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까-마 산냐- ㅡ 우회하여 사띠빳타-나를 육성하는 방법
원문: Dhamma and Science 섹션의 ‘ Kāma Saññā – How to Bypass to Cultivate Satipaṭṭhāna ’ 포스트
까-마 산냐-(kāma saññā), 즉 까-마 로까(kāma loka)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왜곡된 산냐-는 소따빤나가 빤짜 니와라나(pañca nivaraṇa)를 극복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 높은 막가 팔라(도과), 특히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를 육성하는데 필요한 마음가짐(마음성향)입니다.
2025년 1월 25일 작성
영문 도표 다운로드/인쇄: Distorted Saññā Present in All Realms
사띠빳타-나 부미 ㅡ ‘왜곡된 산냐-’가 없음
1. 위 도표를 사용하여, 붓다 세계관의 주된 특징들을 요약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그것들을 열거하고 곧 있을 포스트들에서 필요한 세부 사항들을 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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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까-마, 루빠, 및 아루빠 로까로 나누어지는) 31영역으로 된 세상(로까)은 ‘분홍색 박스’ 안에 있습니다. (괴로움 없는 빠빳사라 마음의) 닙바-나는 맨 왼쪽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umi)’(‘부미’는 ‘지역’을 의미함)가 있는데, 그곳에는 까-마, 루빠, 또는 아루빠 로까의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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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닙바-나는 ‘세상(로까)에서 완전히 분리됨’을 의미하므로, 그것은 도표에 표시된 바와 같이 ‘알로까(aloka)’라고도 불립니다. 예를 들어, ‘Gotama Sutta (SN 12.10)’에서 붓다께서는 붓다후드(Buddhahood, 부처님의 깨달음)를 얻는 것을 “Nirodho, nirodho’ti kho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ī”ti.”로 묘사하셨습니다. 동일한 구절이 여러 숫따에 있습니다. 여기서, ‘āloko udapādī’는 붓다후드가 달성될 때 ‘세상에서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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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umi)는 (소따빤나 상태 이상의) 성자가 닙바-나에 근접한 마음성향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인데, 따당가 닙부따(Tadaṅga Nibbuta)(‘순간적 또는 일시적 닙바-나’)라고도 불립니다. 또한 그것은 많은 숫따에서 삽빠바-사 찟따(Sappabhāsa Citta)(‘괴로움 없는’ 빠밧사라 찟따의 더 낮은 버전)라고 불리며,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에서는 빳쭈빳티따 사띠(Paccupaṭṭhita Sati)라고 불립니다.
마음은 바힛다 윈냐-나 단계에서도 오염된다
2. 감각 입력을 받을 때, 뿌툿자나의 마음은 항상 바힛다 윈냐-나(bahiddha viññāna) 단계에서 시작됩니다. 그 마음은 상요자나-가 모두 그대로 있기 때문에 이미 오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즉시 앗잣따 윈냐-나(ajjhatta viññāna) 단계에 들어가고 순식간에 더욱 오염됩니다. 그 오염은 두 단계, 즉 뿌라-나 깜마(purāṇa kamma) 및 나와 깜마(nava kamma)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은 항상 뿌라-나 깜마 단계에 들어가지만, 빠띳짜 사뭅빠-다의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에 이를 때에만 나와 깜마 단계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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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이, 루빠 및 아루빠 로까(즉, 브라흐마 영역)에는 나와 깜마 단계가 없는데, 그곳에는 까-야 및 와찌 아비상카-라로 행해지는 강한 깜마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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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 로까(4가지 아빠-야-, 인간 영역, 및 6가지 데와 영역)에서, 나와 깜마 단계에는 도덕적 행위(뿐냐 깜마)와 부도덕적 행위(아뿐냐 깜마)가 모두 포함됩니다.
