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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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까-야 딧티와 빤쭈빠-다-낙칸다-

 

원문: Elephants in the Room 섹션의 ‘Sakkāya Diṭṭhi and Pañcupādānakkhandhā’ 포스트

- 2022년 5월 15일 작성; 2022년 12월 12일 개정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는 ‘변하지 않는 개체’ 또는 어떤 ‘영구적 에센스(본체)’가 있다고 하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삭까-야 = 빤쭈빠-다-낙칸다-

 

1. 여러 숫따는 ‘삭까-야(sakkāya)’라는 낱말이 ‘빤쭈빠-다-낙칸다 (pañcupādānakkhandha)’를 의미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 숫따로 SN 38.15, SN 38.16, SN 22.105, SN 22.112, MN 14, MN 106, AN 4.33, 및 AN 6.61가 있습니다.

 

  • * 삭까-야빤하- 숫따(‘Sakkāyapañhā Sutta, SN 38.15’)에서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존자시여, 붓다께서는 ‘삭까-야(sakkāya)’는 5가지 취착의 무더기(빤짜 우빠-다-나칸다-, pañca upādānakkhandhā)’ ㅡ 루-뿌빠-다-낙칸다(rūpupādānakkhandha), 웨다누빠-다-낙칸다(vedanupādānakkhandha), 산뉴빠-다-낙칸다(saññupādānakkhandha), 상카-루빠-다낙칸다(saṅkhārupādānakkhandha), 윈냐-누빠-다-낙칸다(viññāṇupādānakkhandha)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설명하십니다. 

  • * 나열된 다른 숫따들은 동일하게 설명합니다.

  • * ‘빤쭈빠-다낙칸다 (pañcupādānakkhandha)를 시작으로 핵심 단계를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그것은 삭까-야(sakkāya)와 삭까-야 딧띠(sakkāya diṭṭhi)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알다시피, 삭까-야 딧티를 제거함으로써 소따빤나가 됩니다. 따라서, 이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람마나는 루빠의 모음(루빡칸다)으로 인식된다

 

2. 빤짝칸다(Pancakkhandha)아-람마나(ārammaṇa)가 마음에 들어올 때 일어납니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빤짝칸다(pañcakkhandha, 다섯 무더기)는 루빠(rupa)와 그 루빠로 인해 일어나는 4가지 정신적 요소(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입니다.

그러나 왜 그것들을 무더기라고 할까요? 그것은 루빠 그자체는 많은 자동적인 단계의 결과로 보이거나, 들리거나, 맛보아지거나, 냄새맡아지거나, 감촉되거나,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들은 한 단계에 전체로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다음은 매우 중요한 점들입니다.

 

i) 마음은 많은 스냅샷의 루빠를 받아들인 후에만 루빠를 이해합니다. 이해는 단지 하나의 스냅샷이 아니라 그런 많은 스냅샷의 무더기로 인해 시작됩니다. 빠알리어로, 그것은 ‘루빠 맛따(rupa matta)’이며, 여기서 맛따(matta)는 ‘흔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히야 숫따의 ‘diṭṭhe diṭṭha mattaṁ bhavissati’에 있는 ‘matta’입니다. ‘다섯 무더기 ㅡ 각 유정체의 경험’의 #12를 참조하세요.)

ii) 예를 들어, 사람이 나무를 볼 때 처음에는 나무의 어렴풋한 이미지만 들어옵니다. 그 이미지는 여러 단계 후에 더 뚜렷하고 분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단계들은 [우리가 인식하기에는] 너무 빨리 일어납니다. 

iii)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지 못하는 자동적인 과정입니다. 오직 매우 정화된 부처님의 마음만이 그 지극히 빠른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iv) 요점은 사람이 그 빠른 과정에 의식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3. 필자는 이 시리즈인 일생 중의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During a Lifetime)의 이전 포스트들에서 그 과정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루빠 무더기 ㅡ 루빠에 대한 정신적 인상의 모음’을 참조하세요. 그곳의 #7을 보세요. 

 

  • * 거기서 논의한 바와 같이,  “어제 우리 아빠가 나를 만나러 왔다.(my dad came to see me yesterday.)”라는 전체 문장을 들어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우리 아빠(my dad)”, “왔다(came to)”, “나를 만나러(see me)”, “어제(yesterday)”라는 여러 부분으로 그것을 받습니다. 거기서 논의한 바와 같이, 그 낱말들은 다른 감각을 통해 오는 다른 데이터의 부분들에 의해 분리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각 감각 입력으로부터 데이터 흐름을 모으고 조합할 수 있습니다.  

