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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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 자-야, 및 자-이 ㅡ 다른 의미들

 

원문: Elephants in the Room 섹션의 ‘Jhāna, Jhāya, and Jhāyi – Different Meanings’ 포스트

- 2022년 6월 23일 작성/개정(#9)

 

자-나(jhāna), 자-야(jhāya), 및 자-이(jhāyi)는 서로 관련되어 있고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그것은 ‘일반적으로 숙고/명상’ 또는 ‘감각 영역을 초월하는 특정 명상 상태’, 즉 ‘자-나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자-야 ㅡ 숙고하다 또는 명상하다

 

1. 아리야(불교)와 아나리야(비불교) 명상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붓다께서는 산다 숫따(‘Sandha Sutta, AN 11.9’)에서 비유를 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위 링크에서 영어 번역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략히 그 비유를 설명하겠습니다. (빠알리 버전의 토픽에서 ‘Sandha’가 ‘Saddha’로 잘못 대체되었습니다.) 

 

  • * 부처님 시대에는, 특별히 훈련된 말들은 군대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 말들은 순종마(앗사-자-니-요, assājānīyo)입니다. 거기서 ‘앗사-(assā)’는 ‘말들’이고, ‘아자-니-요(ajānīyo)’는 ‘순종/특별한 종’을 의미합니다. 그 말들은 먹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고 훈련하고 생각하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그 숫따의 시작부분에서, 붓다께서는 산다(Sandha)에게 “ājānīyajhāyitaṁ kho, sandha, jhāya”, 즉 “산다여, 순종마처럼 명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 반면에, 열등한 말(앗사칼룬꼬, assakhaḷuṅko)은 온종일 먹을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것은 “Assakhaḷuṅko hi, saddha, doṇiyā baddho’ yavasaṁ yavasan’ti jhāyati”, 즉 “말 구유(먹이통)에 매인 열등한 말은 ‘여물, 여물!’하면서 항상 먹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yava’는 여물 또는 건초를 의미함)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 * 이 숫따는 말도 그것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숙고하다’는 의미로 ‘자-야(jhāya)라는 낱말의 일반적인 의미 하나를 보여줍니다.

 

2. 그래서, 붓다께서는 빅쿠 산다에게 ‘순종의 말’처럼 명상하고 ‘열등한 말’처럼 명상하지 말아야 한다고 훈계하셨습니다. 

 

  • * 따라서, 자-이(jhāyi)라는 낱말은 같은 숫따에서 (단순히 임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하는 것을 지칭합니다. 그것은 숫따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용법입니다.

  • * 그 다음, 붓다께서는 아나리야 요기(anariya yogi, 세간 수행자)는 세간 대상(지, 수, 화, 풍, 등)을 취하고 마음에 감춰진 번뇌(오염원)로 명상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에 반하여, 아리야(Ariya, 성자)는 위 링크에 있는 영어 번역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리야(성자)는 지, 수, 화, 풍에 의존하여 명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한한 공간, 무한한 의식, 없음(무소유), 또는 인식도 아니고 인식아님도 아님(비상비비상)에 의존하여 명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이고, 들리고, 생각되고, 알게 되고, 얻어지고, 구해지고, 또는 마음에 의해 탐구된 것에 의존하여 명상하지 않는다.”

  • * 우리는 그것을 아래에서 논의하겠습니다.

  • * 자-야(jhāya)는 ‘명상하다’를 의미하고, 자-이(jhāyi)는 ‘명상자’를 의미하고, 자-나(jhāna)는 특정한 명상 상태를 지칭합니다. 사마-디(samādhi)는 명상의 일반적 결과이지만, 우리가 알게 될 것처럼 ‘부도덕한 사마-디’, 즉 ‘밋차- 사마-디(micchā samādhi)’가 있고, 그러나 그것들(밋차- 사마-디들)은 결코 자-나(선정)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아리야 명상들과 아나리야 명상들은 모두 자-나(jhāna, 선정)로 이어지지만, 그것들은 [밋차- 사마-디와는] 질이 다릅니다. 자-나(선정) 상태를 거치거나 거치지 않고 닙바-나(Nibbāna)에 이르는 것이 가능합니다.

