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까-마, 루빠, 및 아루빠 로까의 산냐-
원문: Sutta Interpretation 섹션의 ‘Saññā In Kāma, Rupa, and Arupa Loka’ 포스트
산냐-(saññā)는 까-마 산냐-, 루빠 로까 산냐-, 및 아루빠 로까 산냐-를 포함합니다. 까-마, 루빠, 및 아루빠 로까의 유정체들은 모두 특정한 유형의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라고도 알려진 ‘왜곡된 산냐-, 즉 위빠리따 산냐-’와 함께 태어납니다. 그 이유 때문에 감각적 즐거움, 자-나의 즐거움, 및 아루빠 사마-빳띠의 즐거움에 들러붙음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2025년 9월 20일 작성
로까 산냐-에 집중하지 않고 명상할 수 있는가?
1. ‘Saññā Sutta (AN 11.7)’에서,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Siyā nu kho, bhante, bhikkhuno tathārūpo samādhi paṭilābho yathā neva pathaviyaṁ pathavisaññī assa, na āpasmiṁ āposaññī assa, na tejasmiṁ tejosaññī assa, na vāyasmiṁ vāyosaññī assa, na ākāsānañcāyatane ākāsānañcāyatanasaññī assa, na viññāṇañcāyatane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ī assa, na ākiñcaññāyatane ākiñcaññāyatanasaññī assa, na nevasaññānāsannayatane nevasaññānāsannayatanasaññī assa, na idhaloke idhalokasaññī assa, na paraloke paralokasaññī assa, yampidaṁ diṭṭhaṁ sutaṁ mutaṁ viññātaṁ pattaṁ pariyesitaṁ anuvicaritaṁ manasā, tatrāpi na saññī assa; saññī ca pana ass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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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번역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 서로 다르게 강조표시를 하였습니다. 빠알리 문법은 다르기 때문에 문장 구조의 순서가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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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스승님, 고체에 대한 빠타위 산냐-(pathavi saññā), 액체(예를 들어, 물)에 대한 아-뽀 산냐-(āpo saññā), 불에 대한 떼조 산냐-(tejo saññā), 바람에 대한 와-요 산냐-(vāyo saññā), 아-까-사-난짜-야따나 산냐-(ākāsānañcāyatana saññā), 윈냐-난짜-야따나 산냐-(viññāṇañcāyatana saññā), 아-낀짠냐-야따나 산냐-(ākiñcaññāyatana saññā), 네와산냐-나-산나야따나 산냐-(nevasaññānāsannayatana saññā) (이 네 가지는 아루빠 로까 사마-빳띠에 대한 것임),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과 관련된 어떤 산냐-(saññā), 미래 존재와 관련된 어떤 산냐-(saññā), 또는 윈냐-나로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거나, 파악하는 것과 관련된 어떤 산냐-(saññā)를 취하지 않고도 사마-디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까? 하지만 [사마-디 상태에 이른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인식할 것입니다(여전히 산냐-를 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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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으로 강조된 문장은 모든 영역에 존재하는 네 가지 ‘대요소’를 나타냅니다. 그것들은 또한 아나리야 요기(수행자)들이 루빠 로까 자-나(진흙 볼, 물 그릇, 불, 호흡을 이용한 까시나 명상)를 기르기 위해 사용되는 (마음이 집중하는) 니밋따의 유형을 나타냅니다. 검은색으로 강조된 문장은 아루빠 로까 사마-빳띠 및 다른 존재를 나타냅니다. 자주색으로 강조된 문장은 일상생활 중의 보통 산냐-를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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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문장에서, 아난다 존자는 위에서 언급한 어떤 종류의 산냐-도 없지만, 여전히 산냐-가 있는 사마-디(samādhi)가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가라앉히는(쿨링 다운) 산냐-’는 닙바-나와 관련이 있다
2. 표식 5.1에서, 붓다께서는 “Idhānanda, bhikkhu evaṁ saññī hoti: ‘etaṁ santaṁ etaṁ paṇītaṁ, yadidaṁ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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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물론, 그런 사마-디가 있다. 그것은 닙바-나와 관련된 ‘가라앉히는(쿨링 다운) 산냐-’며, ‘etaṁ santaṁ etaṁ paṇītaṁ, yadidaṁ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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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닙바-나와 관련된 그 산냐-에는 그 인식에 어떤 왜곡됨이 없습니다. 즉 모든 왜곡된(위빠리따), 즉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를 가진 모든 로끼야 산냐-(세상과 관련된 모든 산냐-, 즉 빤쭈빠-다-낙칸다)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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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의한 바와 같이, 일상 생활 중의 아라한도 (들러붙음이 없이) 로끼야 산냐-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아라한뜨 팔라 사마-빳띠(아라한뜨 팔라를 다시 경험함)에 있는 동안에는, 아라한들은 (어떤 왜곡도 없는) ‘순수한 산냐-’를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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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욱이, 소따빤나 단계 이상의 모든 [유학] 성자들도 사띠빳타-나 부미(Satipaṭṭhāna Bhūmi)에 있는 동안에 (어떤 왜곡도 없는) ‘순수한 산냐-’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윗자-는 까-마 로까의 까-마 산냐-에 의해 촉발된다’의 #19와 ‘까-마 산냐-를 극복 ㅡ 사띠빳타-나 부미 또는 자-나’를 참조하세요.
