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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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빠-나사띠는 호흡 명상인가?

     

    원문: Bhāvanā (Meditation) 섹션의 ‘Is Ānāpānasati Breath Meditation?’ 포스트

     

    [여기서는] 호흡 명상이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산냐- 숫따(Saññā Sutta)를 논의합니다.

     

     2017년 6월 2일 작성; 2024년 9월 7일 재작성

     

    소개

     

    1.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를 구글(Google) 검색하면, 검색된 거의 모든 웹 사이트가 이를 ‘불교 호흡 명상’ 또는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알아차림)’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영어번역에서는 ‘Ānāpānassati Sutta (MN 118)’라는 제목도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다른 예는 ‘Ānāpānasati Sutta: Mindfulness of Breathing’입니다. 

     

    • * 그러나 여러 띠삐따까의 숫따(Tipitaka sutta)들은 아래에 논의된 바와 같이, 호흡 명상은 불교의 아-나-빠-나사띠 바-와나-(Ānāpānasati Bhāvanā)가 아니라고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 * 호흡 명상은 부처님 시대 전에도 요기(수행자)들이 행하였습니다. 따라서 호흡 명상은 부처님의 아-나-빠-나 바-와나-(Ānāpāna bhāvanā)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호흡과 까시나 명상을 직접 육성하셨는데 그것이 닙바-나(Nibbāna), 즉 ‘괴로움/고통에서 영구적인 벗어남’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호흡 명상은 고따마 부처님 전에도 실천되었다

     

    2. 은둔자가 된 후에 곧, 그리고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기 훨씬 전에 우리의 보디삿따(싯닷타, 산스크리트어로 싯다-르타)께서는 그 당시에 저명한 두 요기인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로부터 호흡/까시나 명상 기술을 배웠습니다.

     

    • * 알라-라 깔-라-마는 세 번째 아루빠 사마-빳띠(arupa samāpatti)인 아-낀짠냐-야따나(ākiñcaññāyatana, 아루빠 사마-빳띠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네 가지 루빠 자-나에 능숙해야 함)에 도달하는 방법을 보디삿따께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보디삿따께서는 그 아루빠 사마-빳띠는 아-낀짠냐-야따나 브라흐마 영역에 태어나게 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Bodhirājakumāra Sutta (MN 85)’을 참조하세요. 알라-라 깔-라-마를 떠나신 후, 보디삿따께서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가셔서 가장 높은 아루빠 사마-빳띠인 네와산냐-나-산냐-야따나(nevasaññānāsaññāyatana)에 도달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위 링크된 숫따의 표식 13.25를 참조하세요. 

    • * 보디삿따께서는 가장 높은 아루빠 사마-빳띠조차도 괴로움을 끝나게 하지 못하고 유한한 수명을 가진 그 브라흐마 영역에 태어나게 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 그 두 스승을 떠난 후에, 우리의 보디삿따께서는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6년을 더 힘쓰며 보냈습니다. 위 링크된 동일한 숫따에 묘사된 바와 같이, 보디삿따께서는 그 당시의 요기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기교를 실천하며 고초를 겪었습니다. 예를 들어, 위 링크된 숫따의 표식 25.1 ~ 30.5를 참조하세요.

     

    3. 육 년 동안 고초를 겪은 후, 보디삿따께서는 마침내 그런 접근법들은 닙바-나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위 링크된 숫따의 표식 30.6을 참조하세요.

     

    • * 보디삿따께서는 지혜(빤냐-)를 육성하고 ‘이 세상의 참된 본질’, 즉 ‘야타-부-따 냐-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야타-부-따 냐-나’에 대해서는 ‘부-따와 야타부-따 ㅡ 그것들의 진정한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보디삿따께서는 이전에 도달했던 그 동일한 자-나를 육성했지만, 이번에는 까-마 라-가(kāma rāga)를 단지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제거함으로써 육성하였습니다. 위 링크된 숫따의 표식 34-37.1을 참조하세요.