 

명상자(자-이)의 종류

 

3. 띠삐따까(Tipitaka) 내의 주석인 ‘넷띠빠까라나(Nettipakarana)’에 있는 ‘아딧타-나하-라위방가(Adhiṭṭhānahāravibhaṅga)’에서는 명상자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Jhāyī”ti ekattatā. Tattha katamo jhāyī? Atthi sekkho jhāyī, atthi asekkho jhāyī, nevasekkhanāsekkho jhāyī, ājāniyo jhāyī, assakhaluṅko jhāyī, diṭṭhuttaro jhāyī, taṇhuttaro jhāyī, paññuttaro jhāyī. Ayaṁ vemattatā.”

번역: “ ‘자-이-(Jhāyī)’는 ‘명상하다’를 의미한다. 어떤 다양한 유형이 있는가? 명상하는 자들은 수행 중에 있는 성자들(섹코, sekkho), 수행이 완성된 성자들(아라한들, ‘아섹코_asekkho’), 및 나머지 자들(보통 사람, 즉 섹코도 아니고 아섹코도 아닌 자)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순종의 말과 같이 명상하고(아-자-니요, ājāniyo), 다른 이들은 열등한 말과 같이 명상한다(앗사칼룬꼬, assakhaluṅko). 또한 목표에 따라, 즉, 견해를 깨끗이 하고(딧툿따로, diṭṭhuttaro), 들러붙음을 몰아내고(땅훗따로, taṇhuttaro), 빤냐-를 개발하는(빤늇따로,  paññuttaro) 것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그것들이 다양한 유형이다.”

 

  • * 그 다음 문단은 그 명상자(자-이, jhāyi)들에 의해 얻어진 사마-디(samādhi)의 다양한 유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Samādhī”ti ekattatā. Tattha katamo samādhi? Saraṇo samādhi, araṇo samādhi, savero samādhi, avero samādhi, sabyāpajjo samādhi, abyāpajjo samādhi, sappītiko samādhi, nippītiko samādhi, sāmiso samādhi, nirāmiso samādhi, sasaṅkhāro samādhi, asaṅkhāro samādhi, ekaṁsabhāvito samādhi, ubhayaṁsabhāvito samādhi, ubhayato bhāvitabhāvano samādhi, savitakkasavicāro samādhi, avitakkavicāramatto samādhi, avitakkaavicāro samādhi, hānabhāgiyo samādhi, ṭhitibhāgiyo samādhi, visesabhāgiyo samādhi, nibbedhabhāgiyo samādhi, lokiyo samādhi, lokuttaro samādhi, micchāsamādhi, sammāsamādhi. Ayaṁ vemattatā.”

  • * 그것들을 [모두] 설명하려면 [별도의] 한 포스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가 [여기서] 논의할 것들을 강조 표시하였습니다. 로끼야 사마-디(Lokiya samādhi)는 (성스런 길의) 로꿋따라 사마-디(lokuttara samādhi)와 관련없는 모든 명상을 통해 도달됩니다. 밋차- 사마-디(Micchā samādhi)는 부도덕한 생각, 예를 들면, 도둑 두목이 강도질을 계획하는 것을 통해 도달됩니다.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는 닙바-나로 이어지는 로꿋따라(lokuttara) 범주로서, 두 가지 유형일 수 있습니다. 자-나(jhāna)는 여기서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로끼야(아나리야) 또는 로꿋따라(아리야)일 수 있는 사마-디(samādhi)의 특별한 유형임에 주목하세요.

 

아리야 및 아나리야 명상

 

4. 위 #1에서 언급한 숫따에 관련된 두 개의 숫따, ‘Saññā Sutta (AN 11.7)’ 및 ‘Manasikāra Sutta (AN 11.8)’ 숫따에서, 붓다께서는 아리야(Ariya) 명상과 아나리야(anariya) 명상 사이의 차이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셨습니다.

