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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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따-'나 '자아'나  '아-뜨마'의 면에서 '삭까-야 딧티'

 

원문: Dhamma and Science 섹션의 ‘Sakkāya Diṭṭhi in Terms of Attā or “Self” or “Ātma”’ 포스트

- 2019년 10월 26일 작성; 2019년 11월 1일 개정; 2022년 10월 9일 개정

 

여기까지 차착까 숫따의 요약

 

1. 차착까 숫따(Chachakka Sutta, MN 148)는 새로운 아-람마나(ārammana, 생각 대상)가 마음에 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탐욕, 분노, 또는 무지를 통해 그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을(taṇhā, 땅하-) 수 있습니다. 그 단계들을 간략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모든 관련 포스트는 ‘담마와 과’의 이 ‘생명의 기원(Origin of Life)’ 서브 섹션에 있습니다.

 

  • * 처음에, 관련된 특정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에 따라, 여섯가지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ṇa) 중의 한 가지가 일어납니다. 그것들은 짝쿠(cakkhu), 소-따(sōta), 가-나(ghāna), 지와-(jivhā), 까-야(kāya), 또는 마노-(manō) 윈냐-나(viññāṇa)입니다. 그런 윈냐-나(viññāṇa)는 업 에너지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보기’, ‘듣기’, ‘냄새맡기’, ‘맛보기’, ‘감촉하기’, 또는 ‘기억이나 생각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 * 그 다음, 마음은 ‘산 가띠(san gati)와 ‘접촉’하게 됩니다. 탐욕, 분노, 또는 무지를 통해 그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는 가띠(gati)가 있다면, 마음은 그에 상응하는 소-마낫사(sōmanassa), 도-마낫사(dōmanassa), 또는 우뻭카(upekkha) 웨-다나-(vēdanā)를 생성합니다. 그것들은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 즉 ‘마음이 만든 웨-다나-(mind-made vēdanā)’입니다.

  • * 그런 ‘마음이 만든 웨-다나-(mind-made vēdanā)가 일어나면, 마음은 그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습니다. 사람은 탐욕, 증오, 또는 무지를 통해 들러붙을(땅하-, taṇhā) 수 있습니다.

  • * 핵심어인 아-람마나(ārammana)는 ‘감각 사건에서 위빠-까 웨-다나-와 삼팟사 자- 웨-다나-’ 포스트에서 소개하였습니다.

 

아라한의 특별한 위치

 

2. 아라한(Arahant)에게는 처음 단계만 발생합니다. 아라한은 어떤 아-람마나(ārammana)에도 들러붙음이 없으며, (설탕의 단맛이나 레몬의 쓴맛과 같은) 까-마 산냐-(kāma saññā)를 경험하는 것만 있습니다.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러나, 아라한(Arahant)도 부상, 질병 등을 겪으면 까-이까(kāyika, 신체) 웨-다-나(vēdanā)를 느낄 것입니다. 그것들은 둑카(dukkha), 수카(sukha), 또는 아둑카마수카(adukkhamasukha) 웨-다나-(vēdanā)입니다. 까-이까(kāyika, 신체) 웨-다-나(vēdanā)를 기반으로 하는 소-마낫사(sōmanassa) 또는 도-마낫사(dōmanassa) 웨-다나-(vēdanā)는 아라한이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 * 아라한 이외의 모든 이들은 특정한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을 수 있습니다. 그 들러붙음이 발생하는지 여부는 ‘산 가띠(san gati)’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각자가 모든 각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는 것은 아닙니다.

 

차착까 숫따의 심층 측면

 

3. 우리는 또한 그 단계들에 관련된 ‘심층 측면(deeper aspect)’을 논의했습니다.

 

  • * 언제든지 6가지 유형의 윈냐-나(viññāṇa) 중의 하나만 특정한 아-람마나(ārammana)로 인해 마음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 짧은 순간에 듣거나, 냄새맡거나, 맛보거나, 감촉하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감각 입력에 초점을 맞춘, 단 하나의 찟따 위티(citta vithi)만이 어떤 순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어진 시간에 오직 하나의 빠사-다 루-빠(pasāda rūpa)만이 하다야 왓투(hadaya vatthu, 마음 자리)와 접촉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그 감각 접촉을, 그 특정한 감각 입력에만 초점을 맞춘 네 개의 찟따 위티(citta vithi)로 분석합니다.

