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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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 '자아'는 깜마 발생에 관련되어 있다

 

원문: Dhamma and Science 섹션의 ‘An Apparent “Self” Is Involved in Kamma Generation’ 포스트

- 2019년 11월 2일 작성; 2019년 11월 6일 개정; 2022년 9월 10일 개정; 2022년 10월 14일 개정; 2023년 2월 3일 개정

 

소개

 

1. 여기에서는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지닌 누군가가 왜 (자신이 알거나 모르거나) 자아(self)를 믿고 그 잘못된 견해로 깜마(kamma)를 축적하는 지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 * 이 시리즈의 이전 포스트에서, 왜 ‘경험하는 자(경험자)’가 없는지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따라서, 초기 감각 경험을 묘사하기 위한 ‘자아(self)’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 * 그러나,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지닌 자는 감각 입력을 경험하는 ‘자아(self)’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잘못된 견해를 바탕으로 ‘좋은 경험’을 계속하거나 ‘나쁜 경험’을 멈추기 위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있는 한, 잘못된 견해의 ‘행위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무아(no-self)’라고 말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습니다.

  • * 그것은 우리가 나쁜 결과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핵심 개념은 감각 입력에 대한 반응으로 (의식적 생각과 말을 포함하는)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것이 결실 없음(실속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 * 차착까 숫따(Chachakka Sutta, MN 148)는 새로운 아-람마나(ārammana, 생각 대상)가 마음에 올 때 발생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마음은 탐욕(탐함), 분노(성냄), 또는 무지(어리석음)를 통해 그 아-람마나(ārammana)에 자동적으로 ‘들러붙게(taṇhā, 땅하-)’ 됩니다. 그 단계들을 간략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 단계들을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관련 포스트는 ‘담마와 과학’ 섹션의 ‘붓다의 세계관(Worldview of the Buddha)’ 서브섹션에 있습니다. 주 서브섹션은 ‘생명의 기원(Origin of Life)’입니다.

 

배경 자료에 관한 포스트

 

2. 이전 게시물에서, 우리는 초기 감각 경험에는 ‘자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임의로 또는 무작위로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그 감각 경험들에는 원인(또는 이유)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입니다.

 

  • * 어떤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는 부상, 질병 등과 같은 고통을 가져오는 반면, 다른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는 좋은 음식, 편안한 생활 등과 같은 즐거운 경험을 가져옵니다. 그것들은 모두 육체(까-야, kāya)를 통해 경험됩니다. 그것들은 환상이 아닙니다. 실제 고통(괴로움)이 있습니다(그리고 어떤 즐거움도 있습니다).

  • * 다른 모든 초기 감각 경험은 직접적으로 고통(괴로움)이나 즐거움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냄새맡는 것, 맛보는 것, 기억을 상기하는 것은 그 순간에는 ‘중립적인’ 감각 경험입니다.

 

3. 그러나, 그 감각 입력들을 기반으로 소-마낫사 웨-다-나(sōmanassa vēdāna) 또는 도-마낫사 웨-다-나(dōmanassa vēdāna)가 자동적으로 마음에 일어납니다. 그것들은 ‘까-마 산냐-(kāma saññā)’에 기반한 ‘마음이 생성한(mind-generated)’ 웨-다-나(vēdāna)입니다. 모든 사람(아라한 포함)들은 설탕의 단맛이나 어떤 약의 쓴맛을 경험합니다. 이것들은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라한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그런 소-마낫사 웨-다-나(sōmanassa vēdāna) 또는 도-마낫사 웨-다-나(dōmanassa vēdāna)로 인해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가 일어납니다.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따라서,  ‘까-마 산냐-(kāma saññā)’로 인한 소-마낫사 웨-다-나(sōmanassa vēdāna) 또는 도-마낫사 웨-다-나(dōmanassa vēdāna)에 기반하여, 주어진 사람은 그 특정 감각 사건(ārammana, 아-람마나)에 들러붙고(taṇhā)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오직 아라한만이 들러붙지 않습니다.

