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참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닙바-나(깨달음)에 대한 두려움
원문: Dhamma and Science 섹션의 ‘Fear of Nibbāna (Enlightenment)’ 포스트
- 2020년 3월 18일 작성
소개
1. 필자는 ‘붓다의 광대 세계관(Wider Worldview of the Buddha)’ 서브 섹션에서 붓다 담마(Buddha Dhamma)의 개요를 제시했습니다. 거기서 설명된 바와 같이, 부처님의 핵심 메시지는 오직 재탄생 과정을 멈추어야만, 즉 닙바-나(Nibbāna)를 달성해야만 미래의 고통(괴로움)이 멈춰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몇 가지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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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다루고 싶은 주된 문제는 ‘열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잘못된 견해에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그 함축적(내포) 의미는 재탄생 과정이 멈춤으로서 ‘나는 소멸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나는 지금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래에 나는 지금까지 나의 깜마(kamma)(원인)의 누적된 결과(효과, 영향)를 바탕으로 데와(Deva), 브라흐마(Brahma), 또는 동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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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내가 이 생에서 아라한과(Arahanthood)를 얻는다면, 죽은 후에 나는 31영역 이 세상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닙바-나(Nibbāna)와 합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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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자아(self)’가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결실(실속)없는 토론(논의)이 많이 있습니다. 붓다께서 지적하셨듯이, 그것은 잘못된 출발점에서 생명 사이클을 논의하는 것입니다. 주어진(특정) 생명 흐름은 원인(깜마, kamma)에 따라 진전(또는 진화)합니다. 과거 깜마(kamma)가 그 위빠-까(vipāka)를 가져올 수 없게 되면(즉, ‘땅하-_taṇhā’ 또는 ‘우빠-다-나_upādāna’가 멈춰지면), 그 과정이 멈춰지고 마지막 [생의] 육체가 죽을 때 닙바-나(Nibbāna)와 합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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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께서는 닙바-나(Nibbāna)는 존재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닙바나는 존재하지만 이 세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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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가띠(gati)를 지닌 자아(self)’가 닙바-나(Nibbāna)를 얻을 때까지 존재하지만, 그것은 영혼(soul)과 같은 ‘영구적 자아(permanent self)’가 아니라는 불교 개념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낫따(세간적 해석) -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다’, ‘겉보기 자아는 깜마 발생에 관련되어 있다’, 및 ‘빠띳짜 사뭅빠-다 ㅡ 자아는 아윗자-로 인해 존재한다’ 포스트들을 참조하세요. 또한, ‘Yamaka Sutta (SN 22.85) – Arahanthood Is Not Annihilation but End of Suffering’ 포스트도 참조하세요.
2. 우리는 앞으로 있을 포스트(게시물)에서 그 더 깊은 개념을 체계적 방식으로 다시 논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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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재탄생 과정의 멈춤’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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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글 검색을 해보니, 온라인 토론 포럼에서 두 사람의 아래와 같은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다루고 싶습니다.
첫 번째 잘못된 통설 - 사라짐 또는 소멸을 열반과 동일시한 것에 의한 두려움
3. 다음 인용문은 첫 번째 사람(사람 1)의 코멘트에서 발췌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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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3년도 채 되지 않는 몇년 전부터 불교의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삶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고, 더 이상 게임을 하고 싶지 않은 쪽으로 저를 밀어붙였던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저가] 가는 길과 같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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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 존재로부터 영원히 사라진다는, 진짜 죽음에 대한 생각에 처음 직면한 그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진짜 죽음]은 저가 한번 보면,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진짜 죽음을] 계속 조사(탐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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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저는 이것[이 존재]에 갇히게 되는 생각을 숙고했습니다. 존재는 탈출구가 없으며 어디를 가든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백만 년, 수십억 년, 어쩌면 영원히 이랬다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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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깨달음만이 유일한 벗어남이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까 저는 두렵습니다. 모든 것이 단지 환상일 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없고, [모든 것은] 이미지일 뿐이고 저 혼자라는 것이 저는 두렵습니다. 가끔 저를 구해주는 깨달음조차 없다는 것이 저는 두렵습니다. 저의 질문은 ‘내가 미쳐 가고 있는가? 내가 모든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 입니다.”