  • * 예를 들어, 마음은 ‘소리 패킷(packet of sound)’를 분석하고 있을 때, 그 소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음은 그 짧은 시간 동안에는 보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거나 등을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감각 입력은 ‘패킷(packet)’별로 분석됩니다. 각 ‘패킷(packet)’은 6가지 가능한 유형(봄, 들음, 맛봄, 냄새맡음, 감촉함, 또는 ‘담마-’를 상기함) 중의 단 하나입니다.

  • * 우리는 현대 과학의 최근 발견 면에서 그것을 분석했습니다. 마음은 약 100분의 1초(10밀리초)로 분리된 각 감각 입력의 ‘스냅샷’을 포착합니다. 그것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연속적으로 보고 있는 것’같이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련의 스냅사진을 연속적인 영화로 인식하는 것처럼,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입니다. ‘시각은 일련의 스냅사진 - 영화 비유’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것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것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이 한 번에 하나의 ‘스냅샷’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6가지 문’에서 오는 ‘데이터 패킷(data packets)’을 섞지 않고 결합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나 산냐-(Ghana Saññā)는 무엇인가?

 

4. 그 빠른 마음이 그 감각 사건들을 경험하는 ‘사람’이나 ‘자아(self)’나 ‘앗따-(attā)’가 있다는 환상(착각)을 줍니다. 그 잘못된 인식이 ‘가-나 산냐-(ghāna saññā) (‘견고 인식’ 또는 ‘고형 인식’)’입니다.

 

  • * 필자는 이전에 ‘가-나 샨냐-(ghāna saññā)’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었습니다. 그것은 일련의 ‘스냅샷’을 포착하고 서로 연결하여 ‘연속적인 감각 경험’을 주는 것으로, 마음이 만드는 환상을 묘사하는 낱말(용어)입니다.

  • * 우리가 논의했듯이, 그것은 우리가 영화를 볼 때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연속적으로 움직인다는 환상(착각)은 일련의 정적 사진을 투사함에 따라 일어납니다. ‘시각은 일련의 스냅사진 - 영화 비유’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5. 어떤 감각 사건도 잠깐 동안의 ‘스냅샷’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잠깐 동안 지속되고 과거로 갑니다. 그것이 이해해야 할 매우 중요한(결정적인) 점입니다. 바-히야(Bāhiya)는 그 점을 즉시 이해하고 아라한과(Arahanthood)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바-히야(Bāhiya)는 거의 마지막까지 길(팔정도)을 닦았고, 거기(아라한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밀어줌’만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전 포스트인 ‘차착까 숫따 - 여섯 가지 유형의 위빠-까 윈냐-나’ 에서 논의한 내용입니다.

 

  • * 마음은 이전의 ‘스냅샷’을 상기하고 이를 모두 결합하여 ‘연속적인 감각 경험’으로 나타내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붓다께서는 윈냐-나(viññāṇa)를 마술사라고 부르셨습니다.

 

6. 우리는 또한 우리 육체에 대해 ‘가-나 산냐-(ghāna saññā)’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이 단단하다고 인식하지만,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우리 몸은 ‘대부분 비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그 원자와 분자 [내부]가 대부분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신비 현상?’ 포스트의 #7~#10을 참조하세요.

 

  • * [차착까 숫따의] 그 구절들에 많은 자료(내용)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필자는 논의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제, 차착까 숫따의 다음 절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차착까 숫따에서 다음 절 - ‘삭까-야 사무다야’

 

우리는 [차착까 숫따에서] “Iti manō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ṃ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taṇhā anattā)”로 끝나는 구절까지 논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이전 구절들로부터 뻗어진 결정적인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7. 차착까 숫따의 다음 구절은 “Ayaṃ kho pana, bhikkhave, 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ācakkhu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rūpe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로 시작됩니다.

 

  • * 여기서 삭까-야(sakkāya)는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나타냅니다. 사무다야(samudaya, ‘san’ + ‘udaya’)는 ‘산(san)으로 인한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가-미니(gāmini)는 ‘길’을 의미합니다. 빠띠빠다(patipada)는 ‘행위 계획’ 또는 단순히 자신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삭까-야사무다야가-미니- 빠띠빠다-(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일어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 * 그 다음, 차착까 숫따에서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는 자신이  “짝쿠(cakkhu)는 내 것이고, 짝쿠(cakkhu)는 나이고, 짝쿠(cakkhu)는 나의 자아(self)”라고 믿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 * 그 후, 차착까 숫따는 ‘보는 것(시각)’과 관련된 다른 5가지 실체 모두에 대해 그것을 반복합니다. 그것들은 루-빠(rūpa), 짝쿠 윈냐-나(cakkhu viññāna), 짝쿠 삼팟사(cakkhu samphassa), 짝쿠 삼팟사 자- 웨-다나-(cakkhu samphassa-jā-vēdanā), 및 (‘짝쿠 삼팟사 자- 웨-다나-’에서 기인한) 땅하-(taṇhā)입니다.

