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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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살라ㅡ물라 상카-라는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 필요하다

 

원문: Paṭicca Samuppāda 섹션의 ‘Kusala-Mula Saṅkhāra Are Needed to Attain Nibbāna’ 포스트

- 2021년 12월 20일 작성

 

‘꾸살라ㅡ물라 상카-라-(Kusala-mula saṅkhārā)’는 닙바-나(Nibbāna)로 인도합니다. 이 범주의 상카-라(saṅkhāra)는 아윗자-(avijjā)의 반대인,  지혜(빤냐-, paññā)를 통해 생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상카-라로 삶을 산다

 

1. 최근 포스트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아라한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합니다.

 

  • * 상카-라-(Saṅkhārā)는 간단히 말해서 생각입니다.

  • *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생각을 수반합니다. 생각에는 연민, 사랑, 탐욕, 분노, 질투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생각과 함께 의도를 가지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 * 마노 상카-라(mano saṅkhāra)는 자신의 가띠(gati, 성격/습관)에 따라 자동으로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감각 입력(아-람마나, ārammaṇa)이 관심을 끌면,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ā)가 일어납니다. 그런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ā)는 또한 말로 이어집니다. 그 다음,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하면,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ā)를 통해 해당하는 신체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 * 예를 들어, [상점에서] 여러분의 가띠(gati)가 일치하면, 상점에 진열된 물품을 자동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 더 조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계속 보고 살까 말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사는 쪽으로 기울어진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집어 더 주의깊게 살펴보기로 결정할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은 각각 마노(mano), 와찌(vaci), 및 까-야(kāya) 상카-라-(saṅkhārā)를 수반합니다. 세상 것들에 대한 들러붙음(즉, ‘찬다라-가_chandarāga’로)과 관련된 그런 생각들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아라한은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하지만,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를 생성하지는 않습니다.

 

찬다라-가는 아비상카-라로 이어진다

 

2. 상카-라(saṅkhāra)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 사이의 차이를 아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찬다라-가(chandarāga)가 있는 상카-라(saṅkhāra)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 * ‘라-가(rāga)의 올바른 ‘빠다 니룻띠(pada nirutti, 어원)’는 ‘라-(rā)’ + ‘악가(agga)’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 ‘라-(rā)’는 ‘여행(윤회 여정)’을 의미하고 ‘악가(agga)’는 ‘우선권을 주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라-가(rāga)’는 ‘기꺼이 (윤회 여정에)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 * ‘찬다(chanda)(‘ca’ + ‘anda’)는 ‘눈먼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찬다라-가(chandarāga)’를 지닌 사람은 재탄생 과정에 계속 머무르는 것의 위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로-바, 라-가’ 및 ‘까-맛찬다, 까-마라-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찬다라-가(chandarāga)에는 까-마 라-가(kāma rāga)(‘까-마 로까’에 들러붙음), 루빠 라-가(rupa rāga)(‘루빠 로까, 즉 16가지 루빠-와짜라 브라흐마 영역에 들러붙음), 및 아루빠 라-가(arupa rāga)(4가지 아루빠-와짜라 브라흐마 영역에 들러붙음)라는 3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 * 까-마 라-가(kāma rāga), 루빠 라-가(rupa rāga), 아루빠 라-가(arupa rāga)는 재탄생 과정에 묶는(결박하는) 3가지 상요자나(saṁyojana)(윤회 족쇄)라는 점에 주목하세요. 까-마 라-가(kāma rāga)는 아나-가-미(Anāgāmi) 단계에서 끊어지고, 다른 두 가지 족쇄는 아라한(Arahant) 단계에서 끊어집니다.

  • * 따라서, 찬다라-가(chandarāga)를 제거하면 닙바-나(Nibbāna)로 이어집니다. ‘참고 자료 1’을 참조하세요.

