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붓다고사의 위숫디막가 ㅡ 집중된 분석
원문: Historical Background 섹션의 ‘Buddhaghosa’s Visuddhimagga – A Focused Analysis’ 포스트
- 2017년 4월 29일 작성; 2021년 3월 16일 개정; 2021년 9월 3일 중요한 개정
붓다 담마에 두 번의 중대한 왜곡
1. 첫 번째 왜곡은 약 1500년 전에 붓다고사(Buddhaghosa)가 그의 주석서 위숫디막가(Visuddhimagga)에서 ‘호흡 명상’을 불교의 아나-빠-나사띠(Anāpānasati) 명상으로 도입하면서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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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로 심각한 왜곡은 더 최근에 유럽 학자들에 의해 단순한(순수한) 실수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산스크리트어에 기반을 둔 대승불교와 빠알리어에 기반을 둔 테라와다 붓다 담마를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닛짜(anicca)는 무상(impermanence)으로, 아낫따(anatta)는 ‘무아(no-self)’로 오역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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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스트에서는 첫 번째 문제의 배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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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문제에 대한 소개는 ‘초기 유럽 학자들의 아닛짜 및 아낫따에 대한 잘못된 해석’라는 포스트에 있습니다.
붓다고사에 대한 역사적 배경
2. 이 시리즈의 이전 포스트인 ‘붓다고-사와 위숫디막가 ㅡ 역사적 배경’에서 우리는 붓다고사(Buddhaghosa)가 스리랑카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은 그 포스트를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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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삐따까(Tipiṭaka)의 많은 부분이 축약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시대부터 시작하여, 띠삐따까(Tipiṭaka)에 있는 핵심 개념을 확장하고 설명하기 위해 주석서가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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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주석들의 대부분(적어도 마힌다 존자 시대부터)은 마힌다 존자 자신과 붓다고사 시대까지 950년이 넘는 동안 싱할라 아라한들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이것을 싱할라 앗타까타-(Sinhala Atthakathā, 참된 설명/주석)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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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 있는 레와따 존자라는 어떤 빅쿠가 붓다고사를 영입하여 스리랑카로 가서 싱할라 앗타까타(주석서)를 빠알리어로 번역하게 했습니다(아래 참고 문헌 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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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스트에서, 필자는 붓다고사가 그 싱할라 주석서를 번역하는 대신에 그 자신의 베다 개념을 빠알리어로 된 그의 주석서에 통합했다는 것, 특히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를 호흡 명상으로 묘사했다는 것을 가리켜 보이겠습니다.
싱할라 앗타까타(싱할라어로 된 원래 주석서)의 소멸
3. 그 싱할라 앗타까타는 붓다고사가 그 일을 마친 지 얼마되지 않아 사라졌습니다(대부분은 붓다고사 시대의 훨씬 이전에 마하위하라와 함께 소실된 것으로 보임). 그 원 주석서에 일어난 일에 관계없이, 테라와다 전통은 위숫디막가(청정도론)을 띠삐따까뿐만 아니라 원래의 주석서를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위숫디막가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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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다 문학의 학자인 붓다고사는 그 상할라 앗타까타를 편집하고 위숫디막가를 작성할 때 힌두 베다 개념을 위숫디막가에 통합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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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그는 진짜 불교의 아나-빠-나 바-와나(Anāpāna Bhāvana)를 호흡 명상으로 대체하고 또한 힌두 까시나 명상도 도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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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고사는 또한 틸락카나(아닛짜, 둑카, 아낫따)의 중요성을 무시했지만, 필자는 그가 그것들의 의미를 결코 왜곡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를 보이겠습니다. 틸락카나의 왜곡은 유럽인들이 띠삐따까(Tipiṭaka)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를 영어로 번역했을 때만 일어났습니다. ‘초기 유럽 학자들의 아닛짜 및 아낫따에 대한 잘못된 해석’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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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또한 띠삐따까(Tipiṭaka)에 대한 다른 주석서도 썼지만, 그것들은 널리 사용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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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붓다고사(Buddhaghosa)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를 작성할 때도 싱할라 앗타까타(Sinhala Atthakathā)를 참조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위숫디막가는 명상 기법과 관련하여, 남아 있는 원 주석 3개 및 띠삐따까와 잘 맞지 않습니다.
