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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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야는 빤쭈빠-다-낙칸다 또는 물질적 몸일 수 있다

     

    원문: Sutta Interpretation 섹션의 ‘Kāya Can be Pañcupādānakkhandha or Physical Body’ 포스트

     

    까-야(kāya)는 대부분의 숫따(sutta)에서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를 지칭합니다. 또다른 가능한 의미는 물질적 몸(육체)입니다. 두 가지 모두 무더기 또는 집합체입니다. 까-야의 일반적 의미는 ‘무더기(aggregate)’ 또는 ‘집합체(collection)’입니다.

     

    2025년 7월 5일 작성

     

    물질적 몸(육체)으로서 까-야

     

    1. 까-야(kāya)는 여러 개체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 *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까-야’를 육체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까-야는 여러 몸 부위의 집합체입니다. 다음은 그 용법의 몇 가지 예입니다.

    • * 우리는 여섯 가지 감각, 즉 눈, 귀, 혀, 코, , 및 마음을 통해 외부 감각 입력을 경험합니다. 여기서,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 viññāṇaṁ”는 “ ‘까-야 윈냐나-’는 육체(까-야)와 감촉(뽓탑바)에 의존하여 일어난다”를 의미합니다. ‘Chachakka Sutta (MN 148)’를 참조하세요.

    • * 또다른 예는 ‘Kāya Sutta (AN 10.23)’에서 “Sādhu vatāyasmā kāyaduccaritaṁ pahāya kāyasucaritaṁ bhāvetū’ti”가 “나쁜 육체행위를 버리고 좋은 육체행위를 계발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살생, 도둑질, 성적 비행과 같은) 육체행위, 말과 마음으로 행한 아꾸살라 깜마(akusala kamma), 즉 까-야, 와찌, 마노의 깜마를 말합니다.

    • * ‘Mahāsakuludāyi Sutta (MN 77)’에서는 “ayaṁ kho me kāyo rūpī cātumahābhūtiko mātāpettikasambhavo..”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내 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네 가지 대요소(빠타위, 아뽀, 떼조, 와-요)로 이루어져 있다”입니다.

     

    까-야는 또한 ‘정신적 집합체’를 의미할 수 있다

     

    2. ‘까-야(kāya)’는 주로 여러 ‘정신적 집합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 * ‘Saṅgīti  Sutta (DN 33)’에서는 윈냐-나 까-야, 팟사 까-야, 웨다나- 까-야, 산냐- 까-야, 산쩨따나- 까-야, 땅하- 까-야 등의 여러 ‘정신적 집합체’의 유형을 묘사합니다.

    • * 붓다께서는 마음이 감각 입력을 받으면 복잡한 일련의 ‘정신적 집합체’를 생성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 * 그것들은 루빠 우빠-다-낙칸다(rupa upādānakkhandha)에서 윈냐-나 우빠-다-낙칸다(viññāṇa upādānakkhandha)까지 모두 5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 * 그 ‘빤짜 우빠-다-낙칸다(pañca upādānakkhandha)’(일반적으로 ‘다섯가지 집착의 무더기’로 번역됨)에 관해 다음 사항을 명심해야 합니다. (i) 뿌툿자나(평범한 사람)에게는 빤짝칸다(널리 ‘다섯가지 무더기’로 번역됨)가 결코 생기지 않고, 항상 빤짜 우빠-다-낙칸다가 생긴다. (ii) 대부분의 숫따에서는 그 빤짜 우빠-다-낙칸다가 단순히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로 약칭된다(그리고 해당하는 우빠-다-낙칸다로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음).

    • * 또한, 다섯 가지 우빠-다-낙칸다(upādānakkhandha)는 많은 숫따에서 통칭하여 ‘까-야(kāya)’라고 불립니다.

     

    빤쭈빠-다-낙칸다로서 까-야 

     

    3. ‘Cetana Sutta (AN4.171)’에서는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o kāyo na hoti..”, 즉 “무지가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즉, 아라한의 닙바-나 단계에 도달할 때), 까-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 * 분명히 아라한의 육체는 아라한 단계에 도달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히야 존자는 부처님으로부터 몇 마디의 게송을 듣고 아라한과에 도달했습니다. 존자의 육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 * 이것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아라한 단계 이후에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입니다. 그때,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과정도 끝납니다.