  • * 우리는 그 빠르고 자동적인 과정이 일어난 후에만 그 루빠(광경, 소리, 맛, 냄새, 촉감, 또는 기억 회상)들을 의식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 * 그러나 또한 자동적으로 빠르게 일어나는 또다른 매우 중요한 과정이 있습니다.

 

빤짝칸다-는 즉각 빤쭈빠-다-낙칸다-가 될 수 있다

 

4. 우리가 루빠(또는 아-람마나)를 알게 될 쯤에는 마음은 우리의 가띠(gati)에 기반하여 그 아-람마나(ārammaṇa)에 벌써 들러붙어 있을 것입니다.

 

  • * 따라서, 자신의 가띠와 잘 맞는 모습을 보면, 그 처음 끌림은 벌써 일어났고, 그것을 알게 될 쯤에는 이미 ‘두 번째 보기’를 하고 있습니다.

  • * 마음챙김의 배후에 있는 개념은 모든 나쁜 끌림/아-람마나를 가능한 한 일찍 포착하고 그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적 생각/말/행동으로 이어지는 좋은 아-람마나에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5. 달리 말하면, 우리가 위에서 논의한 것은 초기 감각 사건(예를 들어, 누군가를 보는 것), 그것에 자동적으로 들러붙는 것(땅하-, taṇhā), 그 다음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로 그 아-람마나(대상)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 * 우리는 감각 사건(아-람마나, ārammaṇa)를 경험했고 벌써 그것에 들러붙었습니다. 그것은 빤짝칸다(pañcakkhandha)가 자동적으로 ‘빤짜 우빠-다-낙칸다(pañca upādānakkhandha)’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삭까-야 = 빤짜 우빠-다-나 칸다

 

5. 그러나 그것은 우리(우리 마음)가 그런 아-람마나(대상)가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인식할 때에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까-마 가띠(kāma gati)를 가지면, 반대 성별의 사람에게 쉽게 끌릴 것입니다. 모든 남성은 매력적인 여성, 즉 빤짝칸다를 알아차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어떤 남자에게나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여성에 끌림은 아나가미/아라한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그 성자들은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a)를 생성하지 않습니다.

 

  • * 삭까-야(sakkāya)라는 낱말은 ‘사트(sath)’ + ‘까야(kāya)’에서 유래하며, 여기서 ‘사트(sath)’는 ‘좋은/유익한’을 의미하고 ‘까-야(kāya)’는 ‘모음’을 의미합니다. ‘칸다(khandha)’는 또한 ‘모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삭까-야(sakkāya)은 ‘유익한 모음/무더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 그렇기 때문에 위 #1의 그 숫따들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삭까-야(sakkāya)’는 ‘빤짜 우빠-다-나 칸다(pañca upādāna khandha)’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 * 사람은 자신이 유익하다고 여기는 것들에게만 ‘우빠-다-나(upādāna)’를 가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빠-다-나 빳짜야- 바와’ 단계를 멈출 수 있다

 

6. 위에서 마음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아-람마나(ārammaṇa)에 들러붙을 것임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 * 알다시피, 그 아-람마나(ārammaṇa)는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의 ‘살라-야따나 빳짜야- 팟사(salāyatana paccayā phassa)’ 단계를 통해 아-야따나(āyatana)를 거쳐 들어옵니다. 그러면 ‘팟사 빳짜야- 웨다나-(phassa paccayā vedanā)’와 ‘웨다나- 빳짜야- 땅하-(vedanā paccayā taṇhā)’라는 다음 두 단계도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 * 우리가 그 들러붙음을 알게 되는 것은 ‘땅하- 빳짜야- 우빠-다-나(taṇhā paccayā upādāna)’ 단계에서만입니다. 그것은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라는 것으로 아윗자-(avijjā)가 작용함에 의해 ‘우빠-다-나 빳짜야- 바와(upādāna paccayā bhava)’ 단계를 통해 우리가 새로운 깜마(kamma)를 축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 * 그 ‘우빠-다-나 빳짜야- 바와(upādāna paccayā bhava)’ 단계는 일시적 바와(temporary bhava)(탐욕 바와, 화냄 바와, 등)를 생성하고, 그것은 (아비상카-라를 통해) 새로운 깜마(kamma)를 짓기 시작할 때입니다. ‘아-람마나로 인한 마음가짐의 변화’를 참조하세요. 이 시리즈인 일생 중의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 During a Lifetime)의 이전 포스트들을 복습/검토하면 좋을 것입니다.

