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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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고-사와 위숫디막가 ㅡ 역사적 배경

     

    원문: Historical Background 섹션의 ‘Buddhaghosa and Visuddhimagga – Historical Background’ 포스트

    - 2017년 4월 8일 작성; 2017년 4월 29일 개정; 2022년 8월 28일 개정

     

    1. 아짜리야 붓다고-사(Acariya Buddhaghōsa)는 지난 1500여년 동안 테-라와-다(Thēravāda) 불교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주석, 특히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청정도론)를 검토하기 전에, 그의 시대 이전에 일어난 몇 가지 중요한 사건과 그가 그 주석들을 작성하기 위해 스리랑카에 온 이유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 * 붓다고-사(Buddhaghōsa)가 스리랑카에 오기까지의 역사 연대기는 이 섹션의 이전 포스트인 ‘잘못된 테라와다 해석 ㅡ 역사 연대기’에 나와 있습니다.

    • * 이 포스트를 작성하는 데는 아래의 세 가지 참고 문헌에 있는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2. 첫째로, 우리는 아라한만이 초기  4번의 불교 회의(상가-야나-, Sangāyanā)에 참여했으며, 네 번째 회의는 기원전 29년 스리랑카 중부 지방의 현재 마탈레(Matale) 근처에 있는 알루위하-라(Aluvihāra) 사원(바위 사원)에서 열렸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붓다 담마의 보존’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띠삐따까(Tipiṭaka)는 싱할라 문자(빠알리에는 자체 문자가 없음)로 이 네 번째 상가-야나-(Sangāyanā, 불교 회의)에서 처음으로 (오늘날 존재하는 것으로) 완전히 기록/(승인)완료되었습니다.

    • * 따라서, 다음 세 가지를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i) 진짜 담마는 아라한들이 또한 아비담마 삐따까(Abhidhamma Piṭaka)를 완성한 것과 함께 기원전 29년에 존재했다. (ii) 오늘날 띠삐따까(Tipiṭaka)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버전이며,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이 삐띠따까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iii) 띠삐따가(Tipiṭaka)는 싱할라 문자를 사용하여 빠알리어로 기록되었다.

     

    3. 둘째로, ‘숫따 해석 ㅡ 웃데-사, 닛데-사, 빠띠닛데-사’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띠삐따까(Tipiṭaka)의 많은 부분이 축약(응축)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띠삐따까 숫따(Tipiṭaka suttā)를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은 그 포스트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상당한 혼란과 많은 모순을 야기했습니다.

     

    • * 부처님 시대부터 시작하여, 구전하기 쉽도록 고안된 축약(응축) 형태로 된 것을 확장하고 핵심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주석서가 작성되었습니다. 우리는 띠삐따까(Tipiṭaka)가 부처님의 빠리납바-나(반열반) 이후 약 500여년 동안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전 기간 동안 그것은 기억하기 쉽도록 고안된 형식이었기 때문에만 살아 남았고, 따라서 많은 세부 사항이 생략되었습니다.

    • * 예를 들어, 부처님의 첫 설법인 담마 짝까 빠왓따나 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 (SN 56.11))를 전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숫따(sutta)는 단 몇 페이지의 구절로 축약(응축)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가능했던 대부분의 구두 전달을 위해 한 숫따에 그  모든 정보를 응축(축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초기에, 빅쿠들은 대중에게 설법(데사나)을 할 때  세부 사항을 설명했습니다.

    • * 그러므로, 띠삐따까(Tipiṭaka)가 세대를 거쳐 구두로 전해지는 것 외에도 세부 사항도 구두로 전승되었습니다. 그러나 붓다 담마가 서기 100~200년경에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 그 세부 사항들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습니다(올바른 설명을 전달하기 위한 아리야, 즉 도과를 성취한 자들이 충분히 없었습니다). 물론 암기하기 쉬운 띠삐따가(Tipiṭaka)의 구절은 충실히 전달되었습니다.

    • * 위 마지막 불렛(글머리 기호)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핵심 문제를 설명합니다. 띠삐따까(Tipiṭaka)는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띠삐따가의 핵심 개념을 설명하는 아리야(Ariya)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 와하라까 테로 덕분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와하라까 테로의 빠리닙바-나’를 참조하세요.

