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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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테라와다 해석 ㅡ 역사 연대기

 

원문: Historical Background 섹션의 ‘Incorrect Theravada Interpretations – Historical Timeline’ 포스트

- 2017년 4월 29일 작성; 2021년 12월 8일 개정

 

1. 테라와다 붓다 담마(Thēravada Buddha Dhamma)의 타락(질적 저하)은 지난 1500여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i) 1500여년 전에 붓다고-사(Buddhaghōsa)의 힌두 명상 기법 도입, (ii) 유럽 학자들이 1800년대 후반에 띠삐따까(Tipiṭaka, 삼장)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청정도론)를 모두 영어로 번역할 때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에 대한 잘못된 해석.

 

  • * 이 섹션의 여러 포스트에서, 위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것입니다(아래 #7 참조).

  • * 이 포스트에서는 논의에 중요한 역사 연대기에 대해 논의할 것입니다. 필자는 두 개의 이전 포스트인  ‘Thēravada: Problems with Current Interpretations of Key Concepts’와 ‘Historical Timelines of Buddha Dhamma and Sri Lanka – End of Sinhala Commentaries’를 결합(조합)하여 보다 간결한 이 포스트에 오게 되었습니다(두 개의 이전 포스트는 삭제했음).

  • * 이 섹션의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붓다 담마에 대한 훨씬 더 심한 왜곡이 대승(Mahāyāna), 선(Zen), 티벳(Vajrayāna)에 기반한 다양한 교파에서 분기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반열반 후 500여년 경에 인도에서 대승(Mahāyāna)의 일어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 이 포스트에서는 테-라와다 붓다 담마(Thēravada Buddha Dhamma)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여기서는, 처음에 테-라와다 붓다 담마(Thēravada Buddha Dhamma)의 연대기를 살펴보고, 순수한 담마가 묻히기(감춰지기) 시작한 때를 식별할 수 있는지를 알아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BCE = 기원전, CE = 서기(기원후) = AD).

 

  • * 기원전 563~483년: 고따마 붓다(Buddha Gotama)

  • * 기원전 377~307년: 스리랑카의 Anuradhapura 도시가 Pandukabhaya 왕에 의해 세워짐. 그러나 스리랑카에 사람이 군락을 형성한 것은 적어도 3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증거가 있음. 위키피디아 기사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Sri_Lanka에 스리랑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있음.

  • * 기원전 247년: 마힌다 테로 존자(Ven. Mahinda Thero)가 스리랑카의 Anuradhapura에 있는 싱할라 왕국에 붓다 담마(Buddha Dhamma)를 소개.

  • * 기원전 161~137년: 역사상 처음으로 Dutugemunu 왕이 스리랑카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

  • * 기원전 29년: 띠삐따까(Tipiṭaka, 삼장)(기원전 247년경에 제3차 불교 회의, 즉 제3차 ‘담마 상가야-나’에서 결집된 버전)가 모두 아라한들이 참석한 마지막 ‘상가야-나’인 제4차 ‘담마 상가야-나’에서 기록/승인완료됨. 이것이 현재까지 살아남은 빠알리 띠삐따까임.

  • * 서기 100~200년: 일부 기록에 따르면 신통력을 지닌 마지막 아라한인 말리야데와 존자(Ven. Maliyadeva)가 스리랑카에 살았음. 위키피디아 기사 https://en.wikipedia.org/wiki/Maliyadeva 참조. (그러나, 그 이후로 아라한의 지위에 도달한 ‘자-띠 소따-빤나’가 있었을 수는 있으나,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임).

  • * 기원전 100년: Akṣobhya Buddha에 관한 문헌과 함께 초기 대승경(Prajñāpāramitā 시리즈)이 아마도 기원전 1세기에 인도 남부에서 쓰여졌을 때, 대승불교가 시작되었을 수 있음. https://en.wikipedia.org/wiki/Mahāyāna 참조.

  • * 서기 150~250년: 대승불교의 창시자로 여겨진 나가르주나(Nāgarjuna)의 생애임. 나가르주나(Nāgarjuna)의 중심 개념은 모든 담마의 ‘공’(sunyata)이었음.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은 Mulamadhyamakakarika(중론)임.