  • * 이 단계에서, 우리는 새로운 깜마(아비상카-라)를 축적하는 것을 신중하게 의도적으로 멈출 수 있습니다. 그것은  ‘딴하-’와 ‘우빠-다-나’ 사이의 차이 포스트에서 자세히 논의한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 * 이제,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삭까-야라는 견해가 ‘삭까-야 딧티’다

 

7. 세상의 감각 입력에 들러붙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한, 사람은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가집니다. 달리 말하면, 삭까-야(sakkāya) 딧티(diṭṭhi)는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가 수카(sukha)로 이어진다는 견해입니다.

소따빤나 단계에서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제거되는 것은 ‘딧티 위빨라-사(diṭṭhi vipallāsa)’의 제거로 이어집니다.

 

  • * 그러나, 필자가 거듭해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것이 ‘산냐- 위빨라-사(aññā vipallāsa)’와 ‘찟따 위빨라-사(citta vipallāsa)’를 제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소따빤나(Sotapanna)는 여전히 성관계를 포함하여 즐거운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따빤나는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서 아빠-야가-미(apāyagāmi, 사악처로 향하는) 행위에 유혹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 ‘위빨라-사(딧티, 산냐-, 찟따)는 상카-라에 영향을 미친다’ 포스트에 있는 세부 사항을 참조하세요.

 

8. 다섯 무더기(빤짝칸다, pañcakkhandha)라는 개념을 이해하면(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빤쭈빠-다-낙칸다가 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면),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 * 칸다(khandha)라는 개념은 적어도 초기의 들러붙음에는 사람이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필자가 이 섹션의 포스트들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감각 입력을 경험하는 것은 자동적인 과정입니다.

  • * 더욱이, 감각 사건에 들러붙는 첫 단계(그리고 빤쭈빠-다낙칸다를 일으키는 것)조차도 자신의 가띠(gati)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삭까-야 딧티 = 세상을 경험하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견해

 

9.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가띠(gati)가 변함에 따라, 사람은 감각 입력에 다르게 반응할 것입니다. 성스런 길에서 진전하게 되면, 다양한 아-람마나(ārammaṇa)에 끌리는 자신의 가띠(gati)는 감소하고, 아라한 단계에서는 남아 있는 가띠(gati)가 없게 됩니다.  미래의 태어남은 우세한(지배적인) 가띠(gati)에 따릅니다. 남아 있는 가띠(gati)가 없는 아라한은 31영역으로 된 이 괴로움이 가득한 세상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 * 그것은 붓다 담마에서 결정적인 개념입니다. 아브라함 종교에서와 같은 ‘영구적 영혼’은 없습니다. 힌두교에서와 같은 아-트마(ātma)는 없습니다.

  • *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가 제거된 후에도, 나(I, me)에 대한 인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마-나(māna, 자만)(또는 아스미 마-나, asmi māna)가 제거되는 아라한 단계에서만 사라집니다. 삭까-야 딧티는 소따빤나 단계에서 제거되는 상요자나(samyojana, 족쇄)인 반면에, ‘마-나(māna)’는 아라한 단계에서 제거되는 더 높은 상요자나(족쇄)입니다. 

  • * 붓다 담마에서 ‘앗따(atta)/아낫따(anatta)’라는 개념은 산스크리트어의 ‘아-트마(ātma)/아나-트마(anātma)’라는 개념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낫따(anatta)를 아나-트마(anātma)와 동일한 것으로 잘못 가정하기 때문에 요즘에 그렇게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설명하는 또다른 방식

 

10. 빤짝칸다(pancakkhandha, 다섯 무더기)는 사람이 경험하는 루빠(rupa), 웨다나-(vedanā), 산냐-(saññā), 상카-라(saṅkhāra), 및 윈냐-나(viññāṇa)라는 무더기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에 루빠(rupa)를 경험하지 않습니다.

