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아-나-빠-나사띠의 첫 단계 ㅡ '까-야'의 아닛짜 본질을 봄
원문: Sutta Interpretation 섹션의 ‘First Stage of Ānāpānasati – Seeing the Anicca Nature of Kāya’ 포스트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의 첫 단계는 닙바-나의 소따빤나 단계를 달성하기 위해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의 아닛짜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2025년 11월 1일 작성
까-야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다
1. ‘까-야는 대부분의 숫따에서 빤쭈빠-다-낙칸다 까-야다’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까-야(kāya)는 대부분의 숫따에서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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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의한 바와 같이, 감각 입력이 마음에 도달하면 ‘새로운’ 빤쭈빠-다-낙칸다(또는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이 시작되고, 마음은 자동적으로 ‘뿌라-나 깜마’ 단계에 들어갑니다. 마음은 많은 흥미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추구하지 않고 ‘뿌라-나 깜마’ 단계에서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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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 입력에 계속 들러붙으면, 빠띳짜 사뭅빠-다의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에 이르러,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에 들어갑니다. 이곳은 거짓말과 도둑질과 같은 마음, 말, 몸을 통한 오염된 행위(깜마)가 발생하는 곳입니다(본질적으로 이것들은 열 가지 불선한 행위, 즉 ‘다사 아꾸살라’임). 그러면 마음이 ‘나와 깜마’ 단계로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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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나와 깜마’ 단계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항상 ‘뿌라-나 깜마’ 단계(초기의 ‘약한 깜마’ 생성)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감각 사건(나무를 볼 때 조차도)은 뿌툿자나(보통 인간)의 마음을 ‘세상은 견고한 기반 위에 있다’는 견해와 인식에 따라 작용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왜 ‘나무나 푸른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은 ‘흥미없는 감각 입력’에도 자동적으로 들러붙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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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자세한 내용은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를 포함하여 많은 포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나-빠-나사띠의 세 단계
2. 최근 포스트 ‘아-나-빠-나사띠 ㅡ 사띠빳타-나와 관계’에서, 우리는 ‘Ānāpānasati Sutta (MN 118)’가 세 단계로 아-나-빠-나사띠를 육성하여 닙바-나의 아라한 단계에 도달하는 세 가지 일련의 단계를 묘사한다는 사실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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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단계는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에 들러붙음의 아닛짜(결실없는) 본질을 보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단계는 ‘Ānāpānasati Sutta (MN 118)’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포스트에서는 이 첫 번째 단계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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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계에서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 전체와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집중합니다. 빤쭈빠-다-낙칸다 까-야가 시작될 때마다 마음이 닙바-나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지혜로 보아야’ 합니다. 이는 아래에서 논의할 도표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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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빠-나(ānāpāna)는 아-나 아빠–나(āna āpāna)입니다. 이 단계에서, ‘아-나(āna)’는 ‘세상(빤쭈빠-다-낙칸다)이 이롭지 않다는 것, 즉 아닛짜 본질을 받아들이고/이해하고, 아-빠-나(āpāna)는 빤쭈빠-다-낙칸다가 이롭다는 것, 즉 닛짜 본질이라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아-나-빠-나는 ‘숨을 들이쉼’과 ‘숨을 내쉼’으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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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숙고의 일환으로, 육체(‘까-야’ 또는 ‘사리라’라고 함)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봄으로써, 아수바 바-와나-(asubha bhāvanā)를 함양합니다. 이를 통해 뿌툿자나(puthujjana)는 자신을 아빠-야-(apāyā)에 묶는 가장 낮은 세 가지 상요자나(samyojana)를 끊을 수 있습니다.
아-나-빠-나사띠의 첫 단계
3. 뿌툿자나가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가 되고 따라서 성자(아리야)가 되는 요건은 칸다 숫다(SN 25.10)에 간결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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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소따빤나 아누가-미와 오염된 마음의 아닛짜/위빠리나-미 본질’에서 칸다 숫따(SN 25.10)를 자세히 논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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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중요한 것은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 즉 루-빠 우빠-다-낙칸다(rūpa upādānakkhandha)에서 윈냐-나 우빠-다-낙칸다(viññāṇa upādānakkhandha)까지의 아닛짜(anicca), 위빠리나-미(vipariṇāmi), 안냐타-바-위(aññathābhāvi) 본질을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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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 즉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는 숫따에서 자주 ‘까-야(kāya)’로 언급됩니다. ‘까-야는 대부분의 숫따에서 빤쭈빠-다-낙칸다 까-야다’를 참조하세요.
