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빠띳짜 사뭅빠-다에서 빠알리 핵심어의 왜곡
원문: Paṭicca Samuppāda 섹션의 ‘Distortion of Pāli Keywords in Paṭicca Samuppāda’ 포스트
- 2021년 11월 29일 작성; 2022년 10월 16일 개정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서 빠알리 핵심어(키워드)에 대한 왜곡은 현재 영어 번역에서 아주 흔합니다. 필자는 그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 두 개의 매우 중요한 숫따(경)를 분석해보겠습니다.
우다-나에 있는 처음 두 개의 숫따
1. 우다-나(Udāna)에 있는 숫따(sutta, 경)들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의 ‘기쁨이 가득한 말씀’입니다. 우다나(Udāna)의 처음 두 경전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것들은 붓다께서 깨달음의 밤 동안에 어떻게 아눌로마(anuloma)와 빠띨로마(paṭiloma)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이해하셨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두 숫따에 대한 영어 번역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다음 구절은 첫 번째 숫따에 대한 [영어 번역] 인용문입니다. 해당 구절의 빠알리 버전은 ‘참고자료 1’에 있습니다.
“[깨달음의] 밤의 첫째 부분에서 붓다께서는 의존적 발생(dependent origination)에 대해 순(일어남)방향으로 숙고하셨습니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남으로 인해 저것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무지(ignorance)는 선택(choices)의 조건이다. 선택은 의식(consciousness)의 조건이다. 의식은 이름과 형태(name and form)의 조건이다. 이름과 형태는 6가지 감각 영역(six sense fields)의 조건이다. 6가지 감각 영역은 접촉(contact)의 조건이다. 접촉은 느낌(feeling)의 조건이다. 느낌은 갈망(desire)의 조건이다. 갈망은 움켜잡음(grasping)의 조건이다. 움켜잡음은 지속 존재(continued existence)의 조건이다. 지속 존재는 재탄생(rebirth)의 조건이다. 재탄생은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참함, 절망이 있게 되는 조건이다. 그것이 이 모든 괴로움/고통의 덩어리가 발생하는 방법/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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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영어 번역은 ‘Upon Awakening (1st)’에 있습니다. 두 번째 번역은 ‘The First Discourse about the Awakening Tree’에 있으며, [첫 번째 번역과] 거의 같습니다.
2. 다음 구절은 두 번째 숫따에 대한 [영어 번역] 인용문입니다. 해당 구절의 빠알리 버전은 ‘참고자료 2’에 있습니다.
“[깨달음의] 밤의 둘째 부분에서 붓다께서는 의존적 발생(dependent origination)에 대해 역(그침)방향으로 숙고하셨습니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그침으로 인해 저것이 그친다. 그것은 바로, 무지(ignorance)가 그치면, 선택(choices)이 그친다. 선택이 그치면, 의식(consciousness)이 그친다. 의식이 그치면, 이름과 형태(name and form)가 그친다. 이름과 형태가 그치면, 6가지 감각 영역(six sense fields)이 그친다. 6가지 감각 영역이 그치면, 접촉(contact)이 그친다. 접촉이 그치면, 느낌(feeling)이 그친다. 느낌이 그치면, 갈망(desire)이 그친다. 갈망이 그치면, 움켜잡음(grasping)이 그친다. 움켜잡음이 그치면, 지속 존재(continued existence)가 그친다. 지속 존재가 그치면, 재탄생(rebirth)이 그친다. 재탄생이 그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참함, 절망이 그친다. 그것이 이 모든 괴로움/고통의 덩어리가 그치는 방법/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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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영어 번역은 ‘Upon Awakening (2nd)’에 있습니다. 두 번째 번역은 ‘The Second Discourse about the Awakening Tree’에 있으며, [첫 번째 번역과] 거의 같습니다.
두 숫따에 대한 개관
3. 그 두 개의 숫따(sutta, 경)는 붓다께서 깨달으셨을 때 발견하신 핵심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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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숫따는 미래의 고통이 어떻게 미래 재탄생을 통해 일어나는지를 묘사합니다. 그 모든 것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 단계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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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숫따는 마음에서 무지를 제거하면 미래 재탄생을 막는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4. 두 번째 숫따에 대한 두 번역은 모두 명백히 잘못되었습니다. 붓다께서는 그날 밤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 마음은 모든 무지(avijjā, 아윗자-)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것은 위 #2의 번역에 명시된 것과 같이 부처님에게는 그 모든 이어지는 단계가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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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렇다면, 붓다께서는 깨달음(붓다후드, Buddhahood)을 얻으신 순간부터 어떤 상카라도 생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웨다나-(vedanā)와 산냐-(saññā)는 모든 유형의 상카-라(saṅkhāra)에 있습니다. 그것은 붓다께서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거나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고 식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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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그대로 낱말별로 대응시켜 번역한 것은 두 번째 숫따(경)의 모든 단계에 대해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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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계들의 그침은 마음에 아윗자-(avijjā, 무지)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모든 아라한에게도 유효합니다!
