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상카-라 ㅡ 소개
원문: Paṭicca Samuppāda 섹션의 ‘Saṅkhāra – An Introduction’ 포스트
상카-라(saṅkhāra)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상카-라에 대한 기본 개념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빠띳짜 사뭅빠-다(Paticca Samuppāda)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23년 1월 26일 작성; 2023년 3월 26일 재작성
영문 도표 다운로드/인쇄: 7. Saṅkhāra – An Introduction
상카-라 ㅡ 다양한 유형
1. 상카-라(saṅkhāra)는 감각 입력(아-람마나, ārammaṇa)에 반응하여 마음에 일어납니다. 그것들은 아-람마나와 각자의 가띠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느낌/인식/의도의 혼합입니다. (생각없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은 찟따/마노 상카-라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로 아-람마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것들로 입 밖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 행위를 하기 시작한다면, 그것들은 강한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그것은 상카-라(saṅkhāra)의 하나의 주요 부분입니다. (아라한을 포함하여) 모든 유정체는 그것들을 생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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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생각들, 말, 및 행동들은 탐욕(로바), 성냄(도사), 또는 무지(모하)에 의해 오염/타락될 수 있는데, 그것들은 아뿐냐/아꾸살라(부도덕한) 상카-라(apuñña/akusala (immoral) saṅkhāra)입니다. 그것들은 미래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접두사 아비(abhi)도 붙으며, 즉 그것들은 아뿐냐/아꾸살라 아비상카-라(apuñña/akusala abhisaṅkhār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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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반대, 즉 관대, 연민, 및 지혜가 있는 도덕적인 유형은 미래에 좋은/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그것들은 뿐냐 아비상카-라(puñña abhisaṅkhāra)입니다.
2. 예를 들어, 우리가 짧은 큰 소리를 듣는다면, 언짢을 수 있지만 화를 내지는 않을 수 있는데, 그것은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만 수반합니다. 그러나 그 큰 소리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화가 나고 그 잡음을 일으키는 사람을 (내적으로) 욕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리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밖으로 말하며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 행위는 모두 와찌 아비상카-라(vaci abhi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소리를 내는 사람과 마주한다면, 그 사람에게 화를 내며 때릴 수도 있는데, 그 깜마(kamma)는 까-야 아비상카-라(kāya abhisaṅkhāra)로 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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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두사 ‘아비(abhi)’가 없는 상카-라(saṅkhāra)는 미래에 업적 결과가 없습니다. 즉, 그것들에는 업 에너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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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상카-라-(saṅkhārā)는 붓다 또는 아라한에게 일어나기 때문에,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는 ‘아윗자- 빳짜야- 아비상카-라-(avijjā paccayā abhisaṅkhārā)’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아윗자-로 인한)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ā)는 붓다 또는 아라한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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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띳짜 사뭅빠-다(Paticca Samuppāda)에서, 웃데사(uddesa) 버전이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이지만, 아윗자-(avijjā)로 인해 일어나는 그것들은 항상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ā)입니다. 그 때문에 숫따의 구절들을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순과 혼란을 초래합니다. ‘빠띳짜 사뭅빠-다에서 빠알리 핵심어의 왜곡’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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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더 깊은 개념을 논의하고 있는) 많은 숫따들은 발화 발언, 즉 웃데사(uddesa) 형태입니다. 그것들을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것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닛데사 형태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예와 비유가 있는 긴 설명(빠디닛데사)이 필요합니다. ‘숫따 해석 - 웃데-사, 닛데-사, 빠띠닛데-사’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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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상카-라(saṅkhāra)의 세 가지 주요 유형의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상카-라의 세 가지 유형은 행동, 말, 및 생각의 원인이다
3. ‘Cūḷavedalla Sutta (MN 44)’에는 마음 속에 생성된 상카-라의 유형에 대해 간결한 진술이 있습니다.
“Tayome āvuso visākha, saṅkhārā—kāyasaṅkhāro, vacīsaṅkhāro, cittasaṅkhāro”ti.
ㅡ 세 가지 유형의 상카-라가 있는데, 까-야 상카-라, 와찌- 상카-라, 찟따 상카-라입니다.
“Katamo panāyye, kāyasaṅkhāro, katamo vacīsaṅkhāro, katamo cittasaṅkhāro”ti?
ㅡ 까-야 상카-라는 무엇이고, 와찌- 상카-라는 무엇이며, 찟따 상카-라(또는 마노- 상카-라)는 무엇입니까?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asaṅkhāro,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ㅡ 앗사-사 빳사-사-는 까-야 상카-라고, 위딱까 위짜-라는 와찌- 상카-라고, 산냐-와 웨다나-는 찟따 상카-라를 이룹니다.
