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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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띳짜 사뭅빠-다' - 자아는 '아윗자-'로 인해 존재한다

     

    원문: Dhamma and Science 섹션의 ‘Paṭicca Samuppāda – A “Self” Exists Due to Avijjā’ 포스트

    - 2019년 11월 16일 작성; 2019년 11월 17일 개정

     

    소개

     

    1. ‘차착까 숫따(Chacakka Sutta, MN 148)’에서는 6가지 실체 각각과 관련된 6가지 매개변수에 대해 설명합니다. 6가지 매개변수는 내부 아-야따나(internal āyatana), 외부 아-야따나(external āyatana), 윈냐-나(viññāṇa), 팟사(phassa), 웨다나-(vedanā), 땅하-(taṇhā)입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6가지 유형의 내부 아-야따나( internal āyatana), 즉 짝쿠(cakkhu), 소-따(sōta), 가-나(ghāna), 지와-(jivhā), 까-야(kāya), 및 마노-(manō) 각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36가지 실체(entity)가 논의됩니다.

     

    • * 관심의 초점은 아-람마나(ārammana)입니다. 예를 들어, 쇼핑몰을 걸어가는 한 여성이 멈춰서 상점 창문으로 드레스를 바라봅니다. 창문으로 보이는 드레스가 그 여성의 관심(주의)을 끌었습니다. 그 드레스는 아-람마나(ārammana)입니다.

    • * 우리는 6가지 감각 중 어떤 것을 통해 오는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게(taṇhā, 땅하-) 될 수 있습니다. 그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게 되거나 갇히게 되는 것’(땅하-, taṇhā)예를 들어 짝쿠(cakkhu)로 다음 과정, 즉 "짝쿤짜 빠띳짜 루-뻬 짜 웁빳자-띠 짝쿠윈냐-낭, 띤낭 상가띠 팟소, 팟사 빳짜야- 웨다나-, 웨다나- 빳짜야- 땅하-(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 paccayā vedanā, vedanā paccayā taṇhā.)"를 통해 발생합니다. 

    • * 우리는 이 시리즈(생명의 기원)에서 ‘붓다의 세계관(Worldview of the Buddha)’ 서브섹션의 이전 포스트에서 그 과정을 자세히 논의했습니다.

     

    땅하-(‘아-람마나’에 들러붙게 됨)는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2. ‘눈길을 끄는 대상’은 루빠 아-람마나(rupa ārammana) 또는 루빠-람마나(rupārammana)(새로운 용어)입니다. 루빠-람마나(rupārammana)로, “짝쿤짜 빠띳짜 루-뻬 짜 웁빳자-띠 짝쿠윈냐-낭(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ñāṇaṃ)”를 통해 짝쿠 윈냐-나(cakkhu viññāṇa)(보는 감각)가 일어납니다. (같은 방식으로, 삿다-람마나(saddārammana), 가-나-람마나(ghānārammana), 지와-람마나(jivhārammana), 까-야-람마나(kāyārammana), 및 담마-람마나(dhammārammana)는 각각 소-따윈냐-나(sōtaviññāṇa), 가나윈냐-나(ghanaviññāṇa), 지와-윈냐-나(jivhāviññāṇa), 까-야윈냐-나(kāyaviññāṇa,  및 마노-윈냐-나(manōviññāṇa)를 각각 일으킵니다.)

     

    • * 순식간에 마음은 그 아-람마나(ārammana)에 매이게 될(땅하-, taṇhā) 것입니다.

    • * 그 아-람마나(ārammana)가 마음을 기분좋게 하는 것이라면, 마음은 탐함을 통해 들러붙을(‘매이게 되는’이 더 좋은 표현일 것임) 수 있습니다. 혐오스러운(반감을 가지는) 것이라면 성냄을 통해 ‘매이게 될’ 수 있습니다. 중립적인 아-람마나((ārammana)라 할지라도 무지로 ‘매이게 될’ 수 있습니다.

    • * 필자가 몇 가지를 계속 반복하여 말하고 있지만, 반복은 그것을 유지(기억)하는 핵심입니다.

