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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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콘즈의 역사 연대기

 

원문: Historical Background 섹션의 ‘Historical Timeline of Edward Conze’ 포스트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 불교의 일어남에 대한 역사 연대기가 논의됩니다. 

 

 2021년 9월 8일 개정; 2023년 6월 28일 개정

 

애드워드 콘즈(Edward Conze)는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 학자였으며, 대승 반야바라밀(Mahāyāna Prajnapāramitā), 즉 반야심경(Perfection of Wisdom sutrā)을 산스크리트 원본에서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Edward Conze’을 참조하세요.

 

(산스크리트 수트라-들은 나가르주나와 같은 대승 철학자들이 지은 것이며, 붓다께서 전하신(설하신) 원래 빠알리 숫따가 아닙니다. 수트라(sutra)는 숫따(sutta)에 대한 산스크리트 낱말입니다).

 

콘즈는 마하-야-나 수트라-(대승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On Indian Mahāyāna Buddhism’(1968년)라는 책에서 대승/선 학자인 D. T. Suzuki의 저작을 분석했습니다. 대승경에 대한 콘즈의 편견은 분명하지만, 필자는 그의 연대기를 [주제로] 선택했습니다. 그의 연대기는 마하-야-나(대승) 학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수트라-(sutrā)를 작성하고 나중에 그것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게 하려고 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역사 연대기는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가 그의 저서 ‘A Short History of Buddhism’(1980년, 최근 판은 2008년)에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콘즈에 따르면, 불교의 역사는 간편하게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 고대 불교, 훗날에 테라와-다(Theravāda)로 알려지게 된 것과 대체로 일치함.

  2. 2)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의 일어남,

  3. 3) 탄트라(Vajrayāna, 금강승)와 선(Ch’an, Zen)의 일어남,

  4. 4) 더 이상의 분할이 없음.

 

첫 번째 시기는 대략 500년입니다. 두 번째 및 세 번째 시기는 함께 대략 기원후(CE)의 첫 천년에 해당합니다. 마지막 천년은 네 번째 기간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아래 설명에서, 원래 가르침과 대승 이데올로기(이념) 사이의 차이가 또한 명백합니다.

 

아래에서, 필자는 콘즈가 말한 그대로 이 이야기를 제시하겠습니다(콘즈의 책, 2008년 판의 p. 31에서 시작).

 

“마하야나(대승)는 두 단계로 전개되었는데, BC 100년과 AD 500년 사이에 진행되었던 비체계적 형태의 첫 단계와, 그다음 AD 150년 후에 두 가지 뚜렷이 구별되는 학파인 중관학파(Madhyamaka)와 유식학파(Yogacara)로 이어진 체계화된 철학적 형태다.

 

우리는 우선 초기 대승의 두가지 특징을 설명해야 한다. 약 BC 100년(부처님의 빠리닙바-나로부터 약 400년 후)에, (인도의) 많은 불교도들은 기존 교리가 진부하고 쓸모없게 되었다고 느꼈다. 담마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구, 새로운 사회 환경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항상 새로운 재형성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에서, 그들은 (결국 대승불교로 알려지게 된) 새로운 문헌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이 문헌의 창작은 인류 역사에 알려진 가장 중요한 창조적 에너지의 분출 중 하나이며, 약 4~5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은 [기존 교리의] 반복만으로는 종교를 활발하게 유지할 수 없다고 믿었다. 끊임없는 혁신으로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그 종교는] 화석화되고 생명력을 주는 자질을 잃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지금까지 대승주의자의 태도는 꽤 논리적으로 보인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부처님의 빠리닙바-나(반열반) 이후에 수세기 동안 명백하게 작성된 새로운 글들을 부처님의 말씀으로 나타내기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체제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그들은 마하상기까(Mahasanghika, 대중부 불교)를 따라, 역사적 석가모니 부처님(Buddha Sakyamuni)의 중요성을 최소화하고 담마의 화신(dharmakaya, 법신)인 부처님으로 대체했다. 『묘법연화경(Lotus of the Good Law,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은 BC 500년 경 또는 그 날짜가 언제였든 간에 보드가야(Bodhgaya)에서 깨달음을 얻기는 커녕, 세세토록 영원히 머무시며 무수한 곳에 무수하게 변장하여 항상 법을 설하신다고 말한다.”