“Ksamā panāyye,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k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k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ㅡ 세 가지 유형의 상카-라는 왜 그런 식으로 분류합니까?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ikā ete dhammā kāyappaṭibaddhā, tasmā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Pubbe kho, āvuso visākha,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etasikā ete dhammā cittappaṭibaddhā, t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ㅡ 앗사-사 빳사-사-(들숨 날숨)은 몸(움직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앗사-사 빳사-사는 까-야 상카-라입니다.
ㅡ 위딱까/위짜-라가 일어난 후에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위딱까/위짜-라는 와찌- 상카-라입니다.
ㅡ 산냐-와 웨다나-는 모든 찟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산냐-/웨다나-는 찟따(마노) 상카-라입니다.
앗사-사 빳사-사는 아비상카-라가 아니다
4. ‘앗사-사 빳사-사- 까-야 상카-라(assāsa passāsā kāya saṅkhāra)’라는 구절에서 ‘앗사-사 빳사-사(assāsa passāsa)’는 ‘들숨 날숨’에 수반되는 상카-라의 유형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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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비록 인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들숨 날숨은 찟따 위티(citta vithi), 즉 우리가 찟따(citta)를 ‘생각’으로 번역하면 ‘생각들’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떤 자와나 힘이 없는 ‘약한 찟따’입니다. 그런 약한 찟따 위티(citta vithi)들은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 마음을 통해 작용합니다. 자, 호흡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수반하며, 모든 몸의 움직임은 마음이 몸을 통제하기 때문에 찟따를 수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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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탐함, 성냄, 또는 무지와 함께 일어나지 않는 호흡, 걷기, 달리기, 또는 모든 신체 움직임은 업적으로 중립인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그것들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아닙니다.
5. 위 #3에 있는 그 정의들은 일반적으로 상카-라(saṅkhāra)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들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되는지 아닌지는 탐욕(로바), 화냄(도사), 또는 무지(모하)를 수반하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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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산냐-와 웨다나-는 아라한들의 찟따에도 일어납니다. 따라서, 아라한들에게 일어나는 마노- 상카-라(manō saṅkhāra)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아닙니다. 그러나, 웨다나-(vedanā)가 삼팟사ㅡ자-ㅡ웨다나-(samphassa-jā-vedanā)로 변하면, 그것들은 확실히 아비상카-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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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딱까/위짜-라(vitakka/vicāra)는 간단히 ‘숙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람마나(ārammaṇa)가 들어오면,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내적으로 고민(숙고)할 수 있습니다. 한 예가 아래 #6에 있습니다. 그 숙고는 비도덕적, 도덕적, 또는 중립적일 수 있으며 맥락(상황)에 따라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사위딱까/사위짜-라(savitakka/savicāra)로 언급될 때, 그것들은 예를 들어 아라한에게 일어나는 ‘좋은 와찌 상카-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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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사항은 '와찌- 상카-라 ㅡ 상깝빠(의식적 생각)와 와-짜-(말)’, ‘와찌- 상카-라의 바른 의미’, 및 ‘위딱까, 위짜-라, 사위딱까, 사위짜-라, 및 아위딱까, 아위짜-라’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상카-라와 아비상카-라
6. 위에서 언급된 세 가지 주요 유형의 상카-라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그것들의 작용/발달을 기억하기가 더 쉽습니다. 좋은 유형이든 나쁜 유형이든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우리가 감각 입력(아-람마나, ārammaṇa)에 들러붙어 마음에 탐함, 성냄, 또는 무지가 일어날 때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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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 X가 따분하여 TV를 보고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X는 단지 ‘단조로운 프로그램’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그 프로그램은 최근 개봉한 영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반나체 여배우를 보여주는 광고로 전환됩니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X에게 욕정이 있는 생각으로 이끌고, 그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 처음의 욕정이 있는 생각은 그의 숨겨진 오염원(까-마 라-가 아누사야, kāma rāga anusaya)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그것들은 그런 광경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부추켜진 그의 성격/습관(가띠, gati)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찟따/마노 아비상카-라(citta/mano abhisaṅkhār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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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노 아비상카-라(mano abhisaṅkhāra)는 가띠(gati)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아비상카-라의 가장 약한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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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그는 의식적으로 욕정이 가득한 생각을 생성하기 시작하며, 여기서 그는 속으로 말하며 그 영화를 보면 얼마나 좋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위 #5에서 언급된 ‘숙고’, 즉 ‘위딱까/위짜-라’입니다. 그것들은 와찌 아비상카-라(vaci abhisaṅkhāra)의 형태입니다. 그는 친구에게 전화하여, 와서 그 광고를 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의 말도 와찌 아비상카-라(vaci abhisaṅkhār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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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은 배우와 그 영화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하며 광고를 보고 영화를 보러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옷을 차려입고 차를 몰고 영화관으로 갑니다. 그 모든 신체 행동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입니다. 더욱이 그 신체 행동의 근본 원인은 마음에 있는 욕정이며, 그것들은 까-야 아비상카-라(kāya abhisaṅkhār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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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찌 및 까-야 아비상카-라는 의식적인 생각으로 자와나 찟따(javana citta)에서 일어나므로 더 강건합니다.