    • * 비록 우리가 차착까 숫따(Chacakka Sutta)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위 일련의 것들은 많은 숫따(sutta)에 나와 있습니다. 눈에 띄는 몇 가지 숫따는 MN 18, SN 12.43 ~ SN 12.45, 및 SN 35에 있는 여러 개의 숫따입니다. 이 과정은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땅하-’는 삭까-야 딧티(딧티 위빨라-사)와 아스미 마-나(산냐- 위빨라-사)로 인해 일어난다

     

    3. #1, #2에 언급된 일련의 사건에는 ‘자아(self)’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연속 사건은 어떤 의식적인 생각이 없이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 * 만약 들러붙음 또는 매임(땅하-, taṇh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런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는 가띠(gati)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아(self)’에 대한 잘못된 견해(삭까-야 딧티_sakkāya diṭṭhi, 또는 딧티 위빨라-사_diṭṭhi vipallāsa)와, 또한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산냐- 위빨라-사, saññā vipallāsa)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 ‘자아(self)’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에서 사라지고, ‘자아(self)’에 대한 잘못된 인식(산냐- 위빨라-사, saññā vipallāsa)은 아라한 단계에서만 완전히 사라집니다.

    • *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제거됨에 따라, ‘아빠-야가-미(apāyagāmi, 악처로 향하는) 행위’를 하는 경향이 그칩니다. 그러나 아라한(Arahant) 단계에 이를 때까지, 여전히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와, 그에 따른 아스미 마-나(asmi māna)를 가지며, 심각함이 덜한 부도덕한 행위(akusala kamma, 아꾸살라 깜마)를 할 수 있습니다.

    • * 그것은 ‘겉보기 자아는 깜마 발생에 관련되어 있다’ 포스트에서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와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라는 용어와 함께 논의되었습니다. 그 포스트와 또한 ‘시각은 일련의 스냅사진 - 영화 비유’라는 포스트를 다시 읽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궁극적인 실재면에서 ‘자아’는 없지만, 아라한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자아(self)’에 대한 감각이나 인식을 갖게 됩니다.

     

    ‘땅하-’ ㅡ 괴로움(고통)의 기원

     

     4. 이전 포스트 ‘땅하 - 괴로움(고통)의 기원’에서, 두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가리켜 보였습니다. 

     

    • * 첫째로, 땅하-(taṇhā)(다양한 ‘아-람마나’에 들러붙음 또는 매이게 됨)는 괴로움(고통)의 기원입니다. 그것이 괴로움(고통)에 대한 두 번째 성스런 진리입니다. 그 땅하-(taṇhā)는 유쾌하거나 불쾌한 아-람마나(ārammana) 때문일 수 있습니다.

    • * 그러나 땅하-(taṇhā) 그 자체로는 자동적으로 괴로움(고통)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땅하-’가 그 자체로 자동적으로 괴로움으로 이어진다면, 아무도 열반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논의했듯이, 땅하-(taṇhā)는 아-람마나(ārammana)를 포착하자마자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 * 따라서, 둘째로 결정적인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아-람마나(ārammana)를 끌어당겨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vitakka/vicāra, 위딱까/위짜-라) 시작하지 않는 한,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따라서, 깜마 윈냐-나_kamma viññāṇa)를 축적하지 않습니다. 그 축적은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아윗자-(avijjā)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 * 그 두 번째 과정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로 시작하여 일어납니다. 이에 대해 아래에서 논의하겠습니다.

     

    잘못된 견해와 그릇된 인식으로 깜마를 행하는 자아가 있다

     

    5. 그 때문에 무아(no-self)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직 아라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는 ‘자아(self)’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겉보기 자아는 깜마 발생에 관련되어 있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논의한 바와 같이, 어떤 아-람마나(ārammana)에 기반한 땅하-(taṇhā) (‘아-람마나’에 들러붙게 되거나 매이게 되는 것)는 아라한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아라한이 의식적으로 땅하-(taṇhā)를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라한은 어떤 들러붙음(땅하-, taṇhā)으로 이어지게 하는 모든 가띠(gati)를 제거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 *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를 이해하는 열쇠는 가띠(gati)가 어떻게 제거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몇 개의 포스트에서 이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둑카 니로다(미래 괴로움의 그침)는 ‘땅하-’가 그치는 것이다

     