  • * 이것은 빠알리어로 된 차착까 숫따(MN 148)의 약 4분의 1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로서, 여섯의 여섯 세트가 완성됩니다.

 

초기 감각 경험에는 자아가 관련되어 있지 않다

 

4. 논의한 바와 같이, 차착까 숫따의 다음 구절은, “ ‘Cakkhu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āti. Cakkhu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ā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Tasmā taṃ na upapajjāti: ‘cakkhu attā’ti yo vadeyya. Iti cakkhu anattā.”입니다.

 

대략적인 번역: “만약 누군가가 ‘짝쿠(cakkhu)는 자아(self)다’ (또는 ‘시각은 나의 것이다’, 또는 ‘그것은 보는 내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옹호(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짝쿠(cakkhu)(육체적 눈이 아님)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명백하다. 만약 짝쿠(cakkhu)가 자아(self)라면, 그것은 ‘나의 자아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또는 나는 순간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은 자아다’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짝쿠(cakkhu)는 ‘자아 아님(not-self)’ 또는 ‘아낫따-(anattā)’다.” (‘not  attā’를 의미하는 ‘na attā’는 ‘na āgāmi’가 ‘Anāgāmi’로 운이 맞추지는 것과 같이, ‘anattā’로 운이 맞춰집니다.)

 

  • * 그리고, 빠알리어로 된 차착까 숫따(MN 148)의 다음 네 번째는 위의 결론이 초기 감각 경험에 관련된 모든 36가지 실체(여섯의 여섯 세트)에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즉, 6가지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 6가지 외부 아-야따나(external āyatana), 6부류의 (위빠-까) 윈냐-나(viññāṇa), 6부류의 팟사(phassa), 6부류의 웨-다나-(vēdanā), 6부류의 땅하-(taṇhā)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 * 그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차착까 숫따 - 여섯 가지 유형의 위빠-까 윈냐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 다음, 우리는 “Ayaṃ kho pana, bhikkhave, 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ā..”로 시작되는 숫따의 그 다음 구절을 논의했습니다.

 

‘자아(self)’로 번역된 ‘앗따-(attā)’는 잘못되었다

 

5. 빠알리 낱말인 ‘앗따-(attā)’는 필자가 위에서 그렇게 번역했지만, 실제로는 ‘자아(self)’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번역하는 것은 요즘 아주 흔합니다. 우리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 대한 논의를 마칠 때까지 그렇게 번역된 것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에 걸쳐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에 대한 개념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로 앗따-(attā)의 진정한 의미를 논의하려고 하면,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앗따-(attā)가 있는지 여부에 대한 왓차곳따(Vacchagotta)의 질문에 대해 붓다께서 답하기를 거부하신 이유입니다. ‘Ānanda Sutta (SN 44.10)’를 참조하세요.

 

  • * 왓차곳따(Vacchagotta)는 붓다께 와서 “낑 누 코, 보 고따마, 앗탓따-” 띠?(“kiṃ nu kho, bho gotama, atthattā” ti?)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고따마 현자시여, ‘앗따-(attā)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 * ‘앗탓따-(atthattā)’는 ‘앗티 앗따-(atthi attā)’이며 ‘앗티(atthi)’는 ‘존재한다’를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이 경우에서 왓차곳따(Vacchagotta)는 ‘앗따-(attā)’를 ‘자아(self)’로 뜻하였습니다. 따라서, 왓차곳따(Vacchagotta)는 “ ‘자아(self)’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까?” 라는 의미로 말하였습니다.

