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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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무아': 간단한 분석 ㅡ 우리는 항상 '아윗자-'로 행하는가?

 

원문: Comments/Reviews 섹션의 ‘“Self” and “no-self”: A Simple Analysis’ 포스트

- 2015년 10월 23일 작성; 2019년 8월 14일 개정; 2022년 7월 30일 개정[영문법 및 경미한 사항 개정임]

 

최근에 받은 2개의 코멘트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은 기본 개념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문제를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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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코멘트(Mr. Alexander Ausweger에 의함):

 

전제:

(1) 한 유정체가 지금까지 재탄생한 횟수는 무한합니다.

(2) 한 생애(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에 아라한이 될 확률은 미미하지만 0이 아닙니다. (가능한 확률 값의 범위는 확률 이론에서 평소와 같이 0에서 1까지임)

 

결론: 무한한 횟수의 재탄생에서 아라한에 도달할 확률은 1이 될 것이며, 이는 모든 사람은 이미 상사라(samsara, 윤회 세상)를 떠났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결론: 우리가 아직 여기 있기 때문에, 전제 중 하나가 틀림없이 잘못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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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코멘트(Mr. Chamila Wickramasinghe에 의함):

 

“.... 아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에서, ‘아윗자- 아누사야(avijjā anusaya)’는 아라한 단계 아래의 사람에게는 남아 있기 때문에, 아윗자-(avijjā) 없이 일어나는 ‘찟따ㅡ크사나(cittaㅡkshana)’(찟따, citta)는 단 하나도 없는가요? ..”

 

***

 

위의 두 코멘트에는 잘 정의된 ‘자아(self)’에 대한 인식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재탄생 사이클을 겪는(거치는) '잘 정의된 유정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사용하여 사람을 표시하여 구별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동적으로 변하지 않는 ‘자아(self)’라는 인상을 줍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서 이 ‘자아감(sense of a self)’을 제거하는 것은 좀 어렵습니다.

 

  • * 이 문제의 다른 측면은 ‘아낫따(anatta)’가 무아(no-self)를 의미한다는 일반적인 오해입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라한뜨후드(Arahanthood, 아라한과)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자아감(a sense of a self)이 있습니다. ‘아낫따(anatta)’의 다른 의미는 사람이 ‘자아(self)’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한, 난감하게(어찌할 수 없게) 되고 고통(괴로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 * 그래서 붓다께서는 ‘자아(self)가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고, ‘자아가 없다(no-self)'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처음에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나의 담마는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관점(견해)이 모두 올바르지 않은 이유를 명확히 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논의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코멘트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코멘트에 대한 답변은 그 논의 중에 분명해질 것입니다.

 

1. 첫 번째 코멘트에서 제기된 결정적인 문제는 첫 번째 전제 자체입니다. “한 유정체….”라고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실제 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soul)’ 또는 ‘자아(self)’가 있다고 말합니다. 절대적 정체성을 부여하려면 그 안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 * 이제, 위의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붓다께서 어떻게 설명하셨는지 논의해 보겠습니다.

  • * 부처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아-트마(ātma) 또는 ‘영혼(soul)’ 또는 자아(self)를 믿었습니다. 그 절대적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람’의 무엇이 독특한가라는 물음에, 어떤 이들은 그것이 자신의 몸(루-빠, rūpa)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의 느낌(vēdana, 웨-다나), 자신의 인식(saññā, 산냐-), 자신의 행위(saṅkhāra, 상카-라), 자신의 생각(viññāṇa, 윈냐-나), 또는 위의 다섯 가지 조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빤짝칸다(pancakkhandha, 오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루빡칸다(rupakkhandha), 등이 아닙니다. 필자는 그 차이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나중에 일련의 포스트를 작성할 것입니다.

  • *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것은 없습니다.

 

2. 붓다께서는 왜 위의 어떤 것도 ‘주어진(특정) 사람’에게 동일하게 남아 있지 않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기본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A라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 * 다섯 가지 범주(루-빠_rūpa, 웨-다나_vēdana, 산냐-_saññā, 상카-라_saṅkhāra, 윈냐-나_viññāṇa) 중 어느 것이 몇 년 간격의 두 가지 때에 동일하게 유지되었습니까? A라는 사람은 자랐고 동일한 몸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그의 일차적인 생각(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의 대부분은 취직이나 대학 입학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와 매우 다를 것입니다.

