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삼마- 사띠는 사띠빳타-나 부-미에서 경험되는 아-나-빠-나사띠다
원문: Sutta Interpretation 섹션의 ‘Sammā Sati Is Ānāpānasati Experienced in Satipaṭṭhāna Bhūmi’ 포스트
아-나-빠-나사띠(또는 사띠빳타-나)의 목표는 삼마- 사띠(빤짜 니-와라나, 즉 5가지 장애가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아-나-빠-나사띠 사마-디로) 위빠사-나(Vipassanā)를 행할 수 있고, 이 사마-디는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에서 경험됩니다.
2025년 10월 25일 작성
소개 ㅡ 사띠는 무엇인가?
1.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삼마- 사띠(Sammā Sati)를 지닐 때 사띠(sati) 상태입니다. 여기서, ‘삼마-(sammā)’는 ‘산(san)’ + ‘마(mā)’, 즉 ‘오염을 제거함’을 의미합니다. ‘산(San)이란 무엇인가? 상사-라(삼사-라)의 의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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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은 마음이 까-마 산냐-(kāma saññā)에서 벗어난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로 의도적으로 이동되지 않는 한, 항상 까-마 산냐-와 함께 합니다. 까-마 산냐-가 있으면 까-마 라-가 상요자나(kāma rāga saṁyojana)를 제거하지 않는 한, 마음이 빤짜 니-와라나(pañca nīvaraṇa)로 가려집니다. ‘빤짜 니-와라나 및 감각적 즐거움(까-마 라-가)’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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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까-마 산냐-’에서 벗어날 때, 즉 마음이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마음에서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더욱이, 아래에서 논의할 ‘Icchānaṅgala Sutta (SN 54.11)’에서 붓다께서 설명하셨듯이, 마음은 모든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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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마음이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삼마- 사띠를 지니게 되고, 마음은 담마에 쉽게 집중하고 지혜를 육성할 수 있습니다. ‘사띠빳타-나 부-미 ㅡ 로까 산냐-에서 벗어남’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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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완전히 육성된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로 머물 때, 그 사람의 마음은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에 있습니다.
참된 마음챙김은 사띠빳타-나 부-미에서 이루어진다
2. 소따빤나의 마음은 닙바-나의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할 때 처음으로 사띠빳타-나 부-미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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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그들은 사띠빳타-나를 육성함으로써, 그리고 구체적으로 ‘까-예 까-야-누빳사나-(kāye kāyānupassanā)부터 ‘담메수 담마-누빳사나-(dhammesu dhammānupassanā)’까지를 육성함으로써 사띠빳타-나 부-미에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다. ‘Sati Sutta (SN 47.44)’를 참조하세요. 같은 제목으로 같은 구절을 말하는 몇 개의 숫따가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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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1.8에서, 붓다께서는 “Evaṁ kho, bhikkhave, bhikkhu sato hoti”, 즉 “그것이 바로 빅쿠가 마음챙김을 하는 방식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띠(sati)는 단순히 관습적 의미의 ‘마음챙김’을 넘어, 삼마 사띠(Sammā Sat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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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아직 ‘까-예 까-야-누빳사나-(kāye kāyānupassanā)부터 ‘담메수 담마-누빳사나-(dhammesu dhammānupassanā)’까지를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의 ‘뿌라-나 깜마’와 ‘나와 깜마’ 단계(‘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 참조)와 마음이 ‘까-마 산냐-’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아윗자-는 까-마 로까의 까-마 산냐-에 의해 촉발된다’와 ‘사띠빳타-나 부-미 ㅡ 로까 산냐-에서 벗어남’를 참조) 이해해야 합니다.
