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google":["PT Serif","Noto Sans KR"],"custom":["Nanum Gothic","Nanum Barun Gothic"]}

 

 

'땅하-' - 괴로움(고통)의 기원

 

원문: Dhamma and Science 섹션의 ‘Taṇhā – The Origin of Suffering’ 포스트

- 2019년 11월 9일 작성

 

땅하-는 갈망이 아니라 들러붙음이다

 

1. ‘땅하-(tanhā)는 심하게 오해된 빠알리 용어입니다. 일반적으로 ‘갈망(craving)’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갈망(craving)은 보통 기분좋은(유쾌한) 아-람마나(ārammana)와 관련이 있습니다.

 

  • * 땅하-(tanhā)는 모든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아-람마나’는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심지어 중립적인(단지 호기심일 수도 있음) 것일 수도 있습니다.

  • * 우리는 아름다운 것이나 사람에 다양한 정도로 들러붙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무언가를 ‘두 번째로 보기’위해 잠시 멈추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첫 눈에 반하는 것’과 같은 훨씬 더 강한 들러붙음일 수도 있습니다.

  • * 그러나 우리는 또한 멈춰서, 방금 차에 치여 죽은 사람을 다시 살펴 봅니다. 그것은 기분좋은 광경은 아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광경에 ‘들러붙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잠시 생각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가다가 자신에게 더 나쁜 적을 보면 더 강한 ‘들러붙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혐오스러운 생각을 불러 일으키고 그 적에게 가혹한 어떤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 * 요점은 땅하-(taṇhā)가 아-람마나(ārammana)에 대한 더 많은 ‘마음 행위’ 즉 ‘의식적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에서 논의했습니다.

 

‘땅하-’ - 괴로움(고통)의 기원

 

2. 땅하-(tanhā)는 또한 미래 괴로움(고통)의 기원입니다. 붓다께서는 첫 번째 법문인,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 SN 56.11)에서 다음과 같이 괴로움(고통)의 기원, 즉 ‘둑카 사무다야(dukkha samudaya)를 정의하셨습니다.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둑카사무다양 아리야삿짱ㅡ야-양 땅하- 뽀놉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세이야티당ㅡ까-마 땅하-, 바와 땅하-, 위바와 땅하-.(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aṃ ariyasaccaṃ—yāyaṃ taṇhā ponob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kāma taṇhā, bhava taṇhā, vibhava taṇhā.)”

 

  • * 번역: “빅쿠들이여, 괴로움(고통)의 기원에 대한 고귀한 진리는 무엇인가 ㅡ 그것은 여기저기서 여러가지 것에 즐거움(기쁨)을 구하는 것에 기반한 들러붙음(taṇhā, 땅하-)이며, 재탄생으로 이끄는 것이다. 즉,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들러붙음(kāma taṇhā, 까-마 땅하-), 존재에 대한 들러붙음(bhava taṇhā, 바와 땅하-), 그리고 이 생으로 끝난다는 단멸 견해에 들러붙음(vibhava taṇhā, 위바와 땅하-)이다.”

  • * 이 3가지 유형의 땅하-(taṇhā)는 ‘까-마 땅하-, 바와 땅하-, 위바와 땅하-’ 포스트에서 논의했습니다. 

 

3. 흥미롭게도, 쭐-라웨달라 숫따(Cūḷavedalla Sutta, MN 44)에서 [다음과 같이] 동일한 구절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의 기원을 설명합니다. “ ‘삭까-야사무다요 삭까-야사무다요’띠, 아이예, 윳짜띠. 까따모 누 코, 아이예, 삭까-야사무다요 윳또 바가와따-” 띠? “야양, 아-유소 위사-카, 땅하- 뽀놉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세이야티당ㅡ까-마 땅하- 바와 땅하- 위바와 땅하-; 아양 코, 아-유소 위사-까, 삭까-야사무다요 윳또 바가와따-”띠.(“‘sakkāyasamudayo sakkāyasamudayo’ti, ayye, vuccati. Katamo nu kho, ayye, sakkāyasamudayo vutto bhagavatā” ti? “Yāyaṃ, āvuso visākha, taṇhā ponobbhavikā nandī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kāma taṇhā bhava taṇhā vibhava taṇhā; ay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samudayo vutto bhagavatā” ti.)