 

  • * 첫째 숫따에서, 아난다 존자는 아래 질문을 합니다. 필자가 번역할 빠알리 인용문은 ‘참고 자료 1’을 참조하세요(필자는 링크 주소에 있는 영어 번역문을 수정 번역하였습니다. 두 번역을 비교해 보세요). ‘참고 자료 1’의 인용문의 첫 부분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스승님, 빅쿠가 ‘빠타위에 대한 빠타위 산냐(pathavisaññā of pathavi)를 받아들이지 않고’(neva pathaviyaṁ pathavisaññī assa) ‘사마-디(samādhi)에 이르는 것’(samādhipaṭilābho)이 가능합니까?” (여기서, ‘assa’는 ‘받아들이다’를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 * 여기서, 아난다 존자는 흙(빠타위)으로 만든 까시나 대상을 사용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기(수행자)가 흙덩이에 집중할 때, 그의 마음은 탐하고, 화내고, 또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빗나가 뛰어다니는 것을 멈춥니다. 그것은 조용한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고, 사람에 따라 아나리야 자-나(anariya jhāna)로 어어지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 * 그 다음, 아난다 존자는 다른 유형의 까시나 대상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동일한 질문을 합니다. “na āpasmiṁ āposaññī assa, na tejasmiṁ tejosaññī assa, na vāyasmiṁ vāyosaññī assa.” 요기(수행자)는 보통 한 그릇의 물과 불꽃을 사용하여 아-뽀 산냐-(āpo saññā)떼조 산냐-(tejo saññā)를 받아들입니다.

  • * 와-요 산냐-(vāyo saññā)를 받아들이는 마지막 것은 호흡 명상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는 호흡명상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또한, ‘산냐-와 그 진정한 의미’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5. 사람들은 그 기법으로 제4 아니리야 자-나(anariya jhāna)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도달하면, 아나리야 요기는 ‘무한한 공간’에 집중함으로써 첫 번째 아루빠와짜라 사마-빳띠(arupavacara samāpatti)에 이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도달한 후, ‘무한한 윈냐-나(viññāṇa)’에 집중하여 그 다음 사마-빳띠(samāpatti)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네와산냐-나-산냐-야따나 사마-빳디(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samāpatti)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요기(yogi)는 (이 세상에 속하는) 로끼야(lokiya) 대상에 집중할 수 있고, 따라서 그 모두는 로끼야 사마-디(lokiya samādhi)입니다

 

  • * 마지막으로, 아난다 존자는 이 세상(사람으로서 우리가 인식하는 것: ‘이다로까산냐_idhalokasañña’)에서나 빠라로까(paraloka)(간답바 또는 다른 영역에 있는 존재로서)에서도 어떤 것에 집중하는 것 없이 사마-디(samādhi)가 가능한지를 묻습니다.

  • * 그러므로, 아난다 존자가 제기하신 물음은,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 없이 사마-디(samādhi)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가?”입니다.

 

아리야 명상의 초점

 

6. 붓다께서는 ‘로끼야(lokiya) 실체’에 대한 산냐-(saññā)를 받아들이는 것이 없는 그런 명상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참고 자료 2’ 참조). 그러나 그것은 ‘닙바-나(Nibbāna)를 본’, 즉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에 이른’ 성자(아리야)만이 가능합니다. 성자들은 자신들이 (그 레벨/단계에서) 본 닙바-나(Nibbāna)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라한들만이 자신들이 도달한 궁극적 벗어남(해방)을 숙고할 수 있습니다.  

 

  • * 그것은 “etaṁ santaṁ etaṁ paṇītaṁ, yadidaṁ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즉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탁월하다 ㅡ 그것은 모든 상카-라(saṅkhāra)의 그침이고, 재탄생 과정에 이르는 모든 결박을 푸는(내려놓는) 것이고, 갈망의 끝이고, 재탄생의 그침이고, 세상의 그침인, 닙바-나(nibbāna)다.” 필자는 링크 주소에 있는 영어 번역과 다른 것을 강조 표시하였습니다.