 

상카-라의 세 가지 주된 유형

 

3.  다음 분류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1. 1. 일상 활동과 관련된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은 ‘업적으로 중립’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업적으로 중립인 상카-라(kammically-neutral 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2. 2.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재탄생 과정을 계속하게 합니다. 이것들은 아윗자-(avijjā)로 인해 일어나는 상카-라(saṅkhāra), 즉 아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과정에서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입니다. ‘아꾸살라ㅡ물-라 웁빳띠 빠띳짜 사뭅빠-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3. 3. 그 다음, 성스런 길에 있는 자(소따빤나 아누가-미 단계 이상의 성자)가 육성하는 ‘꾸살라ㅡ물라 상카-라(kusala-mula saṅkhāra)’가 있습니다. 그 상카-라(saṅkhāra)는 성스런 진리(사성제)를 이해함으로써 일어납니다. 그것이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과정에 있는 ‘꾸살라-물라 빠띳짜- 상카-라(kusala-mula paccayā saṅkhāra)’입니다.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닙바-나에 도달해야 한다

 

3-1. 우리는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열반을 향한 일(수행)도 또한 상카-라(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 * 닙바-나(Nibbāna)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까-야 상카-라_kāya saṅkhāra’로) 신체 활동을 하고, (‘와찌 상카-라_vaci saṅkhāra’로) 담마 개념을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마음이 적절한 상태(사마-디, samādhi)에 있을 때 특정한 담마 개념이 자동적으로 마음에 떠오릅니다(마노 상카-라, mano saṅkhāra).

  • * 그것이 바로 ‘꾸살라ㅡ물라 상카-라(kusala-mula saṅkhāra)’입니다.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 단계부터 꾸살라ㅡ물라 상카-라(kusala-mula saṅkhāra)를 육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라한 단계에 이를 때까지 일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아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과정을 통해 일어날 수 있습니다.

  • * 아라한뜨후드(Arahanthood, 아라한과)를 얻으면,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닙바-나(열반)을 얻은 후에도 빠리닙바-나(Parinibbāna)에 이를 때까지 여전히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합니다. ‘상카-라 ㅡ 단일 낱말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세 가지 유형의 아비상카-라

 

4. ‘상카-라 ㅡ 단일 낱말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포스트에서, 우리는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에서 작용할 수 있는 세 가지 유형의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곳의 #8을 참조하세요.

 

  • * 먼저, 로바(lobha), 도사(dosa), 모하(moha)(그리고 질투와 같은 다른 관련된 쩨따시까)를 수반하는 아뿐냐-비상카-라(apuññābhisaṅkhāra)(나쁜 상카-라)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아뿐냐 아비상카-라(apuñña abhisaṅkhāra)’로 낮은 영역(아빠-야-, 악처/사악처)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아뿐냐-비상카-라(apuññābhisaṅkhāra)는 닙바-나(Nibbāna)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것들은 보기(알기) 쉽습니다.

  • * 그러나, 우리는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좋은 상카-라(good saṅkhāra)’가 열반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알았습니다). 그것들은 인간 영역 또는 그 위의 ‘좋은 영역(선처)’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대적으로 좋은’ 아비상카-라 (abhisaṅkhāra)입니다. 그것들은 뿐냐-비상카-라 (puññābhisaṅkhāra)아-넨자비상카-라 (āneñjabhisaṅkhāra)입니다.

 

5.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와 함께 하는 뿐냐 깜마(puñña kamma)는 인간 영역 또는 그 위 영역에 재탄생하는 것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베푸는 것(보시), 도덕적인 삶, 그리고 명상은 뿐냐 깜마(puñña kamma)에 속합니다. ‘뿐냐 깜마 – 다나, 실라, 바와나’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는 또한 16가지 루빠-와짜라 브라흐마(rupāvacara Brahma) 영역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루빠-와짜라 자-나(rupāvacara jhāna, 색계 선정)(처음 4가지 선정)을 육성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 아-넨자-비상카라(āneñjābhisaṅkhāra)는 4가지 아루빠-와짜라 브라흐마(arupāvacara Brahma) 영역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4가지 더 높은 자-나(아루빠-와짜라 자-나/무색계 선정, arupāvacara jhāna)을 육성하는 것에 작용합니다.