‘존재하지 않기(존재의 끝)’를 바라는 자들이 있다
4. 우선,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음 성향(사고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은 왜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할까요? 그들 대부분은 아마도 재탄생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어떤 고통(괴로움)이든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벗어나고 싶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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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것은 아빠-야-(apāyā, 사악처)에 있는 유정체들의 마음 성향(사고 방식)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 모든 것을 끝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붓다께서 담마짝깝빠왓따나 숫따(Dhammacakkappavattana Sutta, SN 56.11.)에서 “얌삣창 나 라바띠 땀삐 둑캉(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이라는 구절로 표현하신 고통(괴로움)의 좋은 예입니다. 이 구절은 “원하는(잇차-, icchā)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고통(괴로움)이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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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짜위방가 숫따(Saccavibhaṅga Sutta, MN 141)에서,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그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까따만짜-유소, 얌삣창 나 라바띠 땀삐 둑캉? 자-띠담마-낭, 아-유소, 삿따-낭 에왕 잇차- 웁빳자띠: ‘아호 와따 마양 나 자-띠담마- 앗사-마; 나 짜 와따 노 자-띠 아-갓체이야-’띠. 나 코 빠네땅 잇차-야 빳땁방.(Katamañcāvuso,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Jātidhammānaṃ, āvuso, sattānaṃ evaṃ icchā uppajjati: ‘aho vata mayaṃ na jātidhammā assāma; na ca vata no jāti āgaccheyyā’ti. Na kho panetaṃ icchāya pattabb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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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 “(어떤) 태어남의 대상인 유정체에서, ‘아, 내가 그런 태어남의 대상이 되지 않고, 그 태어남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바람(욕망)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런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따라서 그 사람은 고통(괴로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5. 따라서, 육체적 고통 / 정신적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만 사람들은 그것이 그냥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신체적 문제(병에 걸리거나 노령으로 인해 다양한 신체 질환이 시작됨) 또는 정신적 문제 (일상적인 스트레스 또는 우울증)에 부딪힐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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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그들은 소박한 삶을 살고 부도덕한 행위를 삼가함으로써 그런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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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다음, 그들은 닙바-나(Nibbāna)는 ‘자기 존재가 끝나는 것’이라고 하는 글을 읽기(또는 말을 듣기) 시작하고는 겁을 먹습니다(또는 기겁을 합니다). 그것이 위의 첫 번째 사람(사람 1)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좋은 영역’에서 삶은 짧다
6. 우리는 보통 많은 생명체(유정체)가 겪는 가혹한 종류의 고통을 깨닫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 영역이외에는 동물 영역만 볼 수 있습니다. 그때조차도 우리는 동물의 고통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완전히 드러나 있는 많은 동물들의 고통을 보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도록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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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사람들은 TV에서 동물 쇼를 보는 것을 즐깁니다. 이를 테면, ‘호랑이가 사슴을 쫓아 따라가서 잡아 산 채로 먹는 것’ 등을 보는 것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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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입이 갈고리에 찔리고 물 밖에서 숨을 쉴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 물고기의 고통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부 동물과는 달리, 물고기는 그들의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의 일부인 감정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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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반면에, 소리를 지르거나 얼굴 표정으로 고통을 나타내는(보여주는) 많은 동물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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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모든 동물들은 재탄생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인간이었습니다!
7. 아빠-야-(apāyā, 사악처)의 다른 세 영역에서 받는 고통(괴로움)은 훨씬 더 나쁩니다(심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영역들은 우리가 확실하게 원하지 않는 태어남(자-띠, jāt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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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점은 우리가 재탄생 과정에 있는 한, 그런 태어남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태어남은 단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통계에 기초하여 볼 때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에 비해 훨씬 더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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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지구에는 80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에는 개미가 그 백만 배나 더 많습니다. 지구에는 약 1조 종의 생명체가 있습니다. ‘The Largest Study of Life Forms Ever Has Estimated That Earth Is Home to 1 TRILLION Species’ 를 참조하세요. 이것은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운 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다른 세 영역(아빠-야- 중의 세 영역)들은 계산하지 않은 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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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문에 붓다께서는 인간 바와(bhava)는 매우 드물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경험하는 모든 즐거움은 매우 짧은 기간입니다. 붓다께서 가르치신 고통(괴로움)은 주어진(특정) 유정체가 아빠-야(apāyā, 사악처)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재탄생 과정의 고통(괴로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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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로 눈을 돌리겠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루의 3분의 1은 ‘사실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8. ‘존재의 소멸’을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잠자는 동안 ‘우리 존재’를 알지(인식하지) 못합니다. 자는 동안, 특히 깊은 수면 사이클 동안에는 의식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잠들고 다음날 아침에 깰 때까지 우리는 세상에 있는 ‘우리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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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보통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뇌수술을 받는 동안 9시간 넘게 의식이 없었을 때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약물 주사 후에 의식을 잃은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에 [세상을] 알아차린 것은 약물로 인한 무의식 상태에서 나왔을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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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이 없거나 깊은 잠에 들어 있는 동안, 우리는 (사실상)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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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Arahant)이 죽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 관한 한) 영원히 그런 ‘의식없는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닙바-나(Nibbāna)와 합병했을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닙바-나(Nibbāna)가 존재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개념(루빠_rupa, 찟따_citta, 제따시까_cetasika)들의 관점에서 닙바-나(Nibbāna)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닙바나는 존재하지만 이 세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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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영역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과 ‘닙바-나(완전한 닙바-나, 즉 빠리닙바-나)’ 사이에는 겹침이 없습니다. 그 둘은 상호 배타적입니다. 각자는 ‘이 세상에’ 있거나 ‘빠리닙바-나’에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부처님이나 아라한들 중의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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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한(Arahant)이 죽어 닙바-나(Nibbāna)와 합병되면, 더 이상 죽음이 없습니다. 닙바-나(Nibbāna)를 달성하는 것은 (‘아윗자-_avijjā’를 완전히 제거하여) 태어남과 죽음이 계속되는 사이클에 대한 모든 원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닙바-나(Nibbāna)를 또한 ‘죽음 없음(deathless)’이라고도 합니다.