  • * 그 다음, 차짝까 숫따는 다른 5가지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 즉 소-따(sōta), 가-나(ghāna), 지와-(jivhā), 까-야(kāya), 마노-(manō)에 대해 반복합니다.

 

깜마 위빠-까로 인한 초기 감각 경험에 대한 요약

 

8. 차착까 숫따의 전반부에 대한 우리의 모든 논의는 위 구절에서 결정적인 결론으로 이어졌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초기 감각 입력들을 경험하는 ‘경험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듯이, 그 초기 감각 입력들은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로 들어옵니다.

 

  • * 이 점을 강조하겠습니다. 즉, 모든 감각 경험은 ‘경험자’가 직접 개시하지 않고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먼저 "짝쿤짜 빠띳짜 루-뻬 짜 웁빳자-띠 짝쿠윈냐-낭(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ñāṇaṃ)"을 통해 대상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항상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입니다.

  • * 육체(kāya, 까-야)를 통해 경험된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는 안락(sukha, 수카)하거나, 고통(dukkha, 둑카)스럽거나, 중립적(adukkhamasukha, 아둑카마수카)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행했던 좋은 업(good kamma)으로 인해 안락한 침대에 누워있게 됩니다. 과거에 행했던 나쁜 업(bad kamma)은 부상으로 이어집니다. 둘 다 "까-얀짜 빠띳짜 폿탑베 짜 웁빳자-띠 까-야윈냐-낭(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āti kāyaviññāṇaṃ)"를 통해 발생합니다.

 

9. 다른 모든 초기 감각 경험은 ‘아둑카마수카 웨-다나-(adukkhamasukha vēdanā)’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보거나, 듣거나, 냄새맡거나, 맛보거나, 생각이 마음에 떠 오릅니다. 마지막 부분은 “마난짜 빠띳짜 담메 짜 웁빳자-띠 마노윈냐-낭(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āti manoviññāṇa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아둑카마수카 웨-다나-(adukkhamasukha vēdanā, 중립적 느낌)를 생성합니다.

 

  • * 그러나, 6가지 모든 초기 감각 접촉을 바탕으로, 우리는 까-마 구나(kāma guna)로 인해 즉시 소-마나사 웨-다나-(sōmanassa vēdanā) 또는 도-마낫사 웨-다나-(dōmanassa vēdanā)를 생성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설탕을 맛보거나 매력적인 사람을 볼 때, 어필하는 맛을 경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자연스럽습니다).

  • * 그것들에 바탕한 것이 ‘마음이 만든(mind-made) 느낌’, 즉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a-vēdanā)’입니다. 그것들은 몸(까-야, kāya)의 감각 접촉과 관련된 둑카/수카(dukkha/sukha) 웨-다나-(vēdanā)와는 다릅니다.

  • * 이제, 까-마 구나(kāma guna)로 인한 그런 소-마낫사(sōmanassa) 또는 도-마낫사(dōmanassa) 웨-다나-(vēdanā)에 기초하여, 보통 사람은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a-vēdanā)를 생성합니다. 그 감각 입력에 마음이 들러붙는(taṇhā, 땅하-)다면, 그것이 일어날 것입니다. 물론, 아라한(Arahant)은 그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a-vēdanā)들을 생성하지 않습니다.

  • * 그것은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에 논의되어 있습니다.

 

‘땅하-’는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우빠-다-나’로 이어진다

 

10. 그것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인데, 차착까 숫따(Chachakka Sutta)에서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차착까 숫따는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단계만을 설명합니다.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의 그 단계는 ‘새로운 업 생성’과정을 시작합니다.

 

  • * 이제 여러분은 새로운 아-람마나(ārammana)가 마음에 올 때, 우리의 모든 업 생성 활동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에서 ‘살라-야따나 빳짜야- 팟소-(salāyatana paccayā phassō) 단계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로 새로운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을 시작하는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입니다.