    6. 붓다께서는 첫 법문인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 SN 56.11)에서 ‘괴로움(고통)의 멈춤(그침)’, 즉 ‘둑카 니로다야(dukkha nirodhay) (세 번째 성스런 진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셨습니다.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둑카니로당 아리야삿짱ㅡ요 땃사-예와 땅하-야 아세와위라-가니로도 짜-고 빠띠닛삭고 뭇띠 아날-라요(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ṃ ariyasaccaṃ—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번역: “빅쿠들이여, 괴로움(고통)의 멈춤(그침)에 대한 성스런 진리는 무엇인가ㅡ그것은 이 세상 것들에 대한 갈망(‘아-사와_āsava’라고 함)을 잃음에 따라, 땅하-(taṇhā)가 완전히 멈춘 것이며, 세상 것들을 포기하고 그만두며,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 * 아날-라야(anālaya)라는 말은 ‘나(na) + ‘알-라야(ālaya)’, 즉 ‘갈망하지 않음’ 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논의한 바와 같이, 까-마 구나(kāma guna)가 있는 세상 것을 갈망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탐욕을 통해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습니다(땅하-, taṇhā). 만약 그것을 얻는 것이 방해받으면, 성냄(분노)으로 집착합니다. 그러므로, 갈망 또는 욕망은 땅하-(taṇhā)의 뿌리에 있습니다. 도사(dosa) 또는 빠띠까(paṭigha, 도사의 낮은 버전)는 로바(lobha) 또는 탐욕(greed)이 다르게 나타난 것입니다.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 때문에, 닙바-나(Nibbāna)는 또한 ‘아-사왁카야(āsavakkhaya, ‘āsava’ + ‘khaya’)’, 즉 ‘아-사와(āsava)의 제거 상태’입니다.

    • * 필자는 이들 핵심 빠알리 용어들을 점차 필요에 따라 소개하려고 합니다.

     

    빠띳짜 사뭅빠-다 ㅡ 자아와 무아는 둘다 잘못된 접근이다

     

    7. ‘자아(self)’ 또는 ‘무아(no-self)’의 개념으로 시작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 ‘그가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했다’ 등과 같은 말(용어)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런 것들이 ‘자아’라는 인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에 의해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붓다께서도 “내가 그곳에 가겠다”나 “나는 과거에 그런 존재로 태어났다”는 등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 * 그러나 우리는 다음 사항을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과거 깜마)과 조건(빳짜야-, paccayā)은 결과(깜마 위빠-까, kamma vipāka)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그런 위빠-까(vipāka)를 바탕으로 새로운 깜마(kamma)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 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위빠-까(vipāka)를 더 많이 가져옵니다. 그것이 바로 재탄생 과정이 계속되는 방법입니다!

    • * ‘자아(self)’에 대한 잘못된 견해(sakkāya diṭṭhi, 삭까-야 딧티)와 잘못된 인식(asmi māna, 아스미 마-나)은 그런 활동으로 이어집니다.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는 그 과정을 설명합니다.

    • * ‘자아(self)’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인식을 갖고 있는 한, 특정 가띠(gati, 성격)를 갖게 됩니다. 그 가띠(gati)를 바탕으로 미래 결과(vipāka, 위빠-까)가 일어나는 원인(깜마, kamma)이 축적됩니다. 그 위빠-까(vipāka)가 결과를 가져올 때, 더 많은 깜마(kamma)가 생성됩니다. 그렇게, 이 순환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그것이 깜마(kamma)와 위빠-까(vipāka)가 끝없이 순환되는 이유입니다!

    • * 이 세상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가띠(gati)는 줄어들 것입니다. 그 이해와 함께, 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인식은 줄어들고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닙바-나(Nibbāna)로 가는 길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진정한 본질을 보는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삭까-야 딧티가 제거됨)로 시작합니다. 물론 평범한(세간적)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에 도달하려면 먼저 10가지 유형의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를 제거해야합니다. ‘붓다 담마에서 독특한 것은 무엇인가?’ 포스트를 참조하세요(‘Buddha Dhamma – In a Chart’에 있음).

     

    위 #1에 있는 일련의 사건은 ‘빠띳짜 사뭅빠-다’에 있다

     

    8. 차착까 숫따(Chacakka Sutta)에서 위 #1에 있는 빠알리 구절은 “짝쿤짜 빠띳짜 루-뻬 짜 웁빳자-띠 짝쿠윈냐-낭, 띤낭 상가띠 팟소, 팟사 빳짜야- 웨다나-, 웨다나- 빳짜야- 땅하-(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 paccayā vedanā, vedanā paccayā taṇhā.)”입니다. 그 구절에 나오는 단계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살라-야따나 빳짜야- 팟소-, 팟사 빳짜야- 웨-다나-, 웨-다나- 빳짜야- 땅하-(salāyatana paccayā phassō, phassa paccayā vēdanā, vēdanā paccayā taṇhā)”와 같습니다. 

     

    • * 차착까 숫따(Chacakka Sutta)에서 “짝쿤짜 빠띳짜 루-뻬 짜 웁빳자-띠 짝쿠윈냐-낭, 띤낭 상가띠 팟소(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단계는 단지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살라-야따나 빳짜야- 팟소-(salāyatana paccayā phassō)” 단계로 일어나는 것을 더 자세히 설명한 것입니다. 물론 ‘살라-야따나(salāyatana)’는 6가지 모든 감각 입력을 가리키며, “짝쿤짜 빠띳짜 루-뻬 짜 웁빳자-띠 짝쿠윈냐-낭, 띤낭 상가띠 팟소(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ā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에 있는 ‘짝쿠(cakkhu)’는 그 6가지 중의 하나를 가리킵니다.