7. 위 #6에 있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의 유형은 특정한 재탄생을 직접 일으키기에 충분히 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까-마 로까(kāma loka)에 위빠-까(vipāka)를 가져올 수 있는 업 에너지를 생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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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욕정을 일으킨 이 유형의 아비상카-라는 자라서 예를 들어 성폭행을 범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 특정한 깜마는 (예를 들어, 동물로) 불행하게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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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그것이 상카-라와 아비상카-라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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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방식의 이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자와나 찟따(javana citta)를 수반하고, 그것은 (도덕적 함의에 대해) 탐함, 성냄, 또는 무지와 함께 일어나는 강한 찟따입니다.
쩨따나-와 산쩨따나-
8. 닙베디까 숫따( Nibbedhika Sutta (AN 6.63) )에서, 붓다께서는 “cetanāhaṁ, bhikkhave, kammaṁ vadāmi.”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깜마(kammā)의 유형을 결정하는 것은 쩨따나(cetanā), 즉 ‘의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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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도가 로바(lobha), 도사(dosa), 또는 모하(아윗자-)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어떤 것을 하는 쩨따나, 즉 의도입니다. 여기서, 깜마(kamma)는 업적 결과가 없는 단지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간다면, 그것은 중립적인 쩨따나(cetana)로 행한 것이며, 그 의도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산쩨따나-(sañcetanā)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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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쩨따나(cetana)는 그것이 산(sañ), 즉 로바(lobha), 도사(dosa), 모하(아윗자-)를 수반하면, 산쩨따나-(sañcetanā, sañ + cetanā)가 됩니다. ‘주요 담마 개념’ 섹션의 ‘산 ㅡ 결정적인 빠알리 어원(San – A Critical Pāli Root)’ 서브섹션의 포스트들과, ‘깜마의 세부사항 ㅡ 의도, 영향받는 자, 깜마 빠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9. 빠띳짜 사뭅빠-다에 대한 상세한 분석(닛데사 버전)이 (띠삐따까 주석인) 위방가빠라나나(Vibhaṅgapararana)에 있습니다. ‘Paṭiccasamuppādavibhaṅga’ 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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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에는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되어 있는데, “Kāya sañcetanā kāyasaṅkhāro, vacī sañcetanā vacīsaṅkhāro, mano sañcetanā citta saṅkhāro. Ime vuccanti “avijjā paccayā saṅkhārā”.”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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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아윗자-(avijjā)와 함께 일어나는 상카-라는 ‘산쩨따나-(sañcetanā)’, 즉 ‘오염된 쩨따나’ 또는 ‘오염된 의도’를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그것들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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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산쩨따나(sañcetanā)를 가진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만이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에 포함됩니다.
10. 산쩨따나- 숫따(Sañcetanā Sutta (SN 27.7))에서, 붓다께서는 “rūpa sañcetanāya chandarāgo, cittasseso upakkileso.”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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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루빠(rūpa)에 대한 들러붙음/갈망(찬다 라-가, chanda rāga)은 오염된 의도(산쩨따나-, sañcetanā)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오염된 의도는 탐함, 성냄, 무지가 함께 하는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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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그 구절은 소리, 냄새, 맛, 감촉, 및 담마-(담마 산쩨따나-)에 들러붙음에 대해 반복됩니다. 담마-(dhammā)는 마음[하다야 왓투]에 직접 들어오는 아-람마나(ārammaṇa)입니다. ‘담마와 담마- ㅡ 다르지만 관련됨’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예
11.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칼을 들고 걸어가는 누군가를 본다면, 우리는 그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를 생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을 움직이는 것은 까-야 상카-라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칼로 무엇을 하는지 알기까지는 우리는 그것들이 까-야 아비상카-라(kāya abhisaṅkhārā)인지 아닌지 모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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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누군가를 해치거나 죽이려는 의도로 칼을 들고 간다면, 그때 산쩨따나-(sañcetanā)가 작용하고 그는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에 관여하고 있는데, 그 상카-라-(saṅkhārā)는 까-야 아비상카-라-(kāya abhisaṅkhārā)의 특정 유형인 아꾸살라 아비상카-라(akusala abhisaṅkhār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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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단지 그 칼을 사서 집에 가져간다면, 그것은 산쩨따나-(sañcetanā)가 아니라 단지 쩨따나(cetana)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에 속하지 않는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ā)로 행해진 단지 까-야 깜마(kāya kamma)(몸의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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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중립 쩨따나-가 함께 하는 상카-라-(saṅkhārā)는 중립 깜마-로 이어지는데, 그것들은 미래에 업적 결과가 없습니다. 그러나 산쩨따나-(sañcetanā)가 함께 하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로 행해지며, 그것들은 미래에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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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상카-라(까-야, 와찌, 또는 마노 상카-라)는 각자의 의도가 로바, 도사, 모하(아윗자-)를 수반할 때에만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상카-라와 깜마 ㅡ 밀접하게 관련됨