토론 포럼에서 행해지는 정신나간 토론
5. 담마 휘일(Dhamma Wheel) 토론 포럼에 최근 “Do Arhats experience contact with their sixfold sense media? What about vedanā?” 토론이 있습니다. 그런 번역이 초래한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참가자들은 #2에 있는 두 번째 숫따에 대한 위 번역에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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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에 있는 그 번역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윗자-(avijjā, 무지)가 없으면(그치면), 선택(상카-라, saṅkhāra), 의식, 이름과 형태, 6가지 감각 영역, (감각 영역으로) 접촉, 느낌, 갈망, 움켜잡음(우빠-다-나, upādāna), 지속 존재(바와, bhava), 재탄생, 그리고 모든 괴로움/고통의 덩어리가 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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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모두는 부처님과 아라한들에게는 아윗자-(avijjā)(사성제에 대한 무지)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데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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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위 #2의 번역에 따르면, 그분들은 더 이상 어떤 상카-라(saṅkhāra)도 생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6가지 감각 기능을 경험하지 않으며(즉, 보거나, 듣거나, 맛보거나, 냄새맡거나, 만지거나, 생각하지 않음), 아무 것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이 본질적으로는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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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반대로, 붓다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에 45년 동안 사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여섯 가지 감각 기능을 모두 경험하시고, 그것들을 최적으로 사용하시며, 최고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붓다께서는 원하시는 만큼 과거의 어떤 것도 기억해 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또한 육체적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를 포함하여 모든 유형의 웨다나-(vedanā)를 느끼셨습니다.(붓다께서는 허리 문제가 있었으며, 데와닷따에 의해 부상을 당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6. 그렇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두 번째 숫따(경)가 잘못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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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숫따(sutta)는 모두 완벽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번역자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 - 또는 붓다 담마(Buddha Dhamm)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빠알리 숫따들을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할 때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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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반복해서 강조했듯이, 각 빠알리 낱말(특히 깊은/심오한 숫따들에 있는 낱말)들은 논의된 문제의 맥락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어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접합니다. ‘park’라는 낱말은 “She will park the car so we can walk in the park.”과 같이, 동일한 문장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것[‘주차하다’와 ‘공원’]을 의미합니다.
숫따 해석 ㅡ 웃데-사, 닛데-사, 빠띠닛데-사
7.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단계(그리고 그 반대의 단계, 즉
‘빠띨로마 빠띳짜 사뭅빠-다’의 단계)는 ‘발화 발언(웃데-사, uddēsa)’ 형식입니다. 그것은 11단계로 열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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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단계들은 닛데-사(niddēsa, 간단한 설명) 또는 빠띠닛데-사(paṭiniddēsa, 자세한 설명)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숫따 해석 ㅡ 웃데-사, 닛데-사, 빠띠닛데-사’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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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삐따까(Tipiṭaka, 삼장)에는 그와 같은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또 다른 것으로 “예 담마- 헤뚭빠바와-, 떼상 헤-뚱 따타-가또 아-하; 떼산짜 요 니로-도-, 에왕와-디- 마하-사마노-.(Ye dhammā hetuppabhavā, Tesaṃ hētuṃ tathāgato āha; Tesañca yo nirōdhō, Evaṃvādī mahāsamaṇō.)”이 있습니다. 우빠띳사(Upatissa, 빅쿠가 되기 전의 사리뿟따 존자)는 ‘웃데-사(uddēsa) 버전’을 듣는 것만으로도 소따빤나(Sotapanna)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그는 부처님의 수제자로서 부처님 다음으로 예리한(지혜로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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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시대에 다른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닛데-사(niddēsa) 버전이 그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8.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구절은 자세히 설명되어야 합니다. 즉, 빠띠닛데-사(paṭiniddēsa) 버전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현재 영어 번역은 어떤 설명도 없이 그 ‘웃데-사(uddēsa) 버전’을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word-by-word translation)합니다. 위 #2에 있는 두 번째 숫따(경)의 번역에서 보여 주듯이, 그것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다음 도표는 필자가 강조하고 있는 문제를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첫 번째 세로줄은 띠삐따까(Tipitaka)에 있는 숫따의 웃데사(uddesa) 버전을 보여줍니다. 그 웃데사 버전에 대해 숫따 센트럴(Sutta Central) 사이트의 낱말별 번역은 두 번째 세로줄에 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PDF 다운로드 파일: Paṭicca Samuppāda Figure