첫 번째 단계는 까-야-누빳사나-부터 담마-누빳사나-까지 포함한다
4. 그러므로, ‘까-야-누빠사나-(kāyānupassanā)’는 ‘까-야(kāya)’ 또는 ‘빤쭈빠-다-낙칸다 (pañcupādānakkhandha)’의 아닛짜(anicca), 위빠리나-미(vipariṇāmi), 안냐타-바-위(aññathābhāvi) 본질을 숙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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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찟따-누빳사나-(cittānupassanā), 웨다나-누빳사나-(vedanānupassanā), 담마-누빳사나-(dhammānupassanā)(사띠빳타-나의 나머지 세 가지 구성 요소)는 ‘까-야(kāya)’의 아닛짜(anicca), 위빠리나-미(vipariṇāmi), 안냐타-바-위(aññathābhāvi) 본질을 숙고하는 세 가지 추가 방법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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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찟따-누빳사나-(cittānupassanā): 마음 속에서 라-가(rāga), 도사(dosa), 모하(moha) 생각이 일어나는지 끊임없이 살펴야 하며, 더 이상 그런 생각에 휘말리지 않도록 마음을 중립적인 개념, 즉 담마 개념에 다시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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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다나-누빳사나-(vedanānupassanā): 위에서 언급된 그런 생각은 (라-가와 함께) 수카 웨다나-, (도사와 함께) 둑카 웨다나-, 또는 (모하와 함께) 중립 웨다나- 중의 하나와 함께 옵니다. 이런 웨다나-를 인식하는 것은 찟따-누빳사나-를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카 또는 둑카 웨다나-와 함께 일어나는 어리석은 생각은 식별하기 쉽지만, 모하 또는 아윗자와 함께 일어나는 생각은 식별하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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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마-누빳사나-(dhammānupassanā)는 까-야-누빳사나-(kāyānupassanā), 찟따-누빳사나-(cittānupassanā), 웨다나-누빳사나-(vedanānupassanā)를 실천할 때 어리석은 생각과 느낌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이 네 가지 모두 함께 함양됩니다! 이들을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5. 그러므로, 네 가지 유형의 아누빳사나-(anupassanā)는 모두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의 첫 번째 단계를 육성하고 라-가, 도사, 모하/아윗자-로 감각 입력에 들러붙음의 아닛짜(anicca) 본질을 보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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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이 첫 번째 단계에서는, 까-야(kāya), 즉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에 들러붙는 것이 결실없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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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따빤나 아누가-미와 오염된 마음의 아닛짜/위빠리나-미 본질’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이 단계에서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에 들러붙는 것이 결실없고 위험하다는 ‘더 넓은 관점’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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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과정의 세부 사항, 즉 마음이 의식적으로 생각하기도 전에 어떻게 자동적으로 들러붙는지 보는 것은 두 번째 단계에서만 필요합니다. 바로 이 두 번째 단계에서 까-예 까-야-누빳사나-(kāye kāyānupassanā), 찟떼 찟따-누빳사나(citte cittānupassanā), 웨다나-수 웨다나-누빳사나-(vedanāsu vedanānupassanā), 그리고 담메수 담마-누빳사나-(dhammesu dhammānupassanā)가 작용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트에서 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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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 전체에 대한 ‘더 넓은 관점’은 위의 링크 포스트에서 가져온 다음 도표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도표에서 우리는 뿌툿자나가 소따빤나 아누가-미가 되기 위한 최소 요건을 논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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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도표의 단계 1과 단계 2는 소따빤나 아누가-미가 빠띠소따가-미가 되어 어떻게 성스런 길을 시작하는지를 나타냅니다. ‘빠띠소따가-미 ㅡ 사띠빳타-나 부미와 닙바-나를 향해 감’를 참조하세요.
영문 도표 다운로드/인쇄: ‘Aniccaṁ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뿌툿자나의 마음은 항상 까-마 산냐-와 함께 ‘빨간색 박스’내에 있다
6.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려면 뿌툿자나의 마음이 어떻게 모든 감각 입력을 처음 접하는 순간에 라-가 또는 도사 또는 적어도 아윗자-에 기반하여 모든 감각 입력에 자동적으로 그리고 변함없이 들러붙는지를 ‘지혜로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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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모든 감각 입력과 함께 그들의 마음은 위 도표에서 ‘빨간색 박스’로 표시된 ‘까-마 로까’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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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뿌툿자나는 (빤쭈빠-다-낙칸다를 시작하고 재탄생 과정으로 흘러가는) 아누소따가-미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빤쭈빠-다-낙칸다의 성장 ㅡ 아누소따가-미’를 참조하세요. 그들이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보이는(아는) 유일한 해결책은 더 많은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덫에 걸려 재탄생 과정에 무력하게 놓이게(어쩔수 없게) 됩니다.
