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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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기능이 어떻게 ‘내부 아-야따나’가 되는가?

 

원문: Dhamma and Science 섹션의 ‘How Do Sense Faculties Become Internal Āyatana?’ 포스트

- 2019년 9월 8일 작성; 2022년 10월 13일 개정

 

소개

 

1. 감각 기능은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일상적인 용법에서 우리는 감각 기능을 눈, 귀, 코, 혀 및 몸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 * 그러나,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서는 감각 기능의 사용법에 따라 두 가지 다른 빠알리 낱말이 있습니다.

  • * 보통 사람의 감각 기능은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입니다. 그것들로, 일반인들은 외부 세계를 경험하고 그것들에 들러붙습니다.

  • * 그러면 그 외부 루-빠-(external rūpā)는 ‘외부 아-야따나(external āyatana)’ (예를 들어, ‘내 집’, ‘내 친구’ 등)가 됩니다. ‘아-야따나 사이의 접촉이 위빠-까 윈냐-나로 이어진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그러므로, 외부 아-야따나(external āyatana)는 그 사람이 들러붙는 외부 루-빠-(external rūpā)입니다. 아라한에게 외부 루빠-(external rupā)는 결코 외부 아-야따나(external āyatana)가 되지 않는데, 그것들은 단지 외부 루빠-(external rupā)입니다.

 

2. 아라한(Arahant, 아라한뜨)은 마음에서 탐함과 미워함과 미혹함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아라한의 감각 기능은 인드리야(indriya)입니다. 그 감각 기능으로, 아라한은 아무런 들러붙음이 없이, 집, 사람 등과 같은 ‘외부 루-빠-(external rūpā)’를 경험합니다. 그 집은 자신이 얼마 전에 살았던 우아한 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단지 집입니다. 그 사람은 그때에는 ‘친밀한 친구’였을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저 또 다른 한 사람일 뿐입니다. 물론, 아라한은 자신이 어렸을 때 살았던 집과 자신의 친구였던 사람을 인식할 것입니다.

 

  • * 간단히 말해서, 감각 기능은 ‘들러붙음(attachment)’이 없다면 인드리야(indriya)입니다. 사람이 그것에 끌리거나 그것에 반발되면 그것은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가 됩니다. 같은 식으로, 외부 루-빠(external rūpa)도 그것에 들러붙게 되면 외부 아-야따나(external āyatana)가 됩니다.

  • * ‘들러붙음’을 뜻하는 빠알리 낱말은 ‘땅하-(taṇhā)’입니다. 탐함, 미워함, 또는 미혹함을 통해 들러붙음(attachment)이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단 ‘들러붙음’이 일어나면, 그 사람은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합니다(그것은 ‘상카-라’를 생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래를 참조하세요). 또한, ‘땅하-, 탐함과 미워함과 미혹함을 통해 어떻게 들러붙는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인드리야(감각 기능)가 어떻게 ‘내부 아-야따나’가 되는가?

 

3. 먼저,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인드리야(indriya)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합시다.

 

  • *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5가지만이 아니라 6가지의 감각 기능이 있습니다. 즉, 눈(cakkhu, 짝쿠), 귀(sōta, 소-따), 코(ghāna, 가-나), 혀(jivhā, 지와-), 몸(kāya, 까-야), 및 마음(manō, 마노-)입니다.

  • * 우리의 초기 감각 입력(보고, 듣는 것 등)은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때문입니다. 초기 감각 접촉의 순간에,  그런 감각 기능은 인드리야(indriya)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길에서 매력적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단지 그 사람을 짝쿠 인드리야(cakkhu indriya)로 봅니다. 이것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과 같은데, 그 사진은 마음에 등록됩니다.

 

4. 그러나, 그 초기 감각 경험에 기반하여, 우리는 그 감각 경험을 반복해서 즐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인드리야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인드리야(indriya)는 아-야따나(āyatana)가 됩니다. 위의 예에서, 그 매력적인 사람에게 들러붙게 되어 그 사람을 계속 바라본다면, 우리는 눈을 짝까-야따나(cakkāyatana)(‘cakkhu āyatana’는 ‘cakkāyatana’로 운이 맞춰짐)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 * 그러므로, 초기 감각 대상은 인드리야(indriya)에 의해 포착됩니다. 그러나 그 감각 입력을 받은 후에 즉시, 우리는 그 감각 기능을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로 사용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대상에] 들러붙게 되면(‘땅하-’를 형성하면) 일어납니다. 위 #2를 참조하세요.

