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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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마나(감각 입력)는 결정적인 과정을 시작되게 한다

 

원문: Buddha Dhamma ㅡ Advanced 섹션의 ‘Ārammaṇa (Sensory Input) Initiates Critical Processes’ 포스트

 

아-람마나(Ārammaṇa)는 감각 입력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깜마를 생성하기 시작하고 빤쭈빠-다-낙칸다(다섯가지 집착 무더기)에 더합니다. 아라한 단계 아래의 어떤 누구도 빤짝칸다(다섯 무더기)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2024년 3월 12일 작성

 

뿌툿자나에게 있어서 아닛짜, 둑카, 아낫따

 

1. 모든 보통 인간(뿌툿자나)은 외부 세상 것들에 닛짜(nicca), 수카(sukha), 및 앗따(atta)라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특성이 있다고 하는 잘못된 견해(사견/딧티)와 타고난 잘못된 인식(산냐)를 지닙니다. 그것들을 각각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 및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그 사람과 결혼하거나 그 큰 집을 사거나 그 비싼 차를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 * 뿌툿자나(puthujjana)에게 있어서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및 아낫따(anatta)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물질적인 것들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 그 목표들을 성취하는 것에 성공할 때, 그들은 매우 기뻐하게 됩니다. 그런 소유물들을 즐기는 것을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라고 합니다.

  • *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매력을 잃는데, 사람들은 늙고 죽고, 사물들은 낡아지고 파괴되거나 손상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들은 불가피합니다. 그것이 아-디나와(ādinava), 즉 ‘까-마 앗사다’를 즐기는 것의 결함입니다.

 

2. 많은 사람들은 또 다른 측면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측면은 그런 ‘까-마 앗사-다’를 추구하는 중에 부도덕한 행위(아꾸살라 깜마)를 하는 것의 위험한 결과입니다.

 

  • * 아꾸살라 깜마(akusala kamma)는 축생(동물)이나 더 나쁜 유정체로 태어남을 포함하여 해로운 결과(위빠-까)로 이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위빠-까(vipāka)가 생의 나중에 또는 미래 태어남에서도 실현되기 때문에 이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 * 이 양 측면의 최종 결과는 결국 괴로움(고통)입니다. 

 

3. 대부분의 사람들은 #1과 #2의 한 측면 또는 양 측면을 모릅니다. 붓다께서는 물질적 이익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장기적으로) 항상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 * 그러나, 뿌툿자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입니다.

  • * 그들은 딧티 및 산냐- 위빨라-사(vipallāsa)를 제거함으로써 모든 괴로움/고통을 제거하는 보장된 길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는 왜 세상 것들에서 즐거움을 구하는가?

 

4. 뿌툿자나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질적 부’를 소유하려고 노력합니다. 두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인이 그것에 기여합니다. 

 

(i)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들’을 추구하는 것의 나쁜 결과(깜마 위빠-까)는 오랫 동안, 때로는 미래의 많은 재탄생에 걸쳐서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ii) 세상의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인식(산냐-)는 ‘우리 마음에 형성된’ 환영(왜곡된 산냐-)입니다.

 

  • * 위 (i)을 이해하고 딧티 위빨라-사를 제거함으로써 소따빤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띠빳타-나를 실천하여 사까다-가-미/아나-나-미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산냐- 위빨라-사를 제거함을 통해 (ii)도 이해해야 합니다.

  • * 더욱이, (i)과 (ii)를 이해하면 소따빤나에 이르는 것도 더 쉬워질 것입니다.

  • * ‘위빨라-사(딧티, 산냐-, 찟따)는 상카-라에 영향을 미친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붓다 담마 ㅡ 두 가지 (관련된) 페러다임의 변화

 

5. 모든 것(유정체와 무정체)는 보편 원리인 빠띳따 사뭅빠-다에 기반하여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 논리적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i) 세상의 어떤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인식(산냐-)은 환영이지만, 뿌툿자나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 잘못된 인식(왜곡된 산냐-)에 기반하여,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부도덕한 행위를 합니다.