다양한 수준의 삼마- 사띠
3. 제가 설명했듯이, 삼마- 사띠는 소따빤나 단계 이상의 성자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삼마- 사마-디 ㅡ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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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띠빳타-나를 기른 후, 성자들은 의지대로 사띠빳타-나 부-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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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빠-나사띠와 사띠빳타-나 사이의 관계는 ‘아-나-빠-나사띠 ㅡ 사띠빳타-나와 관계’에서 논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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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는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의 상세 버전입니다. ‘Paṭhamaānanda Sutta (SN 54.13)’는 아-나-빠-나사띠 사마-디를 육성하면 사띠빳타-나의 성취로 이어지고, 이는 뒤따라서 삿따 봇장가(Satta Bojjhaṅga)와 윗자- 위뭇띠(아라한과)의 성취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계열의 후속 숫따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언급합니다. (Sutta Central 번역본에서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이 아라한과로 이어진다고 하는 것은 웃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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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이 생에서 기분좋게 보내기 위해 주기적으로 아-나-빠-나 사띠 사마-디(Ānāpāna Sati samādhi) 상태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스트레스 없는 마음에 관한 잇차-난갈라 숫따
4. ‘Icchānaṅgala Sutta (SN 54.11)’는 짧은 숫따입니다. 필자는 모호함을 피하도록 숫따 전체를 번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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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숫따는 (마음이 내장된 위빠리따/오염된 산냐-에서 벗어나는) 아-나-빠-나 사띠 사마-디(Ānāpāna Sati samādhi)가 사띠빳타-나 부-미에서 경험된다는 사실을 가리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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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링크에 있는 Sutta Central 번역본과 비교해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랜 세월에 걸쳐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표식 2.5에서 “Idhāhaṁ, bhikkhave, sato assasāmi, sato passasāmi”라는 구절은 “이와 관련하여, 마음챙김으로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김으로 숨을 내쉰다.”로 번역됩니다. 붓다께서 왜 마음챙김으로 호흡해야 할까요???
붓다께서는 우기(왓사-와-사)에 안거하심
5. “Ekaṃ samayaṃ bhagavā icchānaṅgale viharati icchānaṅgalavanasaṇḍe.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icchāmahaṃ, bhikkhave, temāsaṃ paṭisallīyituṃ. Nāmhi kenaci upasaṅkamitabbo, aññatra ekena piṇḍapātanīhārakenā”ti.
“Evaṃ, bhante” ti kho te bhikkhū bhagavato paṭissutvā nāssudha koci bhagavantaṃ upasaṅkamati, aññatra ekena piṇḍapātanīhārakena.”
번역: “한 때, 부처님께서 잇차-난갈라의 잇차-난갈라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빅쿠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빅쿠들이며, 나는 석 달 동안 안거하고자 한다. 탁발 음식을 가져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스승님.’라고 빅쿠들이 대답했다. 그리고 탁발 음식을 가져가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부처님께 가까이 가지 않았다.”
6. “Atha kho bhagavā tassa temāsassa accayena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bhikkhū āmantesi: “sace kho, bhikkhave,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puccheyyuṃ: ‘katamenāvuso, vihārena samaṇo gotamo vassāvāsaṃ bahulaṃ vihāsī’ti, evaṃ puṭṭhā tumhe, bhikkhave, tesaṃ aññatitthiyānaṃ paribbājakānaṃ evaṃ byākareyyātha: ‘ānāpānassati samādhinā kho, āvuso, bhagavā vassāvāsaṃ bahulaṃ vihāsī’ti.
번역: “그리고 3개월이 지나, 부처님께서 안거에서 나오시어 빅쿠들에게 말씀하셨다. ‘빅쿠들이여, 다른 분파의 지지자들이 고따마 붓다께서는 어떻게 안거 기간을 보내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붓다께서는 아-나-빠-나사띠 사마-디로 머물며 보냈습니다.’ ”
붓다께서는 아-나-빠-나사띠 사마-디로 왓사-와-사를 보내심
7. “Idhāhaṃ, bhikkhave, sato assasāmi, sato passasāmi. Dīghaṃ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mi, dīghaṃ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mi; rassaṃ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mi, rassaṃ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mi; ‘sabbakāyap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pajānāmi… pe …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pajānāmi, ‘paṭ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pajānāmi.”
위의 구절(구)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Ānāpānasati Sutta (MN 118)’에서 아-나-빠-나사띠를 설명하는 기본 구절입니다. 아-나-빠-나사띠 숫따(MN 118)의 해당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Dīghaṁ vā assasanto ‘dīghaṁ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ṁ vā passasanto ‘dīghaṁ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ṁ vā assasanto ‘rassaṁ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ṁ vā passasanto ‘rassaṁ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aṭisaṁ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 pe …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8. 필자는 두 경우에서 다른 낱말들에 강조 표시를 하였습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낱말들은 잇차-난갈라 숫따(SN 54.11)에서 묘사된 부처님의 아-나-빠-나사띠를 나타냅니다. 이 낱말들은 아-나-빠-나사띠 숫따(MN 118)에서 빅쿠가 따르는 절차에서는 자주색으로 표시된 낱말로 대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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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 pe …는 본문을 짧게 유지하기 위해 중간 부분을 건너뛰는 것을 의미합니다. 건너뛴 부분은 까-야-누빳사나-(kāyānupassanā), 웨다나-누빳사나-(vedanānupassanā), 찟따-누빳사나-(cittānupassanā), 그리고 담마-누빳사나-(dhammānupassanā)의 끝 부분까지 포함됩니다. 건너뛴 부분은 두 페이지 정도 됩니다. 빠자-나-미(pajānāmi)에서 식카띠(sikkhati)로 전환은 모든 부분에 적용됩니다.
