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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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 가르침이 지닌 핵심 문제

 

원문: Historical Background 섹션의 ‘Key Problems with Mahāyāna Teachings’ 포스트

- 2019년 9월 2일 개정; 2021년 6월 11일 개정; 2022년 10월 1일 재작성

 

주된 모순

 

1. 다음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대승 불교’의 단지 몇 가지 주된 모순입니다.

 

  1. (1) 대승불교들은 각자는 붓다후드(Buddhahood)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붓다후드는 고따마 부처님과 같은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사리뿟따(Sariputta) 존자와 같은 아라한들도 붓다후드를 얻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2. (2) ‘보살 서원(Bodhisattva vow)’은 훨씬 더 나쁩니다. 각 사람은 삼마- 삼붓다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삼마- 삼붓다가 되도록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들은 삼마- 삼붓다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3. (3) (고따마 부처님의 반열반 후 불과 500년쯤에) 대승 버전을 시작한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갱신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4. (4) 모든 유정체는 삼마- 삼붓다의 상태를 얻을 수 있습니다(모두는 불성이 있습니다). 

  • * 필자는 ‘묘법연화경(법화경) ㅡ 집중된 분석’ 포스트에서 위 (1)과 (2) 를 논의했습니다.

  • * 이 포스트는 그 아래 (3)과 (4)에 대해 논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위 (1)과 (2)에 있는 문제를 강조하겠습니다.

 

처음 두 모순의 요약

 

2. 위 (1)과 (2)이 주된 문제는 붓다 담마의 근본 교리와 충돌하는 것입니다.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는 아주 오랜 세월 후에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셨다는 것에, 대승주의자들은 ‘바라밀다(pāramitā)’를 충족하여 삼마- 삼붓다가 되는데 수많은 겁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 * 그 다음, 그들은 돌아서서 모든 이들(모든 유정체를 의미함)은 동시에 삼마- 삼붓다의 지위를 얻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정체가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 * 더욱이, 고따마 부처님께서는 삼마- 삼붓다의 독특함(‘Ekapuggalavagga (AN 170-187)’ 참조)과 삼마- 삼붓다와 아라한뜨 간의 차이를 명확하게 묘사하셨습니다(‘Sammāsambuddha Sutta (SN 22.58)’ 참조).

  • * 따라서, 삼마- 삼붓다와 아라한뜨 사이의 격차는 거대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라한뜨와 보통 사람(뿌툿자니까)사이에도 거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3. 대승불교도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보살 서원(Bodhisattva vow)’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 존재가 삼마- 삼붓다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각 사람은 보살(Bodhisattva)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 오래 전에 이 개념을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유정체가 무한히 많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각 인체에는 방대한 수의 미시적 존재가 있습니다. ‘당신의 몸에는 지구상의 사람 수만큼 많은 생명체가 있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이 지구에는 1000조 마리의 개미가 있습니다.  https://www.ask.com/question/how-many-ants-are-there-in-the-world 를 참조하세요. 아니면 그들은 [인간 외의] 다른 유정체를 고려하지 않을까요?

  • * 이 겁(기본적으로 약 45억년의 태양계 수명)에 4분의 삼마- 삼붓다가 출현하셨습니다. 또 한 분의 삼마- 삼붓다가 더 출현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예외적입니다. 이 겁 이전에는 30 겁(약 1조 년!) 동안 한 분의 삼마- 삼붓다도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붓다가 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까요, 즉 얼마나 오랫 동안 보살로 남아 있어야 할까요? 그리고 모든 유정체(또는 오늘날의 인구 만이라도)들이 동시에는 고사하고, 동일한 겁에 삼마- 삼붓다가 될 수 있을까요? [보살 서원과 관련된 그것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삼마- 삼붓다의 가르침이 시대에 뒤떨어질 수 있는가?

 

4. 문제 (3)에 대해, 대승 선조들은 붓다 담마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개선’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교(붓다 담마)의 현재 부흥 배경’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붓다께서 발견하신 궁극의 자연법칙을 어떻게 ‘개선’하거나 ‘개정’할 수 있을까요? 필자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누군가 답하기를 바랍니다.

 

  • * 부처님의 반열반후 500년이 되기도 전에, 인도의 대승불교도(Mahāyānist)들은 붓다 담마를 개선할(다듬을) 뿐만 아니라 붓다 담마와 이질적인 개념을 통합하기 시작했습니다.

