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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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가르침이 지닌 핵심 문제

 

원문: Historical Background 섹션의 ‘Key Problems with Mahāyāna Teachings’ 포스트

- 2019년 9월 2일 개정; 2021년 6월 11일 개정

 

1. [대승 가르침의] 주된 문제는 붓다 담마의 근본 교리와 충돌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아주 오랜 세월 후에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자신의 노력으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셨다는 것에, 대승주의자들은 ‘바라밀다(pāramitā)’를 충족하여 붓다가 되는데 수많은 겁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 * 그 다음, 그들은 돌아서서 붓다 담마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개선’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Background on the Current Revival of Buddha Dhamma’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붓다께서 발견하신 궁극의 자연법칙을 어떻게 ‘개선’하거나 ‘개정’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이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2. 대승불교도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보살 서원(Bodhisattva vow)’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 존재가 붓다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각 사람은 보살(Bodhisattva)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 오래 전에 이 개념을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중생이 무한히 많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각 인체에는 방대한 수의 미시적 존재가 있습니다. ‘There are as many creatures on your body as there are people on Earth!’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이 지구에는 1000조 마리의 개미가 있습니다.  https://www.ask.com/question/how-many-ants-are-there-in-the-world 를 참조하세요. 아니면 그들은 [인간 외의] 다른 유정체를 고려하지 않는가요?

  • * 우리는 지난 1800여년 동안 의미있는 수의 아라한이 없었다는 것을 압니다. 무수한 존재들이 붓다의 지위는 고사하고 아라한의 지위에 도달하는 어떤 현실적인 방법이 있는가요?

  • * 이 겁(기본적으로 우주의 지속시간, 즉 약 300억년)에 4분의 부처님이 출현하셨습니다. 또 한 분의 부처님이 더 출현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예외적입니다. 이 겁 이전에는 30 겁(약 1조 년!) 동안 한 분의 부처님도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붓다가 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까요, 즉 얼마나 오랫 동안 보살로 남아 있어야 할까요? 그리고 모든 중생(또는 오늘날의 인구 만이라도)들이 동시에는 고사하고, 동일한 겁에 붓다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진심일까요?

 

3. 부처님의 반열반후 500년이 되기도 전에, 인도의 대승불교도(Mahāyānist)들은 붓다 담마를 개선할(다듬을) 뿐만 아니라 붓다 담마와 이질적인 개념을 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붓다 담마가 500여년 후에 개선이 필요했다면, 그들은 어떻게 업데이트 과정을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그렇게 많은 변화와 관련하여 그들이 상당한 수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일어난 일은 그 반대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원래의 담마와 일치합니다. 사람들은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에 있는 그 이질적인 개념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될 것입니다.

 

4. 이 수정 과정을 시작한 사람들은 열반의 중심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와 같은 개념을 결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들을 그들의 용어(관점)로 정의한 다음, 더 많은 개념을 발명함으로써 그 용어를 설명하는 미끄러운 경사로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많은 대승 문헌을 영어로 번역한 애드워드 콘즈(Edward Conze)의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 * “……기원전 약 100년(부처님의 빠리닙바-나로부터 약 400년 후)에, 인도의 많은 불교도들은 기존 교리가 진부하고 쓸모없게 되었다고 느꼈다. 담마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구, 새로운 사회 환경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항상 새로운 재형성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에서, 그들은 결국 대승불교로 알려지게 된 새로운 문헌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이 문헌의 창작은 인류 역사에 알려진 가장 중요한 창조적 에너지의 분출 중 하나이며, 약 4~5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은 [기존 교리의] 반복만으로는 종교를 활발하게 유지할 수 없다고 믿었다. 끊임없는 혁신으로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그 종교는] 화석화되고 생명력을 주는 자질을 잃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 * ( ‘에드워드 콘즈의 역사 연대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철학적 주장들이 에드워드 콘즈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상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그 개념들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필자는 ‘텅빔/공(emptiness)’이라는 개념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5. 나가르주나(Nagarjuna), 바수반두(Vasubandhu), 및 아상가(Asanga)와 같은 대승 ‘철학자’들 중 아라한(Arahant) 또는 소따-빤나(Sotāpanna)로 기록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이론’을 가진 오늘날의 철학자와 같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라한이라는 개념을 싫어했습니다.

 

  • * 대승경(Mahāyāna sutra)은 기원후 150-250년에 인도에 살았던 나가르주나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은 기원후 200년 이전에, 즉 부처님의 빠리닙바-나(반열반)으로부터 약 700년 이전에 어딘가 숨겨지게 되었습니다.

  • * 따라서 나가르주나(Nagarjuna)와 같은 인도 지식인은 소크라테스 시대의 철학자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주어진 시대에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일치하는 온갖 종류의 추측(추정)을 합니다.

  • * 붓다께서는 이 결과에 대해 경고하셨는데, “담마처럼 보이고 담마처럼 느껴지는 다른 버전이 있을 것이다. 시중에 모조 금이 나오면, 진짜 금은 숨겨지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addhamma Patirupaka Sutta (SN 16.13)’을 참조하세요). 그것은 1800여년 이상 동안 있어왔습니다.

  • * 하지만 진실은 결국 밝혀집니다. 그 때가 지금일 수 있습니다.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수백 년 동안 숨겨져 왔습니다.