 

위 #2에 따르면, 세 가지 유형의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는 모두 찬다라-가(chandarāga)로 인해 일어납니다.

 

뿐냐-비상카-라와 아-넨자-비상카-라가 어떻게 아윗자-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가?

 

6. 기초적 배경이 탄탄하지 않은 사람들은 왜 뿐냐-비상카-라(punñābhisaṅkhāra)와 아-넨자-비상카-라(āneñjābhisaṅkhāra)도 아윗자-(avijjā)로 인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려울 것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사성제/빠띳짜 사뭅빠-다/띨락카나를 이해할 때까지는 아윗자-(avijjā)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스런 진리(사성제)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더 높은 영역에 미래 재탄생을 위해 애쓰는 것도 장기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 * 그것은 그 결정적인 이해에 도달한 후에야 많은 깊은(심오한) 숫따(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 * 그것은 또한 붓다 담마(Buddha Dhamma)의 더 깊은(심오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깊은(심오한) 숫따(경)를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 * 필자는 조만간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고 싶습니다. 이제 또 다른 관련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모든 종교는 행복을 이루도록 선행하기를 권장한다

 

7. 부처님 출현 이전에,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 중립적인 행위를 믿었습니다. 모든 종교는 (어느 정도)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빠알리 용어로, 그것은 아뿐냐-비상카-라 (apuññābhisaṅkhāra)를 피하고 뿐냐-비상카-라 (puññābhisaṅkhāra)를 육성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 * 그 근거의 이면에 있는 원리는 선을 행하면 선한 결과가 따르고 악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그 반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깜마(kamma, 업)의 법칙에 대한 이해의 기본 수준’입니다.

 

붓다 담마와 주요 종교 사이의 차이

 

8. 붓다께서는 또한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삶을 살고 뿐냐-비상카-라(puññābhisaṅkhāra)를 육성하라고 조언하셨습니다.

 

  • * 그러나 붓다 담마에는 더 깊은 수준의 이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세 가지 특성, 즉 띨락카나(Tilakkhana)로 내재된 31영역으로 된 이 세상의 ‘실제 본질(참된 본성)’을 이해하는 것을 수반합니다. 그 이해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와 괴로움에 대한 제1성제를 이해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 더 깊은(심오한) 가르침은 이 세상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기 전에는 고통/괴로움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진실은 단지 ‘좋은 행위(선행)’를 하고 ‘나쁜 행위(악행)’를 삼가함으로써 미래 고통/괴로움을 멈출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아윗자-, avijjā)이라고 말합니다. 

  • * 더 깊은 요점(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붓다께서는 그 깨달음으로 이 세상의 진짜 고통/괴로움을 보셨습니다. 재탄생이 일어나는 31영역으로 된 더 넓은 세계가 있습니다. 중생들은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여 ‘악행’을 범하고 결국 사악처(apāyā, 아빠-야-)에 떨어지게 됩니다. 붓다께서는 미래에 재탄생이 일어나는 과정(빠딧짜 사뭅빠-다, Paṭicca Samuppāda)을 설명하셨습니다.

  • * 그 과정이 이해될 때까지(그래서 틸락카나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중생들은 여전히 우리 세상에 대한 ‘미묘한/미세한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소따빤나(Sotapanna) 단계에서 제거된 더 깊은 수준의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입니다! 그것이 위에서 언급한 더 깊은 수준의 이해입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괴로움을 끝내기에 충분하지 않다

 