  • * 붓다 담마가 500여년 후에 개선이 필요했다면, 그들은 어떻게 업데이트(갱신) 과정을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그렇게 많은 변화와 관련하여 그들이 상당한 수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 * 일어난 일은 그 반대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원래의 담마와 일치합니다. 사람들은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에 있는 그 이질적인 개념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대승(Mahāyāna) 자체는 그것이 발생한 인도에서 사라졌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철학으로 취급함

 

4. 이 개정 과정을 시작한 사람들은 열반의 중심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와 같은 개념을 결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들을 그들의 용어(관점)로 정의한 다음, 더 많은 개념을 발명함으로써 그 용어를 설명하는 미끄러운 경사로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많은 대승 문헌을 영어로 번역한 애드워드 콘즈(Edward Conze)의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 * “……기원전 약 100년(부처님의 빠리닙바-나로부터 약 400년 후)에, 인도의 많은 불교도들은 기존 교리가 진부하고 쓸모없게 되었다고 느꼈다. 담마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구, 새로운 사회 환경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항상 새로운 재형성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에서, 그들은 결국 대승불교로 알려지게 된 새로운 문헌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이 문헌의 창작은 인류 역사에 알려진 가장 중요한 창조적 에너지의 분출 중 하나이며, 약 4~5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은 [기존 교리의] 반복만으로는 종교를 활발하게 유지할 수 없다고 믿었다. 끊임없는 혁신으로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그 종교는] 화석화되고 생명력을 주는 자질을 잃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 * ( ‘에드워드 콘즈의 역사 연대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철학적 주장들이 에드워드 콘즈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상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다음 포스트에서 그 개념들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필자는 ‘텅빔/공(emptiness)’이라는 개념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아래를 참조하세요.

 

마하-야-나(대승)의 선조들은 아리야(성자)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었다

 

6. 나가르주나(Nagarjuna), 바수반두(Vasubandhu), 및 아상가(Asanga)와 같은 대승 ‘철학자’들 중 아라한(Arahant) 또는 소따-빤나(Sotāpanna)로 기록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이론’을 가진 오늘날의 철학자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아라한이라는 개념을 싫어했습니다.

 

  • * 대승경(Mahāyāna sutra)은 기원후 150-250년에 인도에 살았던 나가르주나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은 기원후 200년 이전에, 즉 부처님의 빠리닙바-나(반열반)으로부터 약 700년 이전에 어딘가 숨겨지게 되었습니다.

  • * 따라서 나가르주나(Nagarjuna)와 같은 인도 지식인은 소크라테스 시대의 철학자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주어진 시대에 ‘세계’에 대한 ‘지식’과 일치하는 온갖 종류의 추측(추정)을 합니다.

  • * 붓다께서는 이 결과에 대해 경고하셨는데, “담마처럼 보이고 담마처럼 느껴지는 다른 버전이 있을 것이다. 시중에 모조 금이 나오면, 진짜 금은 숨겨지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addhamma Patirupaka Sutta (SN 16.13)’을 참조하세요). 그것은 1800여년 이상 동안 있어왔습니다.

  • * 하지만 진실은 결국 밝혀집니다. 그 때가 지금일 수 있습니다. 아닛짜(anicca), 둑카(dukkha), 아낫따(anatta)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수백 년 동안 숨겨져 왔습니다.

 

그 갱신(업데이트)들은 붓다의 핵심 가르침을 침해한다

 

7.  그렇다면,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 선조들의 이 개정 사항들은 무엇일까요?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대승불교도들의 다섯 가지 교리적 ‘혁신’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습니다. ‘에드워드 콘즈의 역사 연대기’를 참조하세요.

 

  • * 목표와 관련하여, ‘아라한 사상(이상)’에서 ‘보살 사상(이상)’으로 전환이 있다.

  • * 새로운 구원의 방법이 마련(고안)되었으며, 그것은 자비가 지혜와 동등하게 되었다.

  • * 믿음은 신들에 대한 새로운 판테온(pantheon)으로 새로운 범위가 주어진다.

  • * 완전히 새로운 미덕인 ‘방편의 기술(upayakausalya)은 실천자(수행자)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것은 붓다 담마에서 가장 높은 미덕인 지혜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다.

  • * ‘텅빔(Emptiness)’, ‘그러함(Suchness)’ 등과 같은 항목을 다루는 논리 정연한 존재론적 교리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이다. ‘순야-따(또는 순냐-따)(텅빔/공)는 무엇인가?’를 참조.

 

8.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과 비교하여 이 개정 사항들의 중요한 모순을 논의하겠습니다(아래 1~5 참조).

 

(1). 붓다 담마의 기본 개념은 사람마다 독특한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 증오, 무지가 마음을 오염시킵니다. 그 때문에, 각 사람은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그 결과로 ‘그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고’, 고통/괴로움은 재탄생 순환(윤회)의 최종(순) 결과입니다. 사람은 마음을 정화함으로써 이 재탄생 순환에서 벗어납니다. 이 일을 성취한 자가 아라한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정화할 수 없습니다. 열반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주요 담마 개념’ 섹션의 ‘닙바-나(Nibbān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2). 모든 번뇌의 마음을 정화할 때 열반을 얻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궁극적인 지혜, 즉 빤냐-(paññā)를 가질 때입니다. 자비를 빤냐-(paññā)와 동일시할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자비로울 수 있으나, 그것이 무지를 제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범천계에 있는 그 존재들은 어떤 증오심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네 가지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ara, 범천으로 머무는 자질)인 멧따-(mettā), 까루나-(karunā), 무디따-(muditā), 우뻭까(upekkha)를 완성했습니다. 그들은 혐오스러운(증오하는) 생각의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성제에 대해) 무지하여 언젠가는 사악처에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또한 중대한 모순입니다. ‘세 단계 실천’ 섹션의 ‘닙바-나의 소따빤나 단계(Sotāpanna Stage of Nibbān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3). 붓다께서는 인간계의 삶이 (아나함에게 예약된 곳을 제외하고 ) 다른 어떤 곳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열반에 도달하기가 가장 쉬운 곳이 인간계이기 때문입니다. 더 높은 영역에 있는 어떤 존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들과 우리의 장점(공덕)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다른 존재를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오직 붓다(Buddha), 담마(Dhamma), 상가(Saṅgha)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어떤 유정체도 닙바-나(열반)를 성취하려는 우리의 목표를 도울 수 없습니다.