    • * 다섯가지 우빠-다-낙칸다(upādānakkhandha)는 아라한 팔라 순간, 즉 닙바-나의 아라한 단계에 도달하는 순간에 일어남을 멈춥니다. 따라서, 다섯가지 우빠-다-낙칸다니로다 담마(nirodha dhamma), 즉 ‘일어남을 멈출 수 있는 실체들’이라고 합니다. (역주: 이 경우에, 와하라까 테로께서는 니로다 담마를 ‘추구할 가치가 없는 담마’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음. https://blog.naver.com/hojanyun/223794041312 참조.)

     

    니로다 담마는 무엇인가?

     

    4. ‘Nirodhadhamma Sutta (SN 23.22)’에서는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는 니로다 담마다”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위의 #2를 참조하여 이것들이 각각의 우빠-다-낙칸다를 의미하는지 확인하세요.

     

    • * 링크 주소의 영어 번역에서는 이 구절을 “Rādha, form, feeling, perception, choices, and consciousness are liable to cease(라다여, 형상, 느낌, 인식, 선택, 및 의식은 그치기 쉽다)”라고 번역합니다. ‘니로다(nirodha)’를 ‘그치기 쉽다’로 번역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형상, 느낌, 인식, 선택 및 의식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각각 우빠-다-낙칸다(upādānakkhandha)입니다.

    • * ‘그치기 쉽다’는 것은 이 실체들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우리는 ‘로까 니로다’에 대해 논의했고, 31영역의 세상에서 ‘자신의 미래 존재’만 멈출 수 있으며, 이는 외부 세계나 자신의 육체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가리켜 보였습니다. 그것은 아라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 가능합니다. ‘각 입력으로 '세상의 일어남', 즉 '로까 사무다야'가 시작된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우리는 또한 ‘로까 사무다야(자기 존재의 창조/유지)’가 아라한 단계 아래의 모든 이들에게 계속되는 과정이라는 점을 논의했습니다. 왜냐하면, 로까 사무다야는 각 감각 입력에 들러붙음을 통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로까 사무다야’는 우리가 감각 입력에 들러붙어 다섯 가지 우빠-다-낙칸다를 생성할 때마다 발생합니다(또는 적어도 유지됩니다).

     

    5. 더욱이, 아라한에게는 감각 경험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외부 루빠를 경험하고 정신 과정을 생성합니다.

     

    • * 그렇기 때문에 ‘Nirodhadhamma Sutta (SN 23.22)’에서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를 형상, 느낌, 인식, 선택, 및 의식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문맥 속에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낱말 대 낱말 번역’의 위험성입니다.

    • * ‘로까 니로다’를 성취한 아라한은 여전히 외부 대상을 볼 수 있고, 여전히 육체와 관련된 느낌(웨다나-)을 경험하며, 여전히 꿀을 달콤하게 인식하고, 여전히 느낌(웨다나-)과 산냐-(상카-라의 순수한 형태)를 생성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윈냐-나를 생성하지는 않습니다!

    • * 따라서, 특정 숫따의 더 넓은 맥락에서 숫따에 나오는 낱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위 #1와 #2에서 논의된 숫따들을 비교함으로써 더욱 명확해질 것입니다.  

     

    삭까-야 딧티와 관계

     

    6. ‘Sakkāya Sutta (SN 22.105)’에는 “Katamo ca, bhikkhave, sakkāyo?”(삭까-야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있습니다. 답변은 “Pañcupādānakkhandhātissa vacanīyaṁ” (“나는 그것을 빤쭈빠-다-낙칸다라고 말한다”)입니다.

     

    • * 동일한 답변이 ‘Sakkāyapañhā Sutta (SN 38.15)’에 있는데, “Pañcime, āvuso, upādānakkhandhā sakkāyo vutto bhagavatā”, 즉 “도반이여, 붓다께서는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가 삭까-야(sakkāya)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입니다.