 

p. 32~34에서 발췌한 내용:

 

“붓다를 모든 진리에 대한 ‘시간을 초월한’ 화신으로 [대체]한 개념은 붓다에 의한 진리가 서로 다른 시기에 그 진리를 연속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했다.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대승주의자들은 많은 신화적 허구를 통해 자신들의 저작물을 역사적 부처님과 연결하려고 했다. 그들은 붓다께서 지구에 사시는 동안 설법을 하셨다고 주장하며, 히야야나(소승)의 숫따들을 성문화한 라자가하(Rajagaha)의 (제1차 불교) 회의와 마찬가지로, 마하-야-나 수트라-(Mahāyāna sutrā, 대승경)는  영축산(Vimalasvabhava)이라는 신화의 산에서 보살들이 모여 성문화하였다고 주장했다. 그 텍스트들은 5세기 동안 기적적으로 보존되었으며, 나가(Naga, 용)들의 지하 궁전에, 또는 간다르바(Gandharva)들의 왕에 맡겨져, 또는 신들의 왕에 맡겨져 보관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나가르주나(Nagarjuna)가 말하듯이, ‘붓다께서 열반하신 후 500년이 지나, 선법이 점차 쇠퇴하여 큰 위험에 처했을 때’, 이 과거의 보물들이 발굴되어 드러나 알려지게 되어, 교리를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하-야-나(Mahāyāna, 대승)의 주된 교리적 혁신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목표와 관련하여, ‘아라한 사상(이상)’에서 ‘보살 사상(이상)’으로 전환이 있다.

2. 새로운 구원의 방법이 마련(고안)되었으며, 그것은 자비가 지혜와 동등하게 되고, 6가지 바라밀(pāramitā, 완벽함)을 통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3. 믿음은 신들에 대한 새로운 판테온(pantheon), 또는 신보다 오히려 사람으로 규정된 새로운 범위가 주어진다.

4. 완전히 새로운 미덕인 ‘방편의 기술(upayakausalya)은 성인에게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가장 높은 미덕인 지혜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다.

5. ‘텅빔(Emptiness)’, ‘그러함(Suchness)’ 등과 같은 항목을 다루는 논리 정연한 존재론적 교리가 마련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씩 검토할 것이다.

 

1. 첫 번째 시기에 불교에서 동기를 유발한 아라한 지위(Arhantship)라는 목표는 이제 2위로 밀려났다. 대승적 성인은 ‘보살(Bodhisattva)’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보살은 세 가지 특징으로 구별된다. (a) 본질적인 존재면에서 그는 붓다의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바람(원함)에 의해 촉발(유발)된다. (b) 그는 동등한 비율의 두 가지 힘, 즉 자비와 지혜라는 두 가지 힘에 의해 지배된다. 자비심으로부터 그는 고통받는 생명체를 돕기 위해 이타심에 따라 열반의 지복 상태에 들어가기를 미룬다. ...... (c) 보살은 궁극적인 청정함에 열중하지만, 그들이 지닌 동일한 열정을 가짐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을 접하면서 [윤회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그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거나 [마음을] 오염시키지 않는다.

 

2. 보살의 자비심은 한량없고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한다.... 이 깨달음은 자동적으로 남을 돕고자 하는 바람(원함)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깨달은 사람들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되는데, 그 중 두 가지 유형은 ‘이기적’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이기적이지 않다’. ‘이기적인’ 유형은 ‘열등한 수레’라는 히나야마(Hinayaṃa, 소승) 개념을 나타낸다고 하는 아라한(Arahant)과 벽지불(Pratyekabuddha)이다. ‘이기적이지 않은’ 유형은 붓다이고, 보살로서 이기적이지 않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며, ‘붓다 수레(Buddha-vehicle, 불승)라고 불리며, ‘큰 수레(mahā-yana, 대승)’다.