 

(ii) 그런 부도덕한 행위는 탐함/들러붙음(라-가)과 화냄/증오(도사)로 오염된 마음으로 행해지고, 그 두 가지는 무지(모하/아윗자-)에 기반하여 일어납니다. 그런 아꾸살라 깜마는 현생 또는 내생 중의 미래에 언제든지 그 결과(깜마 위빠-까)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 * 위 두 가지 측면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깜마 위빠-까는 좋은/나쁜 결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내장된 왜곡된 산냐-’와 함께 재탄생으로 이어집니다. 하나의 보편 원리가 두 가지 요인을 모두 설명하는데, 세상은 ‘나쁜 기반’, 즉 빠띳짜 사뭅빠-다에서 작동합니다.

  • *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을 멈추면 두 가지 결과를 멈출 수 있고, 그래서 미래 괴로움/고통을 멈출 수 있습니다.

  • * 우리는 지난 몇 개월 내에서만 ‘왜곡된 산냐-’를 논의했습니다. 그 타임라인(timeline, 일정)은 ‘세 단계 실천’ 섹션의  ‘인식(산냐-) 이해를 통한 소따빤나 단계(Sotapanna Stage via Understanding Perception (Saññā))’ 서브섹션에 있습니다.

 

6. 그래서, 공부한 두 가지 주된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i) 뿌툿자나는 외부 대상이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고유한 ‘까-마 구나(kāma guṇa)’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들러붙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높은 기대를 가지고 그런 것을 더 많이 얻기를 바라는데, 그 기대가 윈냐-나(viññāna)입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그런 기대는 외부 대상이 그런 ‘마음을 즐겁게 하는’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기루를 쫓아가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셨습니다.

 

(ii) 그러나, (각 유정체에 내장된) ‘왜곡된 산냐-’는 그런 외부 것들이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산냐-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에 필수적입니다. Perception(인식)은 산냐-(saññā)에 대한 가장 가까운 영어 낱말입니다. ‘왜곡된 산냐’는 그 관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포하는데, 그것은 우리 정신에 구축되고 또한 우리 육체에 구축되어, 육체 기능이 서로 잘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때문에 이 ‘왜곡된 산냐-’를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 * 빠띳짜 사뭅빠-다는 양 측면(즉, 우리 몸이 어떻게 내장된 ‘왜곡된 산냐-’와 함께 생기고 그 ‘왜곡된 산냐’에 기반한 우리의 부도덕한 행위가 어떻게 미래 괴로움으로 이어지는지)을 설명합니다. 

 

대부분의 아꾸살라 깜마는 까-마 로까에서 행해진다 

 

7. 이전의 두 포스트, 즉 ‘루빠와 루빡칸다 ㅡ 외부 물체가 아님’ 및 ‘위빠리나-마 ㅡ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아꾸살라 깜마는 까-마 로까(욕계)에 있는 동안에 행해진다는 것을 논의했습니다.  따라서, (까-마 로까에 재탄생하는 것을 극복한) 아나-가-미(Anāgāmi)는 이 세상의 대부분의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 * 다음 도표는 그 이전 포스트에서 논의된 것을 업데이트한 것입니다. 그것은 까-마 로까의 깜마 생성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 깜마 생성은 두 단계, 즉 ‘뿌라-나 깜마’와 ‘나와 깜마’ 단계로 일어납니다.

 

원문 도표 다운로드/인쇄:Nibbāna and the Kāma Loka

 

감각 입력(아-람마나)이 마음을 활성 상태로 촉발시킨다

 

8. 감각 입력(아-람마나)이 마음을 활성 상태로 촉발시킵니다. ‘미래 괴로움(로까/둑카 사무다야)은 감각 입력(아-람마나)으로 시작된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까-마 로까(욕계)에서 인간의 마음은 까-마 다-뚜(kāma dhātu) 단계에서 시작합니다.

 

  • * 위 도표에서는 ‘맛 입력’을 예로 설명합니다. 초기 까-마 다-뚜(kāma dhātu) 단계에서, 그 감각 입력에 해당하는 ‘왜곡된 산냐-’가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즉 그것은 ‘맛 입력’에 대한 ‘라사 빠띠상웨다(rasa paṭisaṁvedī)’ 단계입니다. (아라한을 포함하여)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예를 들어, ‘설탕의 달콤함’을 맛봅니다.