7. 모든 감각 입력에 들러붙음과 관련된 위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뿌툿자나가 세상에서 가장 흥미없는 것(예를 들어, 먼지 한 점)을 볼 때도, 그 대상과 함께 그의 마음은 까-마 산냐-(kāma saññā)로 까-마 로까(kāma loka)에 들어갑니다. 분명히, 그런 광경이 라-가(rāga)나 도사(dosa)를 유발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아윗자-(avijjā)를 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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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사소한 감각 입력조차도 ‘까-마 산냐-를 켜고, 마음은 자동적으로 그 까-마 산냐-에 들러붙어 오염된 마음으로 까-마 로까(kāma loka)에 들어갑니다. 위와 아래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되면 마음은 자동적으로 닙바-나(Nibbāna)와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에서 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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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뿌툿자나는 항상 세상 것에 들러붙는 ‘아닛짜’(결실없는) 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그들을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의 길로 이끌고, 빤쭈빠-다-낙칸다를 축적하는 길(또는 이와 동등하게 더 많은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을 시작하는 것)로, 재탄생 과정을 길게 하고, 결코 닙바-나와 사띠빳타-나 부-미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아닛짱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 ㅡ 결정적 구절’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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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감각 입력은 까-마 라-가(kāma rāga)와 그에 상응하는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를 촉발합니다. 또 다른 감각 입력은 빠띠가(또는 도사)와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를 촉발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먼지 한 점과 같은) 다른 모든 것은 중립 웨다나-(neutral vedanā)를 생성하기만 합니다. 뿌툿자나의 마음은 이 모든 것에 들러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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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숫따는 위의 내용을 간결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뿌툿자나의 마음은 ‘중립 웨다나-’에도 들러붙는다
8. ‘Daṭṭhabba Sutta (SN 36.5)’는 세 가지 유형의 웨다나-, 즉 수카- 웨다나-, 둑카- 웨다나-, 아둑카마수카-(중립) 웨다나-가 있다고 말씀하면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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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1.4에서, “Sukhā, bhikkhave, vedanā dukkhato daṭṭhabbā, dukkhā vedanā sallato daṭṭhabbā, adukkhamasukhā vedanā aniccato daṭṭhabbā.”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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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빅쿠들이여, 그대들은 수카- 웨다나-를 고통으로 보아야 하고, 둑카- 웨다나-를 (창에 찔린 것 같은) 훨씬 더 큰 고통으로 보아야 하며, 아둑카마수카(중립) 웨다나-를 아닛짜 본질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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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tiyavedanā Sutta (Iti 53)’에도 비슷한 설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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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그 설명들을 이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수카 웨다나-가 어떻게 괴로움일 수가 있는가?
9.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가 고통이라는 것은 정의상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를 고통이라고 ‘지혜로 보는’ 것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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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경우,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는 사람들을 더 많이 추구하도록 유도하며, 결국 사람들은 부도덕한 행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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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카 웨다나-가 보시와 같은 선행을 수반하는 최적의 상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기분 좋은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의 결과는 까-마 로까(kāma loka) 자체에서 ‘좋은 위빠-까(good vipāka)’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경우에 천신(Deva)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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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런 ‘좋은 결과’조차도 여전히 사람을 까-마 로까(kāma loka)에 묶어두고 닙바-나(Nibbāna)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뿌툿자나가 까-마 로까에 남아 있는 한, 아빠-야에 재탄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카 웨다나-는 고통의 연속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이것이 뿌툿자나의 그런 ‘도덕적 행위’조차도 아래 도표에서 볼 수 있듯이 ‘아닛짜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anicca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본질을 지닌 이유입니다.
왜 중립 웨다나-를 ‘아닛짜 본질’인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10. 이제 중립 웨다나-가 ‘아닛짜 본질’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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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중립 웨다나-’로 있더라도, 뿌툿자나의 마음은 자동적으로 ‘까-마 산냐-(kāma saññā)’와 함께 ‘까-마 로까(kāma loka)’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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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그 마음은 필연적으로 빤짜 니-와라나(pañca nīvaraṇa)로 덮여 있고, 비록 뿌툿자나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동요됨(불안)을 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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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까-마 산냐-(kāma saññā)’가 없는 닙바-나(Nibbāna)나 적어도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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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문에 중립 웨다나-(neutral vedanā)조차도 ‘아닛짜(anicca)’ 본질입니다. 그것은 결코 열반에 있는 ‘닛짜 본질’로 이끌지 못합니다!