  • * 그것은 결정적인(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필자는 이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를 설명하는 데 시간을 좀 할애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들이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붓다 담마의 핵심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은 아윗자-로 행하기 시작할 때만 시작된다

 

11. 다음으로, 차착까 숫따(Chachakka Sutta)는 주어진 사람이 왜 아윗자-(avijjā)로 시작하여 업 생성 단계를 시작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차착까 숫따 - 여섯 가지 유형의 위빠-까 윈냐-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주어진 아-람마나(ārammana, 시각, 소리 등)를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가치가 있거나 유익하다고 인식하는 경우에만 그럴 것입니다. 그 인식은 그 감각 경험들이 자신의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논의했듯이, 그 잘못된 견해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입니다.

  • *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지닌 사람은 그 경험들이 단지 과거 원인의 결과라는 것, 즉 그것들이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좋은 경험’을 유지하거나 ‘나쁜 경험’을 피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상황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가진 자는 누구나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를 거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 * 그러나,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한 소-따빤나(Sōtapanna)는 여전히 부도덕한 행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소-따빤나(Sōtapanna)는 아빠-야가미(apāyagami, 악처로 가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따빤나는 강도가 낮은 부도덕한 행위를 할 지 모릅니다. 그것은 소따-빤나(Sōtapanna)가 여전히 잘못된 인식, 즉 위빠리따 산냐-(viparita saññ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라한 단계에서, 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인식을 모두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차착까 숫따에 대한 논의를 마친 후, 향후 포스트에서 이것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12. 그러나,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지닌 모든 사람이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유형의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습니다.

 

  • * 예를 들어, 아름다운 여성이 직장에서 일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아름다운 여성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그 여성에게 들러붙어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여성을 보고 첫 눈에 홀딱 반하여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 * 그렇기 때문에 ‘자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라한과(Arahanthood)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들러붙는 ‘동적 자아(dynamic self)’가 있을 것입니다. 필자는 영혼 또는 아-뜨마(ātma)의 의미에서 ‘고정된 자아’가 없기 때문에, ‘동적 자아(dynamic self)’라고 말합니다. ‘환생이란 무엇인가? - 생명 흐름의 개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들러붙음(땅하-)은 탐욕, 성냄, 또는 무지로 인해 일어날 수 있다 

 

13. 위 예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들러붙게 되는 것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논의한 바와 같이, 분노(성냄)나 무지를 통해서도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을 수 있습니다. 

 

  • * 적을 보면, 차착까 숫따에서 언급된 단계를 통해 즉시 마음에 분노(성냄)를 일으킬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성된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는 도-마낫사 웨-다나-(dōmanassa vēdanā)이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웨-다나-(vēdanā)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고, 나쁜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 즉 ‘분노하는 의식적 생각’을 마음에 일으키기 시작할 것입니다.

  • * 그 반면에, 위 #12(아름다운 여성을 보는 것)에 논의된 예에서, 생성된 삼팟사 자- 웨-다나-(samphassa-jā-vēdanā)는 소-마낫사 웨-다나-(sōmanassa vēdanā)입니다. 그 사람은 탐욕으로 들러붙었습니다.

  • * 경우에 따라서는 아-람마나(ārammana)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 있으며, [이때에도]  여전히 ‘들러붙게 됩니다. 그것은 아윗자-(avijjā)로 인한 것입니다.

 

‘땅하-’는 각자의 ‘아윗자-’ 레벨에 따라 ‘우빠-다-나’로 이어진다

 

14. 다음 견해 중 하나 이상을 가지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로 이어집니다.

 

  • * ‘육체(까-야, kāya)는 내 것이고, 나 자신이며, 내 자아다. 더욱이, 관련된 모든 신체 기능은 내 것이고, 나 자신이며, 내 자아다’라는 견해입니다. 그것들은 보는 것(짝쿠, cakkhu), 듣는 것(소-따, sōta), 맛보는 것(지와-, jivhā), 냄새맡은 것(가-나, ghāna), 감촉하는 것(까-야, kāya), 생각하는 것(마나, mana)입니다. 위 #7을 참조하세요.