    • * 여기서, ‘삭까-야(sakkāya)’는 ‘사쓰 까-야(sath kāya)’, 즉 ‘까-야가 이롭다’는 의미입니다. 더욱이, ‘삭까-야 딧티(sakkāya ditthi)’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를 이롭다고 보는 것’입니다.

    • * 감각적 즐거움을 이롭다고 여기는 한, 삭까-야 딧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따빤나는 까-마 라-가(kāma rāga)를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빠-야-(apāyā)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아빠-야가-미(apāyagāmi)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생각없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 즉 담마따-(dhammatā)입니다.

     

    빤쭈빠-다-낙칸다 까-야는 아-하-라에 의해 유지된다

     

    7. 두번째 ‘Kāya Sutta (SN 46.2)’ (첫번째 까-야 숫따는 육체에 관하여 위 #1에서 논의되었음)는 까-야의 두번째 유형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데, “Seyyathāpi, bhikkhave, ayaṁ kāyo āhāraṭṭhitiko, āhāraṁ paṭicca tiṭṭhati, anāhāro no tiṭṭhati”, 즉, “이 까-야아-하-라(정신적 몸에 대한 음식)에 의해 유지된다. 그것은 아-하-라(āhāra)에 의존하여 지속되며, 아-하-라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입니다.

     

    • * 아-하-라(āhāra)의 네 가지 유형은 ‘Āhāra Sutta (SN 12.11)’에 논의되어 있는데, 팟사(phassa), 마노- 산쩨따나-(manō sañcetanā), 윈냐-나(viññāṇa), 및 까발린까-(kabalinkā) 아-하-라(āhāra)입니다.

    • * 이 중 어느 것도 육체에 대한 아-하-라(āhāra)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정신적 몸(마노마야 까-야/간답바)에 대한 아-하-라며, 이는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음을 통해) 반복되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의 생성을 통해 유지됩니다. 논의했듯이, (부처님의 빠라맛따 담마에 따라) 더 깊은 레벨에서 그런 감각적 즐거움은 (왜곡된 산냐-를 통해) ‘마음이 만든 것(mind-made)’입니다. ‘산냐- ㅡ 빠띳짜 사뭅빠-다의 감춰진 측면’을 참조하세요.

    • * 감각 입력으로 빤쭈빠-다-낙칸다 까-야가 일어나는 것은 또다른 빠띳짜 사뭅빠-다 사이클의 시작과 같습니다. 31영역 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한 무지(아윗자-)가 아라한 단계에서 완전히 이해되면,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히야 존자가 부처님의 법문 몇 구절을 듣고 아라한과를 얻었을 때, 존자의 육체는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빤쭈빠-다-낙칸다 까-야의 발생(그리고 빠띳짜 사뭅빠-다 사이클의 생성)그 순간에 멈췄는데, 정신적 몸에 대한 아-하-라가 멈췄기 때문입니다.

    • * 아-하-라에 대해서는 ‘아-하-라 ㅡ 정신적 몸의 음식’에 상세히 논의되어 있습니다.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 ㅡ ‘우빠-다-낙칸다’를 지칭

     

    8.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및 윈냐-나는 거의 항상 각 우빠-다낙칸다(upādānakkhandha)를 지칭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알다시피, 감각 입력을 받는 순간 수많은 찟따가 마음을 통해 흐릅니다.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또는 윈냐-나의 단일 단위는 결코 경험될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항상 무더기 또는 집합체로 나타납니다.

     

    • * 감각 입력을 받으면, 마음은 확장되고, 그 우빠-다-낙칸다들은 빠른 속도로 커집니다. 마음이 그 감각 입력에 계속 집중하면, 그것에 반복적으로 들러붙습니다. 이것이 필자가 ‘두 개의 콘’을 사용한 도표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뿌라-나 및 나와 깜마 ㅡ 깜마 생성의 순서’의 #6을 참조하세요.

