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짐 홀트의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원문: Comments/Reviews 섹션의 ‘“Why Does the World Exist?” by Jim Holt’ 포스트
- 2021년 10월 1일 개정
1. 필자는 짐 홀트(Jim Holt)의 “Why Does the World Exist? – An Existential Detective Story”(2012년)을 읽으면서 이 포스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시사하는 바가 많은) 질문들이 있는 좋은 책입니다. 여기서 필자는 그 질문(의문)들의 대부분이 붓다 담마에 그 답이 있다는 것을 가리켜 보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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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69에서, 짐 홀트는 ‘닙바-나(열반)의 행복(지복)’을 ‘사람의 절멸(annihilation)’과 동일시하면서 “...그러나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언가를 어떻게 즐길 수 있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의문)을 다루기 위해, 필자는 처음에 “닙바-나는 사람의 절멸을 의미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포스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책에 있는 다른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결국 책 제목과 동일하게 포스트 제목을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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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불교도들조차 닙바-나(열반)가 파괴(절멸)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여 닙바-나(열반)라는 개념을 두려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빅쿠들조차도 “천상에서 많은 즐거움이 끝나면 닙바-나를 얻기를”이라는 취지의 축복을 해 주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심오한 메시지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부족함을 보여줍니다.
2. 문제는 질문 자체에 있습니다. '사람'이 절멸하려면, ‘사람’이 우선 존재해야 합니다. 자, 이것은 붓다 담마에 대한 지식이 좀 필요한 깊은 문제입니다. 붓다께서 첫 설법에서 말씀하셨듯이, 붓다 담마는 “붑베 아나눗수떼수 담메수…..(pubbe ananussutesu dhammesu…..)”, 즉 “이전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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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멸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것'이 존재해야 합니다. 붓다 시대의 바라문(Brahmin)들은 사람(오늘날의 ‘영혼’)과 연관된 영구적인 ‘아-트마(äthma)’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me)’ 또는 ‘나 자신(myself)’에 대한 인식을 없애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그 인식은 닙바-나(열반)의 아라한 단계에서만 완전히 제거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길(성스런 팔정도)을 따라 진전함에 따라 계속 감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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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31영역의 이 세상에 속해 있는 한, 자신은 항상 ‘나(me)’와 ‘외부 세계(external world)’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께서 무아(no-self) 개념을 거부하신 이유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낫따(anatta)를 ‘무아(no-self)’로 잘못 번역하고 있습니다. ‘붓다 담마’ 섹션의 ‘대통합이론인 담마(The Grand Unified Theory of Dhamm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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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에, 붓다께서는 ‘자아(self)’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시시각각으로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환생이란 무엇인가? - 생명 흐름의 개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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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self)’와 ‘무아(no-self)’라는 양극단을 모두 거부하시면서, 붓다께서는 ‘이 변화하는 존재’, 즉 ‘생명흐름(lifestream)’은 그 생명흐름을 지탱하는 원인의 변화로 인해 시시각각 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에세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 대한 중요한 섹션을 포함하여, 이 사이트의 많은 포스트를 통해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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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의] 책에는 “자아 - 나는 정말로 존재하는가?”라는 별도의 장이 있습니다. 필자는 아래에서 그 장을 논의하고 몇 가지 더 관련된 사실을 가리켜 보이겠습니다.
3. 책의 주된 테마는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있는가?” 또는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입니다. 그것은 수천 년에 걸쳐 누적된 대부분의 주장을 요약하고, 물론 ‘존재할 원인(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창조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질문(의문)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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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위에서 표현된 존재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의문)에 대해 부처님의 대답은 가장 간단합니다. 세상은 영원히 존재해 왔고, 특정한 제1원인을 정확히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증명은 매우 간단합니다. 제1원인이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무엇이 그것을 야기시켰을까요? QED(quod erat demonst randum, 수학에서 증명을 마칠 때 쓰는 기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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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원인과 결과의 과학적 기초에는 제1원인이 없다는 것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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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p.82에서, 짐 홀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대체로, 과학 사상가들은 영원에 대해 그런 꺼림찍함/망설임(qualms)을 공유하지 않았다. 갈릴레오도,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시간에서 무한한 우주를 상상(생각)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정적이고 영원한 우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의 장 방정식(field equation)에 퍼지 인자(fudge factor)(악명 높은 ‘우주 상수’)을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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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짐 홀트가 지적한 것처럼 몇몇 철학자들은 ‘제1원인’ 주장으로 그 문제를 논의해 왔습니다. p.206에서, 철학자 고 존 맥키(John Mackie)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분명히, 맥키가 관찰한 바와 같이, 제1원인의 면에서 어떤 설명도 존재의 궁극적인 질문(의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설명은 제1원인 ㅡ 그것이 신이든, 거짓 진공의 불안정한 덩어리든, 또는 어떤 한층 더 이국적인 실체든 ㅡ 자체의 존재에 대한 ‘왜’라는 추가적인 의문(질문)을 단지 제기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4. 