  • * 붓다께서는 침묵하셨고, 왓차곳따(Vacchagotta)는 부정 형태로 다시 질문했습니다. 두 번째로 왓차곳따는 “낑 빠나, 보 고따마, 낫탓따-”띠?(kiṃ pana, bho gotama, natthattā"ti?)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고따마 현자시여, ‘자아(self)’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까?”라는 의미입니다. 붓다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셨고, 왓차곳따(Vacchagotta)는 일어나서 떠났습니다.

  • * ‘낫탓따-(natthattā)는 ‘나 앗티 앗따-(na atthi attā)’라는 3낱말로 이루어져 있으며 ‘앗탓따-(atthattā)’를 부정하는 낱말이라는 것에 주목하세요. 요즘처럼, 많은 사람들이 빠알리어인 ‘앗따-(attā)’와 산스크리트어인 ‘아-뜨마(ātma)’를 혼동하였습니다. 후자(아-뜨마, ātma)의 의미는 ‘영혼(soul)’에 더 가깝습니다.

  • * 필자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논의한 후, ‘앗따-(attā)’를 자세히 논의할 때, 이 ‘아-난다 숫따(Ānanda Sutta)’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왓차곳따(Vacchagotta)는 나중에 그 개념을 이해했고, 아라한(Arahant)에도 이르렀습니다.

 

‘삭까-야 딧티’라는 잘못된 견해의 기원 - 삭까-야 사무다야

 

6. 그 다음, [차착까] 숫따는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라는 잘못된 견해는 위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그 처음 감각 사건을 경험하는 ‘자아(self)’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 * 그러면, 그것이 ‘좋은 경험’이라면 그 즐거운 경험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경험할 계획도 또한 세울 것입니다. ‘나쁜 경험’이라면, 그런 ‘나쁜 경험’을 피하기 위해 반대로 행할 것입니다.

  • * 어느 쪽이든 활동을  더 많이 할수록, 자아(삭까야 딧티)라는 잘못된 견해가 자랍니다(견고하게 됩니다).

 

7. 그 설명은 “Ayaṃ kho pana, bhikkhave, 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ā—cakkhu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rūpe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로 시작하는 짧은 구절에 있습니다.

 

 

차착까 숫따의 다음 절 - 삭까-야 니로다야

 

위 #7의 구절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합니다. 아래의 새로운 구절은 어떻게 삭까-야 딧띠(sakkāya diṭṭhi)가 일어나지 않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8. 차착까 숫따(Chachakka Sutta, MN 140)의 다음 구절은 “Ayaṃ kho pana, bhikkhave, 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cakkhu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Rūpe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로 시작합니다.

 

니로-다(Nirōdha)라는 낱말은 ‘니르(nir)’ + ‘우다야(udaya)’에서 유래했습니다. 여기서 ‘니르(nir)’은 멈춤을 의미하고 ‘우다야(udaya)’는 ‘일어나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니로-다(nirōdha)는 어떤 것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을 의미합니다.

 

  • * 가-미니(gāmini)는 ‘길’을 의미합니다. 빠띠빠다(patipada)는 ‘행동 계획’ 또는 ‘자신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삭까-야니로다가-미니- 빠띠빠다-(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는 ‘삭까-야 딧티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 * 그 다음, "짝쿠(cakkhu)는 내 것이 아니고, 짝쿠(cakkhu)는 내가 아니고, 짝쿠(cakkhu)는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볼 때, 그렇게(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네땅(netam)’은 ‘나(na)’ + ‘에땅(etam)’, 즉 ‘그것이 아니다’를 의미합니다.