     

    4. 비록 몇몇 주석이 빠알리어로 부처님 시대에 작성되었지만(띠삐따까 내에 세 개의 주석이 있음. 아래 참조), 대부분은 나중에(특히 마힌다 존자의 시대 이후) 싱할라어로 쓰여졌습니다. 그것은 문자 언어가 더 보편화되었을 때였습니다.

     

    • * (마힌자 존자의 시대부터 약 700년 후인) 붓다고-사(Buddhaghōsa)의 시대까지, 싱할라 앗타까타-(Sinhala Atthakathā)(Atthakathā는 attha + kathā로 합성된 낱말로서, ‘진리에 대한 설명’을 의미함)라고 불리는 그런 주석서가 방대하게 축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붓다고-사(Buddhaghōsa)가 스리랑카에 오기 전에 마하위하라(Mahavihara)가 불태워졌을 때 소실되었을 것입니다. 아래를 참조하세요.

    • * 붓다고-사(Buddhaghōsa)의 임무는 싱할라어(Sinhala)에서 빠알리어(Pāli)로 번역하는 것이었지만, 그 대신, 그는 몇 가지 자신의 주석(특히 ‘위숫디막가_Visuddhimagga’)를 만들었을뿐이며, 여기에 자신의 베다(Vedic) 개념을 통합했습니다. 아래를 참조하세요.

     

    5. #1에 언급된 포스트에 있는 연대기에서 알 수 있듯이, 붓다고-사(Buddhaghōsa)가 스리랑카에 도착하기 전에, 많은 원래 주석서의 파괴로 이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기원전 100년경에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에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이 설립된 사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래에서 논의하는 바와 같이, 그 다음에 스리랑카에서 붓다 담마의 오염(질적 저하)으로 이어졌는데, 위숫디막가(Visuddhismagga)를 저술함에 의해 오염이 가속화되었습니다.

     

    • * 수십 년에 걸쳐,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은 마하위하라(Mahavihara)의 라이벌이 되었으며, (Devanampiyatissa 왕 시대의) 마힌다 존자 이래로 종교 활동의 중심이었습니다.

    • * 왓지뿟따(Vajjiputta) 그룹에 속한 한 무리의 승려들이 인도의 Pallarama에서 온 것은 분명히 두 사원 사이에 이런 분열이 시작되게 했습니다(참고문헌 3의 p. 29). 이 왓지뿟따 종파는 제3차 불교 회의(상가-야나)에서 목갈리뿟따 띳사 테로 존자(Ven. Moggaliputta Tissa Thero)에 의해 테-라와-다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후예입니다.

     

    6. 나중에, Voharaka Tissa 왕의 통치 기간(서기 215~237년) 중에,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은 Vaitulya(Vetula) Piṭaka를 채택했습니다. 이때쯤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가 인도에서 지배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 * 마하위하라(Mahavihara)가 이 새로운 진전에 이의를 제기하자, Voharaka Tissa 왕은 Kapila 대신을 임명하여 조사하게 했고, 대신의 권고에 따라 왕은 모든 Vaitulya(Vetula) 책을 불태우라고 명령했습니다.

    • * 기억해야 할 요점은 ‘실론(스리랑카)의 문학 활동이 감소했고,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서기 150년에서 서기 350년 사이에 사실상 중단된 것 같다’(참고문헌 1의 p. xxiii)는 것입니다.

     

    7. Gothabhaya 왕의 통치 기간(서기 254~267 CE) 중에, Vaitulya(Vetula) 이단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왕이 다시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책을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도자 60명에게 [등에] 낙인을 찍어 추방했습니다.

     

    • * 추방된 사람들은 인도 남부의 Kavira에 정착했습니다. 그들이 거기 있는 동안 상가밋따(Sangamitta)라는 새로운 사람이 합류했습니다.

    • * 어느 날, 상가밋따는 목욕을 하던 중, 다른 사람들의 등에 있는 낙인을 보았고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8. 상가밋따(Sangamitta)는 스리랑카로 가서 Gothabhaya 왕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고, 왕은 상가밋따(Sangamitta)를 자신의 두 아들의 가정교사로 임명하였습니다.