세상이 영원히 존재해 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 책에서 논의된 다른 많은 질문(의문)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이 영원히 존재해 왔다는 전제와, 붓다께서 [보여] 주신 존재에 대한 근본 원인(탐욕, 증오, 무지)에서 출발하면, 논의된 질문(의문)의 100%가 [완전히] 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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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p.7에서, 라이프니츠(Leibniz)의 충족이유율/충분근거율(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PSR)이 논의되는데, 모든 진리에는 그것이 그렇고 그렇지 않은 이유가 있어야 하고, 모든 것에는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원인과 결과입니다. 붓다께서는 세상은 탐욕와 증오과 무지 때문에 존재하고, 그리고 그 원인들은 시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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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마음이 물질에 우선한다는 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필자는 [퓨어담마] 웹사이트에서 그것에 대한 증거를 천천히 구축하고 있습니다. ‘아비담마’ 섹션과 ‘담마와 철학’ 섹션에 일부 소개 포스트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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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88에서, 짐 홀트는 모든 과학이 우리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질량이 에너지와 동일하다는 사실에 대해 논의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에너지가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을 주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비담마(Abhidhamma)에서 설명된 것이며, 필자는 마침내 [퓨어담마 웹사이트에서] 그것에 이를 것입니다. 짐 홀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1927년 그의 저서, ‘Analysis of Matter’에서 언급했듯이, 세상을 구성하는 실체의 본성에 관해서는, 과학은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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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또한 p.192에서 철학의 또 다른 큰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논의합니다. “철학자들의 결론은 ……의식에는 단순한 정보 처리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학이 세상을 정보 상태의 놀이로 묘사하는 한, 현실의 일부, 즉 주관적이고 환원할 수 없는 질적 부분을 생략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부처님의 대답은 이 문제와 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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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이 없는 세상은 “나는 왜 존재하는가”(p. 18)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히 ‘존재’해 왔습니다. 시작이 없으므로 그 물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 다른 자주 묻는 질문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입니다. 삶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요점은 우리 모두는 31가지 존재 영역 중에 목적없이 배회하는 장기적 관점에서, 평균적으로 이 존재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탄생(윤회)의 증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5. 이제 유일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부처님의 세계관이 올바르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입니다. 대답은 그것이 우리 주위의 복잡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붓다 담마는 ‘설명력’이 있습니다. 또한 다른 많은 포스트 중에서 ‘생의 예측 불가능한 변화와 ‘좋은 재탄생’을 구하는 길’ 및 ‘타당한 설명 – 잘못된 버전의 담마를 뽑아 없애는 열쇠’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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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리와 그 결과를 직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11] 삿따 봇장가의 육성을 통한 막가 팔라’에서 길(성스런 팔정도)을 따랐을 때에 필자가 경험한 것의 일부를 설명했습니다. 포스트의 제목을 보고 낙담(단념)하지 마세요.
6. 이제 후부 장(chapter)인 “자아 ㅡ 나는 정말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간략히 논의하겠습니다. 여기서 짐 홀트(Jim Holt)는 스스로 답을 찾았습니다(p.256). 데카르트의 유명한 구절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데카르트는 그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추론해 냈는가? (18세기의 Georg Lichtenberg를 시작으로) 많은 논평가들이 지적했듯이, 그의 궁극적 전제에서 ‘나’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데카르트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생각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결코 증명하지 못했다. .….” (강조 표시는 필자가 한 것입니다.)
7.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생각은 있지만 진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아라한의 수준으로 정화되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자신의 마음’에는 생각하는 사람의 인식(지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혜를 얻기 전까지는 ‘자신의 괴로움’이 실제입니다. 진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신적] 괴로움(고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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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아라한이 아닌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려고 하는 것처럼 자신이 정직하게는 ‘자아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속한 어떤 것’에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것과 관련된 고통/괴로움을 느낍니다. ‘아낫따와 둑카 - 진정한 의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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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정화되면(즉 탐욕, 증오, 무지가 없을 때) 아라한 단계에서 ‘자아(self)’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고, ‘자신의 것’과 관련된 괴로움은 더 이상 거기에 없습니다. 아닛짜(anicca)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 이것은 어느 정도 명확해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닙바-나(열반)의 지복 또는 니라미사 수카(niramisa sukha)는 각 단계에서 마음이 정화되면서 길(성스런 팔정도)에서 진전함에 따라 증가합니다. ‘세가지 유형의 행복 – '니라-미사 수카'란 무엇인가?’ 및 ‘니라-미사 수카’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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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우리는 ‘나’라는 감각을 강제로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세 가지 특성인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에 대한 참된 이해를 통해서만 그 ‘나(I)’ 또는 ‘자아(self)’라는 감각을 서서히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자아(self)’도 ‘무아(no-self)’도 없고 생각의 흐름만 있을 뿐입니다. '환생이란 무엇인가? - 생명 흐름의 개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아라한이 죽고 나서야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고 마음이 31 영역으로 된 물질 세계에 대한 모든 들러붙음에서 벗어납니다. ‘닙바나는 이해하기 어려운가?’, 및 ‘루-빠는 무엇인가?(닙바-나와 관련하여)’ 포스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