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상카-라 ㅡ 단일 낱말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원문: Paṭicca Samuppāda 섹션의 ‘Saṅkhāra – Should Not be Translated as a Single Word’ 포스트
- 2021년 12월 7일 작성; 2021년 12월 10일 개정; 2022년 8월 27일 개정; 2023년 1월 25일 개정(#8)
상카-라(Saṅkhāra)는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매우 중요한 빠알리 낱말입니다. 요즘 흔히 번역하는 것처럼, 선택(choices), 과정(processes), 활동(activity), 정신적 형성(mental formations) 등과 같이 단일 낱말로 번역해서는 안됩니다.
소개
1. 필자는 ‘상카-라(saṅkhāra)’가 ‘선택(choices)’과 ‘정신적 형성(mental formations)’으로 번역된 두 개의 핵심 숫따에 대한 영어 번역을 언급했습니다. ‘빠띳짜 사뭅빠-다에서 빠알리 핵심어의 왜곡’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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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번역에 따르면, 마음에 아윗자-(avijjā)가 없으면, 모든 상카-라(saṅkhāra)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위 포스트에 인용된 두 개의 영어 번역에서, “아윗자- 니로다- 상카-라 니로도(avijjā nirodhā saṅkhāra nirodho)”는 “무지(ignorance)가 그치면, 선택(choices)이 그친다.”와 “무지(ignorance)의 그침으로부터, 의도적 과정(volitional processes)의 그침이 있다.”로 번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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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마음은 붓다 레벨의 깨달음(붓다후드, Buddhahood)에 이르자 아윗자-(avijjā)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후, 붓다께서는 45년 동안 사셨습니다. 붓다께서는 그 전체 기간 동안에 어떤 상카-라(saṅkhāra)도 생성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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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 논의된 바와 같이, 사람은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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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토픽(주제)의 맥락에서 숫따(sutta, 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빠알리 숫따를 어리석게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는 것의 위험을 설명합니다.
여러 가지 유형의 상카-라
2. 쭐-라웨달라 숫따( ‘Cūḷavedalla Sutta (MN 44)’ )는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 와찌- 상카-라(vacī saṅkhāra), 찟따 상카-라(citta saṅkhāra)라는 세 가지 유형의 상카-라에 대해 논의합니다. 마지막 유형은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와 (거의)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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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숫따 센트럴(Sutta Central) 사이트에 있는 이 숫따의 영어 번역에서, 세 명의 번역자는 세 가지 유형의 상카-라(saṅkhāra)를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번역합니다. 즉, “physical(육체적), verbal(언어적), mental processes(정신적 과정)”, “bodily process(육체적 과정), the speech process(언어적 과정), the mental process(정신적 과정)”, 및 “physical activity(육체 활동), verbal activity(언어 활동), mental activity(정신 활동)”으로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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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세 가지 유형의 상카-라(saṅkhāra)는 모두 정신적입니다. 그것들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것들은 육체적 과정이 아니지만, 육체적 과정을 제어/통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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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는 마음에서 일어나고 몸행위(행동)를 제어/통제합니다.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는 또한 마음에서 일어나고 말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유형의 상카-라(saṅkhāra)가 모두 마음에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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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숫따(sutta)에서 상카-라(saṅkhāra)의 다양한 의미를 나타내는 단일의 영어 낱말을 찾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래에서 상카-라를 분류하는 또 다른 방법에 대해 논의하겠지만, 먼저 이 세 가지 유형의 상카-라(saṅkhāra)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생각은 마노 상카-라를 가진다
3. ‘쭐-라웨달라 숫따(Cūḷavedalla Sutta, MN 44)’에서, 찟따/마노 상카-라(citta/mano saṅkhāra)는 ‘웨다나-(vedanā)와 산냐-(saññā)’로 정의됩니다. 아래 ‘참고 자료 1’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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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 웨다나-(vedanā)와 산냐-(saññā)는 느낌과 지각(또는 인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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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웨다나-(vedanā)는 ‘외부 감각 입력을 감지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산냐-(saññā)는 그 감각 입력에 대한 인식입니다(그러나 그런 감각 사건에 대한 각자의 편견/편향을 포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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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나무 뿌리는 (토양에 있는 영양분의) 웨다나-(vedanā)를 느끼고, 나무의 잎은 햇빛을 느낍니다. 각각은 그런 자극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식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햇빛을 향해 ‘돌아가고’ 나무 뿌리가 적절한 영양분을 ‘끌어당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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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식물과 나무는 웨-다나-(vēdanā)와 산냐-(saññā)의 기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은 햇빛이 그 위에 닿으면 ‘느낄’ 수 있고(웨-다나-, vēdanā), 그것을 햇빛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산냐-, saññā). 