맛보는 구체적 사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 * (아라한을 포함하여) 인간 몸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자동적으로 까-마 산냐-를 갖습니다. 따라서 아라한은 ‘꿀 산냐-’를 가집니다. 이는 아라한이 꿀을 맛보고 있음을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단지 약간의 호감(마나-빠)만 일어날 뿐입니다. 그의 마음은 그 산냐의 ‘참된 본질’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에 들러붙지 않고,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로 빠띳짜 사뭅빠-다 사이클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 * 아나-가-미의 경우에도 정확히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윗자- 생성’의 첫 단계는 ‘까-마 라-가 상요자나’에 의해 촉발됩니다. 아나-가-미 또는 아라한은 까-마 라-가 상요자나를 제거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자동으로 ‘까-마 로까’의 어떤 감각 입력에도 들러붙지 않게 됩니다. 

    • * 이제, 소따-빤나가 꿀을 맛보는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그의 마음도 역시 먼저 ‘꿀 산냐-’를 생성할 것입니다. 그는 ‘까-마 라-가 상요자나’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꿀 산냐-’, 즉 ‘꿀의 맛’에 들러붙습니다. 그 들러붙음으로,  마음도 초기의 미미한 좋아함(마나-빠)을 좀 더 강한 ‘즐거운 감각’으로 확장시킵니다. 그러나 그는 세 가지의 딧티 상요자나(diṭṭhi saṁyojana)를 제거했기 때문에, 마음이 완전히 오염되지는 않으며, ‘즐거운 감각’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증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오직 ‘까-마 라-가’를 통해서만 들러붙습니다.

    • * 마지막으로, 뿌툿자나의 마음은 완전히 오염될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세 가지 딧티 상요자나까지 가지고 있으므로, 까-마 라-가(kāma rāga)로 들러붙는 것에 더하여 ‘잘못된 견해’로 들러붙습니다. 이는 또한 느껴지는 ‘즐거운 감각’을 더욱 증가시킵니다. 따라서, 뿌툿자나는 꿀 맛을 최대로 경험할 것입니다. 

       

    9. 이것이 바로 ‘까-마 산냐-’가 아윗자-로 ‘초기의 들러붙음을 촉발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유입니다.

     

    • *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뿌툿자나는 항상 ‘까-마 로까’의 모든 감각 입력에 들러붙습니다. 이 초기의 들러붙음은 오직 까-마 라가 상요자나(kāma rāga saṁyojana)가 있는지 여부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 * 아나-가-미 단계 아래에 있는 이들(뿌툿자나, 소따-빤나, 사까다-가-미)은 누구나 까-마 라-가 상요자나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항상 첫 번째 들러붙음을 거칩니다(역주: 성자가 빤냐-로 인한 일시적 바왕가로 출세간 수행을 하는 경우는 제외).

    • * 이어지는 추가의 마음 오염은 뿌툿자나의 경우가 최고이고, 소따-빤나는 그보다 덜하며, 사까다-가-미는 더욱 덜합니다.

    • * 이에 따라, ‘마음이 만든 즐거움의 감각’도 또한 뿌툿자나에서 소따-빤나, 그리고 사까다-가-미로 갈수록 감소합니다.

    • *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만든 고통의 감각’도 또한 뿌툿자나의 경우가 최고입니다.  

     

    깜마 생성의 순서

     

    10. 들러붙음의 그 초기 단계는 ‘뿌라-나 깜마(purāna kamma)’ 단계에서 순식간에 일어난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마음이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에 이르면, (더 긴 시간에 걸쳐) 더 많은 행위를 하여 뿌라-나 깜마 단계서 생성된 초기의 마음이 만든 즐거움을 강화시킬 것입니다.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를 참조하세요.

     

    • * 아라한과 [욕계에서] 아나-가-미는 아윗자-로 들러붙지 않으며, 초기의 미미한 좋아함(마나-빠) 외에는 어떤 추가적인 ‘마음이 만든 즐거움’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뿌라-나 깜마’ 단계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 * 이는 ‘까-마 앗사-다와 고통은 대부분 마음이 만든 것이다’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 * 뿌툿자나에서 ‘마나-빠/아마나-빠(호감/비호감)’가 ‘강렬한 즐거움/고통’으로 증대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 ‘Buddha Dhamma – Systematic’ 섹션의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 * 오직 부처님만이 ‘뿌라-나 깜마’ 단계에서 찰라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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