 

2-1.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빠알리 띠삐따까(Pāli Tipiṭaka, 빠알리 삼장)는 아라한이 기록/승인완료하였으므로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붓다 담마는 기록되고 나서, 100~200년 내에 쇠퇴(질적 저하)하기 시작했습니다.

 

  • * 그렇지만, 서기 450년 경에 붓다고-사(Buddhaghōsa)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청정도론)를 저술할 때까지는 테-라와다(Thēravada)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 * 현재까지 테-라와다(Thēravada) 가르침에 영향을 미친 다른 주요 저술은 아짜리야 붓다고-사(Acariya Buddhaghōsa)와 같은 시기에 있었던 아짜리야 아누룻다(Acariya Anuruddha)의 아비담맛타 상가하(Abhidhammattha Sangaha)입니다. 그러나, 아비담마(Abhidhamma)에 대해 식견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청정도론)만큼 테-라와다(Thēravada)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 * 이때쯤에는, 이미 결정적인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마하-야-나(Mahāyāna)의 영향으로 싱할라어에 두 개의 새로운 낱말, 즉 අනිත්ය (anitya) 및 අනාත්ම (anātma)이 성공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그 두 낱말은 싱할라 낱말인 අනිච්ච(anicca)와 අනත්ත(anatta)를 대체하였습니다. 아래 #4를 참조하세요. 상카-라(saṅkhāra)와 윈냐-나(viññāna)와 같은 많은 빠알리 낱말은 별도의 싱할라어가 없으며, 즉 싱할라어에는 (빠알리 낱말과) 정확하게 동일한 낱말(සංඛාර 및 විඥ්ඥාන)이 나타납니다.

  • * 또 다른 결정적인 (사태의) 진전은 훨씬 더 나중인, 1800년대 후반에 일어났는데, 초기 유럽 학자들이 띠삐따까(Tipitaka)를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그것이 핵심 빠알리 용어인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가 무상(impermanence)과 무아(no-self)로 잘못 번역된 때입니다. 그 무렵에는 테라와다(Theravada)에서도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가 산스크리트 낱말인 anitya(아니트야)와 anātma(아나-트마)와 동일한 것으로 확립되었습니다. 

 

3. 먼저 붓다고-사(Buddhaghōsa)의 영향을 논의하기 위해, 붓다께서 빠리닙바-나(반열반)에 드신 지 대략 950년 후에 붓다고-사가 스리랑카에 오게 한 사건에 대한 연대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빅쿠 냐-나몰리(Bhikkhu Nyānamoli)가 편집한 연대기이며, 아래 참고문헌 1의 소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Devanampiyatissa 왕(기원전 307~276년):

  • * 마힌다 존자(Ven. Mahinda)가 Anuradhapura에 와서 Devanampiyatissa 왕의 왕국에 담마를 확립함.

  • * 마힌다 존자가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사원을 설립함.

 

Vattagamini 왕(기원전 104~88년):

  • * 왕이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을 설립하고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사원에서 분리됨.

  • * 불안감을 느낀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사원에서는 (왕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띠삐따까(Tipiṭaka)를 기록함.

 

Bhatikabhaya 왕(기원전 20년 ~ 서기 9년):

  • *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과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사원 사이에 공개적인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함.

 

Vasabha 왕(서기 66~110년):

  • * 띠삐따까(Tipitaka)에 대한 싱할라 주석서는 왕의 통치 후 어느때에 기록하는 것이 끝남(더 이상 추가되지 않음).

 

Voharika-Tissa 왕(서기 215~237년):

  • * 왕은 마하-위하-라(Mahāvihāra)와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을 모두 지원함.

  • * 아바야기리(Abhayagiri)는 웨툴야(Vetulya) (‘마하-야-나_Mahāyāna’?) 삐따까(pitaka)를 채택함.

  • * 왕은 웨툴야(Vetulya) 교의를 억압함.

 

Gothabhaya 왕(서기 254~267년):

  • * 왕은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사원을 지원함.

  • * 아바야기리(Abhayagiri)에 있는 60여명의 빅쿠가 웨툴야(Vetulya) 교의를 옹호하는 것 때문에 왕에 의해 쫓겨남.

  • * 인도 빅쿠인 상가밋다(Sangamitta)가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을 지원함.