그러나 식물은 그 웨-다나-(vēdanā)와 산냐-(saññā)에 대해 (생각, 즉 마음 속의) 상카-라-(saṅkhārā)를 생성할 수 없습니다. ‘아-야따나 사이의 접촉이 위빠-까 윈냐-나로 이어진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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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유정체만이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개가 주인을 보면 기뻐하지만 낯선 사람에게는 공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개는 로바(lobha)(주인에 대한 애정) 또는 도사(dosa)(이 경우에는 낯선 사람에 대한 반감/혐오)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오직 유정체만이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를 생성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는 모든 찟따(citta)(‘생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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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담마(Abhidhamma)는 이 문제를 명확히 합니다. 모든 찟따(대략적으로 ‘생각’으로 번역됨)은 항상 7가지 쩨따시까(정신 요소)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 7가지 중 두 가지가 웨다나-(vedanā)와 산냐-(saññ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은 항상 웨다나-(vedanā) 및 산냐-(saññā)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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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말하면,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를 생성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와찌 상카-라’는 말로 이어진다
5. ‘쭐-라웨달라 숫따(Cūḷavedalla Sutta, MN 44)’는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를 ‘위딱까 위짜-라-(vitakka vicārā) 와찌- 상카로(vacī saṅkharo)’로 정의합니다. 아래 ‘참고 자료 1’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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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딱까(vitakka)와 위짜-라(vicāra)는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두 가지 쩨따시까(cetasika)입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할 때 일어납니다. 간단히 말해서, 위딱까(vitakka)는 ‘아-람마나(ārammaṅa)로 주의를 돌리는 것’을 의미하고 위짜-라(vicāra)는 ‘그 아-람마나(ārammaṅa)에 머물며 조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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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거나’ ‘밖으로 말하게’ 됩니다. 둘 다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와찌 상카라의 바른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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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 붓다후드(Buddhahood)에 이르신 후 45년 동안 다른 이들에게 말씀을 하셨으므로, 많은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를 생성하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신체 행위는 마음에 일어나는 까-야 상카-라에 기반한다
6.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는 참고 자료 1에서 ‘앗사-사 빳사-사- 까-야 상카-로(Assāsa passāsā kāya saṅkhāro)’로 정의됩니다. 그것은 ‘들숨과 날숨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로 인한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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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신체 활동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로 인한 것입니다. 호흡은 단지 한 측면일 뿐입니다. 마음은 호흡을 조절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의식적으로 숨을 쉴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상카-라(saṅkhāra)의 일종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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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우리는 아비담마(Abhidhamma)를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정신 활동은 찟따 위티(citta vithi)를 수반합니다. 하나의 찟따(citta)가 단독으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찟따들은 항상 찟따의 시리즈/연속(찟따 위티, citta vithi)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와나 찟따(javana citta)를 포함하는 그 찟따 위티(citta vithi)들에서만 느낍니다. 호흡을 유지하는 찟따 위티(citta vithi)에는 자와나 찟따(javana citta)가 없으며, 그것들은 아띠빠릿따-람마나 찟따 위티(atiparittārammana citta vithi)(즉, ‘약한 찟따 위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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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찟따 위티(citta vithi)가 호흡에 수반된다는 사실은 천식 환자를 생각하면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숨을 쉬어야 합니다. 즉, ‘숨을 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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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숫따는 의식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 그것이 항상 일어나기 때문에 언급한 것입니다. 의식이 없을 때, 찟따 위티(citta vithi)는 일어나지 않으며 업 에너지가 몸을 살아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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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모든 신체 움직임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를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글을 쓰거나, 걷거나, 뛰거나, 몸의 어떤 부분을 움직이려면,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로 그것을 해야 합니다.
아윗자-는 대부분의 상카-라에 수반되지 않는다!