     

    • * Gothabhaya 왕이 죽자, 그의 맏아들 Jettha Tissa가 왕이 되었지만 그는 상가밋따에 그다지 애착이 없었기 때문에 상가밋따는 인도로 돌아갔습니다. 14년 후 Jettha Tissa가 죽자, 동생 Mahasena가 왕이 되었습니다.

     

    9. Mahasena 왕은 상가밋따(Sangamitta)에 매우 애착이 있었고, 상가밋따(Sangamitta)는 복수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스리랑카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습니다.

     

    • * 상가밋따의 조언에 따라, Mahasena 왕은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와 붓다 담마에 피해를 입히는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왕은 마하위하라에 보시를 하는 것을 금지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마하위하라의 빅쿠들은 나라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 * 이때쯤, 스리랑카의 불교는 인도에서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의 일어남을 포함하여, 다른 요인들로 인해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아라한은 [실론] 섬에는 드물었고, 일부 있었다면 외딴 지역에 있었을 것입니다.

     

    10. 9년 동안, 상가밋따(Sangamitta)는 영광스럽게 살았고, 마하위하라(Mahavihara)의 재산을 약탈했으며, 결국 도서관이 있는 7층 건물을 불태웠습니다(참고 문헌 3의 p. 47). 사람들은 마하위하라에 일어난 일에 분노했고, Meghavaranabhaya 라는 왕의 대신(장관)에 의해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 * 그러나,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대신(장관)은 왕을 만나 민중을 달래기 위해 마하위하라에 보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왕은 사과했고 마하위하라를 재건했습니다.

    • * 그러나, 사람들은 상가밋따에 대해 매우 화가 났고, 아마도 왕도 모르는 사이에 상가밋따는 왕비의 명령에 따라 살해되었습니다.

     

    11. 손상이 이미 가해졌습니다. 또한 왕이 마하위하라를 재건했을 때, 복원된 마하위하라에 거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바야기리(Abhayagiri)에 있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붓다고-사(Buddhaghōsa)가 마하위하라(Mahavihara)에 왔을 때, 거기 있는 빅쿠들은 원래 아비야기리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 * 게다가, 마하위하라(Mahavihara)가 불타서 완전히 없어졌을 때, 많은 원본 싱할라 주석서(Sinhala Atthakathā)가 없어졌을 것입니다. 띠삐따까(Tipitaka)의 사본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곳에 있었지만, 얼마나 많은 주석서(Atthakathā) 사본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 어쨌든, 원래의 싱할라 주석서는 그 어느 것도 오늘날 존재하지 않습니다.

    • * 마하-야-나(Mahāyāna)는 인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아마도 스리랑카의 테-라와-다를 타락시키는 것에도 기여했을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는 (나가르주나, 바수반두, 등이 쓴 많은 새로운 수트라와 함께) ‘학자(전문가)들의 언어’가 되었고, 빠알리어는 경쟁에서 지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테라와다 해석 ㅡ 역사 연대기’를 참조하세요.

     

    12. (마하나마 왕의 통치기간 중인 서기 412~434년 사이에) 붓다고-사(Buddhaghōsa)가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쯤에, 그 주석서(Atthakathā) 중 일부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 * 냐나몰리 존자(Ven. Nyanamoli)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참고 문헌 1의 p. xviii). “..(붓다고-사의) 이 저작에는 앞서 주어진 인용문에 언급된 3가지 외에 여러 싱할라 주석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인(Porana)’ 또는 ‘옛 스승(Pubbacariya)’에 대한 언급(참조)이 있다. 그 사실은 완전한 방대한 주석서가 9세기 동안에 구축되었고 또는 그래서 그것은 반단따짜리야 붓다고-사(Bhandantacariya Buddhaghōsa)을 붓다(Buddha)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그리고, “..이 방대한 자료(사람들은 그 부피가 어마어마하다고 추측할 수 있음)를 반단따짜리야 붓다고-사(Bhandantacariya Buddhaghōsa)는 자신이 직접 편집하고 빠알리어로 번역하였다(띠삐따까 자체는 원래 빠알리어로 남아 있었다).”

    • * 그런데, ‘Porāna’는 ‘고대(옛)’를 의미하는 싱할라 낱말(지금은 Puräna)입니다.