사람 2(두 번째 사람)의 코멘트
9. 두 번째는 ‘사람 2’의 코멘트입니다. 다음 인용문은 두 번째 사람(사람 2)의 코멘트에서 발췌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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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 명상을 하다가 이 기이한 ‘경험’을 했습니다. 저가 거기에 전혀 없는 것 같았기 때문에 정말 몹시 놀랐습니다. 그 경험 후, 지금은 무서움(두려움)만 느껴집니다. 어제는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왠지 겁만 납니다. 제 마음은 다만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뛰고 있고, 실존적 위기만 겪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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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 명상이나 의식과 관련된 것들의 어떤 것도 처음부터 전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제가 살아 있다고 착각하게 하겠지만, 저는 항상 죽어있고 텅비어 있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쳐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부정적인 파형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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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가 말하는(표현하는) 방식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만, 완전히 깨달은(그런 것이 100% 가능하다면) 사람들이 궁금하기만 합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시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가요? 이 모든 말들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실제로는 죽었다는 말인가요?”
명상 중에 지각(인식)을 잃을 수 있는가?
10. 사람 2의 코멘트 중의 첫 번째 부분은 명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가 경험한 것은 ‘지각없는 명상 상태, 즉 ‘아산냐 사마-디(asañña samādhi)’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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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상태는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제거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도달됩니다. 그것은 불교 명상이 아닙니다. 불교 명상에서는 부도덕한 그 생각만을 멈추게 합니다. [불교 명상에서는] 좋은 생각, 즉 도덕적 생각은 육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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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아나리야(anariya) 명상을 기르는 사람은 아산냐(asañña) 영역에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 영역은 수명이 매우 길고, 거기서는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수십억 년 동안 의식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물론 그 생도 끝나고 그 자는 다른 영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아라한은 좀비(Zombie, 넋이 나간 사람)인가?
11. 이제, 사람 2의 코멘트 중에서 두 번째로 [굵은 글씨로] 강조 표시된 부분에 대해 논의해 봅시다. 아라한(Arahant)은 위의 #10에서와 같이 ‘지각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아라한(Arahant)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외부 세계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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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한 차이점은 살아있는 아라한(Arahant)은 탐욕스럽거나 화를 내거나 현명하지 못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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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아라한은 사람들을 자신의 어머니, 친구, 매력적인 사람/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아라한은 설탕의 단맛이나 식초의 신맛 등을 경험합니다. 육체가 죽을 때까지 아라한은 다른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닙바-나는 고통(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이다 ㅡ 두 가지 유형의 닙바-나
12. 싱할라어로 닙바-나(Nibbāna)는 ‘니와나(Nivana)’ 또는 ‘니위-마(Niveema)(නිවන/නිවීම)입니다. 그것은 쿨링 다운(cooling down, 열기가 내림)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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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딧따빠리야-야 숫따(Ādittapariyāya Sutta, SN 35.28)는 붓다께서 초기에 설하신 법문 중의 하나입니다. 그 숫따(sutta)에서 붓다께서는 ‘세상은 불타고 있다’고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좋고 결실(실속)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마음이 항상 ‘불타거나 스트레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스트레스는 살아있는 아라한(Arahant)이 경험하는 닙바-나(Nibbāna)의 첫 단계(saupādisesa Nibbāna, 사우빠-디세사 닙바-나)에서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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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살아있는 아라한(Arahant)은 과거 깜마(kamma)로 인해 생긴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몸은 과거의 나쁜 깜마 위빠-까(kamma vipāka)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육체가 죽은 후, 아라한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며 그것은 모든 고통(괴로움)의 끝입니다. 그것이 아누빠-디세사 닙바-나(anupādisesa Nibbāna) 또는 빠리닙바-나(Parinibbāna, 완전한 닙바-나)입니다.
13. 마지막으로, 빤냐-(paññā, 지혜)를 충분히 많이 기르기 전에는 닙바-나(Nibbāna, 열반)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빤냐-(paññā)를 충분히 많이 기르면 닙바-나(Nibbāna)에 대한 두려운 생각/지각이 사라집니다. 이 ‘붓다의 광대 세계관(Wider Worldview of the Buddha)’ 서브섹션에 있는 포스트들을 복습해 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오온 ㅡ 띨락카나에 연결(Five Aggregates – Connection to Tilakkhaṇa)’ 서브섹션에 있는 포스트들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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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토픽과 관련하여 다른 문제가 있는 분은 지금 그것들을 논의(토론)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이런 종류의 토론은 필자가 생각하지 못했지만 다른 분들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문제를 명확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포론) 포럼의 ‘Post On Five Aggregates and Tilakkhaṇa – Introduction’ 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