 

6.  그렇다면,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 선조들의 이 수정 사항들은 무엇일까요?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대승불교도들의 다섯 가지 교리적 ‘혁신’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습니다. ‘에드워드 콘즈의 역사 연대기’를 참조하세요.

 

  • * 목표와 관련하여, ‘아라한 사상(이상)’에서 ‘보살 사상(이상)’으로 전환이 있다.

  • * 새로운 구원의 방법이 마련(고안)되었으며, 그것은 자비가 지혜와 동등하게 되었다.

  • * 믿음은 신들에 대한 새로운 판테온(pantheon)으로 규정된 새로운 범위가 주어진다.

  • * 완전히 새로운 미덕인 ‘방편의 기술(upayakausalya)은 실천자(수행자)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것은 붓다 담마에서 가장 높은 미덕인 지혜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다.

  • * ‘텅빔(Emptiness)’, ‘그러함(Suchness)’ 등과 같은 항목을 다루는 논리 정연한 존재론적 교리가 마련되었다.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과 비교하여 이 수정 사항 각각의 중요한 모순을 지적하고(아래 1~5 참조)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1). 붓다 담마의 기본 개념은 사람마다 독특한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 증오, 무지가 마음을 오염시킵니다. 그 때문에, 각 사람은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그 결과로 ‘그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고’, 고통/괴로움은 재탄생 순환(윤회)의 최종(순) 결과입니다. 사람은 마음을 정화함으로써 이 재탄생 순환에서 벗어납니다. 이 일을 성취한 자가 아라한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정화할 수 없습니다. 열반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주요 담마 개념’ 섹션의 ‘닙바-나(Nibbān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2). 모든 번뇌의 마음을 정화할 때 열반을 얻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궁극적인 지혜, 즉 빤냐-(paññā)를 가질 때입니다. 자비를 빤냐-(paññā)와 동일시할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최대로 자비로울 수 있으나, 그것이 무지를 제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범천계에 있는 그 존재들은 어떤 증오심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네 가지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ara, 범천으로 머무는 자질)인 멧따-(mettā), 까루나-(karunā), 무디따-(muditā), 우뻭까(upekkha)를 완성했습니다. 그들은 혐오스러운(증오하는) 생각의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성제에 대해) 무지하여 언젠가는 사악처에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또한 중대한 모순입니다. ‘세 단계 실천’ 섹션의 ‘닙바-나의 소따빤나 단계(Sotāpanna Stage of Nibbān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3). 붓다께서는 인간계의 삶이 (아나함에게 예약된 곳을 제외하고 ) 다른 어떤 곳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열반에 도달하기가 가장 쉬운 곳이 인간계이기 때문입니다. 더 높은 영역에 있는 어떤 존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들과 우리의 장점(공덕)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다른 존재를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오직 붓다(Buddha), 담마(Dhamma), 상가(Saṅgha)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어떤 유정체도 닙바-나(열반)를 성취하려는 우리의 목표를 도울 수 없습니다.

(4). ‘방편의 기술’, 또는 누군가가 생각해 낸 어떤 다른 용어든, 위 (2)의 자비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런 개념은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탐욕과 증오가 없어져도 여전히 무지가 있으면, 무지로 인해 탐욕과 증오가 다시 돌아옵니다(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육성하여 닙바-나(열반)을 얻습니다.

(5). 텅빔(emptiness) 또는 순야-따(sunyāta, 공)와 같은 이 모든 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의 설명(묘사)은 단지 많은 빈(공허한) 말일 뿐입니다. 그것들에는 원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훨씬 더 간단한 설명이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대승불교도들은 이 용어들에 대한 대체 설명을 다시 고안해야 했습니다. 원래 의미는 (1) ~ (4)에 언급된 그 수정 사항과 충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7.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 버전을 따르는 사람들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1) 그들은 (필자가 테라와다 전통에서 태어난 것처럼) 마하-야-나 전통에서 태어났습니다. (2) 그들은 다른 버전의 불교를 접한 적이 없습니다. 마하-야-나(대승) 버전이 지닌 문제는 그들이 만든 것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때는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과 현대 과학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그 특성을 바꾸기 시작할 때입니다.

 

  • * 가장 눈에 띄는 모순은 대부분의 대승 전통에서 ‘모든 존재가 깨달을 준비가 될 때까지 깨달음을 구하지 않겠다’는 맹세입니다. 위의 #2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것이 적어도 요즘에는 명백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고의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를 명백히 위반하는 것입니다.

  • * 모든 교파/종파에서 모순되는 자료를 뽑아 제거하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순수한 붓다 담마를 회복하는 방법에 대한 공개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테라와다 내의 잘못된 해석에 대한 문제를 논하기 전에 순야-따(sunyāta, 공)의 개념을 논해 봅시다. ‘What is Sunyata (Emptiness)?’ 포스트를 참조하십시오. 대승불교는 그들의 선조(대승 전통을 시작한 사람들)가 열반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야-따(sunyāta, 공)를 크게 다루려고 합니다. 대승의 가르침은 닙바-나(열반)가 추상적 개념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열반)은 단순한 개념입니다. ‘닙바나는 이해하기 어려운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또한, ‘Saddharma Pundarika Sutra (Lotus Sutra) – A Focused Analysis’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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