까-마, 루빠, 및 아루빠 로까에는 서로 다른 유형의 왜곡된 산냐-가 있다
3.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각 로까(까-마, 루빠, 및 아루빠)는 왜곡된 산냐-의 세트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까-마 로까(kāma loka)에서 까-마 산냐-(kāma saññā)는 각 감각마다 하나씩 6가지 유형인데, 루빠 산냐-(rupa saññā), 삿다 산냐-(sadda saññā), … 담마 산냐-(dhamma saññā)입니다. 루빠 로까(rupa loka)에서, ‘왜곡된 산냐-’는 ‘자-나의 즐거움’ 그것입니다. 아루빠 로까(arupa loka)에서는 ‘사마-빳띠의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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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하는 상요자나(saṁyojana)가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마음은 적어도 나와 깜마 단계까지 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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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위 도표에서 ‘분홍색 박스’ 안(즉, 까-마, 루빠, 또는 아루빠 바와)의 마음은 항상 (왼쪽에 표시된) 닙바-나에서 멀어집니다. 그것은 처음에, 즉 바힛다 윈냐-나(bahiddha viññāna) 단계에서 자동적인 아비상카-라 생성과 함께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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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색 박스 안의) 맨 위의 화살표는 ‘마음이 닙바-나에 멀어짐’을 보여주며, 도표에서 그 중요한 관찰을 강조합니다. 알 수 있듯이, 뿌툿자나의 마음은 항상 닙바-나에서 멀어집니다. 대부분의 오염은 까-마 로까(kāma loka)의 나와 깜마 단계에서 행해지지만, 뿌라-나 깜마 단계(세 로까 모두에 적용됨)에서도 마음은 항상 닙바-나에서 멀어집니다. 이는 위빠리나-마 둑카(vipariṇāma dukkha)와 관련이 있습니다. ‘위빠리나-마 ㅡ 두 가지 의미’와 ‘아닛짱 위빠리나-미 안냐타-바-위 ㅡ 결정적 구절’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에 대해 관심있거나 알아보고 싶은 분은 포럼에서 문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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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위 ‘광대 세계관’을 알지도 못합니다. 오늘날 세계 인구는 약 80억명이며, 불교도는 약 5억명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불교도의 최소 90%도 위의 그림을 알지도 못하고 있으며, 아마도 99.9% 이상의 불교도들이 우리가 방금 논의한 세부 사항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빤짝칸다는 아라한뜨 팔라 사마-빳띠에서만 경험된다
4. 위의 논의에서 도출되는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뿌툿자나의 마음은 (오염과 ‘왜곡된 산냐’가 없는) 빤짝칸다를 결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붓다께서는 들러붙음은 항상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에 대한 것이고 빤짝칸다(pañcakkhandha)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역에 관계없이, 뿌툿자나의 마음은 항상 도표의 ‘분홍색 박스’ 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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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시작이 없는 재탄생 과정 중에 유정체는 항상 그 영역에 해당하는 ‘왜곡된 산냐-’를 경험해 왔습니다.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아산냐 영역(asañña realm)에서만 산냐-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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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산냐’가 없는 첫 감각 경험은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는 때에 일어납니다. 그때가 바로 처음으로 닙바-나를 엿볼 수 있는 때입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괴로움 없는 빠밧사라 마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7가지 끊어지지 않은 상요자나(saṁyojana)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 #1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그 상태를 ‘삽빠바-사 찟따(sappabhāsa citta)’ 또는 빳쭈빳티따 사띠(paccupaṭṭhita sati) 또는 따당가 닙부따(tadaṅga Nibbuta)라고 합니다. 또한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umi)’라고도 하는데, 그곳에 도달해야 사띠빳타-나의 출세간 버전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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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과(Arahanthood)의 순간에, 모든 상요자나는 제거되고, 처음으로 빠밧사라 찟따/마음을 경험합니다. 삽빠바-사 찟따(sappabhāsa citta)와 빠밧사라 찟따(pabhassara citta) 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에 유의하세요. ‘빠밧사라(pabhassara)’의 의미는 ‘괴로움 없는(빠밧사라) 마음을 드러내는 것’ 포스트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5. 사람은 닙바-나의 아라한 단계에 도달할 때 처음으로 ‘오염과 왜곡이 없는’ 빠밧사라 찟따를 경험합니다. 이는 또한 빤짝칸다(pañcakkhandha)가 처음으로 경험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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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아라한들(아마도 자-나/사마-빳띠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즉 우바또위뭇띠 아라한)은 아라한뜨-팔라 사마-빳띠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원하는 만큼 그 빠밧사라 찟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아라한뜨-팔라 사마-빳띠에 있는 동안, 그들은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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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에, 우바또위뭇띠 아라한(ubhatovimutti Arahant)은 찟따의 흐름이 멈추는, 즉, 빤짝칸다(pañcakkhandha)도 일어나지 않는 니로다 사마-빳띠(nirodha samāpatti)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라한이 육체의 죽음 전, 즉 빠리닙바-나(Parinibbāna) 전에 아누빠디세사 닙바-나(anupadisesa Nibbāna)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 니로다 사마-빳띠는 7일 동안까지 경험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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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빤냐-위뭇띠 아라한들은 니로다 사마-빳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필자는 그들이 아라한뜨-팔라 사마-빳띠도 경험할 수 없다고 믿지만, 그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감각 입력은 (왜곡된) 산냐-와 빤쭈빠-다-낙칸다를 촉발시킨다’ 포스트의 #10을 참조하세요.