    • * 그리고, 보디삿따께서는 ‘세 가지 유형의 더높은 지혜’(떼윗자-, tevijjā)를 깨달으셨는데, 위 링크된 숫따의 표식 34-37.1에 있는 바와 같이 그 순서로 붑베니와-사-눗사띠 냐-나(pubbenivāsānussati ñāṇa), 쭈뚜-빠빠-따 냐-나(cutūpapāta ñāṇa), 및 아-사왁카야 냐-나(āsavakkhaya ñāṇa)입니다. 물론, 마지막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모든 아누사야/상요자나를 제거하여 삼-마삼붓다가 되게 한 지혜입니다.

    • * 붓다의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 붓다께서는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담마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기가 어려울 것임을 아셨습니다. 위 링크된 숫따의 표식 43.1을 참조하세요. 우리가 논의한 바와 같이, 그런 ‘세계관’은 삼마-삼마붓다에 의해 발견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결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Sammāsambuddha Sutta (SN 56.23)’를 참조하세요.

     

    극소수가 아리야 자-나를 통해 막가 팔라를 얻는다

     

    4. 필자는 아라한과를 성취한 이들 중 극소수만이 ‘아리야 자-나/사마-빳띠의 길’을 따르고 ‘세 가지 유형의 더 높은 지혜’(떼윗자-, tevijjā)를 육성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 붓다 시대 중에도, 대부분은 어떤 자-나가 없이 아라한과에 도달했습니다. 아나리야 자-나를 육성했던  일부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후, 그 아나리야 자-나 상태를 통해 막가 팔라를 얻었습니다. 즉, 대부분의 아라한은 ‘빤냐-위뭇띠 아라한’입니다. ‘깔라하위와-다 숫따 ㅡ 싸움과 분쟁의 기원’ 포스트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필자의 추가 코멘트(1~3)를 참조하세요.

    • * 그것은 다른 주제이지만, 필자가 위의 내용을 강조하고 싶었던 이유는 붓다께서 가르치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묘사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닙바-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 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은데, 자-나/사마-빳띠를 얻는 것은 고따마 붓다께서 붓다의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도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호흡 명상은 부처님 전에도 실천되었다

     

    5. 그러므로, 호흡 명상과 (마음을 진흙 덩이, 불, 또는 한 사발 물에 집중하는) 까시나 명상은 부처님 시대 전에도 널리 알려지고 실천되었습니다. 그 기교는 까-마 라-가를 억누르고 아나리야 자-나에 들어가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 * 위 #2에 묘사된 바와 같이, 보디삿따께서는 처음에 그 모든 기교를 시험했고 그것들은 미래 괴로움, 즉 재탄생 과정을 멈추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 * 보디삿따께서는 유일한 길은 모든 재탄생 과정이 일어나는 메커니즘(빠띳짜 사뭅빠-다)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 즉 지혜(빤냐-)를 육성하는 것임을 발견하셨습니다. 빠띳짜 사뭅빠-다를 이해하는 과정 중에, 마음은 어떤 도과(막가 팔라)에 이르는데 필요한 평온함(사마-디)에 이릅니다

     

    막가 팔라를 위한 우빠짜-라 사마-디

     

    6. 사마-디에는 무한히 다양한 유형이 있습니다. 도과(막가 팔라)를 얻으려면, 그 막가 팔라를 위한 우빠짜-라 사마-디(upacāra samādhi)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빠짜-라(upacāra, ‘upachāra’로 발음)는 ‘특정 정신 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며, 이 경우에는 막가 팔라입니다. 예를 들어, 소따빤나  단계에 도달하려면, 소따빤나 단계를 위한 ‘우빠짜-라 사마-디’에 도달해야 합니다.

     

    • * 자-나에 들어가는 것에는 그 자체의 ‘우빠짜-라 사마-디’가 있는데, 이는 막가 팔라를 위한 ‘우빠짜-라 사마-디’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두 가지 다른 유형의 사마-디입니다. 막가 팔라를 얻기 위해서, 자-나를 육성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흔하지도 않습니다. ‘찟따 위-티 ㅡ 감각 입력의 처리’ 포스트의 #12~#16을 참조하세요.