  • * 그러나, 아라한의 마음(또는 아나-가-미의 마음까지도)은 다음 단계인 ‘라사 라-가 빠띠상웨디(rasa rāga paṭisaṁvedī)’ 단계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까-마 라-가 상요자나(kāma rāga saṁyojana)’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상요자나(saṁyojana)는 ‘산(san) + 요가(yoga)’(오염원으로 속박/결속됨) 또는 ‘산냐-(saññā) + 요가(yoga)’(‘왜곡된 산냐-’로 속박/결속됨)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빠알리 원어의 낱말은 ‘සඤ්ඤොජන’이며, ‘saññojana’로 명기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Saṁyojaniya Sutta (SN 35.109)’의 원 버전은 빠알리어로 ‘Samyojana Sutta (SN 35.109)’입니다.

 

9. 그러나 아나-가-미(Anāgāmi) 단계 아래의 모든 이들의 마음은 그 달콤함의 ‘왜곡된 산냐-’에 자동적으로 들러붙고 ‘까-마 바와(kāma bhava)’에 들어갑니다.

 

  • * 그러나, 거기에서 마음이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를 거쳐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의 ‘윈냐-나의 급속한 성장’에 들어갈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특정 순간의 마음 성향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로틱(성적) 영화를 본다면, 그 영화 속의 매력적인 사람을 보면 정욕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담마 개념을 숙고하고 있는 유사한 여성을 본다면 그 성적 흥분을 촉발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 * 주된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나-가-미(Anāgāmi) 단계 아래의 모든 이들은 자동적으로 ‘뿌라-나 깜마’ 단계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까-마 라-가 상요자나(kāma rāga saṁyojana)’가 남아 있는지에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에 들어가서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에서 ‘새로운 깜마’를 축적하는 것은 자동적이 아닌데, 그것이 위 도표에서 점선으로 그것을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감각 입력(아-람마나)은 빠띳짜 사뭅빠-다가 시작되게 한다

 

10. 동일한 개념을 아래 도표에서는 다르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도표를 공부하면서 #8에 있는 글을 꼭 읽어 보세요. 또한, ‘Upavāṇasandiṭṭhika Sutta (SN 35.70)’가 (여기서는 맛/미각 입력인 것에 비해) 시각 입력으로 논의된 ‘산냐- ㅡ 우리의 모든 생각은 왜곡된 산냐-와 함께 일어난다’ 포스트의 #9 및 #10과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원문 도표 다운로드/인쇄:Sequence of Kamma Generation – Kāma Loka

 

감각 입력(아-람마나)은 빤짜 우빠-다-나 칸다가 시작되게 한다

 

11. 위 도표의 주된 요점은 뿌툿자나(또는 소따빤나/사까다-가-미)의 마음은 오염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빤짝칸다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빤짜 우빠-다-낙칸다 상태(위 도표에서 ‘라사 라-가 빠띠상웨디’ 단계)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 * 우리는 마음이 감각 사건과 함께 활성화된다는 것을 압니다. ‘로까 숫따 ㅡ 세상의 기원과 그침’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 포스트의 #1에서, 우리는 시각 사건의 예, 즉 대상을 보는 것과 함께 ‘Loka Sutta (SN 12.44)’를 논의했습니다. 첫 단계는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 viññāṇaṁ.”입니다. 위 도표에서는, 동일한 단계가 미각 입력에 대해 일어나는데(숫따의 표식 3.3에서),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 viññāṇaṁ.”입니다. 그 단계는 위 도표의 처음 네 개의 박스로 묘사됩니다. 그렇습니다. 녹색으로 된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단계는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 viññāṇaṁ”내에서 일어납니다. 

  • * 위 도표의 이어지는 두 단계는 로까 숫따(SN 12.44)에 있는 그것, 즉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와 ‘phassa paccayā vedanā’와 같습니다. ‘phassa paccayā vedanā’는 ‘samphassa-jā-vedanā’를 의미한다는 것에 유의하세요.

