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어 담마(Pure Dhamma)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기 위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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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들은 기도하고 우상 숭배하는가?

 

원문: Myths or Realities? 섹션의 ‘Do Buddhists Pray and Engage in Idol Worshipping?’ 포스트

- 2019년 5월 5일 작성

 

이것은 붓다 담마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1. 우선, 붓다(그리고 그를 나타내는 상징)에 대해 경배를 하는 것은 다른 많은 종교의 ‘기도’와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더 높은 존재(신, 범천 등)에게 요청을 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그 요청들은 사람의 삶을 더 좋게 만들고, 사람이 가진 일상적인(세간) 문제를 해결하거나, 물질적 이득을 구하는 것입니다.

 

  • * 기도는 신들에게 세간적인 것과 보호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신들은 건강, 부, 물질적인 것들을 주고,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을 요청받으며, 그들은 또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줄 것을 요청받습니다.

  • * 어떤 경우에는, 힌두교에서처럼(요즘, 일부 불교 사원에서도 행해짐), 더 높은 존재(들)에게 먼저 제물을 바친 다음, 원하는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 * 불교도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불교도들은 이 고통/괴로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의 참된 본질을 숙고하면서 명상을 합니다. 이 세상에 갈망할 가치가 있는(따라서 기도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2. 반면에, 불교도의 일차적인 목표는 재탄생 과정을 멈추고 닙바-나(열반)를 얻는 것입니다. ‘부디스트 또는 바웃다야-는?’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이 자체가 많은 사람들, 특히 재탄생 과정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각 존재(유정체)는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이 세상에서’ 31 영역 중 하나에 끝없이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재탄생(윤회)과 닙바-나(열반)가 없는 불교는?’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결실이 있고 언젠가는 참된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재탄생 과정은 계속됩니다. 붓다께서는 탐함과 미워함과 무지함으로 행하는 것이 이 잘못된 인식을 야기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 * 무지의 한 부분은 재탄생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 * 괴로움은 그 31영역 중 어느 곳에도 존재하며, 따라서 괴로움은 가장 높은 브라흐마(범천) 영역에도 존재합니다. ‘지구와 관련된 31 존재계’를 참조하세요.

  • * 그러므로, 참된 불교도의 목표는 31영역 모든 곳에 재탄생하는 과정을 멈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깨끗이 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부처님의 세계관을 배우고 숙고(명상)와 도덕적 삶을 사는 것(sīla, 실-라)을 포함하는 성스런 팔정도를 따르면, 마음의 정화로 이어집니다. ‘리빙 담마’ 섹션에 있는 포스트들을 참조하세요.

 

3. 그러므로, 부처님께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더 이상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일반인의 생각과는] 정반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붓다 담마, Buddha Dhamma)을 이해하면 갈망하거나 바랄 가치가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갈애/갈망이 사람을 재탄생 과정에 갇히게 합니다.

 

  • * 미래의 괴로움/고통을 멈추는 유일한 길은 이 세상의 참된 본질을 배우고, 세상것을 갈망하는 것이 헛된(결실없는) 것일 뿐 아니라 위험하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 * 불교도는 결코 부처님에게 [어떤 것을 달라고] 부탁을 하거나, 어떤 부도덕한 행을 범한 것에 대해 [과보를 받지 않게 해 달라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참된 불교도는 마음을 통제함으로써, 즉 마음챙김함으로써 부도덕한 행동, 말, 생각을 삼가하려고 합니다. ‘숫따(경) 해석’ 섹션의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서브섹션의 포스트들을 참조하세요.

  • * 그렇다면, 불교도들은 왜 부처님을 나타내는 상징에 경배를 할까요?