  • *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는 유정체(living being)와 관련된 ‘자아(self)’나 ‘영혼(soul)’이나 아-뜨마(ātma)가 없기 때문입니다. 감각 경험은 과거 원인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아(self)’를 가정하지 않고는 그 감각 경험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감각 입력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반응은 ‘자아(self)’를 믿는 마음성향(mindset, 사고 방식)을 고려해야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 * {연기(Paṭicca Samuppāda)에 대해 논의하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라는 잘못된 견해로 인해 미래 고통(괴로움)이 일어나는 이유가 분명해 질 것입니다. 그것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앗따(atta) / 앗따-(attā), 그리고 아낫따(anatta) / 아낫따-(anattā)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그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습니다.}

 

9. 숫따는 ‘보는 것(시각)’과 관련된 다른 5가지 실체 모두에 대해 그것을 반복합니다. 그것들(5가지 실체)은 루-빠(rūpa), 짝쿠 윈냐-나(cakkhu viññāna), 짝쿠 삼팟사(cakkhu samphassa), 짝쿠 삼팟사 자- 웨-다나-(cakkhu samphassa-jā-vēdanā), (‘짝쿠 삼팟사 자- 웨다나’에 기인한) 땅하-(taṇhā)입니다.

 

  • * 그 다음, 다른 다섯가지 내부 아-냐따나(internal āyatana)인, 소-따(sōta), 가-나(ghāna), 지와-(jivhā), 까-야(kāya), 및 마노-(manō)에 대해 그것을 반복합니다. 그 구절들을 검토해 보세요.

  • * 그러나 감각 경험에 관련된 ‘자아(self)’가 없다는 것을 알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실상 영구한 시간 동안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라는 잘못된 견해를 지녀 왔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끝없는 재탄생 과정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 * 그 강한 딧티(diṭṭhi, 사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본질(true nature)을 보는 것, 즉 ‘야타부타 냐-나(yathābhuta ñāna)’를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큰 부분은 우리가 영화 비유를 사용하여 자세히 논의한 바와 같이, (영혼과 같은) ‘변하지 않는 경험자’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만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느낌은 실제적이며, 모든 괴로움은 실제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원인과 그 결과를 가져오는 때의 조건에 따릅니다. 그것이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입니다. ‘시각은 일련의 스냅사진 - 영화 비유’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우리는 다음 포스트에서 그것을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숫따에서는 기본 과정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삭까-야 니로다야’는 ‘웨-다-나’로 시작된다

 

10. 그 이해에 도달하는 핵심은 “Cakkhuñca, bhikkhave,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ā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로 시작하는 숫따의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번역: “빅쿠들이여, 눈과 형색에 의존하여 눈-의식(eye-consciousness)이 일어난다. 그 다음, 마음은 ‘산 가띠(san gati)’로 접촉하고, ‘산 가띠’로 접촉한 것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으로 느껴지는 ‘마음이 만든(mind-made) 느낌’을 일어나게 한다.”

 

 

‘웨-다-나’에 들러붙게 되면 ‘아누사야’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11. 그 다음,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아누사야(anusaya)라는 매우 중요한 용어를 소개합니다. 수카 웨-다-나(sukha vēdāna), 둑카 웨-다-나(dukkha vēdāna), 및 아둑카마수카 웨-다-나(adukkhamasukha vēdāna)를 기반으로 하여, 세 가지 각각 해당하는 라-가-누사야(rāgānusaya), 빠띠가-누사야(paṭighānusaya), 및 아윗자-누사야(avijjānusaya)라는 아누사야(anusaya)가 초래된다는 것입니다.

 

  • * 라-가-누사야(rāgānusaya)의 기원을 설명하는 구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rāgānusayo anuseti.”

  • * 번역: 수카 웨-다-나(sukha vēdāna)를 경험할 때,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환영하고, 그것에 대해 높이 생각하고 말하고, 그것에 몰두하면, 라-가(rāga)가 잠재하는 경향(라-가-누사야, rāgānusaya)이 강해진다(즉, ‘라-가-누사야_rāgānusaya’가 자란다).”

  • * 여기서, 라-가-누사야(rāgānusaya)는 ‘라-가(rāga)’ + ‘아누사야(anusaya)’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먼저 아누사야(anusaya)의 의미에 대한 개념부터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누사야는 무엇인가?