11. 이 ‘아닛짜 본질’은 실제로 (세 가지 유형의 웨다나-와 함께) 모든 감각 사건에 적용됩니다. 이 모든 감각 사건은 마음을 까-마 로까(kāma loka)로 이끌고 닙바-나(Nibbāna) 또는 적어도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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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모든 감각 사건에 대한 뿌툿자나의 반응은 아닛짜 본질(위빠리나-미 본질)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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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뿌툿자나의 마음성향을 묘사하고 있는 다음 도표에서 훨씬 더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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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툿자나는 어떤 감각 사건에 대한 들러붙음이 ‘까-마 산냐-(kāma saññā)’에 의해 촉발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수카 웨다나-를 가져오는 감각 입력을 추구해야 하고 둑카 웨다나-를 가져오는 감각 입력을 피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중립 웨다나-에 대해서는 유익하지도 해롭지도 않다고 가정하고 그냥 무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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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논의는 또한 뿌툿자나가 직면한 ‘아닛짜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Anicca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본질을 설명합니다. ‘아닛짱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 ㅡ 결정적 구절’을 참조하세요.
영문 도표 다운로드/인쇄: ‘Puthujjana’s Understanding of Sensory Inputs’
세카는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음)을 괴로움으로 본다
12. 위에서 논의한 내용은 또한 ‘Paṭhamarūpārāma Sutta (SN 35. 136)’에도 간결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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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따에서는 “Yaṁ pare sukhato āhu, tadariyā āhu dukkhato; Yaṁ pare dukkhato āhu,tadariyā sukhato vidū.”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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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서, ‘빠레(pare)’는 뿌툿자나(아리야 상태의 밖)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Yaṁ pare sukhato āhu’는 ‘뿌툿자나가 수카라고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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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따다리야-(tadariyā, tad ariyā)’입니다. 여기서 ‘따드(tad)’는 ‘그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tadariyā āhu dukkhato’는 ‘아리야는 그것을 둑카로 여길 것이다’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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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구절인 ‘Yaṁ pare dukkhato āhu,tadariyā sukhato vidū’는 감각 사건으로 느끼는 괴로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릴 수 없을 때(예를 들면, 맛잇는 음식, 비싼 옷, 집 등을 살 수 없을 때)의 뿌툿자나의 슬픔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라한과를 향해 힘쓰는 성자(세카)는 그런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하며, 따라서 그러한 것들이 없는 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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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따 전체를 읽어보면 좋습니다. 위의 설명을 염두에 두면 숫따 전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따빤나 아누가-미가 되기 위한 필수 요건
13. 위의 논의를 참으로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칸다 숫따(SN 25.10)에 따르면 소따빤나 아누가-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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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소따빤나 아누가-미와 오염된 마음의 아닛짜/위빠리나-미 본질’에서 칸다 숫따 전체를 논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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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툿자나가 어떻게 소따빤나 아누가미(즉, 조류에 역행하여 닙바-나와 사띠빳타-나 부-미를 향해 이동하는 ‘빠띠소따가미’)가 되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또한 ‘빠띠소따가-미 ㅡ 사띠빳타-나 부미와 닙바-나를 향해 감’에 논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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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툿자나는 먼저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가 됩니다. 그 다음, 그 소따빤나 아누가미는 소따빤나 팔라 순간에 까-마 산냐-를 극복하고 처음으로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역주: 사띠빳타-나 부-미의 제2영역]에 들어갑니다.
까-마 산냐-는 삭까-야 딧티의 근본 원인이다
14. 감각 입력에 대한 들러붙음은 땅하-(taṇhā), 마-나(māna), 딧티(diṭṭhi)와 함께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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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땅하-와 마-나는 딧티로 인해 일어나고, 특히 삭까-야 딧티로 인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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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질적으로,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는 미래의 행복이 ‘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각 입력’을 더 많이 얻는데 달려 있다고 믿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즉 그것은 그들이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를 기르는데 기꺼이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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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뿌툿자나는 모든 외부 루빠(마음을 즐겁게 하는 광경, 소리, 맛, 냄새, 및 감촉)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이는 그들이 ‘왜곡된/잘못된 산냐-’에 속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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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땅 마마, 에소하마스미, 에소 메 앗따-'띠 ㅡ 땅하-, 마-나, 딧티와 관계’ 포스트, 특히 그곳의 #14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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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려면 그 각 지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관련된 포스트들은 ‘숫따(경) 해석’ 섹션의 새로운 ‘사띠빳타나 숫따 ㅡ 새로운 시리즈(Satipaṭṭhāna Sutta – New Series)’ 서브 섹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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