9. 부처님의 경우에 1인칭으로 사용하는 것(예, sato assasāmi)과 빅쿠의 경우에 3인칭으로 사용하는 것(예, satova passasati)을 제외하면, 주된 차이점은 아-나-빠-나 사띠 숫따(MN 118)의 까-야-누빳사나-부터 담마-누빳사나-까지에 빠자-나-미(pajānāmi)가 식카띠(sikkhati)로 교체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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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너뛴 부분에는 까-야-누빳사나-, 웨다나-누빳사나-, 찟따-누빳사나-, 그리고 담마-누빳사나-의 끝 부분까지 네 섹션을 포함됩니다. 까-야-누빳사나-(kāyānupassanā)에서, 빅쿠에 대한 ‘sabbakāya 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가 부처님에 대해서는 ‘sabbakāya paṭisaṁvedī assasissāmī’ti pajānāmi’로 바뀝니다. 마지막으로, 담마-누빳사나-(dhammānupassanā)에서, 빅쿠에 대한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가 부처님에 대해서는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pajānāmi’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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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서, 빠자-나-미(pajānāmi)는 ‘나는 안다’를 의미하고 식카띠(sikkhati)는 ‘(빅쿠가) 이와 같이 수행한다’를 의미합니다. 잇차-나갈라 숫따(SN 54.11)에서, 붓다께서는 아래 #12에 명시된 바와 같이 ‘쾌적한 머뭄’의 과정을 상기/재현하셨고, 반면에 세카 빅쿠(sekha bhikkhu)는 #11에 명시된 바와 같이 그런 식으로 수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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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 교체는 #8에서 언급했듯이, 웨다나-누빳사나-(vedanānupassanā)와 찟따-누빳사나-(cittānupassanā)에 대해서도 모든 해당 구절에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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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차이점은 #11와 #12에서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아-나-빠-나사띠 사마-디 = 아리야 위하-라, 브라흐마 위하-라, 따타-가따 위하-라
10. “Yañhi taṃ, bhikkhave, sammā vadamāno vadeyya: ‘ariyavihāro’ itipi, ‘brahmavihāro’ itipi, ‘tathāgatavihāro’ itipi. Ānāpānassatisamādhiṃ sammā vadamāno vadeyya: ‘ariyavihāro’ itipi, ‘brahmavihāro’ itipi, ‘tathāgatavihāro’ itipi.”
번역: “붓다의 그 쾌적한 머뭄을 성스런 머뭄(Noble dwelling), 브라흐마- 머뭄(Brahmā dwelling), 따타-가따 머뭄(Tathāgata dwelling)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아-나-빠-나사띠 사마-디를 ‘성스런 머뭄’, ‘브라흐마- 머뭄’, ‘따타-가따 머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수행자(세카-)는 아-나-빠-나사띠로 진전을 이룬다
11. “Ye te, bhikkhave, bhikkhū sekhā appattamānasā anuttaraṃ yogakkhemaṃ patthayamānā viharanti tesaṃ ānāpānassatisamādhi bhāvito bahulīkato āsavānaṃ khayāya saṃvattati.”
번역: “아직 아라한과를 성취하지 못한 수행자(세카)인 빅쿠들에게는 아-나-빠-나사띠 사마-디의 수행이 아사와의 종결(즉,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것)로 이어진다.”
부처님(또는 아라한)은 쾌적한 마음 상태를 위해 아-나-빠-나사띠로 사신다
12. “Ye ca kho te, bhikkhave, bhikkhū arahanto khīṇāsavā vusitavanto katakaraṇīyā ohitabhārā anuppattasadatthā parikkhīṇabhavasaṃyojanā sammadaññāvimuttā, tesaṃ ānāpānassatisamādhi bhāvito bahulīkato diṭṭhadhamma sukha vihārāya ceva saṃvattati satisampajaññāya ca.”