    • * 다섯 가지 우빠-다-낙칸다는 ‘뿌라-나 깜마(purāna kamma)’ 단계에서는 느리게 성장하고, 마음이 의식적으로 깜마를 축적하기 시작하는 ‘나와 깜마(nava kamma)’ 단계에서는 빠르게 성장합니다.

    • * 또한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 ㅡ 대부분 오해임’를 참조하세요. 

    • * 구 포스트에서는, ‘뿌라-나 깜마’ 단계의 윈냐-나를 ‘위빠-까 윈냐-나’로 지칭하고, ‘나와 깜마’ 단계의 윈냐-나를 ‘깜마 윈냐-나’로 지칭했습니다. 그것은 더 강하게 계속 자라는 동일한 윈냐-나입니다. 위빠-까 윈냐-나도 오염되었습니다. ‘짝쿠 윈냐-나에는 오염이 없는가?’를 참조하세요. 그 포스트에서, 우리는 감각 입력으로서 ‘보는 사건’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9. 필자는 또한 다섯 무더기(빤짜 우빠-다-낙칸다)의 맥락에서 ‘루빠’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루빠 우빠-다-낙칸다(rupa upādānakkhandha)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숫따에서 성립하며, 숫따들은 외부 대상을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 * 더욱이, 웨다나-(또는 웨다나- 우빠-다-낙칸다)는 ‘마음이 만든(mind-made)’ 웨다나-를 말하며, 육체로 느끼는 웨다나-(아라한에게도 나타남)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 * 아라한은 어떤 순간에도 윈냐-나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윈냐-나(viññāṇa)’라는 낱말은 ‘냐-나(ñāṇa)가 없음’ 또는 ‘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한 지혜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는 ‘왜곡된 산냐-’가 어떻게 깜마의 축적을 촉발하는지에 대한 앎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일단 그것을 이해하면, ‘산딧티꼬(sandiṭṭhiko)’, 즉 소따빤나가 됩니다. 그러나 ‘산(san)의 생성’은 아라한 단계에서만 완전히 끝납니다. ‘산딧티꼬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참조하세요.

    • * 아라한이 윈냐-나를 생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감각 입력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아라한이 보는 것(또는 안식)은 ‘딧테 딧타맛땅 바윗사띠(diṭṭhe diṭṭhamattaṁ bhavissati), 즉 ‘어떤 오염도 없이 보는 것(비록 그 시각대상에 왜곡된 산냐-가 내장되어 있다하더라도)’으로 표현됩니다. 예를 들어, 아라한은 아름다운 여성을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여성의 아름다움’이 마음에 의해 생성된 잘못된/왜곡된 산냐-임을 온전히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그 시각 대상에 들러붙지 않을 것입니다.

     

    닙바-나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를 이해함으로써 성취된다

     

    10. 육체를 탐구하는 것만으로는 닙바-나(그리고 미래 괴로움을 멈추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현대 의학은 육체 건강을 유지하는 세간적 목적에 부합합니다. 현대 의학 연구자들은 육체를 매우 면밀히 연구해 왔지만, 미래 괴로움을 막는 방법을 전혀 모릅니다. 의학은 육체와 관련된 고통을 완화하는 데에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 * 반면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재탄생 과정과 관련된 상상할 수 없는 미래 괴로움을 멈추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여기서,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의 까-야-누빳사나-(Kāyānupassanā)가 핵심 역할을 합니다. 그 까-야-누빳사나-는 빤쭈빠-다-낙칸다 까-야(pañcupādānakkhandha kāya)에 관한 것입니다.

    • * 모든 오염된 생각이 일어날 가능성이 멈추는 순간, 닙바-나에 도달합니다. 아라한 팔라 순간에 도달하는 순간,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작용도 멈춥니다.

    • * 아라한의 육체가 죽은 후에 닙바-나가 성취된다는 통념과는 달리, 닙바-나는 아라한 팔라 순간에 도달하는 순간에 성취됩니다. 육체가 죽을 때까지 겪는 모든 고통은 마음이 아닌 육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육체와 관련된 위빠-까(vipāka)며, 육체가 죽을 때까지 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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