  • * 그것은 성자들이 사마-디(samādhi)에 이르기 위해 암송/숙고하는 구절입니다. 아나-가-미 단계 이상의 성자들의 일부는 그런 식으로 아리야 자-나(Ariya jhāna)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아나-가-미 단계 아래의 성자들은 그런 식으로 아나리야 자-나(anariya jhāna)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소따빤나/아누가-미를 얻은 후에는 아나리야 자-나(anariya jhānā)를 기르는 것도 좋습니다.

  • * 단지 제1 아리야 자-나(Ariya jhānā)라도 그것은 아나-가-미(Anāgāmi) 단계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명상으로 가능한 결과 ㅡ 사마-디, 자-나, 막가 팔라’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4에서 언급한 둘째 숫따인 ‘Manasikāra Sutta (AN 11.8)’도 동일하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산냐-(saññā) 대신에 마나시까-라(mansikāra)에 집중합니다.

  • * 아라한들도 위 #3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사마-디(samādhi)를 기릅니다. 특히, 빤냐-위뭇띠 아라한(paññāvimutti Arahant)들은 현생에서 행복한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아리야 자-나(Ariya jhāna)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논의한 또다른 숫따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리야 사마-디의 4가지 사용 ㅡ 사마-디바-와나- 숫따

 

7. 사마-디바-와나- 숫따(‘Samādhibhāvanā Sutta, AN 4.41’)는 사마-디 바와-나-(samādhi bhāvanā)는 4가지 종류[를 위함]라고 설명합니다.

 

  • * (i) 현생에서 행복한 경험을 하기 위함(diṭṭhadhammasukhavihārāya, diṭṭhadhamma sukha vihārāya, 여기서 ‘diṭṭhadhamma’는 ‘현생에서’를 의미함)
    (ii) 앎(지혜)과 봄(올바른 시각)을 얻기 위함(ñāṇadassanappaṭilābhāya),
    (iii) 사띠빳타-나/아-나-빠-나사띠(Satipaṭṭhāna/Ānāpānasati)를 기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얻기 위함(satisampajaññāya), 및
    (iv) 오염(번뇌)를 없애서 아라한과에 도달하기 위함(āsavānaṁ khayāya).

  • * 사마-디 바-와나-(samādhi bhāvanā)를 이용하는 것은 그 순서라는 것에 주목하세요. 그러나, 간혹, 어떤 사람들은 쭐라빤타까 존자나 산따띠 대신과 같이, 단 시간 내에 아라한 단계에 이릅니다. 그 경우에, 그들은 (ii), (iii), 및 (iv)를 빠르게 거치기 때문에 (i)은 마지막에 옵니다.

  • * 또한, 위 (i)은 자-나(jhāna)를 포함할 수도 있고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주목하세요. 그것은 자-나(jhāna)가 없는 사마-디(samādhi)일 수 있습니다. 

  • * (ii) 내지 (iv)에서, 사람들은 사마타(Samatha)에 이르면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 위빠사나- 바-와나(Vipassanā Bhāvana)에 참여해야 합니다. 아래 #9를 참조하세요.

 

닙바-나를 이해하는 것의 중요함

 

8. 닙바-나(Nibbāna)의 근본 개념을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 * 인간계보다 높은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괴로움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유정체들은 윤회 여정의 대부분을 괴로움으로 가득한 사악처(아빠-야)에서 보냅니다. 따라서, 붓다께서는 31영역의 이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 완전한 닙바-나(빠리닙바-나, 또는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남’)에는 아라한의 [육체적] 죽음에서 도달됩니다. 그 아라한은 31영역의 어떤 곳에도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 * 많은 사람들이 그 개념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필자는 그 기본 사항을 계속 반복해야 하겠습니다. 필자는 토대(기반)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위빠사나-를 육성

 

9. 따라서, 마음이 초점을 맞추는 곳이 세상의 대상(흙덩이, 물 한 그릇, 호흡, 등)인 모든 명상은 불교 명상일 수 없습니다.