번역: “아라한인 빅쿠, 즉 번뇌를 제거하고 성스런 길을 완성한 빅쿠에게 아-나-빠나사띠 사마-디는 마음챙김과 주의깊음으로 이 생에서 괘적한 삶을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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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육체로 태어난) 부처님이나 아라한도 일상 생활에서 까-마 산냐-(kāma saññā)를 경험합니다. 까-마 산냐-와 함께 사는 것은 모든 번뇌를 제거하신 부처님에게도 마음에 스트레스가 됩니다.
따라서 동의어: 아리야 위하-라, 브라흐마 위하-라, 따타-가따 위하-라
13. “Yañhi taṃ, bhikkhave, sammā vadamāno vadeyya: ‘ariyavihāro’ itipi, ‘brahmavihāro’ itipi, ‘tathāgatavihāro’ itipi. Ānāpānassatisamādhiṃ sammā vadamāno vadeyya: ‘ariyavihāro’ itipi, ‘brahmavihāro’ itipi, ‘tathāgatavihāro’ itipī”ti.”
번역: “따라서, ‘아-나-빠-나사띠 사마-디를 ‘성스런 머뭄’, ‘브라흐마 머뭄’, ‘따타-가따 머뭄’이라고 올바르게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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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브라흐마와 따타-가따는 표준적 사용은 아니지만, 아라한과 붓다를 지칭할 때 사용될 수 있으며, 실제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여기서 브라흐마는 브라흐마 세계에 있는 유정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잇차-난갈라 숫따(SN 54. 11)의 끝입니다.
붓다께서는 왜 아-나-빠-나사띠를 하시는 것인가?
14. 붓다(또는 아라한)께서 이미 성스런 길 요소와 반대되는 것을 버리셨다면, 왜 아-나빠-나사띠를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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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마음에 안도/해방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까-마 산냐-가 없이 되는) ‘아-나-빠-나 사띠 사마-디’가 아-나-빠-나사띠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최종 결과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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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 결과는 (뿌툿자나나 일상 생활 중의 아라한에게도 항상 나타나는) 까-마 산냐-를 극복하고 왜곡된 산냐-에서 벗어난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로 마음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세카(아라한 단계 아래의 성자)는 위빳사나-(특히 삿따 봇장가를 육성)를 하기 위해 사띠빳타-나 부-미에 들어가는 반면, 아라한은 왜곡된 산냐-에서 마음을 해방시켜 이 생에서 쾌적한 머뭄(딧타담마 수카 위하-라-야)을 위해 자주 사띠빳타-나 부미[역주: 아라한 팔라 영역]에 접근합니다. 후자가 붓다께서 아-나-빠-나 사띠 사마-디와 함께 사띠빳타-나 부-미[역주: 즉, 아라한 팔라 영역]에서 시간을 보내시는 것을 선호하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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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을 ‘아-나-빠-나사띠를 함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본질적으로 ‘사띠빳타-나를 함양하는 것’과 같지만, 사띠빳타-나가 더 자세한 내용을 제공합니다. ‘아-나-빠-나사띠 ㅡ 사띠빳타-나와 관계’를 참조하세요.
아-나-빠-나사띠와 사띠빳타-나 부-미
15. 사띠빳타-나를 육성(함양)하는 목표는 왜곡된 내장 산냐-에서 마음을 벗어나게 하여 왜곡된 산냐-에서 해방된 사띠빳타-나 부-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띠빳타-나 부-미 ㅡ 로까 산냐-에서 벗어남’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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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왜곡된 산냐-에서 자유로우므로,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는 동안에는 아윗자-가 촉발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꾸살라물라의] 빠띳짜 사뭅빠-다가 시작될 수 없고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빠띳짜 사뭅빠-다에서 '빳짜야-'는 무슨 의미인가?’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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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7가지 상요자나가 남아 있더라도(사띠빳타-나 부-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처음 3가지가 끊어져야 함)[역주: 최소한 수다원도로서 1가지가 끊어져야 함], 사띠빳타-나 부-미에 있는 동안에는 마음이 일시적으로 모든 오염에서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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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요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에 아윗자-가 일시적(임시적)으로 없어지면, 삿따 봇장가를 육성하고 남아 있는 도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빠띳짜 사뭅빠-다에서 '빳짜야-'는 무슨 의미인가?’를 참조하세요.