 

12. 아누사야(anusaya)는 보통 ‘잠재 성향’으로 번역됩니다. 그것이 기본적 개념입니다. 그런 ‘잠재 성향’은 우리의 가띠(gati)에 있습니다. 아누사야(anusaya)와 가티(gati)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끌림의 법칙 습관 성격(가띠) 및 갈망(아사와)’와  ‘아-사와, 아누사야, 및 가띠’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누구나 가띠(gati, 습관/성격)의 세트가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는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활동의 세트가 있습니다. 이것들 중 일부는 부도덕합니다.

  • * 그러나, 우리는 또한 도덕적(윤리적) 가띠와 부도덕한(나쁜) 가띠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도덕/부도덕은 넓은 범위에 걸쳐 있으며, 그것은 나중에 논의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들은 ‘업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것들은 가띠(gati)와 관련 있습니다.

 

13.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 (그리고 ‘가띠’와 ‘아누사야’)를 지닌 ‘사람’ 또는 ‘자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세요! 그것이 ‘무아(no-self)’라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이유입니다.

 

  • * 우리가 익숙한 것을 계속할 때, 그 습관은 점점 더 커질 뿐입니다. 그것은 또한 아누사야(anusaya)가 자랄 것임을 의미하고, 그 활동으로 인한 그 자람은 아누세띠(anuseti)입니다. ‘아누세띠 ㅡ 아누사야가 상카-라와 함께 자라는 방식’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아라한(Arahant)은 도덕적/부도덕적 가띠(gati)가 없지만, 업적으로 중립 가띠(gati, 습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관행(습관)은 특정한 방식으로 행(일)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라가 아누사야’는 마음이 만든 ‘수카 웨-다-나’ 또는 ‘소마낫사 웨-다-나’에 들러붙게 됨에 따라 자란다

 

14. #10의 구절에서 숫따가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분좋은 아-람마나(ārammana)’가 마음에 올 때, 그 ‘아-람마나’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람마나(ārammana)를 환영하고 그것에 ‘몰두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높게 생각하고, 높게 말하고, 그리고 그 아-람마나(ārammana)를 유지하기 위해 행동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 * 예를 들어, X가 좋아하는 대상을 본다면,  X는 그것을 계속 보고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생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X는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도  X는 그 대상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 계획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 활동들에는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 및 까-야(kāya saṅkhāra)가 포함됩니다.

  • * 그렇게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 및 ‘상카-라 빳짜야- 윈냐-나(saṅkhāra paccayā viññāṇa)’로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연기)가 시작됩니다.

  • * 여기서, 아윗자-(avijjā)는 그 감각 입력을 경험하는 자아(self)가 있다고 믿는 무지(무명)입니다.

 

그 윈냐-나들은 ‘깜마 윈냐-나’다

 

15. 우리는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로 인해 일어나는 초기 감각 사건에는 6가지 유형의 윈냐-나(viññaṇa)가 있을 수 있음을 기억(상기)합니다. 그것들은 짝쿠(cakkhu), 소-따(sōta), 가-나(ghāna), 지와-(jivhā), 까-야(kāya), 또는 마노-(manō) 윈냐-나(viññāṇa)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ṇa)이며, 감각 입력을 인식하게 합니다.

 

  • * 그러나,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상카-라 빳짜야- 윈냐나(saṅkhāra paccayā viññāṇa)’에서 윈냐-나(viññāṇa)는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를 생성합니다. 그런 상카-라(saṅkhāra)는 구체적으로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그런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는 오직 마노- 윈냐-나(manō viññāṇa), 즉 그것들은 마음에만 관련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감각 경험을 계속해서 즐기기 위해 더 많은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에너지는 내장하고 있습니다.

  • * 아비담마 용어로, 그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자와나 힘(javana power)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ṇa)를 위한 업 에너지를 생성합니다.

  • * 다르게 말하면, 그 사람은 그 감각 경험을 다시 즐기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는 이제 ‘깜마 비자(kamma bija)를 만들었습니다. 즉, 그는 이제 특정 결과를 기대합니다.