  • * 시각과 관련된 구성 부분(눈, 신경, 뇌 회로, 등, 그리고 또한 짝쿠 빠사-다 루빠)은 짝쿠 인드리야의 부분입니다. 보여진 것에 들러붙을 때에만 그것은 짝쿠아-야따나(cakkhuāyatana), 또는 짝카-야따나(cakkāyatana)가 됩니다. 따라서, 아라한은 짝쿠 인드리야를 가지지만, 짝카-야따나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 아-야따나(āyatana)에 상응하는 영어 낱말이 없으므로, 앞으로 인드리야(indriya)와 아-야따나(āyatana)를 계속 쓰도록 하겠습니다.

 

5. 두 사람이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보통 사람(X)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라한(Arahant, 아라한뜨)입니다. 여기에서 감각 기능은 맛(jivhā, 지와-)입니다.

 

  • * 두 사람 모두 처음에 맛볼 때는 같은 종류의 지와- 윈냐-나(jivhā viññāna)를 생성합니다. 그것은 단지 케이크의 맛입니다. 혀와 뇌에서 감각 요소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두 사람 모두 그 케이크가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좋은 맛’은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입니다. (그런데, 케이크 한 조각을 맛보는 것과 같은 ‘작은 위빠-까’를 포함하여 열매를 맺기 위해 기다리는 무수한 ‘깜마 비-자_kamma bīja’가 있습니다.)

  • * 그 차이는 케이크를 맛본 직후에 분명하게 됩니다. 아라한(Arahant)은 비록 ‘좋은 맛’을 느꼈을지라도 그 맛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감각 경험이었고, 따라서 아라한(Arahant)은 그 감각 기능을 인드리야(indriya)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 * 반면에, X는 그 맛있는 케이크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X는 [그 케이크를] 더 달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X는 그 감각 기능을 아-야따나(āyatana)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동으로 새로운 깜마(kamma)를 쌓을 것입니다.

 

하나의 인드리야가 어떻게 많은 아-야따나(살라-야따나)로 이어질 수 있는가

 

5. 많은 경우에, 하나의 인드리야(indriya)로 인해 감각 사건을 경험할 때, 우리는 인드리야(indriya)의 일부 또는 전부를 아-야따나(āyatana)로 사용하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인드리야의 세트가 살라-야따나(salāyatana)가 됩니다.

 

  • * 위의 맛있는 케이크(두 사람에게 모두 ‘깜마 위빠-까’임)의 예에서, 두 사람은 ‘맛있는 케이크’를 경험합니다. 아라한은 그 맛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지만, 보통 사람(여성 X라 가정)에게는 [그 경험이] 단지 시작일지 모릅니다. 그녀는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한 조각 더 달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 * 상황을 세밀히 분석해 보겠습니다. 아라한은 배가 고플 경우, 두 번째 조각을 받아 들일지도 모릅니다. 그 받아들임은 탐하는 생각 때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지와- 인드리야(혀, 신경, 등, 그리고 ‘지와- 빠사-다_jivhā pasāda’)는 아-야따나(āyatana)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야따나가 일어나는 것은 정신적 구축(형성)입니다.

  • * 그녀(X)가 배가 고프지 않아도 한 조각을 더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 맛에 대한 갈망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혀는 아-야따나(āyatana)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배고프면) 그 요청은 배고픔과 갈망 모두에 바탕을 두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녀의 혀(더 정확하게는 ‘지와- 빠사-다_jivhā pasāda’)는 여전히 아-야따나(āyatana)이지만 그 차이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7. X의 지와- 빠사-다 루-빠-(jivhā pasāda rūpā)(맛보기 위한 ‘내부 인드리야’)가 아-야따나(āyatana)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그녀가 추가 행동을 하면 더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 * 그녀는 냄새를 맡고 ‘냄새도 좋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맛이 얼마나 좋은지 계속해서 말하고 요리법을 묻거나 어디에서 사야할 지 물을지도 모릅니다.

  • * 이제 그녀는 감각 기능들을 아-야따나(āyatana)로 사용합니다. (냄새맡기 위한) 가나 빠사-다 루-빠-(Ghana pasāda rūpā)는 이제 가-나-야따나(ghānāyatana, ghāna + āyatana)가 되었습니다. 케이크를 먹는 것은 배고픔을 해소하는 것에 한하지 않는데, 많은 감각 기능들은 즐기기 위해 사용됩니다. ‘인드리야에서 아-야따나로’는 정신적 전환입니다. 

  • * 그녀는 그 케이크를 다시 맛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마나, mana)은 마나-야따나(manāyatana, mana + āyatana)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요리법을 적기 시작하면, 몸(까-야, kāya)도 까-야-야따나(kāyāyatana, kāya + āyatana)의 역할을 하면서 돕고 있습니다.