    • *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은 보통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아윗자-(avijjā)로 행하기 시작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감각 입력’에 들러붙게 되는 것, 즉 땅하-(taṇhā)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가 4가지 성스런 진리에 대한 무지, 즉 아윗자-(avijjā)로 인해 수많은 전생에 걸쳐 축적한 가띠(gati)가 확실히 있기 때문입니다!

    • * 초기 ‘들러붙음’(땅하-, taṇhā)은 항상 차착까 숫따(Chachakka Sutta)에서 논의된 단계로 일어나며, 그것은 위 구절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6가지 감각 입력 중 어떤 것이든 그것을 촉발시킬 수 있습니다. 그 여섯 번째는 마노-(manō)로서, “마-난짜 빠띳짜 담메 짜 웁빳자-띠 마노윈냐-낭, 띤낭 상가띠 팟소, 팟사 빳짜야- 웨다나-, 웨다나- 빳짜야- 땅하-(mā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ā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 paccayā vedanā, vedanā paccayā taṇhā.)”로 일어납니다.

    • * 그러므로, 실생활에서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는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ā)’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살라-야따나 빳짜야- 팟소-(salāyatana paccayā phassō)로 시작하고, ‘팟사 빳짜야- 웨-다나-, 웨-다나- 빳짜야- 땅하-(phassa paccayā vēdanā, vēdanā paccayā taṇhā)’로 진행됩니다.

    • * 오직 그 단계에서, 주어진 어떤 ‘사람’이 아윗자-(avijjā)로 행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복잡하게 얽힌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를 시작합니다.

     

    들러붙음(땅하-)에 기반하여, ‘아윗자-’로 행하기 시작한다

     

    9. 그 결정적인 단계인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를 논의해 보겠습니다.

     

    • * 땅하-(Tanhā)는 특정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음 또는 ‘매이게 됨’을 의미합니다. 땅하-(taṇhā)를 ‘갈망(craving)’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누군가 적을 볼 때, 갈망을 통해 땅하-(taṇhā)를 생성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에, 마음은 성냄 또는 싫어함으로 적이라는 그 아-람마나(ārammana)에 매이게 됩니다(들러붙습니다).

    • * 그것이 ‘좋은 아-람마나(good ārammana)이면, 마음은 그것을 더 즐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혐오스러운 것이라면, 그것을 그만두려고 할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마음은 업의 결과로 ‘(아비)상카-라’를 생성합니다.

    • * 예를 들어, 훔치는 경향(gati, 가띠)을 지닌 사람은 상점에서 ‘눈길을 끄는 물건’을 훔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도둑질은 나쁜 업이고, 그래서 장래에 ‘나쁜 위빠-까(bad vipāka)’를 가져올  수 있는 ‘나쁜 업(bad kamma)’를 축적하게 됩니다.

     

    ‘우빠-다-나’는 무슨 의미인가?

     

    10. 우빠-다-나(upādāna)는 아-람마나(ārammana)를 ‘(자신의 마음에서)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빠-다-나(upādāna)는 ‘우빠(upa)’ + ‘아-다-나(ādāna)’에서 유래하며, ‘우빠(upa)’는 ‘근접한(가까운)’을 의미하고,  ‘아-다-나(ādāna)’는 ‘끌어 당김’을 의미합니다.

     

    • * 일단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게(taṇhā, 땅하-) 되면, 우리는 그것을 놓지 않습니다. 마음은 ‘그 아-람마나(ārammana)끌어 당깁니다.’ 먼저,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 두 가지 모두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 (위딱까_vitakka / 위짜라_vicāra)가 관여합니다.

    • *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되면, 신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껴안거나 싫어하는 사람을 때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는 그런 신체적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뇌는 마음에 일어나는 그 의도에 따라 행위를 하도록 돕습니다. ‘Brain – Interface between Mind and Body’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런데, ‘마노(또는 찟따) 상카-라’는 자동적으로 우리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것들은 웨다나/샨냐-(vedana/saññā)를 수반합니다. 그것들은 의식적인 생각(위딱까_vitakka / vicāra_위짜라)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 * 우리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를 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을 시작하는 것은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입니다.

    • * 다음 포스트에서는 상카-라(saṅkhāra)를 자세히 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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