12. 상카-라-(saṅkhārā)는 깜마-(kammā)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깜마(kamma)는 보통 ‘행위’로 번역되지만, 모든 깜마-(kammā)는 마음에 그 기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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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찟따/마노(citta/mano), 와찌(vaci), 및 까-야(kāya) 상카-라(saṅkhāra)가 있는 것과 같이, 마노, 와찌, 및 까-야 깜마(kamma)가 있습니다. 더욱이, 그것들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ā)는 마노 깜마-(mano kammā)를 일으키고,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ā)는 와찌 깜마-(vaci kammā)를 일으키며,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ā)는 까-야 깜마-(kāya kammā)를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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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우리는 아뿐냐/아꾸살라 깜마(apuñña/akusala kamma)와 뿐냐/꾸살라 깜마(puñña/kusala kamma)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 빠띳짜 사뭅빠-다(Paticca Samuppāda)는 여러 유형의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어떻게 미래에 상응하는 결과(위빠-까)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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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위빠-까(vipāka)는 현생이나 내생에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강한 아비상카-라를 가진) 강한 깜마-(kammā)는 웁빳띠 빠띳짜 사뭅빠-다(Uppatti Paṭicca Samuppāda)를 통해 좋거나 나쁜 미래 재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웁빳띠 빠띳짜 사뭅빠-다(어떻게 자신의 재탄생을 만드는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다른, 더 약한 깜마-는 현생이나 내생의 일생 중에 그 위빠-까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방 안의 코끼리’ 섹션의 ‘일생 중의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During a Lifetime)’ 서브섹션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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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일부 깜마-(행위)는 단순히 그 때 일을 완수할 뿐만 아니라 내생에서도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월(carry-over)’ 효과가 있는 것들은 아비상카-라를 통해 일어나는 처음 두 가지 유형의 도덕적 및 비도덕적 깜마-입니다.
마노-뿝방가마- 담마-..
14. 붓다께서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리 생각, 말, 및 행위에 기원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이 읽어보는 것이 필요할 수 있지만, 그것이 붓다 담마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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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원리는 ‘마노-뿝방가마- 담마-..’ 포스트의 담마 구절로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노(mano)’는 마음을 나타내고, 담마-(dhammā)(a 장음을 가짐)는 (재탄생)을 포함하여 위빠-까(vipāka)를 가져오는 그 업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필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논의했습니다. 예를 들어, ‘빠띳짜 사뭅빠-다’ 섹션의 ‘깜마와 빠띳짜 사뭅빠-다(Kamma and Paṭicca Samuppād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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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사람들은 양육부터 물질주의적(유물론적) 세계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형 물질’(예를 들어, 우리 신체)의 기원을 어떻게 마음에 둘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비록 필자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지만,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실천하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특히 서양 독자에게 이 ‘마음-몸’ 관계를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성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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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생각(구체적으로 아비상카-라)은 직접 모든 고형 물질의 생성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묘하지만 아주 논리적/과학적 과정입니다. 필자는 그것을 ‘담마와 과학’ 섹션의 ‘생명의 기원(Origin of Life)’ 서브섹션에서 논의했지만, 필자는 이제 일부 기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5. 상카-라(saṅkhārā)에 대한 모든 포스트들은 ‘빠띳짜 사뭅빠다’ 섹션의 ‘상카-라 ㅡ 많은 의미(Saṅkhāra – Many Meanings)’ 서브 섹션에 있습니다. 한 두개의 포스트에서 상카-라의 모든 측면을 논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포스트들을 반드시 (모두) 읽고 상카-라를 완전히 이해해 보세요. 그것은 빠띳짜 사뭅빠-다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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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새로운 ‘도표로 포스트들을 검토하는 시리즈’의 모든 포스트들은 ‘홈’ 섹션의 ‘도표로 본 불교(Buddhism – In Charts)’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