    • * 그 앗타까타(Atthakatha, 주석서)의 자세한 설명은 인도에 남아 있는 불교도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아래에서 보듯이, 이것이 붓다고-사(Buddhaghōsa)가 [붓다 담마에 대한] 그 그림을 보게 된 곳입니다.

    • * 따라서, 싱할라 앗타까타(Atthakatha, 주석서)의 일부가 마하위하라의 파괴로 소실되었지만, 일부는 다른 곳에서 살아남아 재건된 마하위하라(Mahavihara)에 옮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13. 붓다고-사(Buddhaghōsa)는 인도의 보리수 근처에 살았던 베다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3개의 베다를 통달했으며 유명한 베다 학자였습니다. 그는 인도의 그 지역에 살았던 비구 레와따(Bhikkhu Revata)에 의해 불교로 개종했습니다.

     

    • * Bimula Charan Law(참고 문헌 2의 p. 6 참고)는 레와따 존자가 붓다고-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 싱할라 주석서는 진짜입니다. 그것들은 영감이 넘치고 지혜가 깊은 마힌다 존자에 의해 싱할라어로 작성된 것입니다. 마힌다 존자는 세 차례의 회의(상가-야-나)에서 승인된 부처님의 법문과, 사리뿟따 존자와 다른 존자들의 저술과 논거를 이전에 참조하셨고, 그것들은 싱할라 민족 중에 남아 있습니다. 거기로 가서 그것들을 공부하여 마가다(빠알리) 문법 규칙에 따라 번역하십시오. 그것은 모든 세상의 복지에 이바지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Malalasekara(참고 문헌 3의 p. 66 참고)는 그 요청을 다룬 매우 유사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 * 냐나몰리 존자도 또한 레와따 존자가 그 프로젝트를 위해 어떻게 붓다고사를 영입했는지에 대해 참고 문헌 1의 pp. xxxiv-xxv (소개)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참고 문헌 2의 pp. 31~39와 참고 문헌 3의 pp. 64~69도 참조하세요.

     

    14. 테-라와-다(Thēravāda) 전통에서 붓다고-사(Buddhaghōsa)의 작업에 부여된 중요한 위치는 참고 문헌 1에서 인용한 아래 인용문(p.  xii)에서 명백합니다.

     

    • * “..테-라와-다 빠알리(Thēravāda Pāli) 전통의 교리(Dhamma)는 세 가지 주요 층으로 편리하게 찾아볼 수 있다. (1) 이 중 첫 번째 층에는 빠알리 숫따 삐따까(Pāli Sutta Piṭaka)의 주요 권이 포함된다. (2) 두 번째 층은 아비담마 삐따까(Abhidhamma Piṭaka), 특히 밀접하게 관련된 책인 담마상가니(Dhammasangayaṃi), 위방가(Vibhanga), 빳타나(Patthana)다. (3)세 번째 층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의 저자가 완성했거나 완성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저자 자신이 편집하고 다시 빠알리어로 번역한 체계이다...”

    • * 오늘날에도, 많은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를 사용하고, 귀찮게(성가시게) 띠삐따까를 참조하지 않습니다.

     

    15. Malalasekara에 따르면(참고 문헌 3의 p. 66), 싱할라 전통은 붓다께서 빠리닙바-나(반열반)에 드신지 965년 후에 붓다고-사(Buddhaghōsa)가 스리랑카에 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위 연대기와 일치합니다.

     

    • * 스리랑카의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에 있는 마하위하라(Mahavihara)에 도착한 붓다고사는 사원 당국에 앗타까타-(Atthakathā)를 요청했습니다. 사원에서는 처음에는 꺼렸지만, 그가 학자라는 것을 확인한 후, 그에게 책들을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참고 문헌 1~3 참조).

    • * Bimula Charan Law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참고 문헌 2의 p. 8).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의 외딴 Ganthakaro viharo에 거주하면서, 그는 모든 언어의 뿌리인 마가다어(Maghdha)의 규칙에 따라 싱할라 앗타까타-(Sinhalese Atthakathā) 전체를 (빠알리어로) 번역했다.”

     

    16. 붓다고-사(Buddhaghōsa)가 “싱할라 앗타까타-(Sinhalese Atthakathā)를 빠알리어(Pāli)로 번역했다”는 이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 * 필자가 다음 포스트에서 논의할 것처럼, 그는 베다 개념(호흡명상, 까시나명상 등)의 많은 부분을 통합하여 그의 주석서를 작성했습니다.