빠띳짜 사뭅빠-다의 일부 단계에 대한 닛데-사 및 빠띠닛데-사 버전
8-1. 필자는 많은 포스트에서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11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단 하나의 포스트로는 단 하나의 용어를 [모두/완전히] 논의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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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 단계에서 상카-라(saṅkhāra)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를 의미합니다. ‘빠띳짜사뭅빠-다 위방가(Paṭiccasamuppāda Vibhaṅga)는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 단계를 “Tattha katame avijjā paccayā saṅkhārā? Puññābhisaṅkhāro, apuññābhisaṅkhāro, āneñjābhisaṅkhāro.”로 설명합니다. 번역: “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뿐냐-비상카-라, 아뿐냐-비상카-라, 아-넨자-비상카-라를 의미한다.” 자세한 내용은 ‘상카-라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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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를 기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는 짝쿠 윈냐-나(cakkhu viññāna), 소따 윈냐-나(sota viññāna)등과는 다릅니다. 후자는 6가지 감각 영역[과 관련된 것]이며, 그것은 위빠-까 윈냐-나(vipāka viññān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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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아라한은 (위 #2의 번역과는 달리) 6가지 감각 영역은 그대로 있지만, 깜마 윈냐-나(kamma viññāna)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윈냐-나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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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냐-나 빳짜야- 나-마루-빠(viññāṇa paccayā nāmarūpa)’ 단계에서, 나-마루-빠(nāmarūpa는 설명하기가 좀 더 어렵습니다. ‘깜마 윈냐-나와 나-마루-빠 빠리쩨-다 냐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 모든 용어들을 다시 다룰 수도 있지만, 우리가 개관하고 있는 것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9. 다음 단계에서, ‘살라-야따나(salāyatana)’는 ‘6가지 감각 영역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각 영역들(인드리야, indriya)이 아-야따나(āyatana)로 사용되는 때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아라한은 ‘짝쿠 인드리야(cakkhu indriya)’를 가집니다. 즉, 아라한은 다른 사람들과 꼭 같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눈을 즐거움을 추구하는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짝쿠 아-야따나(cakkhu āyatana, cakkhāyatana)’가 되지는 않습니다. ‘감각 기능이 어떻게 내부 아-야따나가 되는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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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내용은 다음 단계인 ‘살라-야따나 빳짜야- 팟소(saḷāyatana paccayā phasso)’를 보면 명확해집니다. 여기서, ‘팟사(phassa)’는 ‘삼팟사(samphassa)’를 의미합니다. 짝쿠(cakkhu)와 루빠(rupa) 사이의 접촉은 ‘팟사(phassa)’며, 그것은 ‘보는 것’, 즉 ‘짝쿠 윈냐-나(cakkhu viññāna)’로 이어집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드리야는 팟사를 일으키고 아-야따나는 삼팟사를 일으킨다’ 포스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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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종류의 ‘팟사(phassa)’ (삼팟사, samphassa)는 ‘보는 것’, 즉 ‘짝쿠 윈냐-나(cakkhu viññāna)’ 직후에 작용합니다. 그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삼팟사(samphassa)’는 ‘로바(lobha), 도사(dosa), 모하(moha) (아누사야/anusaya라고 하는 마음 속의 오염/번뇌)가 있는 마음의 접촉’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 시각 대상에 들러붙을 때만 일어납니다. 그런 ‘삼팟사(samphassa)’는 그 다음에 ‘삼팟사ㅡ자-ㅡ웨다나- (samphassa-jā-vedanā)’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오염된 마음이 만든 웨다나-(vedanā)의 한 유형입니다. 그러므로, ‘팟사 빳짜야- 웨다나-(phassa paccayā vedanā)’의 닛데-사(niddēsa) 버전은 ‘삼팟사 빳짜야- 삼팟사ㅡ자-ㅡ웨다나- (samphassa paccayā samphassa-jā-vedan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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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다나- 빳짜야- 땅하-(vedanā paccayā taṇhā)’ 단계에서 땅하-(taṇhā)로 이어지는 것은 ‘삼팟사ㅡ자-ㅡ웨다나- (samphassa-jā-vedan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웨다나-(vedanā)가 땅하-(taṇhā)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땅하-(taṇhā)로 이어지는 것은 오직 ‘삼팟사ㅡ자-ㅡ웨다나- (samphassa-jā-vedanā)’뿐입니다.