 

보살은 참을성 있는 사람이다. 보살은 붓다가 되기를 원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지고의 초월적 완전성과는 분명히 무한히 거리가 멀 것이다. 한 생에 그것을 도저히 건널 수 없다. 무수한 생이 필요하고, 보살은 무수한 겁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하며, 그 후에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단 하나의 장애물, 즉 개인적 자아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붓다가 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을 없애는 것이 보살의 최고의 임무다. 두 가지 방법으로 그는 자신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데, 적극적인 자기희생과 이타적인 봉사를 통해, 인지적으로 객관적인 자아의 부재에 대한 통찰을 통해 자신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첫 번째는 자비로 인한 것이고 두 번째는 지혜로 인한 것이다. ..

 

자비과 지혜의 통합은 여섯 가지 바라밀(pāramitā, 완벽함)에 의해 구현되며, 이는 우리가 ‘저 너머로 가는 여섯 가지 방법’에 의해 구현된다. 사람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고 처음 결심할 때 보살이 된다. 여섯 가지는 보시(giving), 지계(morality), 인욕(patience), 정진(vigor), 선정(meditation), 및 지혜(wisdom)다.”

 

이것으로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의 책 인용문을 마칩니다. (간결하게 하기 위해 일부 텍스트를 건너뛰었습니다.)

 

콘즈의 분석에 대한 비평

 

필자는 맨 처음 단락 중의 “이 문헌의 창작은 인류 역사에 알려진 가장 중요한 창조적 에너지의 분출 중 하나이며, 약 4~5세기 동안 지속되었다.”라는 진술을 제외하고는 콘즈의 분석에 동의합니다. 이 문헌은 방대하지만 단순한 이론을 훨씬 더 혼란스럽고 모순적으로 보이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대승 가르침이 지닌 핵심 문제’, ‘묘법연화경(법화경) ㅡ 집중된 분석’, ‘초기 유럽 학자들의 아닛짜 및 아낫따에 대한 잘못된 해석’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것에 대해 유일하게 다행인 점은 마하야나 수트라(대승 )가 완전히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져 있으므로 빠알리 띠삐따까(Pāli Tipiṭaka)로 쓰여진 원래 숫따(sutta)와 쉽게 구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 인도에서 추가된 ‘개선 사항’ 외에도 대승불교가 중국, 일본, 및 티베트로 전파되었을 때(그리고 선, 금강승, 등과 같은 다른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을 때) 국가 관습들과 관련된 더 많은 자료가 추가되었습니다. ‘불교(붓다 담마)의 현재 부흥 배경’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그래서, 붓다 담마에 대한 대승의 재형성 전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듬고 개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이 자연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고 정의상으로 그것들을 개선할 수 없다’는 담마에서 가장 근본적인 개념들 중 하나와 완전히 모순됩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붓다께서 세상에 나타나신다는 것을 인정하며, 따라서 붓다 담마를 바꾸려는 그들의 시도는 대승의 기본적인 모순 중 하나입니다.

 

  • * 우리는 붓다 담마와 어떤 다른 인간의 성취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인간의 성취에는 과학, 철학, 공학 등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의 누적된 노력이 포함됩니다. ‘담마와 과학 - 소개’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반면에, 붓다 담마는 인간성을 뛰어넘어 붓다가 된 단일 인간의 산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모든 평범한 인간의 노력들은 시스템 내에서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사용하여 시스템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참조하세요. 부처님은 인간 영역을 초월하여 31 영역의 ‘전체 존재’를 발견합니다. ‘붓다 담마’ 섹션의 ‘대통합이론인 담마(The Grand Unified Theory of Dhamma)’ 서브섹션을 참조하세요. 대승주의자들은 (보통 인간은 접근할 수 없고 부처님만이 접근할 수 있는) 부처님의 세계관을 ‘묽게 만든’ 버전을 취하여 그들이 만든 이론을 추가했습니다.

 

  • * 이것이 오늘날 다양한 버전의 ‘불교’에 명백한 모순이 그렇게 많은 이유입니다. 어쨌든 정의상 잘못된 더 많은 ‘fluff(하찮은 것/쓸데없는 것)’을 추가하면, 올바른 그림만 왜곡됩니다.

  • * 필자는 이 [영문] 웹사이트 전체에 걸쳐 띠삐따까(Tipitaka)의 진짜 가르침의 자기 일관된(모순없는) 그림을 제공하려고 합니다. ‘붓다 담마: 비인지성과 자기 일관성’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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