 

Jettha-Tissa 왕(서기 267~277년):

  • * 왕은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사원을 지원하였으며, 상가밋따(Sangamitta)는 인도로 돌아감.

 

Mahāsena 왕(서기 277~304년):

  • * 왕은 인도에서 돌아온 상가밋따(Sangamitta)를 지원함.

  • * 왕이 마하-위하-라(Mahāvihāra)를 박해하였으며, 그 빅쿠들은 9년 동안 수도에서 내몰림(쫓겨남).

  • * (7층의 도서관이 있는) 마하-위하-라(Mahāvihāra)가 완전히 불타 없어짐.

  • * 상가밋따(Sangamitta)가 암살됨.

  • * 마하-위하-라(Mahāvihāra)가 재건축됨.

 

Sri Meghavaṇṇa 왕(서기 304~332년):

  • * 왕은 마하-위하-라(Mahāvihāra)를 지지함.

  • * 싱할라(Sinhala) 사원이 인도의 부다 가야(Buddha Gaya)에 설립됨.

 

Jettha-Tissa II 왕(서기 332~334년):

  • * 디빠왐사(Dipavamsa, 스리랑카 연대기)가 작성됨.

  • * 얼마간의 붓다닷따 테라(Buddhadatta Thera)의 책이 저술됨.

 

Mahānama 왕(412-434 CE):

  • * 붓다고-사(Buddhaghōsa)가 스리랑카에 와서 위숫디막가 (Visuddhimagga, 청정도론)와 다른 저작물을 작성함.

 

4. 필자는 냐-나몰리 존자(Ven. Nyānamoli)가 번역한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영어 번역본(참고문헌 1)의 소개를 읽어 보기를 정말 추천합니다. (참고문헌 1의 p. xxvii에서 시작하여) 냐-나몰리 존자의 글을 아래에 인용합니다.

 

“… 이제 기원전 1세기 말쯤(시기는 아주 모호함), 산스크리트어 불교 문학이 장엄한 긴 시대를 막 시작하면서, 산스크리트어는 국제 문화의 언어가 되는 길에 있었다. 실론(Ceylon, 스리랑카의 옛 이름)에서는, 빠알리어에 기반을 둔 정통 전통을 이미 수용한 대 사원(Mahāvihāra, 마하-위하-라)은 이제 인도의 새로운 사상을 공개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그 라이벌(Abhayagiri, 아바야기리)의 분열로 그런 태도를 확인하였다. …..기원후 1세기에 산스크리트 불교(‘히-나야-나_Hīnayāna’, 그리고 아마도 그 무렵에 ‘마하-야-나_Mahāyāna’)가 급속히 성장하여 국외로 퍼졌다.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은 자연스럽게 이 영향력 있는 진전의 일부를 연구하고 옹호하는 데 바빴을 것이며, 그 반면에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사원은 제공할 새로운 것이 없었다. ....Vasabha 왕의 통치 시기(서기 66~110년)에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주석서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로는 휴면 상태이고 더 이상 추가된 것은 없다. 아마도 이제 과거의 것에만 의존하고 있는 마하-위하-라(Mahāvihāra)는 그 자체가 이단들에 감염되고 있었던 것 같다. ……Mahāsena 왕의 통치 시기(서기 277~304년)에는 상황이 정점에 이르렀다. 왕실의 동의를 얻어 마하-위하-라(Mahāvihāra)를 박해하고 수도에서 그 빅쿠들을 추방함으로써,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은 9년 동안 승리를 누렸다. 그러나 옛(이전) 기관은 남부 지방에서 지지자들을 규합했고 왕은 회개했다. 빅쿠들은 돌아왔고, 왕은 소실되어 라이벌(아바야기리)을 장식했던 건물을 복원했다.”