 

16. 예를 들어, 어떤 사람 X가 상점에서 값비싼 물건을 보고 들러붙었다면, X는 배우자와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돈을 마련할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X가 그 물건을 구매할 때까지 그 윈냐-나(viññāṇa)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X가 이미 그것에 대해 라-가 아누사야(rāga anusaya)를 가지고 있었고, 후속 행위를 함으로써 X가 그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추가’했다는 것입니다. 그 추가가 ‘아누세띠(anuseti)’입니다.

 

  • * 사람마다 아누사야(anusaya)의 종류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주어진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각 사람의 아누사야(anusaya) 레벨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 아누사야(anusaya)도 제거될 수 있으며, 그것이 닙바-나(Nibbāna)로 가는 길입니다.

  • * 짐작할 수 있듯이,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아누사야(anusaya)도 동일한 방식으로 증강됩니다. ‘나쁜’ 아-람마나(ārammana)로 도사(dosa, 성냄)가 일어나고, 빠띠가-누사야(paṭighānusaya, ‘paṭigha anusaya’)가 강화됩니다.

  • * 마지막으로, 아윗자-(avijjā)로 행할 때 증강하는 것은 아윗자-누사야(avijjānusaya, ‘avijjā anusaya’)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트에서 더 논의하겠습니다.

 

‘딧티 위빨라-사’와 ‘산냐- 위빨라-사’의 차이

 

이 포스트를 끝내기 전에 다음 포인트를 명확하게 하고 싶습니다.

 

17. 퓨어담마 사이트의 토론 포럼에서, “소-따빤나(Sōtapanna)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하고 나서, 여전히 감각적 즐거움에 가치를 두고 어떤 부도덕한 행위를 할 수도 있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라는 지당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 * 알다시피, 소-따빤나(Sōtapanna)는 아빠-야-(apāyā, apāya의 복수형)에 재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빠-야가-미(apāyagāmi) 행위만을 할 수 없습니다.

  • * 이 세상의 실제 본질을 보는 것(딧티, diṭṭhi)과 그 실제 본질에 대해 상응하는 인식(saññā, 산냐-)을 갖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산냐-(saññā)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산냐-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빠알리 낱말인 위빨라-사(vipallāsa)는 ‘혼동’ 또는 ‘왜곡’을 이미합니다. 잘못된 견해는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로 이어지고, 잘못된 인식은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로 이어집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위빨라-사(딧티, 산냐, 찟따)는 상카-라에 영향을 미친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이 용어로 말하면, 소-따빤나(Sōtapanna)는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를 제거했지만 여전히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가 있습니다.

 

18. 다르게 말하면, ‘자아(self)’에 대한 잘못된 견해(삭까야- 딧티, sakkāya diṭṭhi)는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자아(self)’에 대한 인식, 즉 아스미 마-나(asmi māna)는 단계적으로 사라지며 아라한(Arahant) 단계에서만 [완전히] 사라집니다.

 

  • *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는 아나-가미 단계에서 없어지고, (아스미 마-나, asmi māna와 함께) 찟따 위빨라-사(citta vipallāsa)는 아라한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위빨라-사(딧티, 산냐, 찟따)는 상카-라에 영향을 미친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것은 또한 우리가 ‘자아가 없다(무아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라한후드(Arahanthood, 아라한과)를 얻을 때까지, ‘자아(self)’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 * 핵심 포인트는 ‘자아(self)’ 또는 ‘무아(no-self)’에 기반하여 감각 경험을 분석하려고 하는 잘못이라는 점입니다. 그 대신, 원인과 결과, 또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관점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 * 그러면, 빠알리 낱말인 ‘앗따-(attā)가 실제로는 ‘자아(self)나 ‘영혼(soul)’이나 아-뜨마(ātma)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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