    • * 이제, 그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이 포스트이 초점인 산냐- 숫따(Saññā Sutta)를 논의해 보겠습니다

     

    산냐- 숫따 ㅡ ‘호흡/까시나 니밋따’는 닙바-나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7. 한 때, 아난다 존자는 호흡(공기) 또는 까시나 대상을 명상 대상 또는 니밋따로 사용하지 않고 사마-디에 도달할 수 있는지 붓다께 물었습니다. ‘Saññā Sutta (AN 11.7)’를 참조하세요. 

     

    • * 아난다 존자는 “Siyā nu kho, bhante, bhikkhuno tathārūpo samādhipaṭilābho yathā neva pathaviyaṁ pathavisaññī assa, na āpasmiṁ āposaññī assa, na tejasmiṁ tejosaññī assa, na vāyasmiṁ vāyosaññī assa, na ākāsānañcāyatane ākāsānañcāyatanasaññī assa, na viññāṇañcāyatane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ī assa, na ākiñcaññāyatane ākiñcaññāyatanasaññī assa, n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e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ī assa, na idhaloke idhalokasaññī assa, na paraloke paralokasaññī assa, yampidaṁ diṭṭhaṁ sutaṁ mutaṁ viññātaṁ pattaṁ pariyesitaṁ anuvicaritaṁ manasā, tatrāpi na saññī assa; saññī ca pana assā”ti? 라고 물었습니다. 

    • * 번역은 다음과 같이 개선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빅쿠가 ‘빠타위 산냐-’를 ‘받아들임’으로써 (까시나 명상에서 진흙 덩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빠타위에, 또는  ‘아-뽀 산냐-’를 ‘받아들임’으로써 (까시나 명상에서 물 한 사발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아-뽀에, 또는 ‘떼조 산냐-’를 ‘받아들임’으로써  (까시나 명상에서 불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떼조에, 또는 ‘와-요 산냐-’를 ‘받아들임’으로써 (호흡 명상에서 공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와-요에, 또는 …. 등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이것과 같은 사마디를 얻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 * 예를 들어, ‘호흡 명상’은  공기에 대한 산냐-를 니밋따(nimitta)로 취하는데, 이것이 ‘와-요 산니- 앗사(vāyo saññī assa)’입니다.

     

    ‘와-요 산니- 앗사’ ㅡ 무엇을 뜻하는가?

     

    8. 마음이 특정 대상에 집중할 때, 특정한 식으로 ‘그 대상을 인식’합니다. ‘산냐-(saññā)’는 보통 ‘인식(perception)’으로 번역되지만, 그것에는 붓다 담마에서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붓다 담마를 이해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뿌툿자나)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잘못되게 인식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즉, 뿌툿자나는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 또는 ‘왜곡된 인식(distorted perception)’을 가집니다. 필자는 그것을 ‘왜곡된 산냐-(distorted saññā)’라고 부릅니다.

     

    • * 우리의 육체적 몸과 정신적 몸은 ‘왜곡된 인식’을 주도록 (빠띳짜 사뭅빠-다를 통해) ‘프로그램/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위나 다이아몬드를 ‘단단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현대 과학도 ‘모든 단단한 물체’의 99%가 비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산냐- 위빨라-사 ㅡ 왜곡된 인식’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물-라빠리야-야 숫따(MN 1)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뿌리’를 묘사하는데, 그 뿌리는 ‘산냐- 위빨라-사’, 즉 ‘왜곡된 인식’입니다. ‘물-라빠리야-야 숫따 ㅡ 모든 것의 뿌리’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vāyasmiṁ vāyo saññī assa’ 구절은 문자 그대로, 마음이 호흡에 집중하는 중에 ‘공기(에 대한 왜곡된 산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앗사(assa)’는 ‘받아들임’을 뜻하고, ‘와-야스밍(vāyasmiṁ)’은 ‘공기에/에 대해’를 뜻합니다.

    • * 동일한 식으로, 까시나 명상을 육성하는 어떤 요기는 단단한 물체/대상(예를 들어, 진흙 덩이)에 주의를 집중하며, 이것은 ‘pathaviyaṁ pathavi saññī assa’와 같습니다. 어떤 다른 이들은 (떼조 산냐-를 얻기 위해) 불을 니밋따로 사용합니다. 호흡에 집중하는 것은 와-요 산냐-를 받아들이는 것과 동등한 까시나입니다.