소따빤나는 사띠빳타-나 부미에 접근할 수 있다
6. 소따빤나는 소따빤나 팔라 순간에 일시적으로 사띠빳타-나 부미(삽빠바-사 찟따, 따당가 닙부따, 또는 빳쭈빳티따 사띠)에 들어갑니다. 소따빤나(또는 사까다-가-미) 수행자는 (위 도표에서 위의 ‘큰 그림’을 이해한 후) 출세간 사띠빳타-나 바-와나-( lokuttara Satipaṭṭhāna Bhāvanā)를 육성함으로써 다시 그 상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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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따빤나가 (소따빤나 팔라 순간에) 처음으로 빠밧사라 찟따(pabhassara citta)를 경험할 때, 마음은 그 상태가 잠깐만 유지됩니다. 그리고, 마음은 ‘정상 상태’(인간 바왕가 상태)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그 ‘팔라 순간’을 알 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고 몇 분에서 며칠 동안(사람에 따라 다름) 그 상태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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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후, 소따빤나는 이전 생활로 돌아가서 그 사건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알다시피, 소따빤나는 가정의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탐하거나 화난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세가지 상요자나가 마음에서 제거되면, 소따빤나는 영구적으로 ‘아빠-야가-미 깜마’를 행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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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따빤나와 사까다-가-미는 사띠빳타나의 출세간 버전을 육성하여 삽빠바-사 찟따(sappabhāsa citta)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까-마 라-가(kāma rāga)를 제거하여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띠빳타-나 부미에 접근하기 위해 빤짜 니와라나를 억제
7. 뿌툿자나가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는데 다음 두 가지 요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i) 감각적 즐거움에 들러붙는 것이 왜 재탄생 과정에서 괴로움을 연장시키는지 ‘지혜로 보아야’ 합니다. (ii) 빤짜 니와라나(pañca nivaraṇa)를 억제하여 일시적으로 까-마 산냐-(kāma saññā)를 제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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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도, 이 두 요인은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두 요인 모두 담마 개념에 집중(담마 위딱까 / 담마 위짜-라를 생성)할 때 육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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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내용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은 사띠빳타-나의 세간 버전을 기르고 ‘삽빠바-사 찟따(sappabhāsa citta)’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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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문을 듣거나 담마 개념을 읽거나 또는 단순히 담마 개념을 숙고하는 동안, 마음은 ‘삽빠바-사 찟따(sappabhāsa citta)’에 도달하고 소따빤나 단계를 달성합니다.