7.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동안에 수많은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합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까-야(kāya), 와찌(vaci), 마노(mano)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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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 때문에 ‘빠띳짜 사뭅빠-다에서 빠알리 핵심어의 왜곡’ 포스트에 인용된 두 번역에서 “아윗자- 니로다- 상카-라 니로도(avijjā nirodhā saṅkhāra nirodho)”를 “무지가 그치면, 선택(choices)이 그친다." 또는 “무지(ignorance)의 그침으로부터, 의도적 과정(volitional processes)의 그침이 있다.”로 번역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우리는 또한 ‘선택(choices)’과 ‘의도적 과정(volitional processes)’이라는 영어 낱말이 어떤 유형의 상카-라(saṅkhāra)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흡하기 위해 ‘선택’을 하거나 ‘(의식적으로) 정신적 형성’을 할 필요는 없지만, 호흡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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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번역자들은 오직 아비상카라만이 아라한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라한에게는 아윗자-(avijjā)가 흔적도 없지만 위에서 논의한 세 가지 유형의 상카-라(saṅkhāra)는 모두 명백히 생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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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종류의 번역은 붓다 담마를 왜곡합니다! 필자는 토론 포럼에서 그것이 많은 혼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반복해서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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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와 직접 관련된 상카라를 분류하는 또 다른 방식을 논의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유형은 상카-라(saṅkhāra)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이며, 그 중 일부(아뿐냐-비상카-라, apuññābhisaṅkhāra)는 다양한 형태의 괴로움으로 ‘나쁜 깜마 위빠-까(bad kamma vipāka)’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 즉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는 괴로움/고통(그리고 한바탕 행복까지)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지만 결코 괴로움/고통의 영구적 소멸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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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에 대한 특별한 분류를 논의해 보겠습니다.
아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는 아비상카-라를 수반한다
8. ‘아윗자- 빳자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 단계에서 상카-라(saṅkhāra)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를 의미합니다. ‘빠띳짜사뭅빠-다 위방가( ‘Paṭiccasamuppāda Vibhaṅga’ )는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 단계를 “Tattha katame avijjā paccayā saṅkhārā? Puññābhisaṅkhāro, apuññābhisaṅkhāro, āneñjābhisaṅkhāro.”로 설명합니다.
번역: “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뿐냐-비상카-라, 아뿐냐-비상카-라, 아-넨자-비상카-라를 의미한다.” 자세한 내용은 ‘상카-라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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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위에서 논의한 까-야(kāya), 와찌(vaci), 또는 마노(mano) 상카-라(saṅkhāra)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까-야(kāya), 와찌(vaci), 및 마노(mano) 상카-라(saṅkhāra)의 일부만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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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상카-라 숫따(Saṅkhāra Sutta (AN 3.23))를 참조하세요. 영어 번역이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개념을 제공합니다. ‘sabyābajjhaṁ kāyasaṅkhāraṁ abhisaṅkharoti’는 ‘아뿐냐-비상카-라(apuññābhisaṅkhāra)를 생성하는 것에 관여함’을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그 반대인 ‘abyābajjhaṁ kāyasaṅkhāraṁ abhisaṅkharoti’는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를 생성하는 것에 관여함’을 의미합니다. 뿐냐-비상카-라는 ‘사성제에 대한 이해가 없이 행해진 도덕행위’라는 것에 주목하세요. 아래 #11 및 #12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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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말하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로바(lobha), 도사(dosa), 모하(moha)로 행해진 깜마(kamma)로 이어집니다. 그것들은 다사 아꾸살라(몸으로 셋, 말로 넷, 마음으로 셋)입니다. 까-야 깜마(kāya kamma), 와찌 깜마(vaci kamma), 및 마노 깜마(mano kamma)가 바로 그것입니다. ‘10가지 부도덕한 행위(다사 아꾸살라)’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9.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깁니다.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puñña abhisaṅkhāra, 도덕적인 행위)가 어떻게 로바(lobha), 도사(dosa), 모하(moha)로 행해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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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뿐냐 깜마(puñña kamma)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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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그런 ‘좋은 깜마(선업)’가 그런 ‘좋은 존재’로 있는 동안 (건강함과 부유함 같은) ‘좋은 깜마 위빠-까(good kamma vipāka)’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강한 것들은 ‘좋은 영역(선처)’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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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러한 이득(혜택)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좋은 영역(선처)’에 그렇게 태어나는 것은 드뭅니다. 현생에서 선한 행위(선행)만 한다고 생각해도, 우리는 전생에 '악한 행위(악행)'을 많이 했을 수가 있고, 그로 인해 여전히 '악처'에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오직 띨락카나(Tilakkhana)를 이해해야만 뿐냐 깜마(Puñña kamma)가 (닙바-나로 인도하는) 꾸살라 깜마(kusala kamma)가 됩니다. 아래 #11을 참조하세요.