로까 산냐-에서는 삼마- 사마-디가 불가능하다
3. 표식 5.3에서, 붓다께서는 ‘닙바-나 산냐-’는 위 #1에 열거된 어떤 로끼야 산냐-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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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문답 후에,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가서 동일한 질문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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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난다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가 정확히 동일한 설명을 하시는 것을 듣고 놀랐습니다. 표식 10.1에서 아난다 존자는 “정말 놀랍고, 정말 대단합니다. 스승님과 제자가 아무런 모순없이 똑같은 답변을 주셨다니!”라고 소리내어 말했습니다.
아-나-빠-나사띠가 호흡 명상이 아니라는 직접적인 증거
4. 위 숫따는 호흡 명상이나 어떤 세간적 까시나 명상은 불교 명상이 아니라는 것을 띠삐따까에서 직접 증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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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흡 명상은 와요 산냐-(공기가 코로 들어오고 나가는 산냐-)를 명상의 초점으로 삼습니다. 아나리야 요기(수행자)들의 세간적 까시나 명상은 진흙 볼(빠타위 산냐-), 물 그릇(아-뽀 산냐-), 또는 불(떼조 산냐-)을 니밋따(nimitta) 또는 초점으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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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의한 바와 같이(‘로까와 닙바-나(알로까) ㅡ 완전한 개관’ 참조), ‘세상’과 닙바-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로까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닙바-나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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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의미에서, ‘로까(loka)’는 보통 사람과 환경이 있는 물리적 세계로 여겨지며, 광활한 우주의 별, 행성 등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각자의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를 (외부 세계를 일으키는 ‘각자의 세계’)로 언급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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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해석 모두에서 닙바-나와 ‘로까’ 사이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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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세상/로까’와 관련된 어떤 것도 명상이나 성스런 길을 닦기 위한 니밋따로 취해질 수 없습니다.
닙바-나 산냐-를 취하기 위해서는 소따빤냐여야 한다
5. 그러나, 명상의 초점을 닙바-나 상태(평화로운 마음 상태)로 삼으려면 최소한 소따빤나(수다원)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어도 순간적으로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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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논의했듯이, 사람은 소따빤나 팔라 순간을 얻었을 때 처음으로 어떤 유형의 ‘왜곡된 산냐-’가 없이 ‘닙바-나 산냐-’를 ‘담마의 눈’으로(또는 ‘담마 짝쿠’로 또는 ‘지혜’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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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급했듯이, 이는 설법을 듣거나 담마 개념을 숙고하는 동안 모든 유형의 ‘로까 산냐-’를 극복할 때 일어납니다. 그 순간, 마음은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에 들러붙는 것의 위험성을 깨닫고, 자신을 윤회 과정에 묶어두는 처음 세 가지 상요자나(saṁyojana)를 제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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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세 가지 상요자나(saṁyojana)는 세상(빤쭈빠-다-낙칸다)에 대한 잘못된 견해, 즉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와 관련이 있습니다. 동시에, 단순히 의례 의식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빤냐-를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모든 의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후자 두 가지는 실랍바따 빠라마-사(silabbata paramāsa)와 위찌낏차-(vicikicchā)와 관련이 있습니다.