9.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선한 행위’의 ‘좋은 결과’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전생에 ‘나쁜 행위’를 했으므로, 그것들의 결과가 ‘나쁜 태어남’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 * X라는 사람이 이번 생에서 어떤 악행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이 생이 100년 정도 이내에 끝나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i) 이 인간 바와(human bhava)의 업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았으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육체를 받음] 것입니다. X가 그 생과 아마도 몇 번 더 인간 육체를 받은 삶에서 악행을 피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결국 X는 아래 옵션 (ii)에 직면해야 합니다.
    (ii) X는 새로운 존재(바와, bhava)로 다시 태어날 것이며, 그것은 X가 현재 인간 바와에서 축적한 ‘선업’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과거 수십억년에 이르는 전생에서 축적한 모든 ‘악업’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 * 그 위험은 띠삐따까(Tipitaka, 삼장)에 있는 일부 이야기에서 분명합니다. 아라한인 목갈라나 존자는 맞아 죽었습니다. 그것은 존자의 전생에 부모를 죽인 깜마(업)의 [에너지가 남아 있는] 흔적 때문이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거의 천 명을 죽였으며 아라한에 이르지 못했다면 아빠-야(apāya)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런 존경받는 아라한들이 과거에 그런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10. 그것이 붓다 담마를 재탄생 과정(윤회)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재탄생 과정이 타당한지를 판단/결정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 * 재탄생(윤회)을 믿지 않는 것은 붓다 담마에서 열 가지 잘못된 견해(밋차- 딧티, micchā diṭṭhi)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그 잘못된 견해로는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견해를 제거함으로써 평범한(세간)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에 도달합니다. 그래야만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와 띨락카나(Tilakkhana)와 같은 더 심오한 개념을 이해하고 로꼿따라(출세간) 삼마- 딧티(lokottara Sammā Diṭṭhi)에 도달하여 성스런 길(성스런 팔정도)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 * 위 내용을 숙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기본 개념들을 이해하지 않고 깊은 숫따(경)를 논의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꾸살라 깜마와 뿐냐 깜마 사이의 차이

 

11. 기본 수준의 이해로 행해진 모든 ‘선한 행위’는 뿐냐 깜마(puñña kamma)입니다. 더 깊은 수준의 이해로 행해진 동일한 행위가 꾸살라 깜마(kusala kamma)입니다. 그것을 다음에 간단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열 가지 유형의 아꾸살라 깜마(akusala kamma)(다사 아꾸살라, dasa akusala)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행동으로 하는 세 가지는 빠-나-띠빠-따-(pānātipātā, 살생), 아딘나-다-나-(adinnādānā, 주지 않는 것을 가짐, 훔침), 까-메-수 밋차-짜-라-(kāmēsu micchācārā, 잘못된 성행위뿐만 아니라 지나친 감각적 즐거움도 포함)입니다. 말로 하는 네 가지는 무사-와-다(musāvāda, 거짓말), 삐수나-와-짜-(pisunāvācā, 중상,비방), 빠루사-와-짜(parusāvācā, 거친말), 삼빱빨라-빠-(sampappalāpā, 잡담, 쓸데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직접 하는 세 가지가 아빗자-(abhijjā,  탐욕, 남의 소유물을 탐함), 브야-빠-다(vyāpāda, 악의, 증오), 밋차- 딧티(micchā ditthi, 그릇된 견해, 사견)입니다.

 

  • * 그 열 가지가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로 행해지면 더 강해집니다. 그런 강한 버전의 아꾸살라 깜마(akusala kamma)는 빠-빠 깜마(pāpa kamma)입니다. 그것들은 곧바로 아빠-야-(apāyā, 악처/사악처)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뿐냐-비상카-라(apuññābhisaṅkhāra)를 수반합니다. 아비담마(Abhidhamma)에서, 그런 ‘아빠-야가-미(apāyagāmi, 악처로 향하는) 행위’는 ‘딧티 삼빠윳따(diṭṭhi sampayutta citta)’, 즉 ‘잘못된 견해로 일어나는 마음’으로 행해집니다. 우리는 또한 그것들이 아뿐냐-비상카-라(apuññābhisaṅkhāra)를 수반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이 아윗자-(avijjā)(또는 모하, moha)의 더 강한 버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10가지 유형의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 잘못된 견해) 중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을 가질 때 사용됩니다.

  • * 10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는 ‘밋차- 딧티, 간답바, 및 소-따빤나 단계’ 포스트에서 논의했습니다.