  • * 그래서, 둘 이상의 아-야따나(āyatana)가 참여할 때, 아-야따나(āyatana)의 세트(‘살라-야따나_salāyatana’라고 함)가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감각 입력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경우에는 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 것입니다.

 

인드리야는 상카-라와 함께 아-야따나가 된다

 

8(7). 인드리야(indriya)가 아-야따나(āyatana)가 되었는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감각 입력이나 경험에 대해 의식적인 생각을 생성하기 시작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 * 감각 입력에 대한 관심은 탐함, 미워함 또는 미혹함을 통해 그것에 들러붙음으로 이어집니다.

  • * 예를 들어, 좋은 향수 냄새는 그것을 구입하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적을 보면 화나는 생각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스럽게 되어 잘못된 결정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 * 그런 의식적인 생각들은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입니다.

  • *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는 ‘자신에게 말하고’, 어쩌면 소리내어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탐하는/성내는/미혹한 생각이 생성되고, 그 생각이 내뱉는 말(거짓말, 잡담 등)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는 때리기, 훔치기, 죽이기 등과 같은 신체적 행동을 포함합니다. 이때에는 몸을 움직이는 외에도 보고 들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아-야따나(āyatana)를 사용할 것입니다.

 

9(8).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감각 기능을 인드리야(indriya)로 사용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등을 하지만 그 대부분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갈망하는 어떤 것을 경험할 때, 그 다음 우리는 감각 기능을 아-야따나(āyatana)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 * 아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은 우리가 감각 기능을 아-야따나(āyatana)로 사용할 때만 작동합니다.

  • * 그런 상카-라(saṅkhāra)는 아라한(Arahant)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상카-라(saṅkhāra)는 아윗자-(avijjā)로 인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들[아비상카-라]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를 통해 일어납니다.

  • * 아라한(Arahant)은 항상 자신의 감각 기능을 인드리야(indriya)로 사용합니다. 아라한은 평범한 사람과 꼭 같이 보고 듣지만, 아무 것에도 ‘들러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은 아라한(Arahant)에게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비상카-라는 상카-라의 더 강한 버전이다

 

10(9). 우리가 아-야따나(āyatana)로 행하는 ‘추가적 활동’ 중 일부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일 수 있습니다. 케이크를 단지 먹는 것만으로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까-마 구나, 까-마, 까-마 라-가, 까-막찬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상카-라(saṅkhāra)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의 뚜렷한 차이는 그런 의식적인 생각 (따라서 말과 행동)이 부도덕하게 될 때 분명합니다.

  • * 사람에게 화내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둘 다 ‘와찌 (아비)상카-라’로 행해진 와찌 깜마(vaci kamma)입니다.

  • * 어떤 것을 훔치거나 누군가를 때리는 것은 ‘까-야 (아비)상카-라’로 행해진 까-야 깜마(kāya kamma)입니다.

  • * 그러므로, 부도덕한 생각, 말, 행동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아뿐냐-비상카-라(apunnābhisaṅkhāra, apuñña + abhi + saṅkhāra), 즉 부도덕하고 강한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11(10). 우리는 젊은 사람(Z)이 나쁜 친구들과 교제함에 따라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통찰력을 좀 얻을 수 있습니다. 어릴 때, Z는 술병을 볼지 모르나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도 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보는 대상’일 뿐이고, Z는 자신의 눈(더 정확하게는 ‘짝쿠 빠사-다 루-빠-_cakkhu pasāda rūpā’)을 짝쿠 인드리야(cakkhu indriya)로만 사용할 것입니다.

 

  • * 그러나 Z에게는 나쁜 친구들이 몇 명 있었고, 그들은 그에게 술을 마시기 시작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는 이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제 술병을 본다면, 즉시 술을 마실 생각을 합니다. 물론 파티에 가면 술을 마실 것입니다. 그가 집에 있고 술병이 자신의 아버지의 것이라면, 그 술병을 훔칠지도 모릅니다. 혼자 여행하다가 술집을 보면, 들어가서 술을 마실 수도 있습니다.

  • * 그것은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는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누군가와 말다툼을 벌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싸움으로 이어지고 그가 그 사람을 죽였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는 사형 선고를 받거나 오랫동안 감옥에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훨씬 더 나쁜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아빠-야(apāya, 악처)에 태어날 것입니다.

  • * 그 모든 것의 배후에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들은 강한 상카-라(saṅkhāra)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그가 누군가를 죽이면 그것은 아뿐냐-비상카-라(apunnābhisaṅkhāra)로 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아빠-야(apāya, 악처)에 태어나기 적합하게 할 것입니다.