‘로까 산냐’에 대한 자동적 들러붙음의 중요성 이해
6. 사람은 또한 ‘로까 산냐-(loka saññā)’를 극복하는 순간에 ‘산딧티꼬(Sandiṭṭhiko)’가 됩니다. 즉, 그 사람은 감각 사건의 초기 단계에서 로까 산냐-의 자동적 들러붙음이 어떻게 닙바-나에서 멀어지게 하고 빤쭈빠-다-낙칸다의 또 다른 국면의 시작으로 이어지게 하는지를 ‘지혜로 볼’ 수 있습니다. ‘산딧티꼬 ㅡ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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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자동적 들러붙음’은 해당 상요자나가 깨지지 않는 한, 발생합니다. 이것은 ‘빤쭈빠-다-낙칸다의 성장 ㅡ 아누소따가-미’에 논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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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까-마 산냐-’(까-마 라-가 상요자나로 인해 까-마 로까에 있는 ‘왜곡된 산냐-’)는 마음이 (위 링크 포스트에 논의된 바와 같이) 일련의 들러붙음의 단계 1에서 까-마 로까의 모든 감각 입력에 자동적으로 들러붙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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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은 까-마 라-가, 루빠 라-가, 아루빠 라-가 상요자나라는 세 가지를 모두 제거했습니다. 따라서, 아라한들은 어떤 ‘로까 산냐-’에도 들러붙지 않습니다.
산냐-의 다양성은 까-마 로까에서 가장 높다
7. 까-마 로까의 11가지 영역에서 나타나는 ‘로까 산냐-(loka saññā)’의 수와 유형이 가장 많습니다. ‘까-마 앗사-다(kāma assāda)’, 즉 ‘맛, 냄새, 및 감촉(그리고 이와 관련된 시각 대상 및 소리)과 밀접하게 접촉하는 감각적 즐거움’은 까-마 로까에만 존재하며, (성관계, 맛있는 음식, 매혹적인 시각 대상, 소리, 냄새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유형의 연관된 ‘로까 산냐-(loka saññā)’를 가집니다. 이를 ‘나-낫따 산냐-(nānatta saññā)’, 즉 ‘폭넓게 다양한 산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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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루빠 로까’의 16가지 브라흐마 영역에서, 마음은 더 적은 수의 산냐-를 경험합니다. 이 영역들에서는 ‘자-나 산냐-’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사위딱까(savitakka), 사위짜-라(savicāra), 삐띠(piti), 수카(sukha), 및 에깍가따-(ekaggatā)입니다. 더 높은 루빠 로까 영역으로 올라갈수록 산냐-의 수는 줄어들고, 그에 따라 스트레스, 즉 고통도 줄어듭니다. 제4자-나에 이르면,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자-나 산냐-’가 제거되고, 오직 에깍가따-만 경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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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루빠 로까’(네 가지 아루빠 브라흐마 영역)에서는 오직 마음만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경우, 마음은 오직 하나의 산냐-에만 집중합니다. 예를 들어, 아-까-사-난짜-야따나( ākāsānañcāyatana )와 윈냐-난짜-야따나( viññāṇañcāyatana ) 영역에서는 마음이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윈냐-나에 각각 집중합니다. 이것들은 스트레스가 가장 적은 ‘아루빠 로까 사마-빳띠(arupa loka samāpatti)’입니다. 가장 높은 브라흐마 영역에서는 스트레스(고통)가 가장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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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아나리야 요기가 까-마 로까에서 루빠 로까로, 그리고 마침내 아루빠 로까로 체계적으로 올라가면, 경험되는 ‘왜곡된 산냐-’의 수는 줄어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나 경험이 까-마 앗사-다(감각적 즐거움)보다 더 좋고, 아루빠 사마-빳띠(arupa samāpatti)는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논의하듯이 이러한 성취는 일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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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의 마음은 여전히 까마 산냐-를 받아들이므로, 그것들에 들러붙지 않고 까-마 앗사-다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나 또는 아루빠 사마-빳띠를 육성했다면, 그것들에 들러붙지 않고 그것들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바또위뭇띠 아라한 ㅡ 자-나와 사마-빳띠를 통해 진행