  • * 다시 말하면, 10가지 유형의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 중의 어떤 것이 있으면, 사람은 (높은 유혹이 있을 때) 모하(moha)로 행동하여 ‘아빠-야가-미 빠-빠 깜마(apāyagāmi pāpa kamma)’를 행할 수 있습니다.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이 항상 잘못된 견해로 행동하고 불가피하게 빠-빠 깜마(pāpa kamma)를 행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가능성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꾸살라 깜마는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행할 수 있다

 

12.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10가지 유형의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가 없어도 사람은 아윗자-(avijjā)로 행하고 여전히 빠-빠 깜마(pāpa kamma)를 행하고 아빠-야(apāya, 악처/사악처)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10가지 유형의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를 가진 사람의 가능성보다 훨씬 적습니다.

 

  • * 그것이 소따빤나 아누가-미(Sotapanna Anugāmi) 단계 이상에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아빠-야-(apāyā)에 재탄생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10가지 유형의 잘못된 견해가 없는 것 외에도 그들은 다음을 이해했습니다. 즉, 재탄생 과정에서 영구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한, 아빠-야-(apāyā, 악처/사악처)에서 미래에 고통/괴로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 * (그러나, 아라한 단계 아래의 성자도 인간 영역 또는 그 이상에 재탄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벼운 아꾸살라 깜마(mild akusala kamma)’를 행할 수 있습니다.)

  • * 누군가 재탄생 과정(윤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 * 그러면 닙바-나(Nibbāna)에 관한 깊은(심오한) 숫따(경)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숫따(경)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만약 누군가가 닙바-나(열반)의 개념을 믿지 않는다면, 왜 그가 닙바-나(열반)에 대해 읽으려고(알려고) 애쓸까요?

  • * 그것이 재탄생 과정(윤회)를 믿지 않는 것은 10가지 잘못된 견해 중 하나인 이유입니다.

 

(잘못 번역된) 심오한 숫따를 논의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13. 많은 사람들은 위에서 논의한 내용을 주의 깊게 읽고 이해함으로써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깊은(심오한) 숫따(경)을 낱말별로 그대로 대응시켜 번역하면 상황을 더 악화시킵니다. 문제는 번역자들조차 필자가 위에서 논의한 개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해했다면, 그런 터무니없는 번역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 필자는 많은 사람들이 수년 동안 토론 포럼에서 동일한 [주제의] 토론에 참여해 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귀중한 시간을 많이 낭비했습니다. 물론, 이런 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철학을 토론(논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 * 그러나 부처님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하기 시작이라도 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희귀한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 100년도 안되는 제한된 시간입니다.

 

요약

 

14. ‘꾸살라ㅡ물라 빠띳짜 사뭅빠-다(Kusala-Mula Paṭicca Samuppāda)’ 과정은 닙바-나(열반)로 인도합니다. 그 과정은 ‘꾸살라ㅡ물라 빳짜야- 상카-라(kusala-mūla paccayā saṅkhāra)’로 시작됩니다.

 

  • * 반면에, 재탄생 과정은 ‘아꾸살라-물라 빠띳짜 사뭅빠-다(Akusala-Mūla Paṭicca Samuppāda)’로 계속됩니다. 그 과정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로 시작됩니다. 성스런 진리를 이해하지 않고 행한 선하고 도덕적인 행위(즉, 뿐냐 깜마, puñña kamma)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 * 사성제/빠띳짜 사뭅빠-다/띨락카나에 대한 이해로 행해지는 동일한 종류의 도덕적 행위가 꾸살라 깜마( kusala kamma)입니다.

  •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도덕적이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꾸살라 깜마(kusala kamma) 범주에 속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꾸살라 깜마(kusala kamma)는 성스러운 진리를 이해해야만 행해질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1. 찬다라-가 숫따( ‘Chandarāga Sutta (SN 22.25)’ )의 영어 번역은 거기 ‘Desire and Lust (SN 22.25)’에 있습니다. 찬다라-가(chandarāga)는 ‘욕구와 열망(desire and lust)’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위 #2에 설명된 바와 같이 올바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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