아라한이 참석한 마지막 불교 회의
4. ‘붓다고-사와 위숫디막가 ㅡ 역사적 배경’ 포스트에서 논의한 것처럼, 순수한 담마는 기원전 29년 스리랑카 마탈레에서 열린 제4차 불교 회의(Sangāyanā, 상가-야나-)까지 존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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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약 450년 후, 붓다고사(Buddhaghosa)가 스리랑카에 왔을 때 쯤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고(불교 중심지인 아누라다뿌라의 마하위하라가 한 번 소실되었음), 다른 것들 중에서 한동안 대승불교의 한 종파가 상황을 지배했습니다(위의 링크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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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2천여 년에 걸쳐 서서히 테라와다 붓다 담마의 (질적) 저하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i) 5세기 경에 붓다고-사(Buddhaghōsa)의 힌두 명상 기법 도입, (ii) 유럽 학자들이 1800년대 후반에 띠삐따까(Tipiṭaka, 삼장)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청정도론)를 모두 영어로 번역할 때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에 대한 잘못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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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0년대 후반 이래로 Rhys Davids, Eugene Burnouf, 및 Thomas Huxley 같은 유럽인들의 노력으로 붓다 담마의 부활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이 ‘왜곡된 담마’는 지난 200여년 동안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빠알리어로 된 3개의 원 주석
5. 비록 그 옛 싱할라 주석서는 없어졌지만, 부처님 시대에 빠알리어로 작성된 3개의 주석(Paṭisambhidāmagga, Petakopadesa, Nettippakarana)은 띠삐따까(Tipiṭaka)와 함께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붓다 담마의 보존’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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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고사(Buddhaghosa)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를 작성한 후,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띠삐따까(Tipiṭaka) 대신 위숫디막가(Visuddhimagga)를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했으며 그 원래의 빠알리 주석은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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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 가지 원래 빠알리 주석의 도움으로, 와하라까 테로(Wahraka Thero)께서는 지난 25년 정도 동안에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재발견’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불행히도, 와하라까 테로(Wahraka Thero)께서는 최근에 (안따라) 빠리닙바-나(Prinibbāna)에 드셨습니다. ‘와하라까 테로의 빠리닙바-나’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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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하라까 테로(Waharaka Thero)께서 지난 25년 정도 동안에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재발견’하신 후, 지난 2천여년 동안 몇 가지 핵심적인 잘못된 해석이 붓다 담마에 스며들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오염 시기는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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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의 잘못된 해석에 대해 붓다고사 자신이 책임이 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포스트에서, 필자는 붓다고사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음을 보이겠습니다. ‘초기 유럽 학자들의 아닛짜 및 아낫따에 대한 잘못된 해석’ 포스트에서, 필자는 유럽 선구자들이 빠알리어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가 산스크리트어 아니트야(anitya)와 아나트마(anathma)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렇게 번역했다는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붓다고사는 아닛짜와 아낫따의 잘못된 해석에 대한 책임이 없다
6. 먼저, 붓다고사가 비록 띨락카나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라는 낱말의 의미를 왜곡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를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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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붓다고사가 싱할라 앗타까따-(Sinhala Atthakathā)에서 자료를 가져와서 빠알리어로 자신의 주석서인 위숫디막가(Visuddhimagga)를 작성할 의도였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 참고 문헌 1의 [위숫디막가] 원래 빠알리 버전은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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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서 빠알리와 영어 텍스트를 비교할 때, 필자는 참고 문헌 2를 사용할 것입니다.
7. 예를 들어, 빠알리 위숫디막가의 p. 271(참고 문헌 1)에서는, “Catutthacatukke pana aniccānupassi ettha tava aniccata veditabbam. Aniccata veditabba. Aniccānupassanā veditabba. Aniccānupassi veditabbo”라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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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빅쿠 냐나몰리의 책(참고 문헌 2의 p. 282)에서, “그러나 넷째 테트라드(4군)에서, 여기서 무상(impermanence)을 숙고하는 것에 대해, 우선 ‘무상한(impermanent)’이 이해되어야 하고, 그리고 ‘무상(impermanence)’이 이해되어야 하고, 그리고 ‘무상에 대한 숙고(contemplation of impermanence)’가 이해되어야 하며, ‘사람이 무상(impermanence)을 숙고하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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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이 경우에 붓다고사(Buddhaghosa)는 올바른 빠알리 낱말인 아닛짜(anicca)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냐나몰리 빅쿠는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그 앞의 유럽 선구자들의 잘못된 해석을 따라 그것을 ‘무상(impermanence)’으로 잘못 번역했습니다.