(4). ‘방편의 기술’, 또는 누군가가 생각해 낸 어떤 다른 용어든, 위 (2)의 자비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런 개념은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탐욕과 증오가 없어져도 여전히 무지가 있으면, 무지로 인해 탐욕과 증오가 다시 돌아옵니다(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육성하여 닙바-나(열반)을 얻습니다.

(5). 텅빔(emptiness) 또는 순야-따(sunyāta, 공)와 같은 이 모든 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의 설명(묘사)은 단지 많은 빈(공허한) 말일 뿐입니다. 그것들에는 원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더 간단한 설명이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대승불교도들은 이 용어들에 대한 대체 설명을 다시 고안해야 했습니다. 원래 의미는 (1) ~ (4)에 언급된 그 개정 사항과 충돌하였습니다.

 

이제, 위의 #1에 있는 문제 (4)를 다룹니다.

 

붓다 대비 삼마- 삼붓다

 

9. 붓다(Buddha)는 “바와를 멈춤(bhava + uddha)”을 의미합니다.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만이  우리가 축적한 바와의 여러 유형(깜마 에너지)을 움켜잡는 것을 어떻게 멈추는지를 알아낼 수 있고, 그래서 고통(괴로움)을 멈출 수 있습니다.

 

  • * 원칙적으로, 아라한은 새로운 바와를 움켜잡는 것을 멈추었기 때문에 아라한을 붓다(Buddha)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아라한도 삼마- 삼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이해하지 않고는 ‘바와 웃다(bhava uddha)’ 상태에 이를 수 없습니다. 

  • * 그러나 삼마- 삼붓다(Sammā Sambuddha)를 간단히 ‘붓다(Buddha)’로 지칭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아라한을 붓다(Buddha)라고 칭하지 않는 것이 [의미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더 좋습니다.

  • * 불성(Buddha nature)이라는 용어는 위의 이해가 없이 논의되어 있습니다. ‘Buddha-nature’ 기사를 참조하세요.

 

붓다고사는 마하-야-냐(대승) 개념을 테라와-다에 소개했다

 

10. 붓다고사는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의 절정기 중에 인도에 살았습니다. ‘잘못된 테라와다 해석 ㅡ 역사 연대기’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그도 베다 브라만(Vedic Brahmin)이었습니다. 그의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청정도론)는 베다 가르침과 마하-야-나(대승)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 * 붓다고사의 위숫디막가(청정도론)는 현재의 테라와-다(Theravāda)에 크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잘 맞지 않는 현재 테라와-다의 일부 측면이 있습니다. ‘붓다고-사와 위숫디막가 ㅡ 역사적 배경’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마하-야-나(대승)의 영향으로 인해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가 무상(impermanence)과 무아(no-self)로 오해(잘못된 이해/해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승불교도들은 교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붓다고사가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를 ‘호흡 명상’으로 해석한 것은 그의 베다적 배경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 * 따라서, 우리는 마하-야-나(대승)와 베다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테라와-다에 뿌리를 내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섹션을 참조하세요. 

 

요약

 

11.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 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여러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1) 그들은 (필자가 테라와다 전통에서 태어난 것처럼) 마하-야-나 전통에서 태어났습니다. (2) 그들은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최소로 접해 왔습니다. 마하-야-나(대승) 버전이 지닌 문제는 그들이 만든 것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과 모순(상반)되는 그 부분들을 바꾸기 시작할 때입니다.

 

  • * 고따마 부처님과 같은 삼마- 삼붓다의 가르침은 갱신될 수 없습니다. 붓다 담마는 시간/시대를 초월합니다(아깔리꼬, akāliko). 물론 삼마- 삼붓다의 가르침은 (윤회 스케일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만 지속됩니다. 자연에 대한 그 ‘시간/시대를 초월한 진리’는 다음 붓다가 재발견합니다. 모든 삼마- 삼붓다는 동일한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재발견하고 가르칩니다.

  • * 모든 교파/종파에서 모순되는 자료를 뽑아 제거하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순수한 붓다 담마를 회복하는 것에 대한 공개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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