 

12(11). 또한 뿐냐-비상카-라(punnābhisaṅkhāra, puñña + abhi + saṅkhāra), 즉 강한 도덕적 상카-라(saṅkhāra)도 있습니다.

 

  • * 예를 들어,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자선 단체에 기부하는 것은 강한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로 행해진 까-야 깜마(kāya kamma)입니다. 그것들은 둘 다 ‘뿐냐-비상카-라(punnābhisaṅkhāra)’입니다.

  • * 뿐냐-비상카-라(punnābhisaṅkhāra)로 행해진 그런 강한 뿐냐 깜마(puñña kamma)는 (인간과 그 상위 영역에) 좋은 재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외부 루-빠가 어떻게 외부 아-야따나로 되는가?

 

13(12). 인드리야(indriya)가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로 되는 순간, 해당하는 외부 루-빠-(external rūpā)는 외부 아-야따나(external āyatana)로 됩니다.

 

  • * 다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을 봅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하면, 눈은 인드리야(indriya)로만 작용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더 가까이 다가오면, 그 사람을 친구 중 한명으로 인식합니다. 그 순간, 짝쿠 인드리야(cakkhu indriya)는 짝까-야따나(cakkāyatana)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 외부 루-빠-(external rūpā)인 ‘사람’은 이제 ‘친구’가 되었습니다.

  • *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 얼마 후에 그 친구와 말다툼을 하게 되고 그것이 악화되어 그가 적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이제 길에서 그를 보면, 그를 적으로 인식할 것입니다. 그를 볼 때, 짝쿠 인드리야(cakkhu indriya)는 다시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가 될 것이고, 자신이 보는 [대상의] 몸은 외부 아-야따나(external kāyatana)가 될 것입니다.

  • * 그러나 그 두 가지 외부 아-야따나(external āyatana)는 매우 다릅니다. 비록 그 외부 루-빠-(external rūpā)(다른 사람의 몸)가 동일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경우에는 친구를 보았고 다른 경우에는 적을 보았습니다.

 

14(13).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인드리야(indriya)가 어떻게 아-야따나(āyatana)가 되는지를 볼 수 있는 예를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도로변에 차를 주차하고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돌아 와서, 누군가 그의 차로 부딪쳐서 긁힌 자국이 생긴 것을 볼 때, 당연히 화나게 됩니다.

 

  • * 얼마 후, 그 차를 팔았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 다음 며칠 후, 그 차가 사고로 부서진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하지만, 이제 동일한 차가 부서진 것에 대해 화가 나지 않습니다. 심하게 파손된 차를 볼 때, 짝쿠 인드리야(cakkhu indriya)는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외부 루-빠(rūpa)(차)는 외부 아-야따나(external āyatana)가 되지 않습니다.

  • * 유일한 차이점은 그 차를 판 순간, 그 차에 대한 들러붙음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차’가 아닙니다. 자신이 그 차의 ‘소유권’을 포기한 순간, 그것은 바로 또 다른 차가 되었습니다.

 

인드리야가 아-야따나로 되지 않게 하는 방법

 

15(14). 그 마지막 예는 사람이 어떻게 아라한뜨후드(Arahanthood, 아라한과)에서 고통받는 것을 끝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더 이상 들러붙지 않을 때, 사람의 마음은 그 무엇에도 동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언젠가 자신의 몸이 죽을 것임을 아는 것을 포함합니다.

 

  • * 그러나, 아라한뜨후드(Arahanthood, 아라한과)의 그런 마음 상태는 보통 사람으로는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람에서 아라한(Arahant)이 되는 것은 긴 과정입니다.

  • * 우리는 단계적으로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 것들’에 대한 그런 들러붙음은 억지로(강제로) 마음에서 제거될 수는 없습니다. 첫째 단계는 감각적 즐거움을 얻기 위해 부도덕한 일을 하는 것의 결실없음과 위험함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불자는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인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러나 처음에는 [31존재계에 대한] ‘큰 그림(big picture)’이나 ‘붓다 담마의 근본에 대한 개요를 얻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깜마(kamma)와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 그리고 재탄생 과정의 타당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버리는 데 필요합니다. 그런 근본 개념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는 성스런 팔정도를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 * ‘생명의 기원(Origin of Life)’에 대한 이 시리즈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리즈의 초기 포스트에서 요약한) 모든 기존 견해를 사람들은 평가해야 합니다. 불교의 견해는 더욱 복잡하고 그것을 완료하려면 여러 개의 포스트가 더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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