8. 붓다고사(Buddhaghosa)의 원래 빠알리 버전은 또한 ‘아닛짜, 둑카, 아낫따 – 잘못된 해석’ 포스트에서 논의한 것처럼 세 가지 특성 간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1의 p. 617에, “Yadaniccam tam dukkha’nti (SN 3.15) vacanato pana tadeva khandhapancakam dukkham. Kasma? Abhinhapatipilana, abhiññāpatipilanakaro dukkhalakkhanam.”과 “Yam dukkham tadanatta’ti (SN 3.15) pana vacanato tadeva khandhapancakam anatta. Kasma? Avasavattanato, avasavattanakaro anattalakkhanam.”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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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포스트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이것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은 “아닛짜(anicca) 본질(의 것에 들러붙음)에 따라 둑카(dukkha)가 일어나고, 그래서 (그런 들러붙음은) 아낫따(anatta)”입니다.
빅쿠 냐나몰리에 의한 잘못된 번역
9. 그러나, 냐나몰리 빅쿠는 1800년대 초기 유럽 선구자들의 잘못된 해석에 따라 이 두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참고 문헌 2의 p. 663). “그 동일한 다섯 무더기는 ‘무상한(impermanent) 것은 고통/괴로움이다’고 말하기 때문에 고통/괴로움이다(S. iii, 22). 왜 그런가? 지속적인 억압 때문이다. 계속해서 억압받는 상태가 고통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 동일한 다섯 무더기는 ‘고통/괴로움인 것은 무아/비아(no-self, not-self)다’고 말하기 때문에 무아/비아다(S. iii, 22). 왜 그런가? 그것들에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무아/비아의 특징이다.”
10. 따라서, 아닛짜(anicca)를 무상한(impermanent)으로, 아낫따(anatta)를 무아/비아(no-self, not-self)로 해석한 것은 붓다고사가 아니라 1800년대 후반의 그 초기 유럽인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 이전 포스트들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스리랑카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후속 학자들은 그 두 가지 잘못된 해석을 퍼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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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Malalasekara, Jayathilaka, 및 Kalupahana와 같은 초기 싱할라 학자들은 영국 대학에서 그 유럽 선구자들로부터 불교를 배웠고 불교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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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 담마에 대해 그 초기 유럽인들이 어떻게 권위를 가졌는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른 포스트들에서 설명했듯이, 그들은 단순히 띠삐따까(Tipiṭaka)를 (산스크리트어로 인식된 어원을 사용하여)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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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삐따까(Tipiṭaka)를 번역하는 것은 어떤 다른 책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붓다 담마에 대한 깊은 배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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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hys Davids, Bernouf, 및 기타 사람들이 범한 핵심 실수는 빠알리어 아낫따(anicca)와 아낫따(anatta)가 산스크리트어 아니트야(anitya)(무상을 의미함) 및 아나트마(anathma)(무아를 의미함)와 동일하다고 가정한 것입니다.
붓다고사는 호흡 명상을 아나-빠-나사띠로 도입했다
11. 이제, 붓다고사(Buddhagosa)의 위숫디막가(Visuddhimagga)에서 힌두 명상 기법을 붓다 담마에 도입한 문제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다음은 붓다고사의 원래 빠알리 위숫디막가에서 인용한 핵심 구절(참고 문헌 1의 p. 254). “Tattha dighamva va assasantoti digham va assasam pavattayaṃto. Assasoti bahi nikkhamanavato. Passasoti anto pavisanavatoti vinayatthakathayam vuttam. Suttantatthakathasu pana uppatipatiya agatam. Tattha sabbesampi gabbhaseyyakanam matukucchito nikkhamanakale pathamam abbhantaravato bahi nikkhamati. Paccha bahiravato sukhumarajam gehetva abbhaantaram pavisanto talum ahacca nibbayati. Evam tava assapassasa veditabba.”
빅쿠 냐나몰리(Bhikkhu Nyanamoli)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영어로 올바르게 번역합니다(참조 문헌 2의 p. 265). “여기서, 길게 들이쉬는 것(assasanto)은 긴 들숨을 만드는 것이다. ‘assāsa는 바람이 나가는 것이고, passāsa는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라고 위나야 주석서(Vinaya Commentary)에 나와 있다. 그러나 숫딴따/숫따 주석서(Suttanta Commentary)에서는, 그것은 반대의 의미로 쓰여져 있다. 여기서, 유아가 모태에서 나오면, 먼저 안에서 바람이 나가고, 이어서 미세먼지와 함께 들어가지 않은 바람이 입천장을 때리고 [아기의 재채기와 함께] 소멸된다. 이것이, 첫째로, assāsa와 passāsa가 이해되어야 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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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위의 내용은 붓다고사 자신이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를 호흡 명상으로 언급했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그는 특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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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실제 불교의 아나-빠-나 바와-나(Anāpāna Bhāvana)는 호흡 명상이 아닙니다. ‘[7] 아-나-빠-나는 무엇인가?’