두 번째 숫따에 대한 올바른 설명
10. 이제, 두 번째 숫따의 참된 의미에 대해 적어도 그 개념을 이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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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는 아라한은 (다양한 정도로 로바, 도사, 모하를 수반하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생각하고, 말하고, 신체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마노(mano), 와찌(vaci), 까-야(kāya) 상카-라(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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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는 아라한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보고, 듣는 등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6가지 감각 기능을 모두 가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즉, 그것들은 ‘아-야따나(āyatana)’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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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감각 사건에는 웨다나- 쩨따시까(vedanā cetasika)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라한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삼팟사ㅡ자-ㅡ웨다나-(samphassa-jā-vedanā)’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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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땅하-(taṇhā)가 없기 때문에 나머지 단계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즉, 우빠-다-나(upādāna), 바와(bhava), 자-띠(jāti)(미래 재탄생)가 없습니다.
11. 모든 재탄생(jāti, 자-띠)은 #1에 언급된 바와 같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참함, 절망’으로 이어집니다. 아라한은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모든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육체가 죽을 때 아라한이 도달되는 ‘빠리닙바-나(parinibbāna)’(즉 ‘완전한 닙바-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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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길(도)을 시작할 때에 ‘재탄생을 끝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면, 곧바로 낙담할 것입니다. 먼저,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야 합니다. 첫 번째 목표는 소따빤나(Sotapanna) 단계이어야 하고, 그때에도 먼저 기본 개념을 배워야 합니다. ‘불자는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인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그렇지만, 붓다께서 보여주신 ‘큰 그림’(그리고 닙바-나라는 궁극 목표)을 마음에 두는 것은 좋은 생각입니다.
요약
12. 우리는 두 가지 매우 중요한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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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는 붓다 담마(Buddha Dhamma)입니다. 단순히 11 단계를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각 단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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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그 의미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빠알리 구절을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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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불교 토론 포럼에서 토론 단계를 거치며 여러 숫따에 있는 참된 의미/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쓰는지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의 번역이 잘못되었고 명백한 모순이 있기 때문에 문제에 봉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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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어리석게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는 과정’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단지 Dhamma Wheel(담마 휘일) 사이트에서 지난 포스트들을 한번 읽어보세요. 많은 토픽(주제)들이 동일한 잘못된 번역을 인용하면서, 반복적으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번역들은 번역자가 일부 숫따들의 문맥에서 키워드(핵심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일한 사람에 의한 것도) 다른 번역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많은 낱말들은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윈냐-나(viññāna)’는 모든 곳에서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최근 포스트인, ‘담마 ㅡ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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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번역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참되고 순수한 붓다 담마를 배우고, 고도로 응축된 숫따들에 대해 무의미한 번역을 양산하는 것을 계속하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참고자료
1. 빠타마보디 숫따( ‘Paṭhamabodhi Sutta (Ud 1.1)’ )에서 관련된 구절:
“Atha kho bhagavā tassa sattāhassa accayena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ahitvā rattiyā paṭhamaṁ yāmaṁ paṭiccasamuppādaṁ anulomaṁ sādhukaṁ manasākāsi:
Iti imasmiṁ sati idaṁ hoti, imassuppādā idaṁ uppajjati, yadidaṁ—avijjā 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 paccayā viññāṇaṁ, viññāṇa paccayā nāmarūpaṁ, nāmarūpa paccayā saḷāyatanaṁ, saḷāyatana paccayā phasso, phassa paccayā vedanā, vedanā paccayā taṇhā, taṇhā paccayā upādānaṁ, upādāna paccayā bhavo, bhava paccayā jāti, jāti paccayā jarāmaraṇaṁ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ī”ti.”
2.두띠야보디 숫따( ‘Dutiyabodhi Sutta (Ud 1.2)’ )에서 관련된 구절:
““tha kho bhagavā tassa sattāhassa accayena tamhā samādhimhā vuṭṭhahitvā rattiyā majjhimaṁ yāmaṁ paṭiccasamuppādaṁ paṭilomaṁ sādhukaṁ manasākāsi:
Iti imasmiṁ asati idaṁ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ṁ nirujjhati, yadidaṁ—avijjā 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 nirodhā viññāṇa nirodho, viññāṇa nirodhā nāmarūpa nirodho, nāmarūpa nirodhā saḷāyatana nirodho, saḷāyatana nirodhā phassa nirodho, phassa nirodhā vedanā nirodho, vedanā nirodhā taṇhā nirodho, taṇhā nirodhā upādāna nirodho, upādāna nirodhā bhava nirodho, bhava nirodhā jāti nirodho, jāti nirodhā jarāmaraṇaṁ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