    • * 따라서, 위 절의 첫째 부분에서, 아난다 존자는 “호흡이나 또다른 까시나 대상에 집중하지 않고 사마-디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루빠 사마-빳띠에 들어감

     

    9.  위 절의 중간 부분( “na ākāsānañcāyatane ākāsānañcāyatanasaññī assa, na viññāṇañcāyatane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ī assa, na ākiñcaññāyatane ākiñcaññāyatanasaññī assa, n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e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ī assa” )은 마찬가지로 아루빠 사마-빳띠에 대한 것입니다.

     

    • * 여기서,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 빅쿠가 ‘무한한 공간’, ‘무한한 윈냐-나’, ‘줄여진 산냐-’, 또는 ‘산냐-의 일시적 그침’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이것과 같은 사마디를 얻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 * 예를 들어, 아-까-사-난짜-야따나 아루빠 사마-빳띠(ākāsānañcāyatana arupa samāpatti)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아나리야 요기는 무한한 공간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그것은 ‘무한한 공간에 대한 산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 * 일단 거기에 도달하여, 아나리야 요기가 마음을 ‘무한한 윈냐-나’에 집중하면, 마음은 ‘무한한 공간’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이제, 그 요기에게는 공간 차원의 인식(산냐-)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요기는 그 무한한 산냐-를 좁은 수준으로 줄일 수 있는데, 그것이 아-낀짠냐-야따나 아루빠 사마-빳디(ākiñcaññāyatana arupa samāpatti)입니다. 위 #2에서 언급한 알라-라 깔-라-마 요기는 거기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10. 더 진전하면, 아나리야 요기는 그 줄여진 산냐-를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나리야 요기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정신 상태인데, 다른 요기인 웃닷까 라-마뿟따가 도달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대한 ‘산냐-(saññā)’가 신기루임을 입증하며, 그 산냐-는 아나리야 요기라도 거의 일어나지 않게 멈출 수 있습니다

     

    • * 그러나, 아나리야 요기는 위 #3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이 세상의 참된 본질’, 즉 ‘야타-부-따 냐-나’에 대한 무지, 즉 아윗자-(avijjā)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산냐-(saññā)가 ‘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 * 우바또위뭇따 아라한(ubhatovimutta Arahant)만이 (7일 까지) 산냐-가 일어나는 것을 멈출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아라한들은 야타-부-따 냐-나(yathābhūta ñāna)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찟따가 일어나지 않는 니로다 사마-빳띠(nirodha samāpatti)입니다.

    • * 다른 아라한들(빤냐-위뭇따)도 야타-부-타 냐-나를 가졌지만, 그들은 아리야 자-나와 사마-빳띠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니로다 사마-빳띠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자-나 ㅡ 더 미세한 세부사항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이것이 또한 산냐-가 붓다 담마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인 이유입니다. 이 세상과 연관된 모든 산냐-는 ‘세 단계 실천’ 섹션의 ‘인식(산냐-) 이해를 통한 소따빤나 단계(Sotapanna Stage via Understanding Perception (Saññā))’ 서브세션에서 논의한 것처럼, 환상 또는 신기루입니다.  

     

    아리야 사마-디에 도달하는 방법

     

    11. 위 #7에 있는 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난다 존자는 이 세상(이 영역 또는 모든 다른 영역, ‘na idhaloke idhalokasaññī assa, na paraloke paralokasaññī assa’)과 연관된 어떤 니밋따도 취하지 않고 사마-디에 도달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 * 대답은 ‘예스(yes)’였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유일한 니밋따는 ‘닙바-나라는 쿨링 다운(열 내림)/궁극적 고요함’입니다.

    • * ‘Saññā Sutta (AN 11.7)’의 표식 5.1에서, 붓다께서는 아리야(성자)는 ‘닙바-나라는 쿨링 다운(열 내림)/궁극적 고요함’을 니밋따로 취한다고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 ‘etaṁ santaṁ etaṁ paṇītaṁ, yadidaṁ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입니다.

     

    요약

     

    12. 어떤 ‘로끼야 니밋따’(세상에 속하는 대상)를 명상 대상(니밋따)로 취하는 것이 아나리야 명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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