불교 명상은 까시나 대상을 사용하지 않는다
12. 붓다고사가 위숫디막가에 도입한 두 번째 문제는 평범한(세간적인) ‘까시나_kasina’ 명상을 열반으로 가는 실현 가능한 길로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참고 문헌 1의 제4장 및 제5장에서 까시나 대상을 만드는 것에 자세히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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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그는 참고 문헌 1의 p. 118에서 시작하여 ‘지편(earth kasina, 흙 까시나)’을 만드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아주 자세히 설명합니다. “..Nilapitalohitaodatsambhedavasena hi cattaro pathavikasinadosa. Tasma niladivaṇṇam mattikam aggahetva gangavahe mattikasadisaya arunavananaya mattikaya kasinam katabb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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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쿠 냐나몰리(Bhikkhu Nyanamoli)는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참고 문헌 2의 p. 123). “…이제 흙 까시나(earth kasina)가 네 가지 작물/열매가 되는 것은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또는 흰색의 흙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색깔있는 흙을 사용하지 말고 강가(Ganga)의 물이 흐르는 곳에서 새벽(여명)의 색과 같은 점토(찰흙)로 까시나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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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식으로, 붓다고사는 다른 유형의 까시나 대상을 어떻게 만드는지 매우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13. 결정적인 점은 참된 불교의 까시나(kasina) 명상은 어떠한 물질적 까시나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띠삐따까(Tipitaka)에서 물질적 까시나 대상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기술된 참조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참조(자료)를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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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Maha Rahulovada Sutta’(맛지마 니까야, MN 62)에서 라훌라 존자(Ven. Rahula)에게 참된 불교의 까시나 명상을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행될 수 있는 아-나-빠-나사띠 바-와나-(Ānāpānasati Bhāvanā)의 일부로 라훌라 존자에게 설명되었지만, 여기서는 사따라 마하- 부따(satara mahā bhuta)로 만들어진 내부 신체 부위를 숙고하고 외부 대상도 동일한 사따라 마하- 부따(satara mahā bhuta)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사람의 몸을, ‘나(me), 나자신(myself), 등’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kā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rāhulo bhagavantaṃ etadavoca: “kathaṃ bhāvitā nu kho, bhante, ānāpānassati, kathaṃ bahulīkatā mahāpphalā hoti mahānisaṃsā”ti? “Yaṃ kiñci, rāhula, ajjhattaṃ paccattaṃ kakkhaḷaṃ kharigataṃ upādinnaṃ, seyyathidaṃ—kesā lomā nakhā dantā taco maṃsaṃ nhāru aṭṭhi aṭṭhimiñjaṃ vakkaṃ hadayaṃ yakanaṃ kilomakaṃ pihakaṃ papphāsaṃ antaṃ antaguṇaṃ udariyaṃ karīsaṃ, yaṃ vā panaññampi kiñci ajjhattaṃ paccattaṃ kakkhaḷaṃ kharigataṃ upādinnaṃ— ayaṃ vuccati, rāhula, ajjhattikā pathavīdhātu. Ya ceva kho pana ajjhattikā pathavīdhātu yā ca bāhirā pathavīdhātu, pathavīdhāturevesā. 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pathavīdhātuyā nibbindati, pathavīdhātuyā cittaṃ virāje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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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세 가지, 즉, 아뽀(apo), 떼조(tejo), 와요(vayo)는 거기에서 같은 방식으로 논의됩니다. 참된 불교의 까시나(kasina) 명상을 하기 위해 까시나(kasina) 대상을 만들 필요가 없으며, 필자가 말했듯이 띠삐따까(Tipiṭaka)에는 까시나(kasina) 대상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논의한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닛짜와 아낫따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두 번째 문제
14. 다음 포스트인, ‘초기 유럽 학자들의 아닛짜 및 아낫따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역사적 배경’이라는 이 섹션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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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포스트로, 필자는 부처님의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요약할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이 섹션의 포스트들을 편집한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마무리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섹션은 이 섹션뿐일 것입니다.
참고 문헌
1. Bhadantacariya Buddhaghosa의 Visuddhimagga (The Path of Purification – Pāli Edition) (Theravada Tipiṭaka Press, 2010년).
2. Bhadantacariya Buddhaghōsa의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빅쿠 냐-나몰리 역, BPS 판, 1999년). (‘빅쿠 냐-나몰리’의 ‘소개’ 부분은 역사적 배경을 제공함).
3. Bimula Charan Law의 ‘The Life and Work of Buddhaghōsa’ (Low Price Publications, Delhi, 1923년), 2005 판.
4. G. P. Malalasekara의 ‘Pāli Literature of Ceylon’ (Bharatiya Kala Prakashan, Delhi, 1928년), 2010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