막가 팔라로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는 것이 감소한다
8. 논의한 바와 같이, (아라한을 포함하여) 인간 몸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일상 생활을 하는 동안 까-마 로까(kāma loka)와 연관된 ‘왜곡된 산냐-’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는 것은 더 높은 단계의 막가 팔라에 도달하고 더 많은 상요자나(윤회 족쇄)를 제거함으로써 점차적으로 감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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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툿자나(puthujjana)는 열가지 모든 상요자나로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습니다. 또 달리 말하면, 뿌툿자나는 딧티(diṭṭhi), 땅하-(taṇhā), 및 마-나(māna)로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습니다. 여기서, 딧티(diṭṭhi)는 세 가지 상요자나(삭까야 딧티, 위찌낏차-, 실랍바따 빠라-마-사)를 제거함으로써 소따빤나 단계에서 제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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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따빤나와 뿌툿자나의 유일한 차이는 소따빤나의 마음은 첫 세 가지 상요자나가 없기 때문에 아빠-야가-미 행위(사악처로 향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하면, 소따빤나는 삭까야 딧티와 함께 하는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이것은 까-마 로까의 감각적 즐거움이 ‘장기적인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결코 다시는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함). 그들은 괴로움 없는 유일한 상태가 닙바-나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왜곡된 산냐-’에 들러붙습니다. 그러나 세 가지 딧티 상요자나(diṭṭhi saṁyojana)가 제거되어 들러붙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아빠-야가-미 깜마(apāyagāmi kamma)를 행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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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다시피, 닙바-나의 아나-가-미 단계에 도달하려면 까-마 라-가 상요자나(kāma rāga saṁyojana)를 제거해야 합니다. 까-마 라-가 상요자나를 제거하는 것은 까-마 땅하-(kāma taṇhā)를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까-마 로까(kāma loka)에 고유한 ‘까-마 산냐-(kāma saññā)’에 들러붙는 경향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까-마 산냐-’는 까-마 로까의 ‘왜곡된 산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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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하-(taṇhā)의 다른 구성 요소는 루빠 및 아루빠 로까와 연관되어 있고 각각 루빠 라-가(rupa rāga)와 아루빠 라-가(arupa rāga)에 의해 유지됩니다. 따라서, 땅하-는 루빠 라-가와 아루빠 라-가 상요자나의 제거와 함께 아라한 단계에서 완전히 제거됩니다. 마지막으로, 아라한 단계에서 마-나(māna)(그리고 웃닷짜와 아윗자- 상요자나)가 제거됩니다. 여기서, 아윗자-는 마음이 어떻게 ‘왜곡된 산냐-’를 통해 세상것에 들러붙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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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아라한은 왜곡된 산냐-를 경험하더라도 모든 왜곡된 산냐-에 유혹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상 생활 중에는 까-마 산냐-를 경험하고, 자-나에 있는 동안에는 루빠 로까 산냐-를 경험하고(자-나를 경험), 아루빠 사마-빳띠에 있는 동안에는 아루빠 로까 산냐-를 경험합니다(아루빠 사마-빳띠를 경험). 따라서, 아라한의 마음은 결코 위 도표의 ‘분홍색 박스’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도표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음).
왜곡된 산냐-는 아윗자-의 근본 원인이다
9. 우리의 모든 부도덕한 행위(그리고 따라서 미래 고통/괴로움)는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 즉 외부 것(시각 대상, 소리, 맛, 등)에 마음을 즐겁게 하는 측면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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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는 그 왜곡된 산냐-를 주도록 우리의 정신적 몸과 물질적 몸과 그 외부 것들을 만듭니다. 이것이 이해해야 할 결정적인 측면입니다. 필자는 ‘담마와 과학’ 섹션의 ‘붓다의 세계관(Worldview of the Buddha)’ 서브섹션의 처음 몇 개의 포스트에서 그것을 설명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과 같은 보편 원리인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일어납니다. 그러나 빠딧짜 사뭅빠-다는 물질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현상이므로 부처님 만이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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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왜곡된 산냐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흐리게 합니다. 붓다께서 세상에 출현하셔서 그것이 신기루라는 것을 설명하실 때까지, 인간은 즐거움이 외부 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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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우리는 왜곡된 산냐-가 아윗자-의 근본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것은 ‘모든 것의 뿌리’입니다. ‘물-라빠리야-야 숫따 ㅡ 모든 것의 뿌리’와 ‘산냐-니다-나- 히 빠빤짜 상카- ㅡ 부도덕한 생각은 '왜곡된 산냐-'에 기반한다’를 참조하세요.
10. 이것이 요약입니다. 질문이 있으면, 토론 포럼에서 문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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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따빤나 단계 아래의 사람들은 ‘왜곡된 산냐-’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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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필자는 ‘전체적인 그림을 얻는 것’이 소따빤나 단계에도 더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은 ‘실제가 아니다’(그것들은 환상이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마음성향(사고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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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을 가치있게 여기고 그것을 위해 거짓말하고, 속이고, 심지어 죽이는 것도 기꺼이 합니다. 부처님의 세계관이 마음에 스며들면, 적어도 중대한 결과가 따르는 ‘아꾸살라 깜마’를 피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부도덕한 행위는 왜곡된 산냐-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과 다른 최근의 포스트에 설명된 바와 같습니다. 최근의 포스트는 ‘New / Revised Posts’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