 

  • * 그것은 모든 부도덕한 행위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세속적 즐거움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 * 강한 부도덕한 행위(빠-빠 깜마, pāpa kamma)를 한다면, 아빠-야-(apāyā, 악처)에서 고통을 받게 짐지어 집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려는 욕망도 까-마 로-까(kāma lōka)에 묶이게 됩니다. 자-나(jhāna)의 즐거움에 대한 욕망은 루-빠 로-까(rūpa lōka)와 아루-빠 루-까(arūpa lōka)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영역에도 영구적인 행복은 없습니다.

  • * 그것은 다음 탄생이 어디이든, 결국은 아빠-야-(apāyā)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하여 소-따빤나(Sōtapanna) 단계를 얻을 때까지는 아빠-야-(apāyā)에 재탄생할 가능성이 거기에 있습니다. 가능한 모든 고통은 아라한(Arahant) 단계에서 둑카 사무다야(dukkha samudaya)를 완전히 이해할 때 끝납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논의하겠습니다.

 

‘땅하-’의 의미(빠다 니룻띠)

 

4. 많은 빠알리 낱말은 낱말 그 자체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낱말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빠다 니룻띠(pada nirutti)’입니다. 예를 들어, ‘삭까-야(sakkāya)’는 ‘사쓰(sath)’+‘까-야(kāya)’에서 유래하며, 무더기 또는 모음(kāya, 까-야)를 유익하다(sath)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는 다섯가지 무더기(오온)를 자기 것으로 간주하여 유익하다고 생각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 * 땅하-(tanhā)는 ‘융합’되거나 단단히 들러붙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하-(taṇhā)라는 낱말은 두 낱말에서 유래합니다. 타나(Thána)는 곳(장소)(싱할라어로는 තැන)를 의미하고, ‘하-(hā)’는 ‘융합되는/용착되는’ 또는 ‘들러붙는’(싱할라어로는 හා වීම)을 의미합니다. ‘땅하(tanhā)에서 ‘딴(tan)’은 [영어의] ‘thunder’에 있는 ‘thun’처럼 발음되고, ‘하-(hā)’는 [영어의] ‘harm’에 있는 ‘ha’처럼 발음됩니다.

  • * 그것은 차착까 숫따에서 도출된 의미와 일치합니다. ‘까-마 구나 -  들러붙음(땅하-)의 기원’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3가지 유형의 땅하-(taṇhā)

 

5. #2와 #3에 있는 구절에서 3가지 유형의 땅하-(taṇhā)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까-마 땅하-(kāma taṇhā), 바와 땅하-(bhava taṇhā), 위바와 땅하-(vibhava taṇhā)입니다.

 

  • * 각 카테고리(범주)는 들러붙음이 일어날 수 있는 특정 방식의 기원을 나타냅니다. 짐작해 볼 수 있듯이, 까-마 땅하-(kāma taṇhā)는 우리의 내재된 까-마 구나(kāma guna)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싶은 광경, 소리, 냄새, 맛, 촉감, 그리고 담마-(dhammā)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접근이 방해받으면, 우리는 다시 들러붙게 되지만 이번에는 성냄(또는 분노)으로 들러붙습니다.

  • * 바와 땅하-(Bhava taṇhā)는 재탄생을 믿는 자들에게서 일어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띠(gati)를 바탕으로 인간, 천신 또는 브라흐마로 태어나고 싶어합니다.

  • * 재탄생을 믿지 않는 자들은 위바와 땅하-(vibhava taṇhā)를 가집니다.

  • * 그것들을 간략하게 논의해 보겠습니다.

 

까-마 땅하-

 

6. 까-마 로-까(kāma lōka, 욕계)에는 5가지 육체적 감각 기능이 모두 있습니다. 5가지 감각 기능을 통해 어떤 것에 들러붙게 되는 것이 까-마 땅하-(kāma taṇhā)입니다.

 

  • * 덧붙여, 맛, 냄새, 몸 감촉을 즐기고자하는 욕망에서 생기는 들러붙음은 까-마 로-까(kāma lōka)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3가지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처럼 [단단한] ‘고형의 몸’을 필요로 합니다.

  • * 루-빠 로-까(rūpa lōka)에 있는 유정체(living being)는 ‘고형의 몸’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육체적 눈과 귀가 없이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 * 그러므로, 루-빠 로-까(rūpa lōka)에서 땅하-(taṇhā)는 광경(시각 대상)과 소리로 인해 일어납니다. 따라서 루-빠 로-까(rūpa lōka)에 태어나게 될 아나-가미(Anāgami) 성자는 약간의 루-빠 땅하-(rūpa taṇhā)와 삿다 땅하-(sadda taṇhā)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상을 보거나 법문을 듣고 싶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아루-빠 로-까(arūpa lōka)에서는 마음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담마-(dhammā)에만 들러붙을 수 있습니다.