  • * 그 모든 단계는 ‘뿌라-나 깜마’ 단계 중에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그것은 ‘아브야-까따 빠띳짜 사뭅빠-다(Avyākata Paṭicca Samuppāda)’와 같으며, 여기서 ‘아브야-까따(avyākata)’는 ‘강한 업에너지가 생성되지 않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까-마 라-가(kāma rāga)가 ‘라사 라-가 빠띠상웨디(rasa rāga paṭisaṁvedī)’와 함께 일어나므로(첫 도표를 참조), 마음은 ‘까-마 다-뚜(kāma dhātu)’ 단계를 넘어서 ‘까-마 바와(kāma bhava)’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아나-가-미 또는 아라한 단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와 깜마’ 단계는 ‘우빠-다-나’와 함께만

 

12. 다음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일어날 수 있거나 마음이 감각 입력에 관심이 없으면 뿌툿자나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땅하-(taṇhā)는 ‘결박’ 또는 ‘들러붙음’을 의미합니다. 감각 입력의 강도와 그 순간의 마음성향에 따라, 마음은 ‘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에 이르거나 이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 * 마음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감각 입력을 추구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각 입력에 스스로 들러붙었고 ‘그것을 더’ 원합니다. 그것이 ‘우빠-다-나(upādāna)’가 의미하는 바, 즉 ‘가깝게 끌어당김’입니다. 그것은 그 광경, 소리, 및 몸 접촉이 어떤 고유한 ‘까-마 구나(kāma guṇa)’를 지니고 있다는 잘못된 인식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 잘못된 인식은 ‘그것을 더’ 갖으려고 노력하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 * 그 때가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에서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와 함께 마노, 와찌, 까-야 상카-라(강한 깜마)를 생성하기 시작하는 때이며, 거기서 자와나 찟따와 함께 깜마 축적이 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그리고, 따라서 마음챙김으로 멈춰질 수 있음). 그것이 ‘깜마 생성 빠띳짜 사뭅빠-다’, 즉 ‘아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jāti paccayā jarā, marana, soka-paridēva-dukkha-dōmanassupāyasā sambhavan’ti” 까지 진행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 과정이 괴로움, 즉 ‘미래 괴로움을 가져오는 업 에너지 생성’으로 끝나는 방식입니다.

 

빠밧사라(순수한) 마음을 회복하기 

 

13. 위 (#7에 있는) 처음 도표는 까-마 로까(kāma loka)가 ‘괴로움 없는 순수한 (빠밧사라, Pabhassara) 마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 * 아래 도표는 왜 까-마 로까(kāma loka)가 ‘괴로움 없는 순수한 (빠밧사라, Pabhassara) 마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원문 도표 다운로드/인쇄: Defilements Covering a Pure Mind

 

지혜(빤냐-)로서만 오염원을 제거

 

14. 괴로움 없는 순수한 (빠밧사라, Pabhassara) 마음을 항상 덮고 있는 ‘견고한 오염원’의 3개 층이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그 견고한 오염원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하셨습니다. 가장 바깥 층은 3가지 상요자나, 1가지 우빠-다-나, 2가지 아누사야, 1가지 아-사와 등으로 라벨을 붙일 수 있습니다. 3가지 층 모두에 대한 매개변수에 대해서는 ‘4단계의 닙바-나에 대한 조건’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간단히 하기 위해서, 위 도표에서는 상요자나(saṁyojana)와 우빠-다-나(upādāna)만 나타냈습니다. 

 

  • * 첫째 층은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면 영구적으로 제거됩니다. 이 단계에는 ‘왜곡된 산냐-’를 이해하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들이 ‘까-마 구나(kāma guṇa)를 지니고 있지 않고, 물질적인 것들(사람과 비활성 물체)을 붙잡기 위해 아꾸살라 깜마를 하는 것은 미래의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 * 다른 2가지 층은 사띠빳타-나를 개발함으로써 아나-가-미 및 아라한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15. 또한 빠밧사라(pabhassara) 마음을 덮고 있는 모든 ‘3가지 층’을 제거하는 것은 지혜(빤냐-)를 개발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 * 그것을 물질적 흙층을 제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완전히 정신적인 과정입니다. 바히야 존자의 경우에는, 몇 분 내에 3가지 층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Bāhiya Sutta (Ud 1.10)’를 참조하세요. 많은 다른 사람들은 첫째 층을 제거하여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년 동안 고군분투합니다.