 

4. 불교도의 삶에서 큰 부분은 ‘빚을 갚고’ 더 높은 지혜를 가진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첫 번째 행위 중 하나는 전생을 되돌아보고 붓다가 되기 위한 노력에서 (전생에서) 누가 자신을 도왔는지를 상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미사 로-짜나 보-디 뿌자- ㅡ 감사 행위의 서막’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그 다음, 붓다께서는 위의 링크 포스트에서 설명한 것처럼, 깨달음을 얻은 후 초기의 상당 부분을 그 사람들에게 담마를 가르치는 데 보냈습니다.

  • * 붓다 담마에 대한 참된 이해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참되고 순수한 붓다 담마를 받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이끕니다. 그것은 고통의 흔적조차 생기지 않게 하는 길입니다.

  • * (부처님을 나타내는 상징을 사용하여) 부처님을 숭배하는 것은 석상이나 그림 등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부처님을 나타내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경배하며, 헌신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5. 부처님께 경배하는 두 번째로 똑같이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것을 더 많이 경험해야 합니다. 필자가 스리랑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때, 우리 가족은 정기적으로 사원에 가곤 했습니다. 특히 스님(빅쿠)이 설법(데사나-, desanā)을 하는 보름날에는 그랬습니다.

 

  • * 우리는 예정된 설법 전에 먼저 사원에 가서 부처님에게 꽃을 바치고, 기름 등불과 향을 켜고, ‘공양물’을 올리는 동안 여러 게송을 암송하곤 했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앉아서 한 시간 정도 동안 스님(빅쿠)의 설법을 듣곤 했습니다. 

  • * 그것은 정말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잊고 법문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 * 고요하고 평온한 부처님의 이미지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며, 예쁜 꽃을 바치는 것은 세속적인 것에 들러붙지 않는(그리고 갈망하지 않는) 의도를 나타냅니다.

 

6. 어떤 사람들은 불상들이 고유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의미에서 불상을 숭배한다고 말합니다.

 

  • *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도들은 기독교도들이 십자가를 숭배하거나 이슬람교도들이 카바(kaaba)를 숭배하는 것보다 더 이상으로 불상을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 * 십자가나 카바(kaaba)처럼 불상이나 보리수나 스뚜-빠(stūpa)는 헌신을 보이고 마음을 고양시키고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상징이며, 따라서 그것은 고요한 마음으로 명상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7. 이제 보시의 중요성/목적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 * 보시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빅쿠에게 하는 음식물 보시는 보시(다-나, dāna) 범주 중에서 가장 공덕이 큽니다.

  • * 전통적 의식으로 붓다께 보시하는 것도 행해집니다. 빅쿠를 위해 준비된 음식의 작은 부분은 음식이 빅쿠에게 올려지기 전에 먼저 부처님에게 바쳐집니다.

  • * 가난한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 굶주린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모두 공덕행입니다.

 

8. 데와(천신)에게 보시(공양)하는 것은 또 다른 범주일 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 * 필자는 와하라까 테로(Waharaka Thero)님의 법문(desanā)를 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테로님은 그 음식 보시는 더 높은 데와(천신)들이 그들의 부하를 먹이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언급하셨습니다(인간 세계와 마찬가지로 천신계에도 다양한 수준이 있습니다). 테로님은 사람들이 좋은 냄새가 나는 과일 등을 바칠 때, (그것이 올바르게 행해진 경우) 바친 직후에 향기가 사라질 것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음식의 에센스/정수(ōjā, 오-자-)가 추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 그러나 많은 양을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더 높은 데와(천신)들은 많은 이들을 먹이기 위해 공양물을 증식시킬 수 있습니다.

  • *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답변보다 더 많은 의문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그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영역에 관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역에 대해서도)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9. 꽃, 향 등을 바치는 것은 위의 #7과 #8에서 논의된 보시(dāna, 다-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 * 불교 사원에서는 그런 ‘공양’을 부처님에게 바칩니다.