 

3. 이제, 고등학교 1학년 말까지로 시간 간격을 줄여 보겠습니다. 위의 모든 주장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A’는 A를 정의하는 위의 5가지 특성 모두에서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 *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시간 간격을 계속 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의깊게 생각해보면, 집에서 학교에 도착할 때쯤에는 그의 육체도 조금 변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모든 정신적 속성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 * 장기간에 걸친 ‘중대한 변화’를 보려면, 몇 개월의 시간 간격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 간격을 계속 좁히면, 그 사람에 대한 다섯 가지 특성 모두가 시시각각으로 계속해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 사람이 방에 들어가서, 반대편으로 걸어간 뒤, 뒷문으로 방을 나갈 때, 나간 사람이 '동일한 사람'일까요? 위의 다섯 가지 특성 중 어느 것이 그대로 유지되었을까요?

  • * 일단 그것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하면, 네 가지 정신적 특성이 시시각각 계속 변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을 ‘보기’는 좀 어렵지만, 위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점점 더 작은 시간 간격으로 확장됩니다. 그 때문에 그것을 '지혜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 * 게다가, 현대 과학은 실제로 우리 몸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보여줍니다. 몇 달마다 우리 몸의 대부분의 세포들은 완전히 교체됩니다. 우리는 매년 ‘새로운 몸’을 가집니다!

  • * 하지만, 이것은 신체의 모든 단일 숫닷-타까(suddhāṭṭhaka)(가장 작은 물질 단위)가 시시각각 다시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물체(루-빠)는 17  마음순간 동안만 지속되는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그러나 수조 개의 세포로 구성된 몸에서 최소한 일부 세포는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그 엄청난 차이를 다시 읽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인간 생명 - 정신 기반(간답바)과 물질 기반(세포)’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눈으로 ‘보는’ 대신) 지혜로 ‘보는’ 이 방법은 붓다께서 ‘짝쿵 우다빠-디(cakkhuṃ udapādi)..’, 즉 ‘담마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변하지 않는 자아’, 예를 들어, 존 스미스(John Smith)라는 인식(산냐-, sanñā)을 갖게 됩니다.

 

4. 우리는 사람에게 이름을 붙이고, 예를 들어, 존 스미스(John Smith)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 스미스가 그의 삶의 여러 시점에서 공통적인 것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젊은이가 되면 다르게 보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인이 되면 매우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 *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극단으로 가서 ‘존 스미스라는 그런 사람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까? 우리는 존 스미스와 대화할 수 있고 그가 적극적으로 다양한 활동, 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혼(no-soul) 또는 무아(no-self)라는 또 다른 극단입니다.

  • * 그것이 붓다께서 실재로서 자아(self)와 무아(no-self)를 모두 거부하신 이유입니다.

  • * 의사 소통을 하려면 존 스미스(John Smith)라는 이름으로 사람에 대한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붓다께서도 ‘자신의 전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않는 사람’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 ‘사람’은 순식간에 ‘새로운 정체성(identity)’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잠깐 동안에 아라한과를 얻은 여러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몇 달 사이에 성격이 급변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론 우리는 한 달 안에 상당한 체중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고 외모를 바꿀 수 있습니다.

 

5. 절대적 진리(빠라맛타, paramattha)는 우리의 모든 정신 현상이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신 활동 중 어떤 것은 아윗자-(avijjā)로 인해 일어나고 실시간으로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답빳짜야-따- 빠띳짜 사뭅빠-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관습적인 용어(vohāra, 오하-라)를 사용하지만, 우리는 절대적 실재(빠라맛타, paramattha)는  그 ‘존재 상태’가 시시각각 변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 * 우리 육체(그리고 모든 물질적 형태, 상카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합니다. 어떤 것은 빠르게 변하지만(초파리는 며칠 사는데, 따라서 태어나서 성숙기에 이르러 죽기까지 며칠 안에 끝남), 다른 것들은 느리게 변합니다(거북이 수명은 약 200년).

 

6. 따라서, 절대적 실재면에서 사람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 따라 시시각각 더 좋거나 나쁘게 변할 수 있습니다.

 

  • *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kusalaㅡmula 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은 ‘꾸살라ㅡ물라 빳짜야- 상카-라(kusala-mula paccayā saṅkhāra)’로 시작합니다.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아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로 시작합니다.  ‘아꾸살라ㅡ물-라 웁빳띠 빠띳짜 사뭅빠-다’와 ‘이답빳짜야-따- 빠띳짜 사뭅빠-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꾸살라(kusala)도 아니고 아꾸살라(akusala)도 아닌 것들을 행합니다.

  • * 따라서 보통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윗자-(avijjā)가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윗자-(avijjā)는 바람직한/바람직하지 않은 감각 입력이 사람을 유혹할 때 촉발됩니다.

 

7. 이제 두 번째 코멘트를 다룰 수 있습니다. 네. 아윗자- 아누사야(avijjā anusaya)는 닙바-나(Nibbāna, 열반)의 아라한 단계에 도달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각(citta)이 아윗자-(avijjā)로 인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많은 레벨(수준)로 나타납니다.