 

“하지만, 이 일(사건)이 있은 후, 마하-위하-라(Mahāvihāra)는 빠알리어를 세련되게 하여 국내와 국외에서 국제적인 불교 문화의 분야에서 ‘현대’ 산스크리트어와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없다면, 국내에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음을 분명히 예견했을 것이다. 그것은 불교 가르침의 연구와 논의를 위한 언어로서, 싱할라어를 빠알리어로 대체하고 빠알리 문학 작문의 학교를 설립하는 것과 관련된 혁명적인 프로젝트였다. ………이 시기의 최초의 빠알리 원래 작품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 증거를 다룬) 디빠왐사(Dipavamsa)는 여기에 속한다(그것은 Mahāsena 왕의 통치 기간으로 끝나고, Samantapasadika에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천을 다룬) 위뭇띠막가(Vimuttimagga)는 이 시기(4세기)에 마하-위하-라(Mahāvihāra)가 원래의 빠알리 문학 작품을 통해 그 우월성을 재표명하려는 또 다른 초기 시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5. 다음은 참고문헌 2(p. 46)에서 Mahāsena 왕의 통치 기간(서기 277~304년) 중에 원래의 마하-위하-라(Mahāvihāra)가 파괴된 것에 대한 또 다른 설명입니다. “..정통 상가(Saṅgha)가 사용하기 위해 독실한 왕과 경건한 귀족의 관대함으로 지어진 마하-ㅡ위하-라(Mahāㅡvihāra), 놋쇠 빛의 궁전(Brazen Palace), 및 그런 모든 종교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고대 연대기(nikaya-Sangraha, p.14)에 따르면, 약 364개의 대학과 큰 사원이 뿌리째 뽑히고 파괴되었다고 한다.”

 

6. 따라서 (‘띠삐따까_삼장’에 대한) 싱할라어 주석을 편찬하는 역사적 전통은 4세기 또는 그 이전에 어딘가에서 중단되었으며, 원본 싱할라 앗타까타(Atthakatha, 주석서) 중 많은 부분이 원래 마하-위하-라(Mahāvihāra)가 불태워졌을 때 불탔을 수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마하-위하-라(Mahāvihāra)는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에 이득을 주고 있던 인도의 산스크리트 마하-야-나(Sanskrit Mahāyāna) 문학의 맹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빠알리어로 된 문헌을 편찬하려는 공동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5세기 초에 붓다고-사(Buddhaghōsa)가 등장하면서 빠알리 문헌을 편찬하려는 이 노력이 가속화되었습니다.

 

  • * 더 자세한 내용은 5세기에 편찬된, 스리랑카 역사에 대한 빠알리 역사 기록인 마하-왐사(Mahāvamsa)에서 볼 수 있습니다(참고문헌 3 참조).

  • * 그러나, 특히 스리랑카의 역사에 관한 마하-왐사(Mahāvamsa)의 대부분의 설명은 올바르지(타당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포스트를 쓰겠습니다.

  • * 그러나, 마하-왐사(Mahāvamsa)는 붓다고-사(Buddhaghōsa) 시대에 쓰여졌으므로, 붓다고-사(Buddhaghōsa)에 대한 설명은 정확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7. 다음 두 개의 포스트인  ‘Buddhaghōsa and Visuddhimagga – Historical Background’와 ‘Buddhaghōsa’s Visuddhimagga – A Focused Analysis’에서, 필자는 붓다고-사가 위숫디막가(청정도론)를 저술하게 된 사건과 그것이 힌두교의 베다 명상인 호흡 명상과 까시나 명상을 통합함으로써 어떻게 붓다 담마에 대한 첫 번째 주된 오염을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논의할 것입니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혔던  두 번째 주된 오염은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를 무상(impermanence)과 무아(no-self)로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은 ‘Background on the Current Revival of Buddha Dhamma’와 ‘Misinterpretation of Anicca and Anatta by Early European Scholars’에 논의 되어 있습니다.

 

참고문헌

 

1. Bhadantacariya Buddhaghōsa의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빅쿠 냐-나몰리 역, BPS 판, 1999년). (‘빅쿠 냐-나몰리’의 ‘소개’ 부분은 역사적 배경을 제공함).

2. G. P. Malasekara의 ‘Pāli Literature of Ceylon’ (Bharatiya Kala Prakashan, Delhi, 1928년), 2010 판.

3. Wilhelm Geiger의 ‘The Mahāvamsa – The Great Chronicle of Lanka’(1912년).  – සරල සිංහල මහාවංසය (Vijayasiri Vettamuni에 의한 Mahāvamsa의 싱할라 번역) (Sri Devi Printers, 2002년; 4쇄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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