  • * 실제로, 이 ‘두 번째 유형의 공양’은 마음이 붓다 담마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을 설정하고, 따라서 붓다(buddha)의 참된 의미인 ‘바와 웃따(bhava uddha)(31 영역의 어디에도 태어나지 않는 것)로 이끕니다. ‘부디스트 또는 바웃다야-는?’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 * 예를 들어, 그 꽃들은 아닛짜(anicca) 본질을 상징합니다. 보시물로 바쳤을 때는 예뻤지만 며칠 지나면 주름이 지고 시들어 버립니다.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꽃이 지는 모습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아닛짜(anicca) 본질에 대해 숙고해야 합니다. ‘주요 담마 개념’ 섹션의 ‘아닛짜, 둑카, 아낫따(Anicca, Dukkha, Anatta)’ 서브 섹션을 참조하세요.

  • * 보시되는 향은 명상에 도움이 되는 냄새를 풍깁니다. 기분 좋은 냄새지만, 파티에 사용되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북돋아주는 경향이 있는 향수와는 매우 다릅니다.

  • * 즉, 파티에 사용하는 향수는 관능적인 생각을 하게 하지만, 사원의 향은 마음을 진정시키는 작용을 하므로 명상에 도움이 됩니다.

 

10. 촛불이나 기름 등불을 켜는 것도 명상과 숙고에 적합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빛은 지혜를 상징합니다.

 

  • * 붓다 담마(Buddha Dhamma)를 이해하면 ‘법안(Dhamma eye)’이 열리는 것으로 이어지고, 31영역 세상의 참된 본질, 즉 그 영역의 어느 곳의 유정체에도 둑카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 게다가, 기름 등불은 갈망(갈애)에 의해 재탄생 과정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상징합니다. 기름이 기름 등불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처럼 갈망/갈애(taṇhā, 땅하-)는 재탄생 과정에 연료를 공급합니다.

 

11.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나타내는 상징물을 사용하여 부처님께 경배하는 실천은 부처님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붓다 스스로 이 실천을 추천한 이야기가 띠삐따까(Tipiṭaka)에 적어도 두 개가 있습니다.

 

  • * 첫째, 마하-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 Sutta)에서, 부처님의 빠리닙바-나(반열반)가 가까워졌을 때,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의 빠리닙바-나(반열반) 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부처님께 경배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 *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조언하셨습니다. “...사거리에 붓다의 스뚜-빠(stūpā)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꽃, 향, 등을 바치고 경배할 수 있으며, 그것은 사람들의 이득과 행복을 위한 것이다.” 

  • * 여기 관련 섹션이 있는데, 마하-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 Sutta, DN 16)의 섹션 29, Ānandapucchākathā이며, “..Cātumahāpathe tathāgatassa thūpo kātabbo. Tattha ye mālaṃ vā gandhaṃ vā cuṇṇakaṃ vā āropessanti vā abhivādessanti vā cittaṃ vā pasādessanti tesaṃ taṃ bhavissati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12. 보리수를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붓다께서 직접 추천하신 또 다른 숫따가 있습니다. 붓다께서 제따와나라-마(Jetavanarāma)에 없을 때 신도들은 자연스럽게 붓다를 그리워하므로, 부처님의 시자인 아난다 존자는 붓다께서 계시지 않을 때 사람들이 부처님을 경배하는데  무엇을 사용하면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 * 붓다께서는 유골, 자신을 연상시키는 것, 자신이 사용한 것, 특히 자신이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대 보리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 * 그 후, 아난다 존자는 보리수의 씨앗을 제따와나라-마(Jetavanarāma)로 가져와서 심어서, 붓다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제따와나라-마(Jetavanarāma)에 붓다께서 항상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 * 이 이야기는 ‘Kāliṅgabodhijātaka’에 있습니다. 영어 번역은 ‘Kalinga-Bōdhi Jātaka’을 참조하세요.

 

요점은 보시(dāna, 다-나) 또는 도덕적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다양한 방법의 어떤 것을 통해 붓다께 경배하는 것은 직접 닙바-나(Nibbāna)(막가 팔라, magga phala)로 이어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부처님의 깊은 담마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음가짐에 이르는 배경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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