  • * 그 층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이 어떻게 오염되는지를 이해하면(즉, 빤냐-를 개발하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왜곡된 산냐-와 관계

 

16. 감각적 즐거움을 쫓아가는 것이 왜 해로운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으면 닙바-나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지혜로 볼’ 필요만 있습니다. 그 이해는 위 도표의 첫째 층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 후에, 마음은 ‘사악처로 가는 깜마(apāyagāmi kamma)를 지을 수가 없으며, 그런 행위를 의식적으로 멈출 필요가 없습니다.

 

  • * 그러나, 소따빤나는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는 경향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에 대한 딧티 위빨라-사(ditthi vipallāsa)가 제거되었지만,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는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가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산냐- 위빨라-사’는 ‘왜곡된 산냐-’에 속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 * 그 산냐- 위빨라-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띠빳타-나를 실천할 필요가 있으며, 뒤따라서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왜곡된 산냐-’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산냐- 위빨라-사를 제거하면, ‘까-마 라-가 상요자나(kāma rāga saṁyojana)’ 및 ‘까-마 우빠-다-나(kāma upādāna)’가 사라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 * 결정적인 점은 (고유한, 내장된 ‘왜곡된 산냐-’와 함께) 재탄생이 특정 가띠 유형과 함께 육성된 상카-라의 유형에 따라 일어나고, 그 결과적 재탄생이 동일한 가띠를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먹이를 주는, 끝없는 과정입니다. 까-마 로까(kāma loka)에서 벗어나 닙바-나 또는 ‘빠밧사라 마음’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려면, 그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첫째 도표를 참조). ‘물-라빠리야-야 숫따 ㅡ 모든 것의 뿌리’ 포스트의 #2를 참조하세요.

 

요약

 

17. 우리는 위에서 많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들과 그 관계를 논의했습니다. 이 ‘큰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 * (붓다 담마를 이해하지 못한) 보통 사람에게는, 고통/괴로움은 ‘감각적 즐거움을 즐길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을 이해하면(자-나또 빳사또, jānato passato),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는 것’은 고통/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 * 그것을 아는 가장 쉬운 방법이 첫째 도표에 있습니다. 감각 입력에 들러붙을 때마다, 뿌툿자나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만 있는데, (i) 동일한 곳에 머물거나 (ii) ‘괴로움 없는 빠밧사라 마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 뿌툿자나는 주어진 감각 입력에 대해 기쁨을 경험하든, 우울/고통을 경험하든, 또는 중립을 경험하든, ‘고통 없는 빠밧사라 마음’을 향해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세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고서는 윤회 여정(재탄생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포럼에서 자유롭게 질문해 주세요.

 

18. 감각 경험(아-람마나)이 뿌라-나 및 나와 깜마 단계 모두로 이어진다면, 아래 모든 세 가지가 일어납니다.

 

(i) 그것은 (‘아브야-까따 빠띳짜 사뭅빠-다’와 ‘아꾸살라 물라 빠띳짜 사뭅빠-다’가 함께 하는) 완전한 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입니다.

 

(ii) 그것은 빤짜 우빠-다-나 칸다(pañca upādāna khandha)에 또 다른 추가입니다(그리고 이것은 또한 왜 빤짝칸다, 즉 다섯 무더기가 아라한 단계 아래의 모든 이들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지를 설명합니다).

 

(iii) 감각 입력을 쫓아가는 것은 이 세상에 묶이게 합니다. 붓다께서는 이것을 ‘세상의 일어남/기원’과 동일시하셨습니다. ‘로까 숫따 ㅡ 세상의 기원과 그침’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아라한과에 도달하는 순간에, 그 ‘세상의 일어남/기원’은 멈추고(빠띳짜 사뭅빠-다 과정이 멈춤), 그것이 세상의 끝, 즉 ‘로까 니로다(loka nirodha)’입니다. 그 아라한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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