  • * 그 다음, 사람들은 또한 어떤 외부 루빠(external rūpa)를 동일한 식으로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루-빠 루-빠(rūpa rūpa, ‘완나 루-빠_vaṇṇa rūpa’ 또는 간단히 ‘루-빠_rūpa’라고도 함), 삿다 루-빠(sadda rūpa), 간다 루-빠(gandha rūpa), 라사 루-빠(rasa rūpa), 뽓탑바 루-빠(potthabba rūpa), 및 담마 루-빠(dhamma rūpa,  ‘담마-_dhammā’라고도 함)입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내 집, 내 노래, 내 케이크,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기, 나의 편안한 침대, 이것들은 내 생각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 *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정신적 측면(‘짝쿠 윈냐-나_cakkhu viññāna’, ‘짝쿠 삼팟사_cakkhu samphassa’, ‘짝쿠 삼팟사 자- 웨-다나-_cakkhu samphassa-jā-vēdanā)’, 및 ‘땅하-_taṇhā’ 등)이 모두 자신의 ‘자아(self)’라고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감각 기능과 관련된 다른 정신적 측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착까 숫따에서 나열하는 그런 항목은 36가지(6x6)입니다. ‘차착까 숫따 - 여섯 가지 유형의 위빠-까 윈냐-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삭까-야 딧티’로서 ‘빤쭈빠-다-낙칸다-’

 

15. 그 36가지 항목은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는 ‘빤짜(panca)’ +  ‘우빠-다-나(upādāna)’ + ‘칸다(khandha)’에서 비롯된 것인데, ‘사람들이 들러붙게(집착하게) 되는 다섯가지 무더기’입니다. ‘차착까 숫따 - 여섯 가지 유형의 위빠-까 윈냐-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36가지 항목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것들은 루빡칸다(rupakkhandha), 웨다낙칸다(vedanakkhandha), 산냑-칸다(saññākkhandha), 상카-락칸다(sankhārakkhandha), 및 ‘윈냐-낙칸다(viññānakkhandha)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내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의 모든 집 중에서, 하나 또는 몇 채의 집만 자신의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나의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 모음(set of people)’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부모, 내 아내, 내 아이, 내 친구 등입니다.

  • * 그러므로, 사람들이 들러붙는(집착하는) 것은 빤짝칸다(pancakkhandha)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그 들러붙음은 매우 강한 것(‘내 몸’이 가장 강함)에서 친구, 이웃 등으로 그 정도가 감소하며 다양합니다.

  • * 따라서,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는 빤짝칸다(pancakkhandha)의 아주 적은 부분입니다.

  • * ‘삭까-야빤하- 숫따(Sakkāyapañhā Sutta, SN 38.15)’는 [다음과 같이] 삭까-야(sakkāya)를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로 정의합니다. “ ‘Sakkāyo, sakkāyo’ti, āvuso sāriputta, vuccati. Katamo nu kho, āvuso, sakkāyo”ti? “Pañcime, āvuso, upādānakkhandhā sakkāyo vutto bhagavatā, seyyathidaṃ—rūpupādānakkhandho, vedanupādānakkhandho, saññupādānakkhandho, saṅkhārupādānakkhandho, viññāṇupādānakkhandho. Ime kho, āvuso, pañcupādānakkhandhā sakkāyo vutto bhagavatā”ti.

 

‘삭까-야 딧티’를 묘사하는 다른 방식

 

16.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다소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상호 일관성이 있습니다. 아래에 열거한 포스트에서는 그 중 몇 가지가 논의되어 있습니다. 모순되는 어떤 것이 보이면, 알려 주세요(lal@puredhamma.net). 그것을  토론 포럼에서 논의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닛짜’와 ‘수카’라는 잘못된 견해는 ‘앗따-’라는 잘못된 견해로 이어진다

 

17. 사람들은 자신이 닛짜(nicca)와 수카(sukha)라고 인식하는 것에 들러붙게 됩니다. 닛짜(Nicca)는 우리가 그것들을 원하거나 좋아하는 식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카(sukha)는 우리가 그것들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 그 다음, 사람들은 그것들을 소유하게 되고, 그것들을 ‘자신의 것’ 또는 앗따-(attā)로 여깁니다. 그 들러붙음은 매우 강한 것에서부터 덜 강한 것까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몸과 정신 특질(자기 자신의 몸에 관한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은 가장 강한 ‘앗따- 감각(sense of attā)’을 줍니다. 

  • * 그 다음으로, 자신의 배우자, 자기 아이, 자기 집, 자기 자동차, 등과, 자기 친척과 자기 친구 등이 [덜 강한 ‘앗따- 감각’으로] 옵니다.

  • * 그러므로, 제거하기가 가장 힘든 것은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앗따- 감각(sense of attā)’입니다.

  • * 그것은 의지력으로 제거될 수 없으며, 이 세상의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 특성을 이해하는 것으로만 제거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한 것은 그 이해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경험하는 자’는 없습니다. 감각 입력은 과거 원인(kamma, 깜마)의 결과(깜마 위빠-까, kamma vipāka)로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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