 

  • * 아누사야(anusaya)는 표면 아래에 있는 우리의 갈망과 습관(‘아윗자-_avijjā’를 통해 획득한 것)을 의미하며, 표면으로 올라오게 하는 촉발 인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 따라서 아윗자-(avijjā) 자체는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은 대부분 시간에 아윗자-(avijjā) 없이 행합니다. 탐욕스럽거나 싫어하거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무언가를 할 때에만 아윗자-(avijjā)로 행합니다.

  • * 아윗자-(avijjā)는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감각 입력에 의해 촉발됩니다. 주어진 ‘촉발 인자’가 아윗자-(avijjā)를 일으키는 여부는 각자의 가띠(gati)와 아누사야(anusaya)에 달려 있습니다. ‘아-사와, 아누사야, 및 가띠’, ‘윤회 습관, 성격(가티), 및 갈망(아사와)’, 및 ‘가띠에서 바와로 그리고 자띠로 - 우리가 통제해야 할 것’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따라서 보통(평균적) 사람이 아윗자-(avijjā)를 지닌 실체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런 고정된 존재, 즉, ‘자아(self)를 지닌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과 연관된 유일한 것은 그 사람의 가띠(gati)와 아누사야(anusaya)입니다. 이것들도 또한 계속해서 변합니다.

 

8. 아윗자-(avijjā)가 일어날 때에도, 모하(moha)(완전히 덮인 마음)에서 사성제을 알지 못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후자의 경우에는, 도덕적 행위(뿐냐-비 상카-라, punnābhi saṅkhāra)를 하지만 공덕의 결과를 기대합니다. 여기에서도 아꾸살라ㅡ물라(akusala-mula) PS 사이클이 작동하지만 31 영역 내의 좋은 태어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 * 보답을 바라는 모든 미래 기대가 없이, 즉 아윗자-(avijjā)가 없이 공덕을 행할 때에만, 꾸살라ㅡ물라 PS 사이클이 작동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리야(Ariya, 성자)일 때 생깁니다. 아리야(성자)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 결실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라한(Arahant) 단계 아래의 성자(Ariya)는 낮은 수준의 아윗자-(avijjā)(즉, ‘모하_moha’가 없음)로 행할 수 있습니다.

  • *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보고 듣는 것 등을 무시합니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아윗자-(avijjā)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 * 따라서, 아윗자-(avijjā)는 어떤 사람에게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윗자- 아누사야(avijjā anusaya)는 감각 입력에 의해 촉발됩니다.

 

9. 첫 번째 코멘트로 돌아가서, 붓다께서는 ‘사람이 존재한다’거나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유정체는 시시각각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사람'에게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대신에, ‘사람’은 계속해서 변합니다. 우리는 인습적으로 사람을 ‘존 스미스(John Smith) 등으로 부릅니다.

 

  • * 같은 것을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은 ‘유정체’가 그 존재를 일으키는 원인(및 조건)이 있을 때까지 주어진(특정)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근본 원인이 바뀌면, 그 존재가 새로운 것으로 바뀝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동물과 같은 행위를 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죽은 후에 동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10.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주의깊게 살펴봄으로써 두 가지 코멘트에 대해 더 많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 * 아윗자- 아누사야(avijjā anusaya)가 없어지면, 아라한과(Arahanthood)를 얻습니다. #7에 있는 링크를 참조하세요. 그 경우에, 아윗자-(avijjā)는 어떤 감각 입력에도 촉발되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모든 좋아하는/싫어하는 것에 대한 우빠-다-나(upādāna)가 없습니다. 따라서 죽을 때, ‘빠띳짜(Paṭicca)’(어떤 것에  기꺼이 들러붙는 것)에 해당하는 ‘사마 웁빠다(sama uppada)’(유사한 특성의 태어남)가 없습니다.

  • * 그러나 현생을 일으킨 깜마(업) 에너지는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던진 돌은 주어진 에너지가 다할 때까지 [공중에] 있는 것과 같이, 아라한은 자신의 삶의 업 에너지가 다할 때까지 삽니다. 하지만, 아라한은 아사와/아누사야(asava/anusaya)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감각 입력에 대해서도 유혹되지 않습니다.

  • * 아라한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든 감각 입력을 경험하지만, 모든 좋아함/싫어함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라한은 남겨진 많은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가 있을 것이므로, 통증과 쑤심을 경험하거나 더 심하게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몇 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셨고, 목갈라나 존자는 맞아서 죽었습니다. 

  • * 아라한 단계에서 제거되는 것은 미래의 고통/괴로움입니다. 재탄생이 없으므로 미래의 괴로움도 없습니다. 마음은 상사-라(saṃsāra), 즉 재탄생의 사이클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고통/괴로움을 줄 수 있고 줄 것인 물질적 몸에서 영원히 해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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