16. 앞에서 논의했듯이, 아라한과 부처님도 일상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까-마 산냐-인) 왜곡된 산냐-를 경험합니다.
아라한도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로 인해 ‘마음의 동요’(오염이 아님)를 겪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깜마 위빠-까로 인해 육체적 둑카/수카 웨다나-를 겪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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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숫따에서 아라한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틸락카나(Tilakkhana)를 숙고하는 것이 권장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16 results for diṭṭhadhammasukhavihārāya’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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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락카나에 대한 숙고는 아라한이 사띠빳타-나 부-미 또는 아-나-빠-나사띠 사마-디[역주: 아라한 팔라 영역]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깐케이야 숫따는 잇차-난갈라 숫따와 유사하다
17. ‘Kaṅkheyya Sutta (SN 54.12)’는 잇차-난갈라 숫따와 유사합니다. 거기서 ‘세코 위하-로(sekho vihāro)’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그 경의 첫 구절에서 수행자 빅쿠(세카)가 아-나-빠-나사띠에 머무는 것을 나타냅니다.
“Ekaṃ samayaṃ āyasmā lomasakaṃbhiyo sakkesu viharati kapilavatthusmiṃ nigrodhārāme. Atha kho mahānāmo sakko yenāyasmā lomasakaṃbhiy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ntaṃ lomasakaṃbhiy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mahānāmo sakko āyasmantaṃ lomasakaṃbhiyaṃ etadavoca: “so eva nu kho, bhante, sekho vihāro so tathāgata vihāro, udāhu aññova sekho vihāro añño tathāgata vihāro”ti?”
번역: “한 때, 로마사완기-사(Lomasavaṅgīsa) 존자께서 석가족의 영역인 까삘라왓투 근처에 있는 바얀 트리 사원(Banyan Tree Monastery)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석가족의 마하-나-마(mahānāma)가 로마사완기-사 존자께 다가가서 절하고 한쪽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반떼(Bhante)님, 수행자의 명상/머뭄(세코 위하-로)과 아라한의 명상/머뭄(따타-가따 위하-로)이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수행자의 명상/머뭄이 아라한의 명상/머뭄과 다릅니까?’ ”
18. “Na kho, āvuso mahānāma, sveva sekho vihāro, so tathāgatavihāro. Añño kho, āvuso mahānāma, sekho vihāro, añño tathāgatavihāro. Ye te, āvuso mahānāma, bhikkhū sekhā appattamānasā anuttaraṃ yogakkhemaṃ patthayamānā viharanti, te pañca nīvaraṇe pahāya viharanti. Katame pañca? Kāmacchandanīvaraṇaṃ pahāya viharanti, byāpādanīvaraṇaṃ … pe … thinamiddhanīvaraṇaṃ … uddhaccakukkuccanīvaraṇaṃ … vicikicchānīvaraṇaṃ pahāya viharanti.
Yepi te, āvuso mahānāma, bhikkhū sekhā appattamānasā anuttaraṃ yogakkhemaṃ patthayamānā viharanti, te ime pañca nīvaraṇe pahāya viharanti.”
번역: “마하-나-마 도반님, 수행자와 아라한의 명상은 같지 않으며, 서로 다릅니다. 수행자 빅쿠들은 닙바-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은 섯가지 장애(빤짜 니-와라나)를 버리고자 명상합니다. 다섯가지 장애는 무엇일까요? 까-막찬다(kāmacchanda), 브야-빠-다(byāpāda), 티나밋다(thinamiddha), 웃닷짜꾸꿋짜(uddhaccakukkucca), 위찌낏차-(vicikicch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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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요점은 세카 위하-라(sekha vihāra)가 명상 세션(meditation session, 명상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것은 수행자 빅쿠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아-나-빠-나사띠를 육성하면 사띠빳타-나, 삿따 봇장가를 충족시킨다
19. 그 시리즈의 나머지 숫따인 ‘Paṭhamaānanda Sutta (SN 54.13)’(위 #3에 간략히 논의됨)부터 ‘Āsavakkhaya Sutta (SN 54. 20)’까지는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를 육성하면 닙바-나 또는 아라한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모든 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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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모든 숫따들을 (기계적으로) 번역한 사람들이 숫따의 명백하고 명확한 내용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습니다. 위 링크의 영어 번역본을 읽어 보세요. 모든 영어 번역가들이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때 번역했습니다.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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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모두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가 ‘호흡 명상’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놀랍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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