 

  • * 세상것을 숙고하는 대신에, 사람들은 그것들의 결실없는 특성(본질)을 숙고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나-빠나사띠 숫따/MN 118’에 설명되어 있고 훨씬 더 상세하게 ‘사띠빳타-나 숫따/MN 10’에 설명된 바와 같이) 위빠사나- 명상입니다. 그것을 논의하겠습니다.

  • * 막가 팔라(magga phala)를 성취한 누군가가 (사마타 명상으로) 자-나를 기르기를 좋아한다면, 그들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etaṁ santaṁ etaṁ paṇītaṁ yadidaṁ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로 (그 레벨에서) 경험한 닙바-나를 숙고합니다.

  • * 아나리야 요기(anariya yogi)들은 (위숫디막가에 상술된) 전통적 까시나(kasina)와 호흡 명상으로 사마타(그리고 아나리야 자-나)에 도달하는 반면에, 아리야(Ariya, 성자)들은 위 구절로 아리야 자-나(Ariya jhāna)를 얻습니다. 

  • * 소따빤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자들은 도덕적 삶을 살고 담마 개념을 듣기/읽기로 사마타 사마-디(Samatha samādhi)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사성제/빠띳짜 사뭅빠-다/띨락카나’에 대한 위빠사나-(통찰명상)을 육성할 수 있는데 충분히 고요한 상태입니다. 까시나/호흡 명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 '실-라, 사마-디, 빤냐-'에서 '빤냐-, 실-라, 사마-디'로”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자-이’는 ‘불타다/빛나다(to burn)’를 의미할 수 있다

 

10. 마지막으로, 자-이(jhāyi)의 또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Saṁyojana Sutta (SN 12.53)의 “Seyyathāpi, bhikkhave, telañca paṭicca vaṭṭiñca paṭicca telappadīpo jhāyeyya.” 구절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구절은 “기름과 심지에 의존하여 오일 램프가 불타는(빛나는) 것과 같다.”를 의미합니다.

 

  • * 그 오일 램프는 기름이 충분할 때만 불탑니다(빛납니다). 오일이 고갈되면, 그 심지는 빠르게 타서 없어집니다.

  • * 같은 식으로, 탕하(taṇhā)가 그치면(taṇhā nirujjhati) 윤회 여정을 위한 연료가 더 이상 없습니다. “땅하-니로다- 우빠-다-나니로다(Taṇhānirodhā upādānanirodho)”는 빠띨로마 빠띳짜 사뭅빠-다(Paṭiloma Paṭicca Samuppāda)에서 ‘바와(bhava) 니로다(nirodha)’와 ‘자-띠(jāti) 니로다(nirodha)’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재탄생의 끝이고 닙바-나(Nibbāna)입니다! 

 

참고 자료

 

1. “Siyā nu kho, bhante, bhikkhuno tathārūpo samādhipaṭilābho yathā neva pathaviyaṁ pathavisaññī assa, na āpasmiṁ āposaññī assa, na tejasmiṁ tejosaññī assa, na vāyasmiṁ vāyosaññī assa, na ākāsānañcāyatane ākāsānañcāyatanasaññī assa, na viññāṇañcāyatane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ī assa, na ākiñcaññāyatane ākiñcaññāyatanasaññī assa, n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e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ī assa, na idhaloke idhalokasaññī assa, na paraloke paralokasaññī assa, yampidaṁ diṭṭhaṁ sutaṁ mutaṁ viññātaṁ pattaṁ pariyesitaṁ anuvicaritaṁ manasā, tatrāpi na saññī assa; saññī ca pana assā”ti?“

 

2. “Siyā, ānanda, bhikkhuno tathārūpo samādhipaṭilābho yathā neva pathaviyaṁ pathavisaññī assa, na āpasmiṁ āposaññī assa, ..”라는 위 절(참고 내용 1)을 [시작으로하여 모두] 마치신 후, 붓다께서는 성자들이 다음 구절의 내용에 마음을 집중한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Idhānanda, bhikkhu evaṁsaññī hoti: ‘etaṁ santaṁ etaṁ paṇītaṁ, yadidaṁ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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