예
10. 이미 언급했듯이, 호흡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를 통해 일어납니다. 손을 들어올리는 것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이 모든 활동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좋다’거나 ‘나쁘다’로 분류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업적으로 중립적인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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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에, 화가 나서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의 아뿐냐-비상카-라(apuññābhisaṅkhāra) 버전을 수반합니다. 도둑질이나 성적 비행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의 아뿐냐-비상카-라(apuññābhisaṅkhāra) 버전으로 행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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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를 준비하고 그것을 빅쿠(bhikkhu)나 노숙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의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 버전을 수반합니다. 붓다 담마(또는 가치있는 어떤 것)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은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 범주에 속하는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 및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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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스럽거나 화난 마음성향(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아뿐냐-비상카-라(apuññābhisaṅkhāra) 버전에 속하는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입니다. 열 가지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의 반대는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 범주에 속합니다.
선행(뿐냐 깜마)을 하는 것만으로는 미래 괴로움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11. 요점은 ‘좋은 행위/선행(뿐냐 깜마, puñña kamma)’이 좋은 영역(선처)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기간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미래에 아빠-야-(apāyā, 악처/사악처)에 재탄생될 가능성을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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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을 또 다른 식으로 말하면, “아빠-야-(apāyā, 악처/사악처)에 재탄생하는 것은 재탄생 과정의 위험함, 즉 ‘이 세상은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 본질/특성 (띨락카나, Tilakkhana)을 지닌다’는 것을 이해할 때에만 멈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따빤나(Sotapanna)가 될 때입니다. 단지 ‘좋은 행위(선행)’, 즉 뿐냐 깜마(puñña kamma)를 하는 것만으로 과거의 ‘나쁜 행위’[에 의한 과보]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뿐냐 깜마(puñña kamma)를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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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대신, (‘뿐냐-비상카-라’로 ‘뿐냐 깜마’를 행하는 동안) 31영역으로 된 이 세상의 세 가지 특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미래에 극심한 고통/괴로움)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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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락카나(Tilakkhana)를 이해하는 것은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를 육성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닙바-나(열반)의 다양한 단계로 이어집니다.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뿐냐 깜마와 꾸살라 깜마 사이의 차이
12. 뿐냐 깜마(puñña kamma)와 꾸살라 깜마(kusala kamma)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뿐냐 깜마-(puñña kammā)는 자신이 틸락카나(Tilakkhana)를 이해하면 꾸살라 깜마-(kusala kammā)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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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는 뿐냐 깜마(puñña kamma)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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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락카나(Tilakkhana)에 대한 이해로 행해지는 동일한 뿐냐 깜마(puñña kamma)는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꾸살라ㅡ물라 상카-라(kusala-mula saṅkhār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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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바로 (닙바-나로 인도하는)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과정이 ‘꾸살라ㅡ물라 빳짜야- 상카-라(kusala-mula paccayā saṅkhāra)’로 시작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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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한 내용은 ‘낄레사 ㅡ 아꾸살라, 꾸살라, 및 뿐냐 깜마와 관계’ 및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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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용어들이 낯설은 사람들은 이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 관련 포스트들을 반복해서 읽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조각 그림 맞추기 퍼즐’에서 하는 것과 같이) 일단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일 것입니다.
참고 자료
1. 쭐-라웨달라 숫따( ‘Cūḷavedalla Sutta (MN 44)’ )에서:
“Tayome, āvuso visākha, saṅkhārā—kāya saṅkhāro, vacī saṅkhāro, citta saṅkhāro”ti.
“Katamo panāyye, kāya saṅkhāro, katamo vacī saṅkhāro, katamo citta saṅkhāro”ti?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a saṅkhāro, vitakka vicārā vacī 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itta saṅkhāro”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