8. 부처님 시기(특히 초창기)에는 까-마 로까, 루빠 로까, 아루빠 로까에 있는 산냐-를 차례로 극복하여 체계적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우바또위뭇띠 아라한(ubhatovimutti Arahant)들이 있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모든 단계(모든 루빠 자-나와 모든 아루빠 사마-빳띠)를 거쳐 진행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중간 자-나나 사마-빳띠 상태에서(또는 까-마 로까에서 직접)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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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많은 숫따에서 논의됩니다. ‘Mahāmālukya Sutta (MN 64)’를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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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링크 주소는 처음 다섯 가지 상요자나를 제거하여 첫번째 아리야 자-나를 얻는다는 내용에 링크했습니다. 표식 9.7에서, 모든 존재의 결실없는 본질(표식 9.3: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ṁ vedanāgataṁ sannagataṁ saṅkhāragataṁ viññāṇagataṁ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을 봄으로써 그리고 ‘닙바-나 수카’(표식 9.6: “‘etaṁ santaṁ etaṁ paṇītaṁ yadidaṁ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을 숙고함으로써 거기에서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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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그들이 첫번째 자-나에서 아라한과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단지 위딱까/위짜-라를 제거함으로써 두번째 자-나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표식 10.12.1: “..vitakkavicārānaṁ vūpasamā”).
9. 그리고 숫따에서는 네 가지 자-나 모두에 대해 그 과정을 반복합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두번째, 세번째, 또는 네번째 자-나에서 아라한과를 얻지만, 다른 사람들은 바로 다음 자-나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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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식 13.1에서, 숫따는 네번째 자-나에서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세카(sekha)를 설명하지만, [그들은] 그때까지 모든 유형의 산냐-를 극복하여 첫번째 아루빠 사마-빳띠(아-까사-난짜-야따나)로 올라가는 사람입니다(‘..sabbaso rūpasaññānaṁ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ṁ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ṁ amanasikār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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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동일한 과정이 아루빠 로까의 다른 세 영역(윈냐-난짜-야따나, 아-낀짠냐-야따나, 네와산냐-나-산냐-야따나)과 관련된 후속 단계에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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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와산냐-나-산냐-야따나에 남아 있는 ‘로까 산냐-’의 흔적이 제거되면, ‘산냐-웨다이따니로다’, 즉 ‘니로다 사마-빳띠’로 이동합니다. ‘산냐-웨다이따니로다( saññāvedayitanirodha )’는 ‘saññā avedayita nirodha’가 축약된 것이며, ‘웨다나-와 산냐-의 소멸’이며, 모든 생각의 소멸과 함께 닙바-나를 실제로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니로다 사마-빳띠(nirodha samāpatti)’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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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에서는 세상과 관련된 모든 산냐-가 없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완전한 닙바-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닙바-나는 모든 아라한에게 동일하다
10. 마지막으로, 표식 16.1에서 아난다 존자는 붓다께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Eso ce, bhante, maggo esā paṭipad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hānāya, atha kiñcarahi idhekacce bhikkhū cetovimuttino ekacce bhikkhū paññāvimuttino’ 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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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어떻게 여기 일부 아라한들은 (모든 자-나와 사마-빳띠를 가진) 쩨또위뭇띠(cetovimutti)인 반면, 다른 아라한들은 쩨또위뭇띠가 없이(즉, 그들은 단지 빤냐-위뭇띠일 뿐) 해탈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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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그것은 그들의 기관(감각 기관이 아니라, 사띠, 삿따-, 위리야, 사마-디, 빤냐-)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단 하나의 자-나도 닦지 않고 아라한과를 얻고, 어떤 이들은 자-나 또는 사마-빳띠를 통해 아라한과를 얻습니다. 