    • * 위숫디막가(Visuddhimagga)가 띠삐따까(Tipiṭaka)와 (여전히 띠삐따까에 있는) 3개의 원래 빠알리 주석과 명백히 모순되는(불일치되는) 것은 붓다고-사의 위숫디막가 ㅡ 집중된 분석’에 논의되어 있습니다.

     

    17. Bimula Charan Law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진술을 합니다(참고 문헌 2의 p. 38). “...붓다고-사(Buddhaghōsa)의 번역 작업은 3개월 만에 완료되었다. 빠와라나(Pavarana, 안거후 죄 고백 및 참회 의식)를 보고 나서, 그는 회중의 우두머리(상가라자)에게 자신의 임무가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상가라자(Samgharaja)는 그를 많이 칭찬하고 마힌다(Mahinda) 존자가 싱할라어로 쓴 모든 저작물에 불을 질렀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의견을 말할 수 있습니다.

     

    • * Bimula Charan Law가 말하는 대로, 정말 그 작업이 3개월 만에 완료되었다면,  붓다고사는 비록 [주석서의] 일부만 남아 있었더라도 싱할라 앗타까타-(Sinhalese Atthakathā) 전체를 살펴볼 시간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 * 빅쿠의 우두머리(상가라자)가 [싱할라 주석서] 원본 책을 불질렀다는 사실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싱할라 주석서가 붓다고사 시대 이후에 정말로 소실되었습니다.

     

    18. 이 섹션의 다음 포스트 붓다고-사의 위숫디막가 ㅡ 집중된 분석에서, 필자는 위숫디막가가 붓다 담마를  대표하지 않는 이유를 논의합니다.

     

    • * 그러나,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모든 싱할라 앗타까타-(Sinhala Atthakathā)는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청정도론)가 출판된 직후에 소실되었고, 위숫디막가는 띠삐따까(Tipiṭaka) 자료를 설명하는 유일한 근원(출처)이 되었습니다.

    • * 최근까지, 특히 유럽인들이 띠삐따까(Tipiṭaka)와 붓다고사의 저작물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불교를 발견’할 때까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만 사용하고 띠삐따까(Tipiṭaka)를 참조도 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역사적 배경’ 섹션의 포스트들을 참조하세요.

     

    19. 게다가, 유럽인들이 (Rhys Davis와 다른 사람들을 시작으로) 띠삐따까(Tipiṭaka)를 번역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숫따(sutta)를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영어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 * 그러나, 빠알리 경을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며, 그 초기 주석은 띠삐따까(Tipiṭaka) 자료를 확장하는 데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것은 ‘숫따 해석 ㅡ 웃데-사, 닛데-사, 빠띠닛데-사’에서 논의됩니다.

    • * 게다가, 그 초기 유럽 학자들은 빠알리 낱말인 아닛짜(anicca)와 아낫따(anatta)를 ‘무상(impermanence)’과 ‘무아(no-self)’로 잘못 번역함으로써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초기 유럽 학자들의 아닛짜 및 아낫따에 대한 잘못된 해석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이것이 고 와하라까 테로(Waharaka Thero)께서 하신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테로께서는 빠띠삼비다막가(Patisambhidamagga), 뻬따꼬빠데사(Petakopadesa), 및 넷띱빠까라나(Nettippakarana)라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3개의 원 주석을 숙독함으로써 핵심 빠알리 낱말의 의미를 ‘재발견’하실 수 있었습니다. ‘붓다 담마의 보존’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참고문헌

     

    1. Bhadantacariya Buddhaghōsa의 ‘The Path of Purification (Visuddhimagga)’ (빅쿠 냐-나몰리 역, BPS 판, 1999년). (‘빅쿠 냐-나몰리’의 ‘소개’ 부분은 역사적 배경을 제공함).

    2. Bimula Charan Law의 ‘The Life and Work of Buddhaghōsa’ (Low Price Publications, Delhi, 1923년), 2005 판.

    3. G. P. Malalasekara의 ‘Pāli Literature of Ceylon’ (Bharatiya Kala Prakashan, Delhi, 1928년), 20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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