 

  • *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의 찟따(citta)로 나무를 보지 않습니다. 많은 찟따(많은 찟따 위티)가 마음을 통하여 흘러가야 합니다. ‘나무’에 대한 인상은 많은 찟따(citta)가 그 나무의 부분적 이미지에 기여함으로써 점차적으로 나타납니다. 나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런 많은 부분적 이미지가 축적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칸다(khandha, 무더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나무를 한 번에 보는 것처럼 느낍니다. ‘보는 것은 일련의 스냅사진’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우리의 정신적 무더기는 또한 많은 찟따 위티(citta vithi)를 거치면서 축적됩니다. 그 때문에 그것들도 또한 무더기입니다. 여기서 요점은 사람이 나무를 본다는 생각(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정신적 측면을 생성한다는 생각)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 그보다 그것은 마음 자리(하다야 왓투)에서 일어나는 많은 단계를 가진 자동적인 과정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의 가띠(gati)에 따라 일어납니다. 우리는 가띠(gati)를 변경하는 것을 통해 단지 간접적으로만 그 자동 과정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11. 탐함/화냄/미혹함을 통해 들러붙음을 일으키는 아-람마나(대상)가 6가지 감각 중의 하나를 통해 들어올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간략히 검토해 보겠습니다.

 

i) 아-람마나(ārammaṇa)가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루빡칸다(루빠에 대한 정신적 인상)를 일으키고, 다른 4가지 정신적 무더기를 일으킵니다. 즉 아-람마나는 빤짝칸다(pañcakkhandha)를 일으킵니다.

ii) 마음이 그 아-람마나(즉, 빤짝칸다)에 들러붙으면, 마음은 그 아-람마나를 ‘그것에 가까이 유지하고 그것에 대해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빤짝칸다가 빤쭈빠-다-낙칸다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iii) ‘그 아-람마나(대상)에 대해 행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마노(mano), 와찌(vaci), 및 까-야(kāya) 상카-라(saṅkhāra)를 생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말과 행동은 와찌(vaci) 및 까-야(kāya) 상카-라( saṅkhāra)에 기초하여 일어납니다. 탐함/화냄/미혹함이 작용한다면 그것들은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입니다!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에서 ‘아윗자- 빳짜야- 상카-라(avijjā paccayā saṅkhāra)’에 있는 상카-라(saṅkhāra)는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라는 것에 유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은 왜 아-람마나에 들러붙는가?

 

12. 자, 마음은 왜 그 아-람마나(ārammaṇa)에 들러붙을까요? 그것은 3가지 가능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인해 일어납니다.

 

i) 그 아-람마나(대상)(광경, 소리, 맛, 냄새, 감촉, 또는 메모리)를 유익한/즐거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탐함/좋아함(로바, lobha)를 통해 들러붙음을 일으킵니다.

ii) 그것이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하면, 그것은 화냄/증오(도사, dosa)로 이어집니다. 

iii) 마음은 그 아-람마나(ārammaṇa)가 유익한지 아닌지 이해할 수 없다면, 미혹함(아윗자-, avijjā)으로 인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혼란스럽습니다.

  • *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6가지 유형의 루빠(광경, 소리, 맛, 냄새, 감촉, 및 그것들에 대한 메모리)를 가치있게 여기므로 그런 아-람마나(ārammaṇa)를 추구합니다.

  • * 그러나, 그것들을 추구하여 로바, 도사, 및 모하(아윗자-)로 행한다면, 우리는 아윗자-(avijjā)로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를 생성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미래에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빠띳짜 사뭅빠-다(Paṭicca Samuppāda)가 그것을 확실하게 말해줍니다.

  • * 그 괴로움(고통)은 이 생에서 실현되지 않고 미래에 결과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마의 법칙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특히 재탄생을 믿지 못한다면 그렇습니다. 

 

13. 위 #12에서, 필자는 ‘사람은 왜 그 아-람마나(ārammaṇa)에 들러붙을까요?’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 * 그것은 초기 들러붙음이 자연발생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띠에 따라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자신의 가띠(gati)는 변할 수 있으므로, ‘고정된 개성(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 그것은 이해해야 할 매우 중요한 점이며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를 제거하는데 핵심입니다.

  • * 누군가 어떤 아-람마나(ārammaṇa)에 끌리는 가띠(gati)가 없다면 순간적 들러붙음이 없습니다.

  • * 사람은 그 초기 들러붙음이 일어날 때에만 아-람마나(ārammaṇa)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아-람마나(ārammaṇa)에 자동적인 들러붙음이 있은 후에만 일어납니다! 

 

14. 우리 각자에게는 변하지 않는 개체 또는 영구적 본체(에센스)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이 생에 인간이지만, 데와(천신), 브라흐마(범천), 동물, 또는 더 나쁜 존재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삭까-야 딧티(Sakkāya diṭṭhi)는 그 깨달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 * 그것은 소따빤나 단계로 향하는 결정적인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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