비교적 소수의 이들은 모든 자-나와 사마-빳띠를 성취하여,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니로다 사마-빳띠’에 들어가 ‘완전한 닙바-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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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극적인 성취인 닙바-나는 모든 유형이 아라한이나 붓다에게 동일합니다. 닙바-나에는 라-가(rāga), 도사(dosa), 및 모하(moha)가 마음 속에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때 도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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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Anupada Sutta (MN 111)’에서, 붓다께서는 사-리뿟따 존자가 어떻게 모든 자-나와 사마-빳띠를 순차적으로 획득하여 (위 #9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니로다 사마-빳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31 영역 중의 윤회 여정
11. 현재 어떤 영역에 있든, 만약 10가지 상요자나가 모두 그대로 남아 있다면, 미래에 (가장 낮은 네 가지 영역, 즉 아빠-야-를 포함하여) 31가지 영역 중의 어느 영역에나 태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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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리야 자-나를 육성하면 루빠 로까에 태어나 수백만 년 동안 ‘루빠 로까’ 영역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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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들은 자-나(jhāna)를 넘어 아나리야 아루빠 사마-빳띠(anariya arupa samāpatti)를 육성합니다. 그들은 ‘아루빠 로까’의 영역에 태어나 훨씬 더 오랫 동안 그곳에 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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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끊어지지 않는 열 가지 상요자나를 모두 지니고 있으므로, 항상 인간 영역에 먼저 돌아올 것입니다. 그 후에는 아빠-야(apāya)에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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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문에 상요자나(saṁyojana)가 어떻게 끊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곧 있을 포스트에서 다루겠습니다.
아루빠 로까의 ‘왜곡된 산냐-’
12. 위 논의로부터, 우리는 결정적인 관찰을 할 수 있습니다. (아-까-사난짜-야따나 사마-빳띠를 얻기 위해) 마음을 텅빈 공간에 집중하는 것조차도 ‘왜곡된/위빠리따 산냐-’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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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는 음식이나 선정 경험과 같은(둘 다 라-가에 속함) ‘좋아하는 감각 입력’에 마음이 어떻게 들러붙는지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또한 도사(dosa)의 화냄으로 적을 보는 것과 같이 ‘원하지 않는 감각 입력’에 마음이 들러붙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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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아-까-사난짜-야따나’에 처럼) 텅빈 공간이나 위 #1에서 언급한 진흙 볼이나 불(자-나를 얻는데 사용됨)과 같은 아나리야 까시나 대상의 어떤 것과 같은 ‘겉보기에 중립적인 감각 대상’에 어떻게 들러붙는지 알기는 더 어렵습니다. 이것은 아루빠 라-가로 일어납니다. 이는 미묘한 점입니다. ‘루빠(rupa)’는 형태를 가질 수 있는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아루빠 로까(arupa loka)에서 (예를 들어) 무한한 공간은 그런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윗자-(avijjā) 때문에 아루빠 라-가(arupa rāga)로 그것에 들러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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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극적인 실재에서,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온 세상은 모든 유정체들의 집단적 업 에너지에 의해 창조됩니다. 마음이 창조한 것은 모두 환상입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산냐-(saññā)를 신기루라고 칭하시고 윈냐-나(viññāṇa)를 마술사라고 칭하셨습니다. ‘왜곡된 산냐-(산자-나-띠)에 속음 ㅡ 들러붙음(땅하-)의 기원’과 ‘아윗자-는 까-마 로까의 까-마 산냐-에 의해 촉발된다’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