 

바와 땅하-

 

7. 바와 땅하(bhava taṇhā)는 ‘어떤 존재(존재함)’에 대한 들러붙음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바와 땅하-(bhava taṇhā)는 까-마 로-까(kāma lōka), 루-빠 로-까(rūpa lōka), 및 아루-빠 로-까(arūpa lōka), 즉 모든 31영역에서 나타납니다.

 

  • * 까-마 로-까(kāma lōka)에서도 까-마(kāma, 감각적 즐거움)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바와 땅하-(bhava taṇhā)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적한 곳에서 자-나(jhāna)를 기르는 것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와(bhava)’입니다. 그들이 자-나(jhānā, 선정)를 개발하면, 그 새로운 가띠(gati)로 인해 루-빠 로-까(rūpa lōka) 또는 아루-빠 로-까(arūpa lōka)에 태어날 것입니다.

  • * ‘바와(bhava)’의 다른 미묘한 형태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명해지고, 직위(타이틀)를 얻고, [세간의 주목이나 관심을 끄는] 유명한 직업을 얻거나 책임있는 일을 담당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들러붙음은 감각적 즐거움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바와 땅하-(bhava taṇhā)로 인한 것입니다.

 

위바와 땅하-

 

8. 위바와 땅하-(vibhava taṇhā)는 잘못된 견해인 유물관(붓다 시대에는 웃쩨-다 딧티_uccēda diṭṭhi)에서 일어납니다. [이 관점(견해)에서는] 각자의 생(삶)은 죽음으로 끝난다고 믿습니다. 이 견해에서 마음은 몸(뇌)의 부산물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몸이 죽으면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 * 그러므로, 이들은 죽기 전에 이 삶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즐길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위바와 땅하-(vibhava taṇhā)와 함께 까-마 땅하-(kāma taṇhā)를 가질 것입니다.

  • * 현대 사회에서는 위바와 땅하-(vibhava taṇhā)를 갖기가 쉽습니다. 31영역과 재탄생 과정이 있는 더 복잡한 세계에 대한 부처님의 메시지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감각 기능은 이 세상의 ‘숨겨진’ 면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 믿습니다.

 

땅하-가 직접적으로 재탄생에 이르지는 않는다 

 

이전 포스트에서 보았듯이, 보통 사람의 경우, 어떤 아-람마나(ārammana)는 찰나에 자동으로 땅하-(taṇhā)가 일어나게 합니다. 오직 아라한(Arahant)이 되어야만, 어떤 아-람마나(ārammana)에도 땅하-(taṇhā)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차착까 숫따(Chacakka Sutta, MN 148)의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9. 그러나 땅하-(taṇhā)가 재탄생(새로운 존재)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빠띳짜 사뭅빠-따(Paṭicca Samuppāda)는 ‘땅하- 빳짜야- 바오(taṇhā paccayā bhavo)’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다음에 ‘우빠-다-나 빳짜야- 바오(upādāna paccayā bhavo)’가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 * 새로운 존재(bhava)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음은 ‘그 아-람마나(ārammana)를 가까이 끌어당겨’ 그것에 대한 의식적인 생각을 생성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가까이 끌어당김)은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것이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입니다.

  • * 그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는 약간 관련됩니다. 마음이 아-람마나(ārammana)에 들러붙을 때, 그 아-람 마나(ārammana)를 ‘검토(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 ‘검토(조사, examination)’는 위딱까/위짜-라(vitakka/vicāra), 즉 와찌 상카-라(vaci saṅkhāra)를 포함합니다.

  • * 그 때가 아윗자-(avijjā)로 행하기 시작하고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그리고 그에 따라 ‘상카-라 빳짜야- 윈냐-나’를 통해 ‘깜마 윈냐-나’가 생성)하는 때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사이클의 시작입니다.

  • * 더 자세한 내용은 이 시리즈(Paṭicca Samuppāda – Not ‘Self’ or ‘No-Self)의 이어지는 포스트에 있습니다.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빠띳짜 사뭅빠다(연기)’ 섹션에 있습니다.

 

모든 관련 포스트는 이 ‘담마와 과학’ 섹션 중의 ‘생명의 기원’ 서브섹션에 있습니다.

{"google":["PT Serif"],"custom":["Nanum Gothic","Noto Sans KR"]}{"google":["PT Serif"],"custom":["Nanum Gothic","Noto Sans KR","Nanum Barun Gothic"]}
{"google":["Noto Sans KR"],"custom":["Nanum Goth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